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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역사

‘도발적’ 역사평론가 이덕일 (위클리경향 832호)

by 마리산인1324 2009. 7. 3.

 

<위클리경향> 832호 / 2009 07/07  

 

 

[이종탁이 만난 사람]‘도발적’ 역사평론가 이덕일

 

“동북아재단이 왜 동북공정 논리를 옹호하나”


역사평론가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 시대 최고의 문제작가 중 한 명이다. <세상을 뒤흔든 여인들>부터 <조선왕 독살사건>까지 그가 쓰는 역사 이야기는 늘 도발적이며 파격적이다. 학계의 정설 또는 통설이 뿌리부터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전혀 다른 이론으로 재구성해낸다. 그에 따르면 정조는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살해되었고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후대에서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주장을 그저 작가의 상상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문헌을 토대로 실증적 연구를 거쳐 내놓는다. 소설이 아니라 학술인 것이다.

대중은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자연히 매료된다. 1997년 이후 그가 낸 책은 30여 권. 1년에 2~3권가량을 내지만 그때마다 화제와 반향을 부른다. <이덕일의 여인열전> <오국사기>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그는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대학 강단에 서지 않고 오로지 책, 그것도 지루하고 딱딱하기 쉬운 역사서적을 써서 ‘먹고사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 아마 그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그가 새 책을 냈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서점으로 달려가는 팬들이 생겨났을 정도다. 이미 그는 많은 이의 ‘역사 스승’인 것이다.

그런 그를 학계에선 정통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센세이셔널한 주장으로 남들의 이목이나 끄는 이단아(異端兒)로 취급하려 든다. 때로는 몇몇 허점을 짚으며 엉터리라고 무시한다. 하지만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덕일 소장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학계는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주류사관, 식민사관론자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어 진실이 통하지 않는 구조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여기서 섣부르게 판단할 필요는 없다. 이덕일 소장이 ‘다수에 맞서는 외로운 소수’라고 해서 동정적으로 보아줘야 할 이유도 없다. 학문의 세계에선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누가 더 정확한 문헌과 고증을 통해 설득력 있는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 소장은 요즘 한 일간신문에 주목할 만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라는 제목부터 그가 무언가를 작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 그는 글머리에서 “주류 역사학계의 기존 이론체계를 뒤집어엎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무슨 이론이 어떻게 잘못되었기에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걸까. 이번주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이 소장을 찾아간 것은 그렇게 공개 도전장을 낸 배경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서울 마포에 있는 그의 연구소에서 있었다.

본론에 앞서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선덕여왕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극중에 나오는 미실을 두고 실존인물이다, 아니다, 말이 많은데요.
“저는 드라마를 잘 보지는 않습니다만 미실이 역사 속 실존인물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미실이 안 나온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화랑세기는 8세기 무렵 쓴 것이고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12~13세기에 쓴 것입니다. 뒤에 쓴 책에 안 나온다고 앞에 쓴 책을 위서라고 말하면 논리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기초적인 사료 비판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미실이 나오는 문헌은 <화랑세기>다.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이 책은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9년 부산의 한 가정에서 그 필사본(筆寫本)이 공개됐다. 여기에 화랑의 기원, 역대 화랑의 지도자와 함께 미색(美色)을 무기로 신라 3대 왕과 성관계를 가지며 임금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른 미실에 대해 자세히 언급돼 있다. 다수 역사학자들은 이 필사본을 필사자인 박창화(1899~1962)의 위작으로 보고 있으나 서강대 이종욱 총장 같은 학자는 진짜라고 주장하는 등 진위 논란이 지금까지 가시지 않은 상태다. 이 필사본을 진짜로 보는 이덕일 소장은 “우리 역사에서 복수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아도 복수의 남성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미실이 유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필사본을 진짜로 보아야 할 근거가 있나요.
“그게 가짜가 아닌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수백 명입니다. 이들을 가로세로 어느 쪽으로 놓고 보아도 엇갈리지가 않아요. 양주동이 한자와 이두가 섞인 향가를 우리말로 번역했다고 자칭 국보라고 한 게 1930년대입니다. 박창화의 필사본도 그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만약 위서라면 향가를 한자로 지었다는 얘기거든요.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박창화는 우주보(宇宙寶) 소리를 들어야 할 겁니다. 또 ‘신라 지배층의 성풍습이 이렇게 문란해서 어떻게 나라를 유지하겠느냐, 그러니 위서다’고 하는데, 유교 사관의 관점에 불과합니다. 원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누락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위작으로 단정할 근거는 되지 않아요.”

