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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님. 이제 정말로 님을 놓아드려야 하는 시간입니다. 님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고 기대고 싶은 연약한 우리 마음 한 자락조차 다 내려놓고 님을 보내면서 새롭게 만나야 하는 시간입니다.
국민과 함께 하며 기쁘고 좋았던 일들,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아름다운 사연들만 가지고 평안히 떠나십시오. 김대중 전 대통령님께선 “나는 이승에서 싸우고, 노무현 대통령은 저승에서 같이 싸우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현실이 얼마나 참담하고, 얼마나 님이 그리우면 그리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차마 그렇게 말 못하겠습니다. 님에게 더 이상 아프고 무거운 짐을 안겨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모든 소망일랑 여기 산 자들에게 맡기시고, 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영원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십시오.
님이 서거하고 이틀 뒤, 오체투지 기도순례길에 있던 순례단은 봉하마을을 찾았습니다. 수많은 이들의 눈물바다 속에서 저는 님의 집 앞에 펼쳐진 넓은 논들을 보았습니다. 농부 노무현을 잃고, 논도 울고 논둑도 울고 풀들도 울고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와 오체투지 기도 속에 님의 영혼을 위로하고, 서럽고 분한 우리 자신을 달래고 또 달래봐도 애절하고 비통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님의 재임 기간 동안 여러 사안에서 부딪혔습니다. 새만금갯벌 간척과 연안습지 매립 정책을 놓고, 부안 핵폐기장 유치문제와 평택 대추리를 둘러싸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 문제에서도 그랬습니다.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님에게도 고뇌와 번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2007년 10월 2일. 남북정상회담을 떠나던 님의 모습, 그날 그 순간을 또렷이 기억합니다. 님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남에서 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방북하셨습니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직전, 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간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고통을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권양숙 여사와 함께 차근차근 군사분계선을 넘어서던 모습, 님이 만든 그 모든 업적 중에 최고의 걸작이었습니다. 그 큰 결단에, 1989년 8월에 북에서 남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섰던 저는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님이 재임 기간을 마치고 그 먼 촌구석 봉하마을로 내려가셨을 때 다시 감탄했습니다.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밀짚모자를 쓰고 소박하고 환한 웃음으로 농부들과 친환경 농업을 얘기하는 모습이야말로 님이 만든 아름다운 작품들 중 또 하나의 걸작이었습니다. 님의 진심과 진정을 보았고 진실로 겸손하고 낮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국민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부엉이 바위 위를 향해 가시던 그 마지막 새벽, 세상을 하직하러 가는 그 여명의 길에서조차 님은 마을길을 돌보고 풀을 뽑았습니다. 도시와 자본에 대한 맹목적 숭배에 찌든 이 사회를 향해, 님은 그렇게 다시금 금단의 선을 넘고, 편견과 타부의 장벽을 허물며 온몸으로 새 길을 내어가고 있었습니다. 님의 그 마지막 유산이야말로 이 탐욕의 시대에 우리가 받은 가장 고귀한 선물일 것입니다.
예전 서운함 다 거두고, 이제 정말로 평화롭게 공존하고 번영하는 남북통일에 대해 나누고 싶었습니다. 생태적인 미래사회, 지역발전에 대해서도 술 한 잔 걸치며 얘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곧 그 시간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었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비통하게 영원의 길로 떠나고 마셨습니다. 살아서 같이 싸우지 왜 그렇게 혼자 훌쩍, 외롭고 바보같이 가버리셨느냐고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님의 유언처럼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님도, 님을 그렇게 보낸 우리 자신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제 과거가 아니라 현실을, 미래와 희망만을 직시합니다. 민주주의는 파괴되고, 남북관계는 파탄 나고 있습니다. 공동체적 관계는 파열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님이 말씀하셨듯이,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님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닌, 멈추지 않는 모욕, 생매장과 다를 바 없는 비루한 삶을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 님은 죽음으로써 생명과 부활을 말하고, 막다른 세상과 단절하면서 영원한 역사의 길 위에 살기로 하셨습니다. 미약하고 미몽을 헤매이는 우리들에게 연대와 일치의 힘을 부여하셨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여기 살아있는 이들이 님의 삶을 살 것입니다. 님께서 우리에게 남긴 시대정신, 그 가치를 끊임없이 성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살리고 남북화해와 공존을 이루며, 선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향해 꿈꾸고 행동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원칙과 상식이 자리를 잡고, 인간에 대한 도리, 존재에 대한 예의가 있는 사회, 연민과 상생의 기운이 흐르는 따뜻한 사회공동체 만들기를 계속해 갈 것입니다.
님은 과거가 아닌 현재이고 미래입니다. 님은 추억이 아닌 이 시대의 생명력입니다. 님을 기억 속에서가 아닌 살아있는 역사 속에서 만나겠습니다. 님이 다 이루지 못한 소망, 우리가 질기게 일궈가겠습니다. 편히, 편히 가십시오.
2009년 7월 10일 문규현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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