<경향신문> 2009-04-30 17:58: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301758201&code=940100&s_code=as028
[제2부 촛불의 과제와 전망] 정치적 권위주의를 넘어서
정치적 권위주의를 넘어서: 촛불집회와 한국 정치의 과제
김호기(연세대, 사회학)
1. 문제제기
이 글의 목적은 2008년 봄과 여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집회가 한국 민주주의에 주는 함의와 과제를 검토하는 데 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작된 촛불집회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복합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김호기, 2009). 집회는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했지만, 적지 않은 사회운동들이 그러하듯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진화해 나아갔으며, 그만큼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촛불집회를 어느 하나의 시각만으로 분석하는 것은 이 사회운동이 갖는 복합성을 협소하게 해석할 위험이 존재한다. 수십만의 촛불들이 서울과 전국의 어둠을 밝혔을 때 거기에는 수십만의 소망들이 살아 있었고 또 춤추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사회운동의 이론에서 말하는 매스터 프레임(master frame)의 시각에서 본다면(Snow and Benford, 1992) 촛불집회의 매스터 프레임은 보편적 인간주의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주의에 대한 열망 아래 생활정치에 대한 요구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에 이르는 다양한 하위 프레임들이 결합하여 촛불집회를 이끌어간 것으로 보인다.
촛불집회가 남긴 민주주의의 과제를 검토할 때 바로 이러한 복합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한국 정치에 나타나는 탈정치화와 재정치화의 이중적 경향을 주목한 다음, 이어 촛불집회가 남긴 민주주의의 과제를 정치제도적, 사회운동적, 시민문화적 수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한국 민주주의가 나아갈 거시적 방향으로 성찰적 민주화와 이중적 민주화를 제시하고자 한다.
2. 탈정치화와 재정치화의 한국 정치
최근 한국 정치사회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이 관찰된다. 나는 그것을 ‘탈정치화’(depoliticization)와 ‘재정치화’(repoliticization)로 이름짓고 싶다. 먼저 탈정치화란 정치적 무관심이 증대되어 온 것을 뜻하는데,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탈정치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왔다. 전통적인 당파적 지지 기반이 약화되고 무당층이 증가한 것은 그 증거이다. 구체적으로 2007년 12월 대선의 투표율은 63%였으며, 2008년 4월 총선의 투표율은 46%에 머물렀다. 무당층의 경우도 꾸준히 증가하여 지난 1월에는 64.9%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러한 탈정치화 과정 속에서 사회운동을 통한 재정치화가 동시에 진행되어 왔다. 2008년 촛불집회는 재정치화의 단적인 증거이다. 돌아보면, 1987년 이후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는 바,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지속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주도한 입법청원활동, 2000년 낙천·낙선운동, 2002년 촛불집회, 그리고 (기존의 사회운동과는 성격을 다소 달리하지만) 2004년 탄핵반대 촛불집회 등은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의 대표적인 사례들로 지목할 수 있다.
