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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사회

지식인·기득권층 집단 괴롭힘에 노무현 ‘순교’ (한완상, 한겨레21)

by 마리산인1324 2009. 6. 18.

 

<한겨레21> [2009.06.19 제765호]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5153.html

 

한완상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파시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월호]


지식인·기득권층 집단 괴롭힘에 노무현 ‘순교’

   
2009년 5월은 다시 우리에게 지식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있다. 지식인들의 영민한 선긋기와 배반의 요설이 허공을 가를 즈음 민중은 회한의 상여를 짊어지고 있었다. 정작 그 상여 속에는 지식인이 드러누웠는지 모른다. 문득 80년대 대학가의 필독서이자 금서였던 <민중과지식인> <지식인과 허위의식>의 묵은 책갈피가 떠오른다. 이 책의 저자 한완상 전 한성대 총장은 김영삼·김대중정부 때 부총리로 현실권력에 참여하기도했다. 이론과 현실 속에 비친 지식인, 한완상 전 총장의 자택을 국화 향기 서럽던 지난 5월26일 찾았다.
 
 

한 전 총장은 이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의 인터뷰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시대적 소임을 강조하고 “변절한 지식인들과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집단적으로 노무현 전대통령의 도덕적 순결을 공격했다”면서 노무현의 죽음을 ‘순교’로 해석했다. 또 한 전 총장은 “이명박 정부의 중도실용이라는 기치는 허상임이 확실해졌다”고 말하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구호 자체가 본래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했다.

 

한완상 전 한성대 총장

- 지식계급의 정체성과 권력과의 관계가 다시 화두다.

 

= 먼저 ‘지식계급’이란 표현이 불편하다. 지식인은 자기 계급의 이해를 초월하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자신의 협소한 계급적 이해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다른 계급의 편에 서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날카롭게 비판해야 한다. 엄격한 자기 성찰을 통해 씨알과 동고하려는 자세를 갖는 게 참지식인이다. 부도덕한 정부일수록 정의나 성장 따위의 화려한 레토릭이 발달한다. 그 수사 뒤에 있는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게 지식인의 사명이다. 물론 지금은 비판과 대안을 함께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비판적 지식인상을 강조하다가 현실 권력에 참여했다는 지적이 있는데.

 

=권력의 정당성에 문제가 없다면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참여한 뒤에 정책적 오류가 드러나면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김영삼 정 부의 통일부총리로 있을 때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노인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조건 없이 북으로 보냈다. 그때 국회에서 엄청 당했다. 의원들이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몰아 붙였다. 하지만 현실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지식인의 당연한 책무다. 국회뿐만 아니라 대통령 주변에 냉전 수구세력들이 똬리를 틀고 있어 더 이상의 현실 참여를 포기했다. 김대중 정부의 교육부총리로 재임할 때는 경제 각료들과 많이 부딪혔다. 학벌주의·사교육비 문제 등이 주요 갈등 요인이었다.

 

유기적 지식인 ‘줄씨알’이 희망

 

-몇 년 전 어느 강연에서 앨빈 토플러의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란 용어를 인용했다. 그 한국적 의미가 궁금하다.

 

=6월 항쟁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시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와 차이를 나타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코그니타리아트는 계급적 동질성을 전제하지 않으면서 더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21세기 민중이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는 줄 안(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접속하고 소통하고 공론화할 수 있어, 시공간을 초월한 새로운 사회세력이 등장했다. <뉴욕타임스>는 풀뿌리 민중(grass- root) 대신 넷루트(net-root)라고 표현하던데 나는 이것을 줄씨알이라고 부른다. 권력의 조종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대중 사회의 매스(mass)와는 전혀 다르다. 언론의 조작에 속지 않고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면서 자기 스스로 이해하고 행동하는 씨알이다. 줄 안과 줄 밖(오프라인)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세계를 인식하는 능력을 갖게 됐다. 미네르바 같은 젊은이가 바로 줄씨알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인터넷에 ‘정치인 살생부’를 올렸던 철공소 직원도 마찬가지다. 학자나 전문가 못지않은 이런 유기적 지식인들의 활약이 한국을 세계 강국으로 만들 것이다. 줄씨알은 톱다운(하향) 방식의 조직을 거부한다. 더 이상 밀실의 권위주의는 안 통한다. 보텀업(상향) 방식의 민주적 조직 운영을 요구한다.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참여민주주의는 서구보다 앞서갔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 영국의 <가디언>은 한국이 전자민주주의(teledemocracy)에서 가장 앞서나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나는 예전 책에서 대자적 민중과 지식인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젠 의식화 같은 건 필요 없게 됐다. 지식인이 줄씨알과 연대해 지식을 지혜로 재창조하면 된다.

 

-비판적 학자나 문인들이 어느 순간 그동안 삶의 궤적과 모순된 발언을 한 뒤 다른 길을 간다. 반면 확 돌아서지는 않으면서 성향이 상반된 복수의 매체에 탄력적으로 맞춤형 기고를 하는 ‘미디어 지식인’도 있다.

