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9-04-30 17:56:15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301756151&code=940100&s_code=as028
[제2부 촛불의 과제와 전망]경제적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경제적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최태욱(한림국제대학원대)
1. 신자유주의와 촛불
촛불은 정부의 신자유주의화 강행 추진 과정에서 타올랐다.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추진 의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던 대외경제정책이었다. 현 이명박 정부는 다른 건 몰라도 이 정책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게 계승했다.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 문제는 이 신자유주의화 정책을 시민사회의 선호에 대한 고려 없이 노무현 정부보다 더욱 과감하고 신속하게 몰아붙이고자 했던 국가 과잉 상태에서 불거졌다. 시민사회는 이러한 ‘국가주도 신자유주의화’에 대하여 촛불을 들어 경고했던 것이다.
촛불 시민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외치며 제기했던 문제는 비단 광우병 쇠고기만이 아니었다. 사교육 중심의 무한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정책, 서민생활을 더욱 옥죄게 할 의료, 물, 전기, 가스 등의 공공부문 민영화정책, 그리고 공영방송체계에 변화를 가할 언론정책 등에 대해서도 심각한 우려와 저항감을 표출했다. 이것은 오건호의 지적대로 한국의 시민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1987년과 달리) “새로운 역사적 요구”를 드러낸 것인바, 그 요구란 바로 ‘다 같이 먹고사는 민주주의’ 혹은 ‘사회 공공성’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촛불은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가 아닌 실질적 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핵심 가치여야 함을 선언한 것이었다.
정부가 이 촛불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그리고 시민사회의 선호를 존중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제라도 신자유주의화 정책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주의의 증진을 위해 매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촛불이 타오른 지 1년이 지난 지금 시점까지도 그러한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미국발 경제위기로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부작용을 새삼 확인하며 새로운 자본주의 혹은 그 너머까지도 논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정부가 아니라면 이제 시민사회라도 나서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고민해야할 때이다. 이 글은 그 고민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이하에서는 우선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어느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간략히 분석해보고, 그 분석 내용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한국의 자본주의 체제를 초보적 수준에서 상상해본다.
2. 신자유주의의 정체와 운명
1980년대 영국과 미국을 기점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부상은 그것의 정치기획적 측면을 바라보아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간략하나마 미국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자.
2차대전 이후 1970년대초까지 서구 선진국들은 소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만끽했다. 사민주의와 케인스주의 등에 바탕을 둔 복지와 분배 중시의 수정자본주의 시대였다. 이 시기 동안 빈부격차가 크게 줄며 중산층이 사회의 거대한 중심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이 유례없는 행복을 누리는 동안 일부에선 불만이 축적돼갔다. 소수 자본가들 사이에서였다. 그들은 무엇보다 복지국가의 완전고용정책을 못마땅해했다. 완전고용에 가까워질수록 노동은 해고의 위협에서 자유로워지므로 임금 등 노동조건에 대한 노조의 요구는 갈수록 과도해진다는 것이었다. 그외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권 강화 및 행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누진과세와 각종 규제정책 등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의 시장개입이 최소한에 머무는 1차대전 이전의 자유방임 자본주의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했다.
그들에게 1970년대의 세계 경제위기는 차라리 호기였다. 그들은 선진 각국이 겪게 된 노동생산성 증가율 저하, 이윤율 하락, 그리고 경기후퇴 등의 어려움이 2차대전 이후 사반세기 이상 지속된 경제성장과 완전고용 상황이 초래한 노동규율의 약화와 노조의 교섭력 강화 그리고 그에 연이은 과도한 임금상승 및 인플레이션 때문이라는 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완전고용이나 노조활성화 그리고 복지주의 정책 등의 폐해를 당당히 지적하며 이제 본격적으로 국가의 시장개입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산업자본가들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예에서 보듯이 금융자본가들은 금리통제가 (실질이자율을 마이너스 정도에까지 이르게 한) 인플레이션의 한 원인이라며 금리자유화 및 금융업무 영역 등에 대한 규제완화를 강력히 요구했다. 게다가 이 시기에 일어난 두차례의 석유파동은 스태그플레이션의 발생과 맞물려 복지국가체제의 유지비용을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것으로 만들기도 했다. 한편, 경제위기가 장기화됨에 따라 일반시민들의 대안체제에 대한 관심 역시 크게 증가해갔다.
