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9-05-29 오후 08:47:49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357726.html
[세상읽기] 두 개의 벼랑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여기 두 개의 벼랑이 솟아 있다. 그 하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의 몸을 던진 봉화산 부엉이바위다. 상징적으로 그것은 정부가 마주 대하고 있는 민심의 벼랑이다.
5월27일 새벽, 조문을 위해 내려간 봉하마을에서 분향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경험한 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한밤중 그곳에는 어둠을 뚫고 강물처럼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다. 그들은 노 전 대통령의 빈소가 차려진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오고 가고 멈추고 절하며 전직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움직임은 그의 급서 소식이 전해진 후 충격에 빠졌던 사람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고,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갔다. 그날 별빛 아래 시골길에서 행렬에 갇혀 두 시간 반을 기다리는 동안, 한밤중에 끝도 없이 밀어닥치는 이 조문 인파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의 가슴속에 들끓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았다. 이명박 대통령과 집권세력이 이를 헤아리기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전직 대통령을 부패 혐의자로 수사함으로써 이전 정권의 신뢰를 실추시키고자 한 전략은 초기에만 해도 적중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사람들 사이에 부패한 세력이 상대적으로 덜 부패한 세력에 공격을 가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노 대통령의 죽음 후 그의 이미지는 대통령이었음에도 사회적 모순의 짐을 지고 탄압 속에서 죽음에 이르렀던 희생자의 그것으로 떠올랐다. 이제 사람들은 그들이 현실에서 겪는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고인의 고통에 투영시켜 추모와 애도의 물결 속으로 모아들이고 있다.
정부는 시민들이 주도하는 분향소와 추모제조차 경찰력을 동원하여 방해하였다. 혀를 찰 일이다. 잘못하면 ‘이명박 대통령의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국민’이 대립하게 될지도 모른다. 정부는 “살기가 힘들어요. 인권과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어요”라고 외치는 국민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
또 하나 치솟은 것은 대북관계에서 남쪽 정부가 서 있는 위기상황 속 벼랑이다. 현 정부는 지난 두 정권 아래서 이루어졌던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인정하고자 하지 않았다. 대북관계가 경직되는 출발점이었다. 이전 정부 대통령이 다른 유엔 가입국 정상과의 사이에서 발표한 공동선언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선거로 정부가 바뀌었을 뿐이지 왕조가 바뀐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현 정부는 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대북관계의 방향을 잃어버렸고 개성공단의 폐쇄 위기에 이어 북한 핵실험 재개라는 타격에 직면했다. 상대 사회가 전직 대통령 국민장이라는 비상 상황에 빠져 있는 동안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의 처사도 통탄스럽지만, 이 일이 있자마자 대량파괴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전면참여를 선언한 정부의 대응도 대북관계에서 남쪽의 입지가 얼마나 좁아졌는지를 보여준다. 하여 남북은 벼랑 끝에 마주 선 채 노려보고 있다.
북한이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한 피에스아이 참여가 남쪽 입장에서 효과적 대응책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전쟁 위험 때문에 국가신용도가 떨어지고 경제가 어려워진다면, 개성공단이 폐쇄되어 기업인들이 엄청난 손해를 본다면, 더 당황스럽게 되는 쪽은 남쪽 국민일까 북쪽 국민일까? 민족 화해는 거론조차 않는다 하더라도, ‘경제 살리기’를 내걸고 집권한 현 정부가 대북관계에서 취할 태도는 전쟁 위험 불사일까 남북 경제협력 확대일까.
상징으로서의 부엉이바위는 현실 속 부엉이바위보다 가파르다. 남북간에 치솟은 벼랑은 갈수록 아슬아슬해진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의 현명한 판단만이 이 두 벼랑을 안전한 등산로로 만들 수 있다.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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