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9-04-30 15:01:2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301501202&code=940100&s_code=as028
[제1부 촛불의 성찰과 평가]촛불항쟁과 정치문화
촛불항쟁과 정치문화
김종엽(한신대, 사회학)
1.
청소년들이 “미친 소, 미친 교육”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시작된 촛불항쟁이 일어난 지 1년이 되었다. 참여 인원과 기간으로 볼 때 해방 후 남한사회에서 벌어진 최대의 반정부 시위였다고 할 수 있는 촛불항쟁은 고도로 탈중심화된 동원, 대중의 만개한 상상력과 풍자정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유기적 연계성 등 모든 면에서 혁신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하나 둘 촛불이 모일 때처럼 그렇게 서서히 촛불이 찾아들며 조용히 마감되었다. 그래서 도심을 찬란한 촛불의 강으로 물들였던 촛불항쟁은 지금 생각하면 아름다운 봄밤의 꿈처럼 느껴지기 조차한다.
촛불항쟁은 그것의 축제성으로 인해 다른 어떤 정치적 항쟁과도 다르게 그것의 참여 주체들에게 일상과의 선명한 대조를 유발한다. 뒤르켐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촛불항쟁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성(聖)과 속(俗)의 교체라고 할 만한 경험이다. 촛불항쟁 속의 매 집회가 아침 햇살을 맞이할 때까지 지속된 때가 많았던 것은 성에서 속으로의 이행의 문턱을 넘는 것의 어려움 때문이었다.
촛불이 꺼짐에 따라 일상으로부터의 복귀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종종 그렇듯이 커다란 감흥으로 채워진 집합적 열광의 시간의 종결되고 나면 상실감조차 몰려오기까지 한다. 열광의 종결과 더불어 넓게 열리게 되는 이해의 시간에 어떤 우울이 서리는 것은 그런 때문이다. 실제로 촛불항쟁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분석들에는 어떤 상실감, 어떤 아쉬움들이 깊게 배어있다. 그래서 최근에 발간된 촛불에 대한 연구서는 제목조차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당대비평 기획위원회 편, 산책자, 2009)이다. 책 제목이 조용필 노래가사를 약간 변형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게 되면 이런 위트에 우울을 넘어 냉소마저 어린 느낌이 든다. 보수진영이 촛불항쟁을 “광기의 100일”이라고 외치고 있을 때, 비록 다른 맥락이지만 진보적인 학자들마저 촛불항쟁의 한계를 중심 테마로 삼는 상황이 그렇게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촛불항쟁의 한계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는 이들의 충정어린 의도를 이해하며 그런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가 먼저 주장해야 할 것은 촛불항쟁을 그 자체로 옹호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촛불항쟁이 정치 문화에 어떤 변화를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논의에 앞서 촛불항쟁의 막바지에 나온 “촛불은 이미 승리했다”는, 이미 여러 번 비판 받은 주장을 다시 주장함으로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2.
촛불항쟁의 한계는 다각도로 지적되고 있다. 우선 촛불항쟁이라는 투쟁 양식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정확히 어떤 점이 한계인가에 대해서는 시각 차이가 있다. 어떤 이는 촛불항쟁의 평화주의 때문에 자신의 제기한 이슈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촛불항쟁 같은 거리의 정치가 제도화된 정치의 벽을 넘을 수 없다고 말한다. 촛불의 계급적 한계에 대한 지적들도 있다. 촛불은 기본적으로 중산층 주도의 운동이며,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와 접속될 수 없었으며 한미FTA에 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촛불의 이데올로기적 한계에 대한 논의가 있다. 