영국의 대처 총리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같은 신보수세력들은 이렇게 형성된 대안체제 도입 압력을 배경으로 하여 등장하였다. 그들은 ‘복지병’ 등의 폐해를 드러낸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최우선시하는 고전적 자유주의를 새롭게 복원함으로써 시장의 효율성을 증대시켜 위기에 빠진 경제를 살려내겠다는 다짐으로 유권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보수’는 (사회적 자유주의를 버리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보수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들은 한때 케인즈와 쌍벽을 이룰 정도의 유력한 경제학자였으나 수정자본주의의 전성기 내내 소외돼왔던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 이론을 자신들의 처방전으로 제시했다. 대처는 하이에크의 『자유헌정론』을 핸드백에 넣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누구보다 하이에크의 부활을 크게 환영한 이들은 자본가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에크가 설파한 신자유주의의 핵심 메시지는 국가의 경제개입을 철회하고 시장의 자유를 극대화하라는 것이었다. 특히 금융 및 노동 시장에서의 탈규제를 강조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기업 민영화, 법인세와 누진과세의 인하 또는 철폐, 재정지출 축소, 노조의 무력화 등 거의 모든 신자유주의 처방들은 거대 자본가의 이익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들이었다. 자유시장의 무한확대를 염원해온 산업 및 금융 자본가들은 하이에크를 매개로 하여 드디어 자신들의 최상의 정치적 대리인을 만난 것이었다.
신보수 정치세력, 특히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그 추종세력인 네오콘(Neocons)의 신자유주의 신봉은 철저했다. 그들은 미국을 온 인류의 평화와 공동번영을 위해 일해야 할 특별한 소명을 받은 ‘예외적인’ 국가로 여겼다. 그리고 미국이 ‘선의의 세계 패권국가’로 다시 나서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전세계적 확산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그 소명에 부응하는 최대의 의무인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한 그들에게 신자유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게다가 국제경쟁력까지 갖춘) 미국의 자본가그룹은 최상의 파트너가 아닐 수 없었다. 국가-자본 연합의 형성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정치기획으로서의 신자유주의화는 이들의 주도하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개시되었다.
노동, 금융, 조세, 복지, 공공부문 등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요소에 대한 레이건 정부의 대대적인 손질은 비교적 단기간에 미국을 신자유주의 국가로 거듭나게 했다. 그리고 미국은 이제 스스로 자신의 자본주의 유형을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모델로 설정하고 그것의 전파에 나서기 시작했다. 미국의 신자유주의화 압력은 주로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의 개발도상국가, 그리고 동유럽의 체제전환국들을 대상으로 행사되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세계무역기구(WTO) 등을 앞세운 다자주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전미주자유무역협정(FTAA) 등의 체결을 통한 지역주의, FTA나 쌍무금융정책협의와 같이 개별 국가를 상대로 한 양자주의 등 그 압력 행사방식은 다양했다.
