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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방문 기념사진. 1940년 10월 19일 김득범 외 2명은 일본군 토벌대를 방문하고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은 야첨토벌대사령부에서 건립한 충혼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특히 충혼비는 박득범 등이 죽인 일본군을 기념하고자 건립한 것이다. 사진 가운데 줄 왼쪽부터 김재범, 박득범, 김백산이다. |
ⓒ 전갑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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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말 유치환의 시 '수'와 관련하여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에서 자료를 검색하던 중 눈에 띄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낯설지 않은 이름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박득범(朴得範)·김재범(金在範)·김백산(金白山), 바로 동북항일연합군의 조선인 간부들이다.
이 책은 1940년 10월 19일 연길 야첨(野添)토벌대사령부에서 발행한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내부기록>으로서, 세 사람이 부대를 방문한 기념으로 제작한 것이다. 북만주에서 만주·일본군경(이하 일만군)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그들이 왜, 일본군 부대를 방문하여 기념 자료를 남겼을까.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일만군에 투항한 것이었다. 그리고 방문한 부대에서 자랑스럽게(?)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왜 그들은 일만군에 투항(귀순)하게 되었을까. 또 누가 그들을 귀순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 항일군의 행적을 따라 그 당시로 되돌아 가보자.
현상금 붙은 3명의 무장항일군
황량한 만주벌판! 겨울에는 영하 40~50도를 넘나드는 추위에도 무장항일군은 일만군을 무찌르고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조선인 무장항일군은 지금까지도 옛 만주 땅에서 전설적인 부대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1937년 6월 4일 만주 국경 근처에 있는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옛 이름 보천보)를 공격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김일성 부대에서, 동북항일연합군 출신인 중국인 양정우(楊靖宇, 남만성위 제1로군 군장)·위증민(魏拯民, 2군 군장)·조아범(曺亞範, 제1방면군 총지휘)·최현(崔賢,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 등은 북만주를 주름잡고 있었다. 이 부대에서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등 세 사람은 조선인 출신으로서 김일성 다음으로 명망을 얻고 있었다.
일제는 동북항일연합군을 '토벌'하기 위해 특정기간을 정해 놓고 '완전히 소탕'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1939년 10월부터 '동남부치안숙정공작'을 실시하면서 총 6만5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북항일연군을 토벌하고자 했다. 일만군 토벌대에는 투항한 동북항일연합군 2600명도 토벌대원으로 참여시켰다.
또 일제는 항일군을 잡으려고 현상금까지 내걸었는데, 김일성과 양정우, 위증민은 1만엔, 박득범, 조아범 등은 5천엔으로 산정했다. 이 과정에서 양정우가 총살당하고(1940년 2월) 효수되어 나무에 걸렸다. 남은 사람들은 조선인 항일군 수장 3명과 조아범(40년 12월 총살), 위증민(41년 3월 병사) 등으로 압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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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득범 귀순 보고서. 1940년 12월 28일 장춘 영사가 작성한 박득범 등의 귀순 내용을 정리한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는 김재범, 항일군 제2방면군 참모장 임우성(林宇成)도 귀순했다고 적고 있다. |
ⓒ 일외무성 외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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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산 '배신', 김재범 '귀순', 박득범 '체포'
이 3명의 항일군은 어떤 사람인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김일성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던 박득범은 동북항일연군 2군 위증민의 참모장 및 사령부 경위여장(1936.7~1940.5)을 맡아 간도성 연길 등지에서 활약했다.
1939년 8월 24일 박득범은 간도성 돈화현 한원봉 남쪽 부근에서 관동군 독립보병 28대대와 전투를 벌여 일본군 중위 이하 32명을 죽이고, 14명의 부상자를 낳게 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길림성 돈화현에서 허위로 귀순한다고 속여 서뢰호성 경비과장, 돈화현 부현장, 경무반장 등을 죽였다.