촛불은 순수성의 이데올로기, 법실증주의의 이데올로기, 비폭력의 이데올로기에 포획되었으며, 국가주의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촛불에 이런 한계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가 부각되는 이유는 촛불항쟁에 대한 높은 기대 때문이며, 그 높은 기대는 촛불항쟁 자체가 매우 위력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요컨대 촛불항쟁의 힘이 촛불항쟁에 대한 기대 수위를 높였고 그로 인해 촛불항쟁의 성과보다 그것의 한계에 대한 인식도 예민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촛불항쟁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발휘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촛불항쟁이 얼마나 강력한 정부와 대결했는가를 상기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남한 사회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모든 하자를 완전히 떨쳐낸 최초의 보수정권이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은 투표율이 낮았다고 해도 민주화 이후 2위와 가장 많은 표차로 당선되었으며, 한나라당은 합당 등의 의회전술 없이 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했다. 게다가 이명박정부는 보수언론과 재벌, 고위관료와 법조계 등 우리 사회의 상층 엘리트 전반의 연합에 기초한 정권이다. 이에 비해 이명박정부를 견제해야 할 야당은 지리멸렬 상태였고, 사회운동 또한 심각한 역량 약화 상태에 있었다. 이명박정부의 행보의 장애는 이명박정부 자신의 오만과 무능력 이외에는 없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촛불항쟁은 그런 이명박정부의 행로를 취임 몇 달 만에 3가지 방식으로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우선 대통령이 취임 몇 개월 만에 두 번의 대국민사과를 하도록 만들고, 촛불항쟁의 의제로 정립된 1+5 가운데 적어도 대운하사업, 수돗물 민영화, 의료민영화 사업이 정지시킴으로써 이명박정부의 핵심 정책을 제어했다. 다음으로 촛불항쟁은 이명박정부의 정책의 무게 중심을 지지층 결집에 두게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이명박정부는 전체 사회를 보수적으로 재편하는 헤게모니적 기획을 실행하기 어려웠다. 끝으로 촛불항쟁의 재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무리수를 두게 만들었다. 이명박정부는 언론 장악에 박차를 가했고, 사이버모욕죄를 비롯한 각종 악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했으며, 촛불항쟁 참여자들에 대해 집요한 탄압을 계속했으며, 이 때문에 신형철 대법관의 촛불항쟁 관련 사건 배당과 재판 개입에서 보듯이 각종 후안무치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윤리적 양심은 물론이고 ‘논리적 양심’마저 내던지고 단순한 강권으로 퇴행함으로써 헤게모니적 능력을 결정적으로 잃어버린 것이다.
이명박정부의 무능력을 생각하면 그것이 사회를 보수적으로 재편할 헤게모니적 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필자는 충분치 않다고 해도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상황에 따라서 이명박정부 가 낮은 수준의 헤게모니를 이룩하는 것은 가능했다고 본다. 그렇게 볼 때 이명박정부의 헤게모니적 능력을 박탈하다시피 한 촛불항쟁의 성과는 매우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촛불항쟁의 정치적 성과는 분명하지만 그 성과의 장기적 보존 그리고 그것의 확산과 발전 여부는 열린 문제이다. 이에 비해 촛불항쟁이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룩했다는 점은 분명하며, 적어도 항쟁 레퍼토리(contentious repertoire)와 항쟁 퍼포먼스(contentious performance)의 수준에서 그 성과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쟁의 또는 항쟁은 일군의 개인들이 정부에 대해서 특정한 주장이나 요구를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특정한 주장과 요구의 수준에서는 다양성이 존재해도 그것을 제기하는 양식 즉 항쟁 레퍼토리와 퍼포먼스의 수준에서는 의외로 일정한 양식적 안정성이 존재한다. 정치적 항쟁이 발생하는 체제의 성격이 레퍼토리와 퍼포먼스 형태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 사회만 놓고 보더라도 항쟁의 레퍼토리는 폭동(해방공간)이나 무장투쟁(해방공간, 광주항쟁)에서 1인 시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남한 사회의 체제 변동과 항쟁 레퍼토리간의 역사적 상관관계를 상세히 논의할 수는 없다. 다만 항쟁 레퍼토리의 의미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민주화 이전과 이후를 간단히 대비해보자.