1980년대 말에서부터 1990년대를 지나는 동안 일어난 몇가지 국제정치경제 변화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추진에 유리하게 작동하기도 했다. 우선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권 붕괴였다. 이는 국가나 사회가 아닌 시장 중심의 경제체제가 우월하다는 사실이 증명된 획기적 사건으로 해석되었고, 그것으로 신자유주의 추진세력은 내부적으로는 더 큰 자신감과 외부적으로는 더 큰 호응을 얻게 되었다. 더 중요한 변화는 그동안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유형의) 성공적 자본주의체제로 각광받아오던 대륙유럽 및 일본의 경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 북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금융위기에 빠져들었고, 독일은 통일 이후의 경제적 곤란을 겪게 됐으며, 1990년대 초반 일본은 그후 10년 이상 지속된 장기불황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들의 어려움은 미국과 영국이 1990년대 초반의 불황을 극복하고 높은 성장률을 보인 것과 대조되면서 대안모델로서의 신자유주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이 시기 상당한 자신을 얻게 된 신자유주의자들은 이제 ‘자본주의 수렴론’을 펼치기까지 했다. 세계화가 초래하는 국가간 무한경쟁이란 결국 각국 경제의 효율성 극대화 경주를 의미하는바, 여기서 각 나라는 (그 경주의 핵심주자인) 자본과 기업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요컨대, 세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각국의 자본주의가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수렴될 것이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세계표준이 되리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수렴론대로 되지는 않았다. 서유럽의 경우, 세계화가 급속히 진행된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영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들의 자본주의체제는 (비록 과거에 비해 시장의 비중이 어느정도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이 여전히 국가 및 사회적 영향력하에 놓인 상태에서 각기 제 나름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다양성’(varieties of capitalism)은 건재했다는 것이다.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유지되는 이유를 가장 설득력있게 설명해주는 변수는 각국별로 상이한 ‘생산레짐’(production regimes)이다. 생산레짐이란 기업의 생산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상호 보강의 관계에 놓인 제도들의 조합”을 말한다. 그 제도들에는 금융체계, 기업지배구조, 기업간관계, 노사관계, 상품생산체계, 훈련 및 고용체계 등이 포함된다. 각국의 생산레짐은 이 구성제도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해왔으며 어떠한 국가-사회적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되는지에 따라 서로 다르다. 따라서 생산레짐으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의 성격은 나라마다 다른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 생산레짐은 쉽게 변하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 그것을 구성하는 각 제도들과 그들간의 조합은 각국의 독특한 역사 및 정치·사회·문화적 맥락성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압력에 직면할 때 각국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생산레짐 특성에 맞추어 적절한 정책적 대응을 할 뿐이지 생산레짐 그 자체를 변화시키려 하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컨대, 노조의강력한 힘을 보장해주는 제도를 갖춘 자본주의국가라면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를 맞이해서도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채택 등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숙련 향상을 도모함으로써 생산성을 제고하려 하지, 노사관계에 획기적인 제도적 변화를 일으켜 노동시장의 유연성만을 증대시킴으로써 그에 입각한 노동비용 절감을 꾀하지는 않는다. 결국 지속성을 지닌 각 생산레짐의 개별적 특성상 세계화 그 자체만으로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수렴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생산레짐론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에 따르면 1980년대와 1990년대 상황에서 세계 자본주의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위 <표 1> 참조) 영국, 미국, 호주, 뉴질랜드 등이 포함된 ‘자유시장경제(liberal market economies, LME)’와 독일과 북유럽국가 그리고 일본 등으로 대표되는 ‘조정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 CME)’가 그것이다. 안재흥의 지적대로, 칼 폴라니의 이론적 틀에서 보면, CME는 시장과 국가-사회관계가 ‘맞물려’(embedded) 있는 상태이며, LME는 이 관계가 ‘풀려서’(disembedded) 시장이 자율적으로 기능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CME에서는 노사관계나 훈련 및 고용체계 등 제반 생산레짐 요소의 작동에 대하여 국가나 사회의 조정 혹은 개입이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반면, LME에서는 모든 생산관련 제도의 작동이 기본적으로 기업에 의해 시장의 원리대로 이루어진다.
