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9-06-05 오후 09:29:21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8915.html
민주화 세력과 사림, 역사의 닮은꼴
한승동의 동서횡단 /
조선 11대 왕 중종(재위 1506~44)이 젊은 조광조를 발탁해 초고속 승진시킬 때 조정은 훈구세력이 휘어잡고 있었다. 훈구세력의 핵심인 공신들은 태조 때의 개국공신 52명을 시작으로, 정종대의 정사공신 29명, 태종대 좌명공신 26명, 세조대 정난공신 43명, 좌익공신 46명, 적개공신 45명, 예종대의 익대공신 39명, 성종대 좌리공신 75명 등 끝없이 양산됐고, 중종대의 반정공신은 117명에 이르렀다. 공신들은 과전 외에 막대한 공신전과 수십~수백명의 노비를 받았다. 일등 공신은 본인과 부모 처자를 3계급 특진시키거나 조카, 사위를 2계급 승진시켰다. 그리고 전 150결과 은 50냥 등 엄청난 재물을 안겼고 반상 10명, 구사 7명, 노비 13명, 말 한 필을 주었다. 중종반정 주도자 박원종에겐 연산군 때의 시녀 300명을 따로 상으로 주었다. 자자손손 부와 권세를 대물림한 기득권층인 이들 훈구세력 때문에 국가재정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이상성 성균관대 겸임교수가 쓴 <조광조-한국 도학의 태산북두>를 보면, 중종이 조광조를 중용하고 사림파를 끌어들인 배경에는 그런 사정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라(왕권)를 바로 세우려면 훈구세력을 견제해야 했다. 공신 자격을 박탈하고 특권을 몰수한 위훈삭제 등으로 과감하게 기득권세력 척결에 나선 조광조의 비타협적 개혁정치는 훈구세력을 강타했고 중종은 그 상황을 이용했다. 하지만 중종은 개혁이 훈구세력은 물론 왕권마저 위협할 정도로 가속도가 붙자 표변했다. 훈구세력으로 말을 갈아탄 중종은 그들과 손잡고 보수 친위쿠데타를 꾸며 조광조와 사림세력을 역모로 몰아 피의 숙청극을 벌였다. 기묘사화(1519)다.
제도사적으로 접근한 김범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의 <사화와 반정의 시대>는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을 가리키는 ‘삼사’를 둘러싼 역관계로 당시를 파악한다. 김씨에 따르면, 중종은 반정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대신들의 전횡을 ‘감찰·언론기관’인 삼사 강화로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와 사림을 중용했으나, 역시 사림이 지배한 삼사가 왕권마저 위태롭게 만든다고 느낀 순간 다시 대신들과 손잡고 삼사를 쳤다. 4번의 사화와 임진왜란 3년 전의 처참한 기축옥사(1589)로 조선은 이미 휘청거렸다.
오늘의 훈구세력은 누구이고 사림은 누구일까?
역사적 사건을 초시대적으로 끼워맞춰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위험하다. 하지만 ‘모든 역사는 결국 현대사’라는 말처럼 과거사는 오늘의 눈으로 재해석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해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역사는 한낱 얘깃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친일부역세력의 영화는 광복 뒤에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의 부정한 권세에 저항하고 그들이 기생한 분단체제를 비판하며 민주주의와 분배를 요구한 세력을 그들은 안보와 반공의 이름으로 불온시하고 압박하고 제거했다. 서민들이 피땀 흘린 경제성장의 열매마저 가장 많이 따간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태평성대였다. 분단되고 빈부로 양극화한, 그리고 60년 이상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오늘의 한민족 처지가 중종조의 조선보다 과연 태평성대일까?
누대에 걸쳐 기득권을 누리며 변화를 거부한 세력에게 개혁을 압박한 민주화세력을 현대의 사림으로 보는 게 지나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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