87년 이전의 항쟁 레퍼토리는 ‘가투’ 아니면 대학캠퍼스 ‘데모’가 가장 기본적인 형태였다. 어느 형태이든 독재정권에 도전하는 집단이 사전에 계획된 장소에 군집해서 정치적 의사를 표명하고 경찰이 물리적 폭력을 동원해서 그들을 검거하고 해산하는 것이 기본적인 패턴이었다. 87년 6.10 항쟁은 이런 반복되는 패턴의 점진적 진화(확산, 대규모화, 폭력성 상승)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87년 민주화 이후에는 항쟁 레퍼토리와 퍼포먼스에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집회와 시위가 합법화로 인해 항쟁의 폭력성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집시법의 제약 때문에 한편으로는 불법을 마다하지 않는 점거 농성 같은 민주화 이전의 레퍼토리들이 지속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집시법을 우회하는 항쟁 레퍼토리가 개발되었다. 그렇게 개발된 항쟁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는 집회 신고의 까다로움을 피하기 위한 1인 시위이고, 다른 하나는 야간 집회 금지를 우회하기 위한 문화제이다. 촛불항쟁의 레퍼토리는 문화제의 진화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진화에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우선 2002 한일 월드컵 응원을 통해서 대중은 도시 광장의 자유로운 점거를 해방적인 체험으로 가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효순이 미선이 추모집회를 통해서 집회도구로서 촛불이 안정적인 위상을 획득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는 광장의 점거와 촛불을 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8년 촛불항쟁은 그 연장선상에서 두 가지 추가적인 요소들 끌어들였다. 하나는 정보통신기술(인터넷, 휴대전화,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등)을 동원과 확산의 매체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항쟁 에토스를 표출적인 축제적 형태로 전환하는 것이다. 촛불항쟁은 그런 의미에서 민주화 이래 집회와 시위 양식의 진화적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통신기술은 고도로 탈중심화된 방식이지만 매우 효율적인 동원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기존의 미디어에 의한 뉴스편집의 왜곡을 간단히 우회하여 항쟁의 메시지를 폭발적으로 확산시킴으로써 사회의 자기계몽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촛불켜기는 탈중심화된 형태로 동원된 다수의 사람들을 양식적 통일성으로 인도함으로써 연대감을 제고하는 동시에 참여자들 자신들에게도 놀라운 스펙터클을 창조할 수 있게 주었다. 또한 에토스가 축제적인 것이 됨으로써 사회적 해방을 지향하는 항쟁 과정 자체를 해방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이런 혁신적 변화는 정부의 집회 통제 전략을 상당 정도 무력화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이 과정에서 분명해진 것은 촛불항쟁이 혁신한 항쟁 레퍼토리에 대한 보수적 전유가 차단되었다는 점이다. 촛불항쟁의 레퍼토리의 중핵인 촛불켜기는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 뿐 아니라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고 나선 한나라당의 집회에서도 활용된 바 있다. 하지만 2008년 촛불항쟁을 경유함으로써 그런 식의 보수적 전유는 불가능해졌으며, 만일 보수진영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기 풍자적인 소극?이 되고 말 것이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촛불항쟁의 레퍼토리가 양식적 안정성을 획득했다는 점이다. 앞으로 어떤 계기로 어떤 항쟁이 출현할지 예단할 수 없지만, 그것은 촛불항쟁의 항쟁 레퍼토리와 퍼포먼스를 수용한 형태가 될 것이다. 촛불항쟁 기간을 통해서 기존의 사회운동 진영은 이 새로운 항쟁 레퍼토리를 매우 낯선 것으로 체험했으며, 기존 사회운동권이 느낀 혼돈감은 항쟁 레퍼토리간의 변동으로 인한 면이 컸다. 아무튼 촛불항쟁은 기존의 항쟁 레퍼토리에 비해 촛불항쟁의 레퍼토리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각인시켰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동원방식, 집회 양식, 표현 양식 전반이 촛불항쟁의 양식을 차용하고 변형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물론 촛불항쟁의 퍼토리와 퍼포먼스가 가진 제약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시적이고 탈중심화된 동원, 장소적 응집성, 표현적 축제성과 양식적 통일성,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유기적 관련을 통해서 자기강화적인 형태로 발전하는 촛불항쟁은 초기 점화과정에서 경찰력에 의한 통제라는 문턱을 뛰어넘는 장소적 응집력의 확보가 관건이다. 따라서 정부가 이 문턱을 높이고 자기강화의 고리들 각각에 개입함으로써 그것의 발전을 제약할 여지가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항쟁의 기회조 상의 제약을 초극하는 창의력이 지속적으로 생성되어온 점을 생각하면 정부의 통제능력은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촛불항쟁의 반복과 진화의 길은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4.