CME는 다시 국가주도 CME와 합의제 CME로 구분할 수 있다. 전후 1980년대 초반까지의 일본과 민주화 이전의 한국경제가 전자의 전형으로 꼽힌다. 일본과 한국이 발전지향 국가였던 점에 착안하여 이 유형을 ‘발전주의형 CME’라고도 부른다. 협상형 혹은 합의제 CME의 모범사례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시장의 조정이 주로 노사정 3자협약의 정치경제라 불리는 사회조합주의(social corporatism)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그 결과 복지주의가 발달한 까닭에 이 유형은 흔히 ‘유럽형 복지자본주의’ 혹은 ‘사회조합주의 모델’이라고 불린다. 한편, 합의제 CME의 국가는 견고한 노동권과 복지 규정 등을 확립함으로써 노조가 강력한 시장행위자로 행동할 수 있게 하며 자본 측과의 협상과 교섭의 장에도 당당한 파트너로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등 분명한 노동 중시 경향을 띤다. 이러한 사민주의적 국가 경향에 주목하는 이들은 이 유형을 ‘사민주의 모델’이라고도 부른다.
세계화의 진행이 이 합의제 CME에 일정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1990년대 이후 그때까지의 ‘고전적’ 사회조합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사회협약이 네덜란드,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유럽 도처에서 이루어졌다. ‘경쟁력을 위한 조합주의’(competitive corporatism, 이하 ‘경쟁력 조합주의’)라 불리는 새로운 사회조합주의가 부상한 것이다. 고전적 조합주의에 따른 과거 사회협약의 주 의제가 분배였다면 경쟁력 조합주의는 생산성 향상을 분배 못지않은 중요 의제로 다룬다. 즉 여기서는 세계화시대의 어려운 경제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와 사회복지 지출의 합리화 등을 통한 국제경쟁력의 제고를 목표로 하는 한편, 적극적 노동시장정책 등을 통한 고용증대, 불공정 해고의 제한, 그리고 적정한 분배 등을 동시에 도모한다. 분명한 것은 경쟁력 조합주의의 한 목표가 국가경쟁력 제고이지만, 그 달성 방식은 사회협약에 의한 사회적 보호와 시장기능의 활성화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합의제 CME의 한 유형이라는 점이다.
결국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선진국들은 세계화시대에도 각기 자신들 고유의 합의제 CME 체제를 발전시켜갔다.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압력이 개발도상국과 체제전환국들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나마 그들 나라에서의 신자유주의 수용 결과도 별로 신통치 않은 것으로 판명됐다. 예컨대, 1980년대에 과감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분배뿐 아니라 경제성장 면에서도 오히려 과거보다 못한 성과를 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중남미 각국에 연이어 좌파정부가 출범하고, 그들 사이에 범지역 차원의 반신자유주의 국가연합이 형성돼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기조에 따라 급진적인 체제전환을 추진한 동유럽의 많은 국가들도 장기공황을 겪는 등 어려워진 사정은 비슷했다.
1990년대말 이후에는 신자유주의의 퇴조경향이 심지어 미국의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우방들 사이에서도 관찰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뉴질랜드의 변화였다. 1984년부터 1996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자유화 사례”라고 평가될 정도로 매우 과감한 신자유주의화를 추진했던 뉴질랜드는 2000년대에 들어 노동, 조세, 복지, 공공부문 등의 영역에서 (유럽형 CME체제로의 전환을 기대할 정도로) 신자유주의 노선과는 정반대되는 개혁정책들을 채택했다. 뉴질랜드 정도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영국에서도 의미있는 변화가 일어났다. 1998년 블레어의 노동당정부는 과거 보수당정부의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소위 ‘사회투자국가’의 건설을 주창했다. 사회투자국가론은 신자유주의에서 그 건너편 사민주의를 바라보며 그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노선에서의 좌향 이탈인 셈인 것이다. 영국에 이어 캐나다와 호주의 중도좌파 정당들도 각각의 제3의 길을 채택했다.