또한 연길헌병대의 <사상대책월보> 5월호에 따르면, 1940년 5월 11일 항일연군 제1로군 박득범과 최현 연합군 150여명이 왕청현 춘화촌에 들어와 일만군과 전투를 벌이고, 마을주민 40여명을 납치하기도 하였다. 그는 12월 체포되기 전까지 일만 군경과 30여차례 전투를 벌여 수백 명의 일만군을 전사시켰다.
김재범은 박득범과 함께 위증민 부대의 정위 및 제1로군 남만성위 후보위원(1937~1938.11), 김일성부대 정치주임으로서 연길현 동불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김백산은 같은 부대에서 경위여의 제3단 단장을 맡고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일제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결국 1940년 6월 29일 김재범은 김백산의 밀고에 따라 안도현 대마녹진에서 일만군과 공작반원들에게 체포됐다. 이를 계기로 박득범도 저항하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한 조선인 관리가 귀순공작을 펼쳤다. 바로 그가 보통학교 훈도에서 시작, 만주국 경찰관리까지 지낸 김창영이다.
그럼 김창영과 3명과의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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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당시 동북항일군 토벌지도. 1940년 9월 이후 일만군이 동북항일연합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광분했다. |
ⓒ 일외무성 외교사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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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창영, 귀순공작의 '귀재'
1949년 5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재판에 회부된 김창영은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는다.
"내가 박득범을 살려줬다!"
그는 박득범을 비롯해 동북항일연합군의 간부들을 다 잡았다고 시인했다. 1938년 가을에 만주국 치안부와 사법부, 관동군과 연락하여 삼강성 방정현 소재 무영산에 주둔한 항일군 수장 마점산의 참모 장묵림과 양정우의 부하 여단장 여소재 등 항일군병 700여명을 귀순시켰다.
또한 1940년부터 1942년 10월까지, 귀순한 항일군, 일만군과 더불어 동만지구 일대의 숙청공작을 추진·협력하여, 김일성 부대 참모장 임수산 외 30여명, 양정우 군사령부 총무부장 오성륜 외 10여 명, 군사령부 박득범 외 6명, 사령부 소속단장 김백산, 김일성 부대 정치주임 김재범 외 6명 등 수백명의 항일조선군을 체포·숙청케 하였다고 밝혔다.
특히 항일군장 양정우를 몽강현 내에서, 제5사장 진한장을 목단강성 경박호 부근에서, 정치주임 위극민을 돈화현 내에서, 정치위원 한인화을 하얼파령 부근에서 각각 토벌대에게 사살 당하도록 협조하였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김일성과 최현을 제외한 나머지 동북항일연합군 간부들을 다 귀순시켰다고 주장했다. 같은 조선인이 조선인 항일군을 잡으러 다녔다는 것을 말해 준다. 특히 박득범에 대해 김창영은 "자발적 귀순이 아니고 체포 후 귀순하였다"고 말하고, "일만 군경을 다수 살상하였다는 점은 처형될 수 있지만, 일반 귀순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만주국으로부터 허락받았다"고 생명을 구해 준 이유를 설명했다.
김창영은 박득범에 대해 "귀순 후 토벌과 귀순공작에 공헌이 다대함에도 불구하고 처단한다면 부하는 물론, 일반 귀순자들의 동요를 필히 초래하여 만주국 내 치안상태가 다시 험악해 진다"고 사형을 막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박득범 외 2명은 사형을 면하고 체포된 일본군 부대를 방문하여 "일본신민의 일원이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세 전사의 기념촬영...'일본신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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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득범이 작성한 <결심을 말한다>. 박득범은 일본 천황과 만주국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
ⓒ 일방위성 방위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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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0월 19일 오전 11시 30분 다나까 경무과장, 나까하라 성 차장, 하세가와 연길 야첨토벌사령부 부관 등이 참석하여 사령관실에서 환영식을 거행했다.