 

=특정인을 지목해 언급하기는 곤란하다. 지식인 일반의 관점에서 말하겠다. 상황이 변하면 지식인의 태도도 변할 수 있다. 근본적인 변질이 아닌 성숙한 변화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개 명예교수에게는 지식인이란 단어를 붙이는 자체가 사치스러울 정도다. 노 전대통령의 죽음을 읽어내는 방식을 보면 과연 그가 체계적인 역사인식을 갖고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것인지 의심스럽다. 저항시인으로 유명했던 어느 분이 최근 언론에 ‘한국의 마르크시즘에는 인간이 없고 한국의 마르크시스트에게는 가슴이 없다’는 내용의 칼럼을 쓴 걸 보고 나도 놀랐다.

 

-이명박 대통령과 동행했던 작가 황석영의 발언도 파장을 일으켰다.

 

=…안타깝다. 그의 작품은 아름다웠다. 민중과 함께하는 참지식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인식이 한꺼번에 증발해버렸다. 작품이 작가에 의해 배신당하지 않길 바란다. 황 작가 문제는 이쯤 하자.

 

-명망 있는 지식인들이 변절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메시아 의식 때문이다. 메시아적 의식은 광기로 변하기 쉽다. 나치와 파시스트 지도자들이 그랬다. 지식인은 자신을 비우고 독존적 선구자 의식에 대해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가 온 국민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착잡하다. 지식인이 글로 죽였다. 나도 서울대 교수에 TK 출신으로 기득권층에 속한다. 학벌과 지역주의로 강고하게 결합한 기득권 세력이 리버럴 정치인을 소멸시킨 게 아닌가? 분단세력과 수구 언론 권력이 그의 재임 기간에도 끊임없이 괴롭혔고 퇴임 이후엔 조직적으로 괴롭혔다. 노 전 대통령의 미덕이면서 가장 약한 고리가 도덕적 순결주의다. 결벽증에 가깝다. 이런 그에게 ‘꿋꿋하게’ 살아 남았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본인처럼 ‘뻔뻔하게’ 살아가란 말로 들린다. 형식은 자살이지만 본질은 자살이 아니다.

 

-기득권 세력의 집단 괴롭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였다는 말로 이해된다.

 

=맞다.

 

남ㆍ북 강경세력의 ‘적대적 공생’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틀 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남북 두 체제의 강경세력은 의도하지는 않지만 역설적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북한 군부가 남한 수구세력을 도와주는 형국이다. 북한의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보이지만 왜 하필 지금이냐? 일부러 이명박 정부를 도우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이게 바로 ‘적대적 공생관계’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전면 참여를 유발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 PSI는 미국의 보수 강경파 존 볼턴이 시도했고 부시에게 준 아이디어로, 처음부터 네오콘이 북한을 딱 찍어서 겨냥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북한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김영삼 정부 때도 이인모 노인을 북송한 바로 다음날 안타깝게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다. 그때도 적대적 공생관계가 작동한 것이다. 적대적 공생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대안을 지식인들이 제시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실패하면 파시즘이 온다고 경고했는데 지금의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그 이야기는 김대중 정부 집권 때부터 말했다. 계간지 <당대비평>과 대담하면서도 지적했지만,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데 DJ 정부 초기의 총리와 통일부 장관 인선을 보고 경악했다. 혁명은 피아가 구별되므로 간단하다. 하지만 개혁은 법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하므로 더 어렵다. 개혁의 중심 세력을 단단하게 형성해야 하는데 반개혁적 인사 기용이나 어설픈 탕평책은 독수리 날개에 참새 몸통을 한 꼴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바이마르공화국도 느슨하게 나가다 개혁에 실패해 히틀러의 나치스에 정권을 넘기지 않았는가? YS 정부의 실패를 목도한 사람으로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조언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반동의 방향으로 가지 않길 바랐지만 지금 1년이 지난 상황에서 보면 예상이 적중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 중도실용 정부라는 기치는 허상임이 확실해졌다. 성급한 업적주의에 매달리다 보니 ‘토목공사 정부’로 가고 있다. 나치나 파시스트들이 원래 거대한 건축 공사를 즐긴다. 민생 치안이 아닌 정부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공권력을 강화하고 있다. 대북 현안도 한국판 네오콘의 경직된 이데올로그들이 장악하고 있다. 원래 ‘비즈니스 프렌들리’란 용어 자체가 파시즘적이다. 권력이 재벌의 금권력과 밀착해 국정을 함께 운영하겠다는 것 아닌가? 인사도 ‘적이냐 프렌드냐’라는 흑백논리에 빠져 있다.

 

‘악순환의 고리' 지식인이 끊어내야

 

-끝으로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미디어법이란 게 종이신문 권력이 방송과 통신까지 움켜지고 거대 권력을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줄씨알은 통제할 수 없다. 개혁 언론이 줄씨알과 연대하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특히 <한겨레>가 적임이다. 영국의 훌리건보다 훨씬 성숙한 붉은 악마와 촛불이 자연스럽게 줄 안팎에서 연대했다. 이 연대를 가장 두려워하는 세력이 21세기 파시스트 권력이다. 무동 태운 아이의 촛불마저 두려워하는 정권이다. 다만 우리 줄씨알도 조심할 게 있다. 언어 사용이 세련됐으면 한다. 외국의 댓글은 날카롭지만 점잖다. 도덕적 표현력이 부족하면 전파 능력도 떨어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라. 우아하게 지기로 결심할 때 진짜 이긴다.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 내용은 그를 욕 했던 많은 사람들까지 울렸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죽으면서 용서를 말한 것처럼 멋진 패배를 한 자는 반드시 함께 이기게 되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낸다.

 

인터뷰, 글/ 한광덕 국내 편집장 k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