필사자가 성애소설을 썼다는 이력을 들어 의심하기도 하던데요.
“그는 일본 궁내성 도서관 촉탁이었습니다. 이 직책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합니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얼마나 많은 문화재와 도서를 약탈해갔습니까. 희귀한 사료들이 궁내성 도서관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창화가 그곳 자료를 보고 베꼈다고 유추하는 게 상식 아닌가요. 저는 중국 서안이나 낙양, 일본 궁내성 같은 곳에 한국사 관련 고대 사료가 지금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가 차원에서 그런 곳에 목적의식적으로 사람을 파견해 먹고살게 하면서 자료 찾게 하면 아마 중요한 게 나올 거예요. 그 방법이 일본·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학자로서 TV 사극의 역사 왜곡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건 간단한 문제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사료와 사료 사이에 빈 공간이 나옵니다. 사극은 이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거죠. 사료 자체를 비틀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사극을 빙자한 SF입니다. 예를 들어 드라마 주몽에서 소서노가 주몽을 만날 때 어린 여자로 나와요. 사료에 보면 유부녀야 맞거든요. 그런 식은 안 된다는 겁니다.”
사극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주류학계와 한판승부를 벌이겠다는 각오인 듯한데 배경이 무엇입니까.
“애초부터 예상한 싸움인데 그 시기가 조금 빨리 왔습니다. 역사학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과 같은 독립운동가에 연원을 두는 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 때 조선사편수회에 있던 세력의 후예들이 보여주는 식민사관입니다. 이중 후자, 즉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노론벽파의 자손들이 광복 이후 학계를 장악했어요. 그래서 역사교과서가 노론의 시각으로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엉터리 역사를 배우고 자란 것이지요. 이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었는데 요즘 들어 더 심화하고 있어요.”
“역사교과서가 노론의 시각으로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엉터리 역사를 배우고 자란 것이지요. 이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었는데 요즘 들어 더 심화하고 있어요.”

그렇게 느낀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올 초 정조의 어찰이 발견되자 정조독살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조독살설을 못마땅히 여기던 노론의 후손들이 일제히 출동한 셈이지요. 그런데 어찰이 무슨 독살설의 진위를 가리는 사료라도 된답니까. 정조가 정적이던 노론의 거두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까 심환지는 정조 측근이었다, 그러니 왕을 독살했을 리가 없다고 한다면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시저가 부루투스에게 죽은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전혀 근거없는 노론벽파적 시각일 뿐이죠.”

독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 노론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숙종 때 서인들이 남인들에게 정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후 남인의 재기를 막기 위해 정치공작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여기에 서인들이 반발해 소론이 생겨나고 노장 서인들은 노론이 됩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합니다.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집니다. 이 노론벽파가 기득권층이 되어 대대로 내려온 것이 오늘날 한국사학계 주류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볼게요. 정부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동북아재단이 동북공정의 논리를 그대로 옹호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요.
“동북공정의 핵심논리는 과거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강 이북이 과거 중국 영토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북아재단의 홈페이지에는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내용의 글을 버젓이 올려놓고 있어요.”