이제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미국을 벗어나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매우 ‘예외적인’ 자본주의 유형으로 전락했다. 미국의 경우마저도 엄밀히 분석한다면, 예컨대 클린턴 정부의 ‘신민주당(New Democrat)’ 노선을 일종의 제3의 길로 평가한다면, 신자유주의는 (미국형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오직 레이건-부시 라인에서만의 독특한 LME 유형, 혹은 미국 네오콘의 정치기획으로서의 한시적 자본주의 유형에 불과하다고 정의해야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 정의는 새로 출범한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많은 이들의 기대대로 진보적 혹은 사회적 자유주의의 정책기조를 온전히 따를 경우 그 타당성이 분명하게 증명될 것이다. 다행히 지금으로 봐서는 그리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미국 유권자들의 민주당과 오바마에 대한 압도적 지지는 장기간 레이건-부시 라인의 공화당 정부가 강력하게 몰아붙인 신자유주의정책들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누적됐다 터진 한 결과였다. 실제로 미국은 그 기간 동안 빈부격차 문제는 세계 최악이나 사회안전망과 복지체제는 선진국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한, 따라서 엄청난 규모의 빈곤계층이 거의 방치상태에 놓여있으며 투옥률은 인구 대비 세계 최고인 불만 가득한 저품질사회로 퇴화했다. 따라서 대다수 미국인들은 보다 나은 사회로의 획기적 ‘변화’를 갈망했으며, 그 변화를 일으킬 의지와 능력을 지닌 ‘큰 정부’를 원했던 것이다. 게다가 대통령선거 과정중에 발생한 금융위기는 탈규제와 무규제 등 통제받지 않는 자유방임시장의 위험성 혹은 ‘작은 정부’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오바마에 대한 유권자들의 막판 지지 결집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러한 배경하에 정권을 잡게 된 오바마의 민주당 정부가 미국인들의 염원을 무시하면서까지 다 죽어가는 신자유주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할 이유는 별로 없다.
유종일의 전망대로,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의 “관에 못을 박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신자유주의는 대처의 핸드백에서 나와 민심의 목관으로 들어가는 꼴이 된다. 과연 그렇게 될까? 한국에선 어떨까?
돌아보면, 한국의 신자유주의화는 김영삼정부에서부터 시작하여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를 거쳐 조심스럽기는 했으나 점진적으로 줄곧 강화돼왔다. 현 이명박정부는 역대 정부의 그 조심성마저도 버린 채, 그리고 미국도 변해가는 상황에서 ‘역주행’을 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감수하며 노골적인 신자유주의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과거 ‘국가주도 CME’로 분류되던 한국의 자본주의 유형은 이제 ‘국가주도 신자유주의’로 변해가고 있는 형국이다. 한편, 양극화의 심화와 비정규직 증대 등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사회경제적 폐해는 이미 사회통합의 위기를 우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정부는 계속 신자유주의화를 강행 추진해갈 것인가? 그것을 막아야겠다면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내놓을 새로운 자본주의 모델은 무엇인가?
3. 신자유주의의 대안: 한국형 ‘합의제 조정시장경제’
아직 생경한 분야로 인식된 탓인지 이 문제에 관한 기존 연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매우 중요한 과제이니만큼 이 연구에는 앞으로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이 투자되어 현실적 대안이 구체적으로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도 (자본주의의 다양성과 그 일개 유형 중의 하나인 신자유주의의 위기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한국에 합당한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모델을 설계함에 있어 최소한의 원칙 몇 가지에 대해서는 시민사회의 합의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된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첫째, 위에서 소개한 양대 유형론에 따르자면 한국 자본주의의 유형은 CME체제여야 한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지구촌 전체가 신자유주의나 미국식 LME체제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때이니만큼 이에 대한 합의는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한국형 시장경제는 무엇보다 격차문제 해결에 유능한 체제여야 한다. 