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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군 사령부에서 발행한 <비적정보월보 제4호> 지도 |
ⓒ 전갑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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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의 시 '수(首)'에 나오는 '비적'을 놓고 몇 년째 친일시 논쟁이 거듭되고 있다. 또한 내년 유치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남 통영시에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뜻있는 사람들은 통영시가 친일작가 키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필자는 과연 그가 친일문인인지 아닌지, 다시금 '수'를 통해 따져보고자 한다.
일제시대 '비적' 기록을 찾아서 일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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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환은 극작가인 형 유치진과 함께 친일문인으로 의심받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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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4년 10월 5일 <오마이뉴스>에 "유치환 시의 '비적'이 항일독립군 아니라고?"라는 글을 통하여 '비적'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항일독립군(이하 항일군)이라고 역설하였다. 그 이후 통영시와 보수적인 문인단체인 문인협회 등에서는 '비적은 단순한 도둑떼일 뿐이다'라고 본질을 왜곡하였다.
또한 유치환을 옹호하는 문인단체와 소속 일부 회원들이 '정말 가성네거리에 효수된 사람이 독립군인지 밝혀내라'고 역공을 펼쳤다. 비적이 항일군이 아니라는 증거를 내세우지도 못한 채 말이다.
필자는 '비적'이 항일군임을 밝히고자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일본의 방위성 방위연구소, 국립국회도서관, 외무성 외교사료관을 직접 방문하여 사료를 수집하였다. 그 결과는 고 임종국 선생이 주장한 내용과 다르지 않았고, 약 3년간 필자가 주장한 대로 '비적'이 항일군이었음이 뒷받침하는 근거들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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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군 장조인. 1940년 3월 1일 항일군 장조인이 하얼빈 부근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하얼빈헌병대의 <합헌고 제271호 사상대책월보에 관한 건 보고 '통첩'> 보고서. |
ⓒ 방위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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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거주지는 동북항일연군의 무대
도쿄 메구로구 나카메구로에 소재한 방위성 방위연구소는 한말부터 해방될 때까지 육·해군 문서 약 15만책을 소장하고 있다. 필자는 만주 일대에서 항일군들을 토벌한 관동군사령부의 보고서와 사료들을 발굴했다. 이 사료는 유치환이 거주한 빈강성 연수현을 비롯한 하얼빈, 동흥현 등지의 '비적'이 항일군임을 확인해주고 있으며, 또 '수(首)'에 나오는 '가성네거리에 내걸린'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짐작케 한다.
첫 발굴한 자료는 관동헌병대 하얼빈헌병대장 가토가 작성한 보고서이다(1940. 4. 14, 합헌고 제271호 사상대책월보에 관한 건 보고 '통첩'). 이 보고서에 따르면, 1940년 3월 1일 오전 6시경 항일군인 장조인(莊祚人) 외 수십 명이 하얼빈 곽후기팔리촌 입기비구 화요둔에 만주군을 공격하고자 도착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만주군경 30명이 즉각 출동하여 오후 1시에 장조인 부대와 8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항일군 2명이 사살당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두 번째 자료는 일본군과 만주군 그리고 동북항일연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하얼빈에서 벌어진 내용이다. 1940년 10월 11일 오후 1시 10분 빈강성 서부인 경원동남방(慶源東南方) 송화강(松花江) 인근 오목대(敖木臺)에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제12지대 한옥서(韓玉書, 제3로군 정치주임) 등 100여명이 대규모 연합 작전을 펼쳤다.
이날 일본군 제4군관구 교도보병 제4단, 만주경찰, 일본군본부 부대 등 202명과 항일군 100여명이 혈전을 벌였다. 결국 항일군은 지휘관 한옥서, 부관 매서개(買西介), 36대대장 관수마(關秀烏), 35대대 유격대장 쌍협(双俠)를 비롯하여 소대장 4명이 사살당하고 대원 34명이 전사했다(<만주일보>, 1940. 10. 16, 치안부참모사 발행 <철심(鐵心)>, 1940. 10월호).
또한 10월 25일 만주국 대신이 참전한 부대에 상금 7천원을 주었으며, 만주군 기관지와 <만주신문> 등에 '성공적인' 전투임을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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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적정보월보 제4호> 지도 확대(좌). 이 지도에는 조선인 독립군 박길송과 동북항일연군의 이동과 전투사항을 표시하고 있다. |
ⓒ 전갑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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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적정보월보 제4호> 지도 확대(우). 유치환이 거주한 연수현에도 독립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 전갑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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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발굴한 자료는 1941년 5월 31일 관동군참모본부에서 작성한 '비적정보월보 제4호(匪賊情報月報 第4號)'라는 채색지도로 조선인 항일군에 관한 내용이다. 이 지도는 이 시기 만주 전역에 1360명의 '비적'(항일군)이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김일성 부대가 간도성을 비롯해 하얼빈 인근까지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에 따르면, 1941년 5월 25일 밤 8시경 빈강성 동흥현 후삼택 동쪽 약 3km 지점에서 동북항일연군 제12지대장 박길송(朴吉松) 부대원 40명, 장광적(張光迪) 부대원 20명 등 총 120명이 전투를 벌였고, 유치환이 거주한 연수현에서도 20명의 만주군과 혈전을 벌였다.