이 대목에서 그는 지도책을 보여줬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1982년 출판했고 96년 3차 인쇄한 것으로 표기된 중국역사지도집이다. 여기에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유주 자사가 백성을 다스리는 구역이라는 뜻)란 장에 보니 평양은 물론 한강 이북이 모두 중국 땅으로 표시돼 있다. 그는 “이게 중국의 공식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둘 중 하나겠군요. 동북아재단 연구원들이 동북공정 논리를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거나 말입니다. 아무래도 모를 리는 없겠지요.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는 연구는 1960년대 북한에서 이미 나왔어요. 이후 저를 포함해 남한의 몇몇 학자도 평양지역설이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논증을 했고요. 만약 그들이 학자의 양심으로 한사군 평양지역설을 믿는다면 적어도 동북아재단에는 들어가지 말아야죠. 국민 세금을 들여 재단을 설립한 목적에 위배되는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에 주류학계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가 잘못되었다면 반박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들은 일절 말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연재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 아닌가 싶어요. 전에 MBC에서 정조독살 문제로 100분토론을 하자고 했어요. 저는 수락하면서 그랬죠. 아마 저쪽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요. 결국 불발되더군요. 아무도 안 나온다고 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비주류의 길을 걷게 됐나요.
“대학원 다닐 때 노론사관에 동조하지 않으면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의 역사관을 펼칠 수 있는 길을 가야겠다 마음먹었죠. 이후 내 역할은 역사학계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역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H 카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는데요.
“역사는 미래학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옛날 지식을 아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게 역사입니다. E·H 카는 그 말도 했지만 역사를 알려면 역사가를 먼저 연구하라는 말도 했어요. 지금 한국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낸 책 중에 가장 만족스런 책은 무엇입니까.
“책 낼 때마다 나름대로 성의를 다했기 때문에 각각의 의미가 있어요. 하나를 고르기 어렵네요. 가장 화제가 된 책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일 겁니다. 송씨 후손들이 시위도 하고 화형식도 했으니까요.”

남들과 다른 스토리는 어디서 나옵니까.
“1차 자료에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학계의 문제 중 하나가 1차 자료를 보지 않고 누가 해석해놓은 자료를 보고 얘기하는 데 있어요. 그게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모습이지요.”

어느 기사에 보니까 한국의 글쟁이 18인 중에 이 소장님을 꼽았던데, 그 유려한 문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하는 독자가 많습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할까 많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많이 고쳐요.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쓴 뒤 전체적으로 보면서 고치고 추가하고 빼고 해요. 그런 뒤 다시 종합적으로 또 보죠. 그런 과정이 읽기 편하게 만들어줬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공부를 좋아했나요.
“중·고교 때 유신교육이 싫었어요. 수업시간에 교과서보다 삼중당 문고를 더 많이 보았어요. 그때부터 비주류의 인생인 거예요.”

이제 유명 작가가 되었잖아요. 인세도 만만찮을 것 같은데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조선왕 독살사건은 30만 부나 나갔어요. 서민들에 비하면 많이 버는 편이죠. 그러나 연구소 유지 등으로 나가는 비용도 많아 실제 여유로운 생활을 하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앞으로 목표가 무엇입니까.
“제대로 된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죠. 저 외에도 식민사관에 반대하는 전문가는 여럿 있습니다. 조직도 있고요, 학문적 역량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물적 토대가 없는 거예요. 동북아재단에 가는 연 200억 원의 예산 중 10분의 1만 제대로 사용해도 가능한 일입니다.”

천고(遷固)라는 호를 쓰던데 무슨 의미인가요.
“천은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에서, 고는 한서를 쓴 반고(班固)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제가 닮고 싶은 인물을 합쳐놓은 것이지요.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연성을 잃지 않는다는 학자로서의 신념입니다.”

<글·이종탁 출판국 기획의원 jtl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이종탁이 만난 사람]‘도발적’ 역사평론가 이덕일

위클리경향 832호

“동북아재단이 왜 동북공정 논리를 옹호하나”


역사평론가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이 시대 최고의 문제작가 중 한 명이다. <세상을 뒤흔든 여인들>부터 <조선왕 독살사건>까지 그가 쓰는 역사 이야기는 늘 도발적이며 파격적이다. 학계의 정설 또는 통설이 뿌리부터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전혀 다른 이론으로 재구성해낸다. 그에 따르면 정조는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살해되었고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후대에서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런 주장을 그저 작가의 상상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역사적 문헌을 토대로 실증적 연구를 거쳐 내놓는다. 소설이 아니라 학술인 것이다.