상기한대로 생산레짐은 정치나 사회 제도는 물론 역사와 문화 변수 등과도 맞물려 발전하는 것이다. 한국은 공동체 지향의 역사와 문화전통이 강한 사회이다. 게다가 격차 용인 정도가 높을 수 없는 인구밀도와 산업구조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촛불이 요구했던 바와 같이 우리 사회의 공공성 증대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도 격차 문제 해소는 필수이다. 이 모든 조건들이 한국에 합당한 자본주의는 LME가 아닌 CME이며, 그것도 특히 격차문제의 관리와 조정에 뛰어난 CME여야 함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셋째, 한국의 기존 생산레짐 여건이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시장경제 체제로 설계돼야 한다. 생산레짐이란 쉽게 바뀌는 게 아니며, 따라서 대안 체제로의 이행은 기존의 것을 토대로 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게 좋다. 그렇다면 한국의 현 생산레짐을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이 급선무이다. 예컨대, 상품생산체계와 연관된 한국의 산업구조를 일별해보자.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한국의 산업구조는 금융 등의 서비스산업과 일부 첨단산업에서만 우위를 보이는 영미형보다는, 전통 제조업과 IT등의 첨단제조업 분야에서 고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스웨덴, 핀란드, 아일랜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북유럽의 강소국 유형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세계 시장에서 아직 국제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상품은 일반 기술이 아니라 기업 또는 산업에 특화된 기술을 요구하는 (독일, 일본, 스웨덴 등과 같은 CME 국가들에서 생산되고 있는) 중화학 공업이나 IT 산업 제품들이라는 사실도 이를 입증한다. 말하자면 한국은 CME 상품생산체계의 전형인 고숙련 생산체계 하의 ‘고품질 특화 상품’(diversified quality product, DQP) 생산이 중심이 되는 경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레짐 요소들 간의 상보관계를 고려할 때) 거기에 합당한 고용체계나 노사관계가 무엇일지는 자명하다. 기업 입장에서 볼지라도 단기보다는 장기 고용체계가 그리고 분쟁적이기보다는 협력적 노사관계가 기업 또는 산업의 특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노동의 안정적 확보에 적합하다. 이 같은 장기고용체계나 협력적 노사관계가 CME의 전형에 속하는 생산레짐 요소들임은 물론이다.
이러한 생산레짐 성격을 띤 한국 경제가 노동시장의 유연성 극대화를 강조하는 LME 체제로 수렴될 것을 기대하거나 압박하는 것은 무리다. 또한 금융체계 및 기업지배구조 측면에서도 고용과 해고의 유연화를 포함한 기업 및 산업 구조조정의 일상화를 요구하는 LME식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로의 이행 압력 역시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주주자본주의로의 이행은 한국의 기업들로 하여금 주주의 단기적 이익 극대화에 집착하게 하고, 따라서 장기적 투자와 기업특화기술의 개발에는 그만큼 무심해지도록 할 것이다. 고용체계도 장기보다는 비정규직의 증대 등을 통한 단기 위주의 것으로, 그리고 노사관계 역시 협력적이기보다는 분쟁적 관계로 (지금보다 더 빠르게) 전환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기왕 한국기업들이 그나마 누려오던 DQP 산업에서의 국제경쟁력마저 상당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경쟁력을 유지 또는 제고시키고자 한다면 LME 체제로의 이행보다는 오히려 CME체제를 공고히 하고 (필요하다면) 그 위에 LME적 장점을 부분적으로 추가시켜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기고용체계와 협력적 노사관계 틀의 확립은 물론 기업지배구조도 ‘이해관계자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의 성격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감이 바람직하다. 고용의 안정과 확대, 기술투자의 증대,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기업지배구조의 강화 등은 기술집약적 상품의 국제경쟁력 우위를 지속시켜주는 요인이 될 것이다. 결국 한국에 적합한 자본주의 유형은 장기투자자본체계, 이해관계자존중체계, 고숙련생산체계, 협력과 조정의 노사관계, 장기고용체계 등의 CME적 생산레짐 요소들이 어우러지는 자본주의여야하리라는 것이다.