이러한 탈정치화와 재정치화의 이중적 과정이 의미하는 바는 현대적 정치와 탈현대적 정치의 공존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기존의 지역, 계급, 세대의 현대적 이슈들에 양성평등, 환경, 평화, 생명, 안전 등과 같은 탈현대적 또는 생활정치적 이슈들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촛불집회가 함의하고 있듯이, 이러한 경향은 정당정치가 정상화되지 않는 한 앞으로 지속되거나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탈정치화와 재정치화의 이중적 경향을 낳은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존재한다. 먼저, 탈정치화의 원인으로서는 정당정치와 시민사회의 부조응을 지적할 수 있다. 적지 않은 국민들의 시선에는 정당정치가 시민사회의 정치·사회적 의사를 제대로 대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증대되어 왔다. 바로 이 탈정치화의 원인이 다름 아닌 재정치화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정당이 국가와 시민사회의 통로가 되지 못하는 조건에서는 서구 사회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민사회 스스로 정치화하는 경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이중적 경향 속에서 관찰할 수 있는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간의 시간 격차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진전에 따라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간의 시간 격차가 커져 왔으며, 그 변화 속도의 차이에서 빚어지는 일종의 ‘정치 지체’(political lag) 현상이 두드러져 왔다. 시민사회에서는 촛불집회에서 볼 수 있듯이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진전이 만개해 온 반면, 정치사회에서는 전근대적 행태가 반복되어 온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정치 지체 과정에서 시민 일부는 탈정치화하고 또 일부는 재정치화해 왔다는 점이다. 더불어 한 개인의 정체성 안에서도 탈정치화와 재정치화 경향이 공존하며, 그것이 바로 정치적 무관심과 운동의 정치로 각각 표출되어 왔다. 바로 이 점에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으면서도 그 정치에 거리를 두고자 하는 모순적인 정치적 무의식이 작동하는 곳이 다름 아닌 한국 사회이며, 이러한 정치적 무의식의 기반 위에서 정당정치와 사회운동이 독특하게 공존하는 한국 정치의 복합구도가 재생산되어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 지체가 지속되는 한 제도의 정치에 맞서는 운동의 정치가 계속 활성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더욱이 오늘날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진전은 새로운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고 있는 바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글로벌 차원과 로컬 차원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이 정체성의 정치는 사회운동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요컨대, 제도의 정치와 운동의 정치, 재분배의 정치와 정체성의 정치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는 한국 정치의 부여된 중대한 과제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3. 촛불집회와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촛불집회가 한국 민주주의에 주는 함의에 관해서는 지난해 촛불집회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미 활발하게 토론되어 왔다. 크게 보면 그것은 세 가지 견해로 대별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대의민주주의 중심론, 참여민주주의 중심론, 그리고 절충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대의민주주의 중심론이나 참여민주주의 중심론 모두 정당정치와 사회운동 중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 중에서 나는 하버마스의 ‘쌍선적 심의정치’에 기반한 절충론을 제시한 바 있는데, 이러한 생각에는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촛불집회 1년을 돌아보며 촛불집회가 남긴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를 정치제도적, 사회운동적, 시민문화적 수준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정치제도적 과제
정치제도적 과제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초(”대통령주의 또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권위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하나라면, 정당정치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가 다른 하나이다.
먼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어떤 정부든 출범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집권적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대통령중심제의 폐해를 드러내 왔다. 노무현 정부의 경우도 ‘집권적 자유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결국 ‘분권적 자유주의’가 아닌 ‘집권적 권위주의’로 되돌아갔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집권적 권위주의의 성격을 보여주어 왔다. 이른바 ‘CEO 리더십’의 효율성이 강조되었지만, 이 효율성은 의사결정에서의 고도의 집중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을 경시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CEO형 리더십과 정치적 리더십 사이에는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 다시 말해 국민적 여론형성 과정을 경시하는 리더십은 바로 그 국민 여론으로부터의 거부에 직면하게 되며, 이명박 대통령의 리더십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권보다는 분권의 리더십을, 권위주의보다는 자유주의의 리더십으로 나아가야 한다. 