대중은 이런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자연히 매료된다. 1997년 이후 그가 낸 책은 30여 권. 1년에 2~3권가량을 내지만 그때마다 화제와 반향을 부른다. <이덕일의 여인열전> <오국사기>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등 숱한 베스트셀러를 내면서 그는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대학 강단에 서지 않고 오로지 책, 그것도 지루하고 딱딱하기 쉬운 역사서적을 써서 ‘먹고사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 아마 그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부터 그가 새 책을 냈다 하면 만사 제쳐놓고 서점으로 달려가는 팬들이 생겨났을 정도다. 이미 그는 많은 이의 ‘역사 스승’인 것이다.

그런 그를 학계에선 정통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센세이셔널한 주장으로 남들의 이목이나 끄는 이단아(異端兒)로 취급하려 든다. 때로는 몇몇 허점을 짚으며 엉터리라고 무시한다. 하지만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이덕일 소장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사학계는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주류사관, 식민사관론자들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어 진실이 통하지 않는 구조라는 게 그의 시각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여기서 섣부르게 판단할 필요는 없다. 이덕일 소장이 ‘다수에 맞서는 외로운 소수’라고 해서 동정적으로 보아줘야 할 이유도 없다. 학문의 세계에선 수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누가 더 정확한 문헌과 고증을 통해 설득력 있는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이 소장은 요즘 한 일간신문에 주목할 만한 글을 연재하고 있다.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라는 제목부터 그가 무언가를 작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 그는 글머리에서 “주류 역사학계의 기존 이론체계를 뒤집어엎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무슨 이론이 어떻게 잘못되었기에 뒤집어엎어야 한다는 걸까. 이번주 ‘이종탁이 만난 사람’이 이 소장을 찾아간 것은 그렇게 공개 도전장을 낸 배경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서울 마포에 있는 그의 연구소에서 있었다.

본론에 앞서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는 드라마 선덕여왕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극중에 나오는 미실을 두고 실존인물이다, 아니다, 말이 많은데요.
“저는 드라마를 잘 보지는 않습니다만 미실이 역사 속 실존인물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미실이 안 나온다는 점을 근거로 듭니다. 화랑세기는 8세기 무렵 쓴 것이고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12~13세기에 쓴 것입니다. 뒤에 쓴 책에 안 나온다고 앞에 쓴 책을 위서라고 말하면 논리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기초적인 사료 비판 능력이 부족하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미실이 나오는 문헌은 <화랑세기>다.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이 책은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9년 부산의 한 가정에서 그 필사본(筆寫本)이 공개됐다. 여기에 화랑의 기원, 역대 화랑의 지도자와 함께 미색(美色)을 무기로 신라 3대 왕과 성관계를 가지며 임금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른 미실에 대해 자세히 언급돼 있다. 다수 역사학자들은 이 필사본을 필사자인 박창화(1899~1962)의 위작으로 보고 있으나 서강대 이종욱 총장 같은 학자는 진짜라고 주장하는 등 진위 논란이 지금까지 가시지 않은 상태다. 이 필사본을 진짜로 보는 이덕일 소장은 “우리 역사에서 복수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아도 복수의 남성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미실이 유일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필사본을 진짜로 보아야 할 근거가 있나요.
“그게 가짜가 아닌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우선 그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수백 명입니다. 이들을 가로세로 어느 쪽으로 놓고 보아도 엇갈리지가 않아요. 양주동이 한자와 이두가 섞인 향가를 우리말로 번역했다고 자칭 국보라고 한 게 1930년대입니다. 박창화의 필사본도 그 시기에 만들어졌어요. 만약 위서라면 향가를 한자로 지었다는 얘기거든요. 그런 능력을 가졌다면 박창화는 우주보(宇宙寶) 소리를 들어야 할 겁니다. 또 ‘신라 지배층의 성풍습이 이렇게 문란해서 어떻게 나라를 유지하겠느냐, 그러니 위서다’고 하는데, 유교 사관의 관점에 불과합니다. 원문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누락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위작으로 단정할 근거는 되지 않아요.”