넷째, 세계화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CME 체제여야 한다. 세계화에 따른 경제통합의 심화 및 확산 과정에서 산업 및 기업의 구조조정은 끊임없이 진행되기 마련이다. 혁신이 용이하지 않은 경제는 세계화 시대를 살아남기 어렵다. 그렇다면 예컨대 장기고용체계를 중시한다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특정 기업 혹은 산업에서의 ‘종신고용’ 보장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끊임없는 혁신을 위해서는 (LME체제에서와 같은 정도는 물론 아니겠지만)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는 불가피한 일이다. 문제는 그 필요한 정도의 유연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CME 체제의 다른 요구들을 어떻게 만족시켜갈 것인가에 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영국이나 미국 등의 LME 국가들은 서비스산업 등과 같이 기술이나 경영 혁신 혹은 신속한 구조조정이 관건인 첨단산업이나 신산업 분야에서는 CME 국가들보다 우월한 경향을 명백하게 보인다. 이는 단기고용체계, 분권적 노사관계, 그리고 단기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체계 등과 상보관계에 있는 주주자본주의의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LME 체제의 장점은 일반적으로 상당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동반한다. 상시적 구조조정 환경은 양극화나 고용 불안의 문제 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에서 여러 변수를 염두에 두고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에 적합한 시장경제체제는 CME인 것이 분명하다. 한국에서 LME 체제를 발전시켜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이 ‘혁신 경제’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회경제적 비용을 최소화하면서도 혁신 친화적일 수 있는 CME 체제 구축이 절실한 까닭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란 개념은 매우 유익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상기했듯 한국도 노동시장의 유연성 증대 필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화 시대의 개방경제 환경 하에서 혁신을 위해서는 대내 조직의 유연화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 유연화 과정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높은 실직이나 이직 그리고 그에 따른 각종) 개인적 손실이나 불안에 대한 사회적 분담 혹은 ‘사회화’ 기제를 잘 마련해 놓을 경우 거기서는 단순한 유연성이 아니라 유연안정성이 증대될 수 있다. 말하자면 유연성이 안정성의 기초 위에서 증대된다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active labor market policy, ALMP)과 공적 평생교육제도의 도입, 그리고 사회안전망의 강화 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일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예컨대 생산성이 낮은 어느 기업이나 사양산업의 노동자가 실직할 경우 그를 생산성이 높은 기업이나 산업으로 이동케 함을 목적으로 실직 기간 중 한편으로는 생계비 등 실업 관련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업재훈련이나 업무재배치 훈련 등을 받도록 하는 정책이다. ALMP를 시행하고 있는 나라들의 경우는 대부분 튼실한 사회안전망과 복지체제를 함께 갖추고 있는 까닭에 실직자가 새 직장을 얻기까지 직업훈련을 받는 기간 동안에도 교육, 의료, 주거 비용 등으로 인해 큰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체계를 갖추어간다면 기업 차원에서는 유연성이 그리고 노동자 개인이나 사회전체 차원에서는 안정성이 동시에 증대될 수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 확보 방안이 시사하는 바는 세계화 시대가 요구하는 혁신 친화적 CME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결국 복지자본주의를 지향해야한다는 점이다. 이는 위의 두 번째 원칙과 맥을 같이하는 결론이기도 하다. 잘 갖추어진 사회안전망과 복지체계가 개방경제 하의 산업 및 기업 구조조정을 순조롭게 한다는 것은 이미 이론과 경험에 의해 공히 증명된 사실이다. 그러한 제도와 정책이 경제통합이나 시장개방에 따른 구조조정의 부작용을 내부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 기제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의 시장경제체제는 복지주의 CME 체제여야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합의제 CME여야 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한국에 적합한 시장경제체제는 ① LME가 아닌 CME, ② 격차문제 해결에 유능한 CME, ③ DQP 생산체계에 부합하는 즉 장기고용체계, 협력적 노사관계, 이해관계자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CME, 그리고 ④ 복지주의 CME를 지향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원칙들을 관통하고 있는 핵심 가치는 ‘사회 공동체와 연대’라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①번 원칙에서의 CME의 정의 그 자체가 시장의 (사회적) 조정을 의미한다는 점, ②번 원칙은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격차 해소를 강조한다는 점, ③번 원칙은 장기 신뢰관계에 기반한 상생적 이해관계자자본주의를 선호한다는 점, 그리고 ④번은 사회통합형 혁신 경제를 위한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부각한다는 점 등이 모두 그것을 말해준다.