대통령은 국가적 의제에 주로 집중하고 전체적인 ‘통치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담당할 수 있는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정치의 과제 중 하나가 시민사회 내 다양한 이익을 조정하고 중재하는 데 있다면, 이를 위해 정부의 리더십은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 더욱 자율적이고 유연한 ‘분권적 자유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이어 정당정치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가 역시 촛불집회가 남긴 또 하나의 제도적 과제이다. 최근 우리 정당정치에 대해서는 두 모델이 경합을 보여 왔다. 대표성, 책임성, 시민사회와의 강력한 연계를 중시하는 대중정당 모델(최장집 등)과 효율성 및 반응성을 제고할 수 있는 선거전문가정당 모델(정진민 등)이 바로 그것이다(고원 외, 2008). 원론적 관점에서는 전자의 모델이 바람직하지만, 현실적 조건을 고려해 후자의 모델을 선호하는 경향 또한 존재한다. 이 가운데 어느 모델을 것을 강화할 것인가는 물론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적극적으로 소통시킬 수 있는 정당정치가 정상화되어야 하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가 풀어야 할 매우 중대한 과제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2) 사회운동적 과제
촛불집회가 제기한 더욱 근본적인 민주주의의 과제는 정당 모델에 대한 선택을 넘어서 정당정치와 시민사회의 비대칭성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정당의 이념 구도는 시민사회의 이념 구도와는 달리 보수와 중도의 과잉대표성의 문제를 안고 있다. 다시 말해 시민사회는 ‘보수 대 중도 대 진보’가 어느 정도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정치사회의 이념구도는 보수와 중도가 우세한 반면 진보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념 구도의 비대칭성이 다름 아닌 사회운동의 정치가 활성화된 주요 배경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사회에서의 보수와 중도의 과잉대표성은 시민사회에서의 사회운동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지반을 이루어 왔으며, 시민단체의 이른바 준정당적 활동의 사회적 조건을 제공해 왔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우리의 민주화 과정에서 사회운동의 정치가 두드러졌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이러한 운동의 정치가 최근 새로운 전환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는 데 있다. 두 가지 점에서 특히 그러한데, 첫째 2004년 뉴라이트의 등장과 함께 시민사회 내에서의 ‘보수 대 진보’의 긴장이 강화되어 왔으며, 둘째 진보적 시민단체가 새로운 의제들을 설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일각에서는 ‘사회운동의 급진화’를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조희연 등),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운동의 정치와 제도의 정치의 새로운 결합양식을 찾아내는 데 있으며, 이러한 과제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다름 아닌 촛불집회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의 정치와 제도의 정치를 어떻게 결합시킬 것인가에 대한 원론적인 답안은 앞서 지적했듯이 하버마스의 ‘쌍선적 심의정치’에서 구할 수 있지만(Habermas, 1992), 이를 위한 제도적, 실질적 기제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거버넌스는 국가와 시민사회, 내부 공론장과 외부 공론장을 연결할 수 있는 의사결정 방식으로 유효하며, 이 거버넌스 구축을 위해서는 시민참여 거버넌스 모색, 정책네트워크를 통한 예방적 갈등관리시스템 구축, 시민참여에 기반한 사회적 합의형성 제도 마련,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공동체 문화 형성 등의 조건들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한다.
해법이 이렇게 주어진다고 해서 물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버넌스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의 의지가 중요한데, 이명박 정부는 시민사회와의 ‘소통’보다는 ‘법치’를 앞세운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단기적으로 효과일지도 모르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사회통합을 훼손하고 정치적 정당성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3) 시민문화적 과제
주지하듯이 민주적 규범과 가치의 내면화 과정을 뜻하는 시민문화의 민주화는 민주주의 공고화의 문화적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김호기, 1999).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절차와 제도의 완성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적이고 평등주의적 가치 및 규범, 사적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공공정신, 자발적 결사체를 통한 능동적인 참여의식, 토론과 설득을 통한 합의 창출방식, 그리고 질서의식 및 준법정신 등이 사회화될 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몇몇 국가들에서 형식적 절차의 도입이 민주주의의 제도적 완성으로 귀결된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로 후퇴했던 요인 중의 하나도 다름 아닌 이런 민주적 시민문화의 부재에서 찾을 수 있다. 2008년 촛불집회는 그 ‘문화적 축제’로서의 성격에서 잘 나타났듯이 민주적 시민문화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다원주의, 평등주의, 공공정신, 참여의식, 토론을 통한 합의 등이 활발히 살아 있었으며, 이러한 가치들을 내면화할 수 있었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촛불집회가 문화적 민주주의의 현장으로서의 성격이 두드러진 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앞서 지적한 세계화의 충격과 정보사회의 진전은 경제 및 문화생활을 탈국민국가화하고 자발성과 유연성을 증대시켜 왔으며, 특히 쌍방향 소통의 ‘웹 2.0 사회’의 도래는 다원적이고 수평적인 가치를 강화시켜 