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09.06.02 19:11
http://news.joins.com/article/aid/2009/06/02/3390706.html?cloc=olink|article|default
[중앙시평] 다시 돌아보는 ‘노무현 모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삶과 정치에서의 그의 진정성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 해도 계승할 것은 적극 계승해야
5월 23일 이후 우리 사회는 지난해에 이어 다시 한 번 ‘뜨거운 5월’을 맞이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타까운 서거에 대한 추모 열기가 전국을 뒤흔들었다. 이 열기의 원인이 나는 단수(單數)가 아닌 복수(複數)로 존재하는 노무현을 많은 국민이 재발견한 데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 ‘행정가 노무현’보다는 서민적이고 탈권위적인 정치 리더로서의 ‘인간 노무현’과 민주화라는 ‘시대정신 노무현’을 그의 돌연한 서거를 통해 다시 발견하게 되고 또 그리워하게 됐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추모 열기에는 심리적·사회적·정치적 요인들이 결합돼 있다. 그리고 그 배경적 요인으로는 메마른 법치에 기반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한 요인만으로, 또 정파적 시각에서만 이를 독해하려고 할 경우 ‘노무현 바람’에 담긴 큰 줄기를 놓치게 된다. 세대와 지역을 넘어서, 그리고 중도보수적 성향의 시민들까지도 추모에 적극 동참한 것은 이를 직접적으로 증거한다.
이 추모 열기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상으로 돌아오면서 열기는 서서히 식어가겠지만, 추모에 참여했던 그 기억은 우리 의식의 내부에 생생히 살아 있음으로써 삶의 새로운 동력이 된다. 추모 열기가 이른바 ‘기억의 정치’로 전화되는 지점이다. 다시 말해, 기억 속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는 사라지고, 안타까운 죽음이 남긴 바로 그 기억이 결국 살아남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끝없이 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새로운 의식의 변화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 열려 있다.
많은 국민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권,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 보호로 대표되는 ‘노무현적 가치와 정신’이며, 더러 흠결이 있었더라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했던 ‘노무현적 삶과 정치’ 그 자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숙연케 한 것은 삶과 정치에서의 ‘노무현적 진정성’에 있다. 삶을 완성시키는 것은 삶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 있으며, 그 불완전성을 끝없이 넘어서고자 하는 파우스트적 고투(苦鬪), ‘바보 노무현’의 도전이 다름 아닌 노무현적 진정성의 원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결식이 끝난 지금, 우리 사회에 부여된 과제는 추모 열기로 표출된 민심을 제대로 읽고 이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데 있다. 이와 연관해 나는 ‘노무현 모델’을 이야기해보고 싶다. 노무현 모델이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해 온 포괄적인 사회발전 전략을 지칭한다. 그 자신이 3대 국정 목표로 내걸었던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잘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는 노무현 모델의 지향을 보여준다.
돌아보면 노무현 정부가 실현하고자 했던 것은 권력의 민주화, 국가균형발전, 선진통상국가, 인권을 포함한 사회민주화, 사회복지 강화, 한반도 평화정착 등이었다. 이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노무현 모델이 구사한 전략은 기존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선진통상국가를 위해 지지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강행했으며, 사회민주화를 위해 보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보법 철폐, 사학법 개정 등을 추진한 것은 단적인 사례들이다.
전통적인 이념적 이분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노무현 모델은 바로 이 점에서 적잖이 불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무현 자신과 노무현 모델을 추진한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책이 가져올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정책의 이념적 정체성은 부차적인 사안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실용적 사유의 절정에 다름 아닌 대연정이라는 논란 많은 정치적 기획이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개별 정책들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간에 노무현 모델이 그 목표와 전략에서 내적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 모델에 담긴 여러 어젠다들이 기존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새로운 진보의 국가발전이라는 지점을 겨냥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 정치에서 나쁜 풍토 가운데 하나는 앞선 정부의 모든 정책들을 일방적으로 부정해 버리는 데 있다. 노무현 모델의 5년은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다. 정권적 관점이 아니라 국가적 시각에서 설령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 하더라도 계승할 것은 적극 계승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노무현 현상’이 남기는 과제이자, 이명박 정부가 표방한 ‘창조적 실용주의’에도 걸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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