필사자가 성애소설을 썼다는 이력을 들어 의심하기도 하던데요.
“그는 일본 궁내성 도서관 촉탁이었습니다. 이 직책을 의미 있게 보아야 합니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얼마나 많은 문화재와 도서를 약탈해갔습니까. 희귀한 사료들이 궁내성 도서관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창화가 그곳 자료를 보고 베꼈다고 유추하는 게 상식 아닌가요. 저는 중국 서안이나 낙양, 일본 궁내성 같은 곳에 한국사 관련 고대 사료가 지금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국가 차원에서 그런 곳에 목적의식적으로 사람을 파견해 먹고살게 하면서 자료 찾게 하면 아마 중요한 게 나올 거예요. 그 방법이 일본·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응하는 지름길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역사학자로서 TV 사극의 역사 왜곡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건 간단한 문제입니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사료와 사료 사이에 빈 공간이 나옵니다. 사극은 이 부분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메우는 거죠. 사료 자체를 비틀어서는 안 됩니다. 그건 사극을 빙자한 SF입니다. 예를 들어 드라마 주몽에서 소서노가 주몽을 만날 때 어린 여자로 나와요. 사료에 보면 유부녀야 맞거든요. 그런 식은 안 된다는 겁니다.”
사극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주류학계와 한판승부를 벌이겠다는 각오인 듯한데 배경이 무엇입니까.
“애초부터 예상한 싸움인데 그 시기가 조금 빨리 왔습니다. 역사학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과 같은 독립운동가에 연원을 두는 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시대 때 조선사편수회에 있던 세력의 후예들이 보여주는 식민사관입니다. 이중 후자, 즉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노론벽파의 자손들이 광복 이후 학계를 장악했어요. 그래서 역사교과서가 노론의 시각으로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엉터리 역사를 배우고 자란 것이지요. 이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었는데 요즘 들어 더 심화하고 있어요.”
“역사교과서가 노론의 시각으로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엉터리 역사를 배우고 자란 것이지요. 이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싶었는데 요즘 들어 더 심화하고 있어요.”

그렇게 느낀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올 초 정조의 어찰이 발견되자 정조독살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조독살설을 못마땅히 여기던 노론의 후손들이 일제히 출동한 셈이지요. 그런데 어찰이 무슨 독살설의 진위를 가리는 사료라도 된답니까. 정조가 정적이던 노론의 거두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러니까 심환지는 정조 측근이었다, 그러니 왕을 독살했을 리가 없다고 한다면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은 것은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시저가 부루투스에게 죽은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전혀 근거없는 노론벽파적 시각일 뿐이죠.”

독자들 이해를 돕기 위해 노론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숙종 때 서인들이 남인들에게 정권을 빼앗겼다가 다시 찾은 후 남인의 재기를 막기 위해 정치공작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여기에 서인들이 반발해 소론이 생겨나고 노장 서인들은 노론이 됩니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합니다.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와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로 다시 갈라집니다. 이 노론벽파가 기득권층이 되어 대대로 내려온 것이 오늘날 한국사학계 주류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볼게요. 정부에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동북아역사재단을 만들었잖아요. 그런데 동북아재단이 동북공정의 논리를 그대로 옹호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요.
“동북공정의 핵심논리는 과거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강 이북이 과거 중국 영토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동북아재단의 홈페이지에는 한사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내용의 글을 버젓이 올려놓고 있어요.”

