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7/12/20 18:08:46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2/h2007122018084384210.htm
탈민족주의 바람에도 빛바래지 않는 큰 봉우리
[우리 시대의 명저 50] <50>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 연구'
| ||||||||||||||||||||||||
우리의 역사는 외부의 간섭 없이도 근대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을까?
최근 몇 년간 역사학계에서는 일제 식민지 이전 조선후기사회에서 이미 자생적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었다는 ‘내재적 발전론’과 조선후기 사회는 정체된 사회였으며 한국자본주의 발전은 일제의 자본주의 이식에 의해서 가능했다는 ‘식민지 발전론’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1990년대 말 이후 학계 전반에 불어 닥친 탈이념, 탈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입지는 최근 다소 흔들리고 있지만, 조선의 근대화가 외세에 의해 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이나 ‘타율성 이론’ 등 일제의 식민사관에 짓눌렸던 역사학계에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자장은 넓고도 깊다.
적지않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60년대 이후 최근까지 내재적 발전론이 학계에서 지배적인 역사 인식론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일 터이다.
김용섭(76)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의 <조선후기농업사 연구>(지식산업사)는 한국 근대사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내재적 발전론의 수원지로 꼽힌다.
1970, 71년 두 권으로 발행된 <조선후기농업사연구>의 초판본은 60년대 저자가 발표한 18편의 관련논문을 묶은 것이다. 90년과 95년에는 70~90년대에 발표한 보론격의 논문들을 추가한 증보판과 신정증보판(II권)이 선보였다.
저자는 비록 논문들에서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용어를 직접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후기의 농촌사회에서 이뤄진 중세사회의 주체적 해체과정을 추적한 논문들은 강만길 전 고려대 교수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함께 내재적 발전론의 이론적 토대를 굳힌 것으로 평가된다.
김 교수가 한국사에서의 농촌문제연구를 필생의 연구과제로 삼게 된 계기는 전봉준의 공초(供草)를 통해 동학농민의 성격을 구명하는 석사논문 ‘동학난성격고’를 준비하던 55년께로 거슬러올라간다.
지주제의 해체와 토지의 균등경작을 요구한 운동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17~19세기 조선 농촌사회의 토지문제 연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세봉건사회의 해체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연구자료로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토지대장인 양안(量案)과 호적대장을 채택한다.
핵심과제는 토지소유권의 변모를 파악하는 일이었는데 양안과 호적대장에서 기록된 지주와 경작자의 신분과 토지매매기록, 토지경작형태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중세봉건적인 지주와 전호(佃戶ㆍ소작인)의 관계가 어떤 형태로 변모되었는지를 해명한다.
또한 쌀보리 이모작과 이앙법의 보급 등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어떻게 농민의 부력(富力)을 향상시켰는지, 그리고 부력의 향상이 토지소유관계의 변동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조선후기 농촌사회의 변동과 발전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70년 발간된 이 책의 초판본 서문에서 “한국사 연구에 관하여 그 기본자세의 문제로서 큰 벽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까지의 한국사학이 하나의 철칙으로 여기다시피 하고 있었던 한국사에 있어서의 정체성과 타율성의 문제”라며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그 장애물을 피하지 않았다. 토지대장과 양안 같은 원장부 자료를 분석해 ‘농업생산력의 발전-사적소유의 확립-지주전호제의 성립-지주전호제의 변모’ 라는 논리적 고리를 만들어 한국역사에서 토지사유화가 지체됐기 때문에 자생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의 핵심논리를 돌파했다.
중세사회의 해체과정에서 다음 시대를 계승할 새로운 사회세력으로서 ‘경영형 부농층’에 주목한 것도 특기할 만한 대목이다. 경영형 부농층이란 봉건지주층의 땅을 차경(借耕)한 뒤 주로 임노동을 이용해 농업생산, 농업경영에 전력하는 역농자(力農者) 계층이다. 김 교수는 이들을 영국 농업혁명기의 자본가적 차지농(요먼)과 가까운 존재로 파악한다.
그는 경영형 부농층에 대해 “봉건적 생산관계를 타도하고 새로운 생산양식을 수립할 수 있는 사회계층”이라고 정의하는데, 이것은 김 교수가 이들을 서구 근대사회의 주역이 된 중산적부민(中産的富民), 즉 시민계급과 유사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실증주의사학, 마르크스주의사학, 민족주의사학 등 해방 이전 근대역사학의 세 가지 전통을 발전적으로 계승, 내재적 발전론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김용섭의 이론은 학문적 엄정성과 역사적 기여도에 있어 “넘볼 수 없는 큰 봉우리” (이경식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평가 받아왔지만 최근 이런저런 비판에 직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그는 자본가적 차지농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끌어갈 수 있다는 전제하에 조선후기사회의 변화를 들여다봤지만 이는 영국사회에서 17세기에만 나타나는 특수한 형태라는 점에서 경영형 부농을 자본가적 차지농으로 상정하는 전제는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그렇다.
그의 이론이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증명함으로써 이에 조응하는 사적소유의 발전을 확증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도식성을 갖고 있다는 비판과 국가와 민족을 지향하는 강력한 목적론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비판 역시 매섭다.
그러나 그런저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두터운 역사적 실증과 이론적 사유 위에 바탕한 것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외래이론에 휩쓸리지 않고 근대역사학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온 매우 보기 드문 우리 현대 역사학의 전통으로 굳어졌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97년 연세대에서 정년퇴임한 김 교수는 요즘도 매일아침 일찍 도시락 2개를 싸들고 연희동의 연구실로 출근해 밤늦게 연구실을 나온다. 50년대 동학농민전쟁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조선후기 농업사에서 출발한 그의 이론적 탐색은 2000년대까지 이어져 한말에서 일제하의 농업사까지 근ㆍ현대 한국사회의 농업구조와 사회변혁사상을 밝히는 데에까지 나아갔다.
최근 그는 자신의 학문적 도정을 정리한 ‘농업사로 진로를 정하기까지’라는 글을 남겼다. “이 같은 일을 제가 수행한다는 것은 당시로서 참으로 힘에 부치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앞에 태산이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갈 수 있는데 까지 가기로 하였습니다. 자료가 입수되는 분야의 문제로부터 하나하나 풀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50년의 세월이 흐르고 이제 해는 서산에 저물어 가는데, 저의 작업은 겨우 그 태산의 한 모퉁이를 답사하는 데 그쳤습니다” 라고 썼다. 선각자의 겸손은 그래서 더욱 큰 울림을 준다.
| ||||||||||||||||||||||||
입력시간 : 2007/12/20 18:08:46
|
'세상 이야기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화 세력과 사림, 역사의 닮은꼴(한겨레신문090605) (0) | 2009.06.06 |
---|---|
[우리 시대의 명저 50] 이기백의 '한국사신론'(한국일보070912) (0) | 2008.06.09 |
단군신화, 그리고 북방이야기 (뉴스메이커 747호) (0) | 2007.10.28 |
항일군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070913) (0) | 2007.09.15 |
유치환 친일시 증거 찾아(오마이뉴스 070904) (0) | 2007.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