김재범과 김백산의 결의에 찬 발언이 이어졌다. 박득범은 "대일본 천황전하의 충양(忠良)한 신민이 되겠다"고 서약했다. 또한 만주국 황제전하에게도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이 자리에서 박득범은 <결심을 말한다>라는 글에서 "나는 일본신민의 일원으로서 만국 구성의 분자로 노력을 다하고 동아신질서 건설과 만주국 치안숙정에 절대적으로 끝까지 소임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충성을 맹세했다.
특히 "만주국과 조선인 동포들에 대하여, 경제, 산업, 문화 등 기타 시설에 대하여 파괴적 행위를 앞으로 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김재범과 김백산도 "박득범의 생각에 동의한다"며, "천황전하의 광대무변한 은덕과 황은에 보답하고자 생명을 바쳐 치안숙정(治安肅正)에 공헌을 하겠다"고 맹세했다.
특히 김재범은 1940년 9월 25일 위증민의 유류문헌과 동북항일연합군 제1로군 제3방면군 제15단장 이용운(1940. 9. 6 사살됨)이 소지한 문서를 비교하여 항일군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여 일만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기도 했다. 그의 정보는 끝까지 싸우고 있는 항일군을 토벌할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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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범의 <결심을 말한다>. 김재범과 김백산은 "천황전하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은덕과 황은(皇恩)에 보답하고자 생명을 바쳐 치안숙정(治安肅正)에 공헌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
ⓒ 일방위성 방위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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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조선인들, '잡아라! 항일군'
박득범 등은 '일본천황과 만주국 황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김창영의 귀순공작도 계속되었고, 조선인들로 구성된 친일단체까지 합세하여 항일군들을 '발본색원'하겠다고 광분했다.
만주국과 관동군 사령부는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항일군들을 토벌하려고 현상금에서 '특별공작반'까지 구성하도록 했다. 1940년 8월 7일 간도성 화룡현 협화회 본부는 김일성 귀순공작 충고문(忠告文)을 작성해 안도현 선무반 마을에 배포하기도 했다. 또한 협화회 소속 조선인들까지 나서서 자위단 등을 구성해 선무공작반이나 직접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1940년 11월 24일 장춘탄광사원 32명이 모여 '재만반도보국회'와 '동남부지구특별공작후원회' 등을 통합하여 자숙회(自肅會)를 결성하여 토벌 기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 김응두(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 총무, 협화회 신경 계림분회장)는 11월 12일 동남지구특별공작대 유세반원으로 연길지부 결성식에 참석하여 토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자고 광분하기도 했다.
이렇듯 만주에 거주하는 일부 조선인들은 항일군 조선인들을 잡으려고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결국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던 수많은 항일군들은 김창영과 같은 조선인에 의해, 협화회와 자위단 같은 친일단체에 의해 죽거나 혹은 귀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동지를 배신하고 토벌군으로 변신한 박득범, 김재범, 김백산 같은 사람들도 있었던 반면, 끝까지 귀순하지 않고 저항한 조선인 허형식(1942. 8. 3, 사살)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도 양정우처럼 효수되어 나무에 걸렸다. 과연, 만주에서 활동한 항일군 중에서 누구를 기억할지, 이제는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때이다.
김창영은 누구인가? |
김창영은 평북 강계군 공북면 출신이며, 평양고등보통학교 사범과, 교토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 법과를 졸업했다. 그 이후 강계공립보통학교 훈도로 약 2년간 근무하고, 1917년부터 강계 공북면장으로 약 5년간 있다가, 1922년 7월경 강원도 경부보로 임명되었고, 1930년 강원도 경시로 승진했다.
1932년 전라북도 금산군수로 있다가, 1937년 8월경 조선총독부 지시로 만주국 치안부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치안부 경찰관, 이사관, 총무청 참사관을 역임했다. 1943년 10월경 전라남도 참여관 겸 도 사무관(산업부장, 광공부장 등)으로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그는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 소위 '대동아전쟁 필승'을 위하여 화순 무연탄 채탄, 목재, 송탄유 산출 등을 지휘감독하고, 기회 있는 대로 현장을 순회하며 격려했다. 후에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어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공민권 3년 정지를 당하고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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