왔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 초기에 내건 탈권위주의도 자발적인 선택의 측면 못지 않게 바로 이러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 변화하는 세계를 제대로 독해하지 못한 채 과거 권위주의 방식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민주주의의 문화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단기적으로는 온라인 공간을 포함한 문화적 통제를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시민사회의 문화적 다양성을 훼손시키고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촛불집회를 통해 드러난 일련의 가치들, 즉 검역주권과 식품안전에서 시작해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사회적 공공성, 그리고 생명과 평화에 대한 존중은 다름 아닌 삶의 정치의 과제들이며, 이러한 이슈들은 민주주의의 문화적 기반을 강화하고 풍부화시킨다.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능력주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수동적 심리상태, 자유의 훼손, 그리고 인간성의 상실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가 촛불집회에는 생생히 숨쉬고 있었다. 인간적인 삶을 자발적으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고 자유로운 공동체적 연대를 활성화하려는 것은 촛불집회가 부여한 민주주의의 시민문화적 과제라고 볼 수 있다.
4. 성찰적 민주화와 이중적 민주화를 향하여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한 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사회학적 시각에서 촛불집회는 새로운 민주화를 요구했던, 다시 말하자면 한국 민주주의가 단순 민주화(simple democratization)에서 성찰적 민주화(reflexive democratization)로 나아갈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 민주화가 민주주의 절차와 제도가 도입되는 단계라면, 성찰적 민주화는 도입을 넘어서 그 절차와 제도가 책임성을 갖는 동시에 경제·사회·문화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단순 민주화가 국가 운영에서 여전히 집권적이고 권위주의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단계라면, 성찰적 민주화는 분권적이고 탈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화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1987년부터 2007년까지의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단순 민주화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면, 촛불집회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성찰적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일거에 분출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성찰적 민주화의 목표는 다름 아닌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를 생산적으로 결합하려는 이중적 민주화(double democratization)를 활성화하는 데 있다. 촛불집회로 나타난 참여민주주의의 강조가 직접민주주의의 일방적인 확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직접민주주의는 현대사회에서 사실 제한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모든 국민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칠 결정을 내리는 데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란 불가능한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다양한 참여민주주의의 실천이 정치·경제 영역의 제도적 민주화와 병행할 때 민주주의는 한층 심화되고 확장할 수 있다.
이중적 민주화 기획은 이중 전략을 추구한다(Held, 1987; Cohen and Arato, 1992). 한편에서는 국가의 과도한 개입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정체성·규범·연대를 위한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사회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하며, 다른 한편에서는 현대 사회의 복합성과 국가·경제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불가능성을 고려하여 제도적 차원의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현대 국가와 경제를 시민사회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직접적인 사회적 행위는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가와 경제의 민주화는 바람직한 시민사회의 형성과 안정화에 중요한 전제조건이 되고 있다. 요컨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에서의 민주주의 동시적 확장과 생산적 결합이 촛불집회가 남긴 민주주의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돌아보면 촛불집회는 우리 민주화의 역사에서 하나의 중대한 문턱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촛불 이전’의 민주주의가 갖는 문제들이 촛불집회를 통해 여지없이 드러났다면, ‘촛불 이후’의 민주주의 과제는 바로 촛불집회 안에 배태되어 있었다. 문턱을 넘어서려는 것이 물론 쉬운 과제는 아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집합적 의지가 아무리 강렬한 유토피아적 열망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개별 국가가 가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촛불집회 이후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변화는 유토피아적 열망의 실현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의 진화는 바로 그 집합적 의지에 의해 달성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는 다름 아닌 이 집합적 의지에 대한 신뢰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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