이러한 자료들은 이 시기 하얼빈과 연수현 등지에서 동북항일연군이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적'으로 불렸던 그들은 무장항일독립군임을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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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항일연군. 1940년 10월 11일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제11지대 한옥서 정치주임 등 100여 명이 하얼빈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간부들은 일만군에 사살됐다. 사진은 치안부 참모사에서 발행한 <철심> 1940년 10월호. |
ⓒ 일본 국회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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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군, 사살당하고 효수되다
'작은 가성(街城) 네거리에' 효수된 그 시의 '비적(匪賊)'은 항일군일까. 바로 그들이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항일군일 가능성이 높다. 앞에서 사살된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은 총살되거나 전사할 경우 일본군에 의해 목이 잘려 나무에 걸었다는 게 정설로 알려지고 있다.
그 사례를 찾아보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군장 양정우(楊靖宇, 중국인)는 1940년 2월 몽강현 삼도위자에서 일본토벌군에 포위되어 투항을 거부하다가 사살됐다. 그의 시신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가 잘려 몽강현에 걸려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와다 하루끼, <김일성과 만주의 항일무장투쟁, 1998, 226쪽).
또한 경북 선산군 출신인 허형식(許亨植)은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3군장을 맡고 있을 때인 1942년 8월 3일 경성현(慶城縣) 청풍령(靑風嶺)에서 만주국군 토벌대에 포위되어 사살되었다(김인식, <한국현대사와 사회주의>, 2001, 역사비평). 그 이후 일본군에 의해 양정우처럼 효수되어 나무에 걸렸다.
따라서 동북항일연군 12지대 지휘관 한옥서를 비롯한 간부급도 허형식처럼 효수되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음이 자명하다.
특히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6일까지 방위성 방위연구소 등에서 만주와 관련된 <육만밀대일기(陸満密大日記)> <육만기밀대일기(陸満機密大日記)> <육만진대일기(満普大日記)> 1940년~1945년까지, 육군일반사료 중 만주와 관련된 자료 등 총 440책을 살펴 본 결과, 일반 도둑이 항일군처럼 효수된 뒤 나무에 걸려 선전전으로 이용되었다는 자료는 찾을 수가 없었다.
또한 관동군 사령부의 각 부대에서 편찬한 <진중일지(陣中日誌)>, 각종 보고서를 직접 찾아봐도 일반 도둑이 효수되었다는 사실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는 유치환의 '수'에 나오는 '비적'이 일반 도둑이 아닌 항일군임을 방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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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군 토벌기사 만주에서 발간된 <만주신문> 1940년 10월 16일자에 나온 기사. 이 신문은 일만군이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했다고 보도했다. |
ⓒ 전갑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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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친일시로 재평가 받아야
유치환의 시 '수'는 항일군을 조소하는 마음을 담은 '친일시'다. 일부에서 '비적'을 두고 하는 말처럼 "글자 그대로 떼지어 다니면서 살인 약탈을 일삼는 도둑의 무리"가 아니라, 유치환의 거주지에서 만주 전역까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 투쟁한 항일군의 총칭이라고 하겠다.
일본·만주군경은 '비적'을 '사상비(思想匪)'와 '토비(土匪)'로 나누었다. '사상비'는 '공산비(共産匪)'와 '항일비(抗日匪)'로 각각 나누어 불렀다. 그들이 '작은 가성네거리'에 효수되어 내걸린 것이다.
또한 1939년부터 협화회에 소속된 조선인들은 동북항일연군 등을 토벌하는 데 선무공작대원으로서 산악을 누비고 다녔다. <선문반원명부(宣撫班員名簿>(1939. 3. 10 현재)에서는 협화회 소속 조선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43년 하얼빈협화회에 근무한 유치환도 선무공작에 직접 나섰을 것이라 추측된다.
유치환의 '수(首)'란 |
청마 유치환(1908~1967)은 1939년 만주 봉천(奉天)로 이주하였고, 1940년 6월부터 1945년 해방 2개월을 앞두고 귀향했다. 그는 북만주 빈강성(賓江省) 연수현(延壽縣) 신구(新區)의 '자유이민촌 가신흥농회' 농장을 경영하며 1943년 하얼빈 협화회에서 근무했다.
또한 '수'는 1942년 3월 <국민문학>을 통해 발표됐다. 고 임종국 선생은 <실록 친일파>라는 책에서 그의 시 '수'가 "거짓 평가를 받고 있다"며 친일시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 통영시, 거제시, 문학단체 등에서 '수'에 나오는 '비적'은 "일반 도둑"이라며 친일시가 아니라고 줄곧 주장하고 있다. |
지금까지 유치환은 '수'를 비롯한 3편의 친일시를 친일잡지에 게재하였으며, 만주국 협화회에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일문인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 통영시장은 "유치환의 시 중에서 제일 좋은 시가 '수'"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으며, 그의 형 유치진까지 재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다.
다시 유치환을 옹호하고 기념사업을 펼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가 만주에 있으면서 항일시나 항일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항일독립군의 효수된 머리를 보고 조소했던 인물을, 생명을 존중하는 '생명파' 시인으로 영원토록 기념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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