자본주의 세계체제 내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항쟁의 양식을 비벌리 실버는 노동자들의 작업장 교섭력에 입각한 맑스적 투쟁과 상품화에 저항하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폴라니적 투쟁으로 구분한 바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촛불항쟁은 용산철거민 투쟁이나 비정규직화와 정리해고에 저항하는 투쟁들(기륭전자 노동자 투쟁, KTX여승무원의 투쟁, 홈에버 노동자들의 투쟁 등)과 마찬가지로 폴라니적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폴라니적 투쟁 속에서도 촛불항쟁은 특별한 항쟁 담론을 전개했다. 항쟁 기간 동안 줄곧 불렸던 ?헌법 제1조?라는 노래가 보여주듯이 촛불항쟁은 여느 항쟁과 달리 사회의 자기보호 운동을 주권의 문제로 제기했던 것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촛불항쟁의 중심 이슈가 검역주권 문제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면도 있지만 우리 사회 성원들의 국가체험의 역사를 생각하면 정치적 항쟁이 주권 선포 형태를 띠었던 것은 주목할 만한 정치문화의 변동을 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우리 사회 성원들은 식민지 민중으로부터 국가시민으로의 전환을 기획했지만, 냉전의 수립, 해방공간에서의 좌우대립,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체제의 수립으로 인해 온전한 의미에서 국가시민으로의 길이 차단되었다. 오히려 국가는 사회 상층부의 경우에는 공직 사냥터이거나 특권적 분배에 접근하는 요로로 여겨졌고, 하층 민중들에게는 ‘사람 잡는 것’으로 체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원초적 체험형식이 민주화를 통해서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민주화가 그렇게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현대 국민국가에서 국가와 시민 간에는 선거를 매개로 한 민주적 연관, 조세와 사회보험과 공공재 공급을 통한 재분배 연관, 사회성원에 영향을 주는 정책을 고리로 한 정책 연관이 형성될 수 있다. 민주화 이전까지 민주주의 연관이나 재분배 연관은 제대로 작동했다고 할 수 없으며, 민주적 연관이 깨져있었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의 대립이 기본적인 관계 방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민주화를 통해 민주적 연관이 수립되기는 했지만, 그런 민주적 연관이 재분배 연관과 정책 연관을 관류하는 힘으로 잘 작동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연관의 수립으로 인해 우리 사회성원들은 자신들을 주권적 주체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문화적 변화가 촛불항쟁을 통해 공적으로 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헌법 제1조가 거리에서 육화된 음성을 획득한 것에 대해 국가주의의 혐의를 두고 비판하는 시각들이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시각이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국가가 사회적 해방의 근본적 한계라는 아나키즘과 맑스주의의 존중할 만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적어도 중기적으로 사회적 해방을 위한 가장 큰 지렛대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구화라는 조건을 염두에 둘 때에도 그렇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따른 국가의 후퇴는 자본과의 관계에서 국가가 근본적 열세에 놓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국가가 가진 자본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않으려는 것에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도 바로 그런 일에 속한다. 국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고 국제관계에서도 인정받는 검역주권이라는 힘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 대해 국민적이어야 함을 요구하고 자신이 그렇게 할 자격, 즉 주권적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선포하는 항쟁이야말로 문제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 주권적 주장이 현존하는 국가와의 동일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히 대중의 주권적 주장은 87년 민주화 이후 국가와 시민 사이에 제도적 연관의 수립이라는 경험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경험적 토대는 제도적 연관을 초과하는 규범적 연관을 함축하고 있다. 촛불항쟁은 헌정을 구성하는 권력(the constituting power)으로서 시민과 헌정에 의해서 구성된 권력(the constituted power)간의 정면충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동일 평면 위의 주권자간의 충돌이라고 할 수 없다. 촛불항쟁을 민주주의에 대한 링컨의 고전적 정식을 따라 정리하면, 인민에 의한(by the people)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그 정부가 인민을 위한(for the people) 정부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런 정부에 대항해 인민의(of people) 정치가 등장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인민의’의 인민은 ‘인민에 의한’과 ‘인민을 위한’의 인민과 다른 위상을 지닌다. 그것은 우리 헌법 제2조가 명시한 법률에 의해서 정해지는 대한민국 국민, 법률적 국민이 아니라 우리 헌법의 전문에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대한국민,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민은 이 땅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사람들, 인민 자체이다. 이들은 국가적 질서 외부와 내부에 모두 존재하며 경험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자신을 포함하는 대한민국을 정립하는 존재이다.
촛불항쟁은 이전에도 이런 인민의 존재는 일시적으로 현존했다. 4,19를 통해서 그랬으며, 광주항쟁을 통해서 그랬으며, 87년 민주화 항쟁을 통해서 그랬다. 하지만 촛불항쟁 속에서 이전의 경우와 달리 주권적 인민은 주권적임을 스스로 선포함으로써 대자적으로 현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선포가 필요했던 것은 이전의 경우처럼 국가와 정부가 인민을 기만하고 총을 겨누는 대신 이번에는 검역주권을 포기함으로써 인민 전체를 내던지고 포기해버리고자 했기 때문이다. 촛불항쟁은 민주공화국을 내부로부터 형해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주권자로 개입해서 국가와 사회(국가 안의 사회가 아니라 국가를 수립하는 사회)의 일치를 재확립하고자 한 시도, 루소적인 의미에서 기원의 약정을 되풀이하고자 했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2008년 촛불항쟁이 여느 항쟁과 달리 어떤 아름다움, 어떤 유토피아적 계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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