이 대목에서 그는 지도책을 보여줬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1982년 출판했고 96년 3차 인쇄한 것으로 표기된 중국역사지도집이다. 여기에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유주 자사가 백성을 다스리는 구역이라는 뜻)란 장에 보니 평양은 물론 한강 이북이 모두 중국 땅으로 표시돼 있다. 그는 “이게 중국의 공식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둘 중 하나겠군요. 동북아재단 연구원들이 동북공정 논리를 잘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거나 말입니다. 아무래도 모를 리는 없겠지요.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는 연구는 1960년대 북한에서 이미 나왔어요. 이후 저를 포함해 남한의 몇몇 학자도 평양지역설이 잘못되었음을 밝히는 논증을 했고요. 만약 그들이 학자의 양심으로 한사군 평양지역설을 믿는다면 적어도 동북아재단에는 들어가지 말아야죠. 국민 세금을 들여 재단을 설립한 목적에 위배되는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에 주류학계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제가 제기한 문제가 잘못되었다면 반박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들은 일절 말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연재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 아닌가 싶어요. 전에 MBC에서 정조독살 문제로 100분토론을 하자고 했어요. 저는 수락하면서 그랬죠. 아마 저쪽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요. 결국 불발되더군요. 아무도 안 나온다고 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비주류의 길을 걷게 됐나요.
“대학원 다닐 때 노론사관에 동조하지 않으면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나의 역사관을 펼칠 수 있는 길을 가야겠다 마음먹었죠. 이후 내 역할은 역사학계의 구조적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지냅니다.”

역사를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E·H 카는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는데요.
“역사는 미래학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옛날 지식을 아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나라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이끌어주는 게 역사입니다. E·H 카는 그 말도 했지만 역사를 알려면 역사가를 먼저 연구하라는 말도 했어요. 지금 한국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낸 책 중에 가장 만족스런 책은 무엇입니까.
“책 낼 때마다 나름대로 성의를 다했기 때문에 각각의 의미가 있어요. 하나를 고르기 어렵네요. 가장 화제가 된 책은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일 겁니다. 송씨 후손들이 시위도 하고 화형식도 했으니까요.”

남들과 다른 스토리는 어디서 나옵니까.
“1차 자료에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 학계의 문제 중 하나가 1차 자료를 보지 않고 누가 해석해놓은 자료를 보고 얘기하는 데 있어요. 그게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모습이지요.”

어느 기사에 보니까 한국의 글쟁이 18인 중에 이 소장님을 꼽았던데, 그 유려한 문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하는 독자가 많습니다.
“독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할까 많이 고민합니다. 그래서 많이 고쳐요. 하고 싶은 얘기를 다 쓴 뒤 전체적으로 보면서 고치고 추가하고 빼고 해요. 그런 뒤 다시 종합적으로 또 보죠. 그런 과정이 읽기 편하게 만들어줬는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역사공부를 좋아했나요.
“중·고교 때 유신교육이 싫었어요. 수업시간에 교과서보다 삼중당 문고를 더 많이 보았어요. 그때부터 비주류의 인생인 거예요.”

이제 유명 작가가 되었잖아요. 인세도 만만찮을 것 같은데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조선왕 독살사건은 30만 부나 나갔어요. 서민들에 비하면 많이 버는 편이죠. 그러나 연구소 유지 등으로 나가는 비용도 많아 실제 여유로운 생활을 하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앞으로 목표가 무엇입니까.
“제대로 된 국사교과서를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갖고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해주는 거죠. 저 외에도 식민사관에 반대하는 전문가는 여럿 있습니다. 조직도 있고요, 학문적 역량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물적 토대가 없는 거예요. 동북아재단에 가는 연 200억 원의 예산 중 10분의 1만 제대로 사용해도 가능한 일입니다.”

천고(遷固)라는 호를 쓰던데 무슨 의미인가요.
“천은 사기를 쓴 사마천(司馬遷)에서, 고는 한서를 쓴 반고(班固)의 이름에서 따왔어요. 제가 닮고 싶은 인물을 합쳐놓은 것이지요. 정체성을 지키면서 유연성을 잃지 않는다는 학자로서의 신념입니다.”

<글·이종탁 출판국 기획의원 jtlee@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