사회 공동체와 연대의 가치가 존중되고 보장되는 자본주의의 실현은 시장이 사회적 영향력 하에 놓여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즉 시장이 사회 구성원들 간의 협의나 합의에 의해 조율되고 조정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분배와 생산성 간 혹은 형평성과 효율성 간의 균형점, 그리고 복지의 양과 질의 적정선 등은 해당 사회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직접 협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만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한국적 상황에서 작동 가능한 사회적 협의나 합의 방식을 창안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유럽의 합의제 CME 국가들처럼 (경쟁력 조합주의를 포함한) 사회조합주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 해법이긴 하겠으나, 이 경우에도 사회 협약의 의제와 수준, 참여 집단의 범위, 운영 형태 등은 모두 한국의 고유 사정에 맞추어 정해져야한다. 어느 경우이든 합의제 CME를 발전시켜가겠다고 한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참여 집단들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이 보장돼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협의나 합의의 장은 지속되지 못한다. 여기서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가는 노동이나 중소상공인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을 ‘특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자본이나 대기업 등의 강자 집단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수행해야한다.
4. 정치개혁 필요성
이상에서 필자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대안으로 한국 사정에 맞는 합의제 CME 유형을 창안해가자는 데에는 시민사회의 합의 형성이 가능하리라는 낙관론을 폈다. 이하에서는 기존의 한국 정치제도 조건을 고려할 때 한국형 합의제 CME의 발전은 (그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 한) 어려우리라는 비관론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긴 얘기를 짧게 하자면, 무엇보다 한국의 현 정당구도의 문제점을 지적해야한다. 상기했듯, 합의제 CME의 핵심 요건은 협의 혹은 합의 과정에 참여하는 사회경제적 집단들 간의 동등한 파트너십 보장이다. 한국에서도 드디어 노사정 3자협약의 정치경제라고 불리는 사회조합주의가 가동될 거라는 기대를 모았던 김영삼 정부 시절의 노개위(노사관계개혁위원회)나 김대중 정부 시절의 노사정위가 모두 실패로 끝난 것도 바로 이 요건의 결여 때문이었다. 노동이 (사측에 비하여) 대등한 파트너로서의 지위가 크게 허약했다는 것이다. 노동의 ‘정치세력화’가 미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의 정치세력화는 친( W)노동정당이 현실 정치에 존재하고 그것이 제도정치권에서 상당한 정책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개위든 노사정위든 사회협약의 장에서 사측과 노측이 서로에게 의미 있는 양보를 했다고 치자.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합의사항들은 국회에서 입법화 혹은 제도화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그 이행이 보장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만약 국회 내에 노동의 이익을 대변할 이념이나 정책 정당이 없다면 (합의사항들 중) 노측에 유리하게 결정된 것들은 그저 단순한 (협상 테이블 위에서 만의) 구두선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도 그것을 책임지고 법제화하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력한 친노동정당이 부재한 한국의 정당정치에서, 즉 노동의 정치세력화가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노측이 사측과 대등한 파트너로서 인정받기는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노동만이 아니다. 중소상공인 등 한국의 대다수 사회경제적 약자 집단들은 국회 내에 자신들의 ‘정치적 대리인’ 즉 ‘자기 정당’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정당구도가 이념이나 정책이 아니라 인물이나 지역 중심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는 주요 사회경제집단들의 정치세력화를 핵심 요건으로 하는 합의제 CME의 성공적 운영을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결국 한국형 합의제 CME의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경제 구조의 개혁은 물론, 그것에 선행 혹은 그것과 병행하여 이념 혹은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의 구조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당의 구조화를 촉진하는 독일식이나 전면 비례대표제를 전격 도입하거나 (그게 당장 어렵다면 적어도 상당한 비례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현 비례대표 의석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이 나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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