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5710.html
오바마의 아프간, 존슨의 베트남 되나 [2009.09.11 제777호] |
미군 전사자 8월에만 47명 ‘최악의 기록’… 반전 여론 높아지며 민주당 진보파는 철군론 거론 |
▣ 정인환 |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이전부터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비교됐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어떨까? 오바마 대통령이 링컨이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아니라 린든 존슨 대통령과 닮아 있다면….”
<뉴욕타임스>는 지난 8월23일치에서 이렇게 썼다.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이듬해 재선에 성공한 존슨 대통령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필적할 만한 ‘위대한 사회’ 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민권법 도입을 통한 인종차별 철폐와 빈곤 근절을 위한 노력, 공공 의료보장제도(메디케어·메디케이드) 도입 등은 민주당 진보파의 자랑이었다. 문제는 그의 임기 중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이 전면화했다는 점이다. 눈덩이처럼 전비가 쌓여가면서 재원이 고갈돼 개혁 정책의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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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집착하다 개혁 발목 잡혀
“존슨 대통령이 공산주의 확산을 막으려면 베트남전쟁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고 느낀 것처럼, 오바마 대통령도 테러리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고 있는 듯싶다.” <뉴욕타임스>의 지적만이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 스스로 이런 인식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그는 지난 8월17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열린 해외참전자회(VFW) 연차총회 연설에서 아프간전쟁을 “선택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필요에 의한 전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시사주간지 <네이션>이 9월2일 인터넷판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보면,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정책이 떠오른다”고 쓴 것도 이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대테러 전쟁’의 주무대를 이라크에서 아프간으로 옮겨갈 것임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취임 직후인 지난 2월 아프간 증파 계획을 서둘러 밝힌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아프간에 은신해 있는 알카에다를 포함한 국제 테러조직의 뿌리를 뽑는 것이 미국의 안보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달려 있다고 본 탓이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상황은 지속적으로 나빠져왔다. 9월2일 현재까지 아프간 참전 미군 전사자는 모두 738명에 이른다. 올 들어서만 모두 182명의 미군이 아프간에서 목숨을 잃었다. 특히 8월 한 달 동안에만 모두 47명이 전사했다. 지난 8년여 전쟁 기간 동안 최악의 해, 최악의 달이다.
“아프간의 현 상황이 엄중한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승리를 일궈낼 수 있다고 본다.” 스탠리 매크리스털 아프간 주둔 미군사령관은 지난 8월31일 미 중부군사령부와 나토군사령부에 제출한 현황 보고서에서 이렇게 밝히고, 전면적인 정책 변화를 촉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밀로 묶여 일부 내용만 공개된 이 보고서에서 매크리스털 사령관이 요구한 ‘변화’는 병력 증파였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 언론들은 군 고위 관계자들의 말을 따 “(매크리스털 사령관이) 보고서에서 8개 여단, 약 4만 명의 병력을 증파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전했다. 지난 2월 이미 2만1천 명 증파 계획이 나와 올해 말까지 아프간 주둔 미군 규모는 6만8천 명에 이르게 된다. 추가 파병 요청이 의회에서 고스란히 받아들여진다면, 내년엔 아프간 주둔 미군이 10만 명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프간 현지의 정치 상황도 오바마 행정부를 옥죄고 있다. 지난 8월20일 실시된 대선은 선거부정 논란에 휩싸인 상태다. 게다가 9월3일 오후 현재까지 발표된 개표 결과, 과반 지지율을 확보한 후보가 없다. 결선투표를 실시해야 할 상황이다. 정정 불안이 장기화할 것이란 얘기다.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 정부가 장악한 지역은 전 국토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데 이견을 다는 아프간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카르자이 정부가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정확이 뭘 뜻하는지에는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런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국토의 3분의 2를 탈레반이 좌우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매크리스털 사령관의 현황 보고서 제출 직후 쏟아져나온 각종 여론조사 결과가 부정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평화단체들 반전 캠페인 압박
< CNN방송 >과 여론조사 전문기관 ‘오피니언리서치’가 공동으로 실시해 9월1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57%가 아프간전쟁을 반대한다고 답했다. 지난 4월 실시된 같은 조사에 비해 반대 의견이 11%포인트나 높아졌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입소스’가 9월2일 내놓은 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56%가 추가 파병은 안 된다고 답했다. 앞서 지난 8월 중순 <워싱턴포스트>와 < ABC방송 >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응답자의 51%가 ‘아프간전쟁을 지속할 가치가 없다’고 답해, 개전 이래 처음으로 ‘반전 의견’이 절반을 넘어섰다. 특히 민주당 지지자의 70%가 아프간에서 전쟁을 지속하는 데 반대했고, 병력 증파에 찬성한다는 응답자도 20% 선을 밑돌았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를 두고 “지난 2004년 이라크전쟁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한 시점을 떠올리게 한다”고 분석했다. 반전 여론은 이후 수직 상승을 이어가면서 2006년 중간선거에서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고, 공화당의 참패로 이어졌다. 공화당 정권 몰락의 서막이었다.
민주당 진보파를 중심으로 ‘아프간 철군론’이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초기 일찌감치 오바마 대통령 지지 의사를 밝혔던 러스 파인골드 상원의원은 지난 8월28일 <월스트리트저널>에 보낸 기고문에서 “미군의 아프간 주둔 자체가 현지 여론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되면서,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며 “아프간 철군 시한을 제시할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데이비드 오베이 하원 세출위원장도 “내년 봄까지 실질적인 진전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아프간전쟁 경비를 삭감할 것”이라고 으르고 있다.
일부 보수 인사들도 ‘철군론’에 무게를 싣기 시작했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인 보수 논객 조지 윌은 9월1일치에서 “아프간 전역에서 저항세력과 맞서 치안을 유지하려면 몇십만 병력이 10년 이상 장기간 주둔해야 한다는 게 대테러 전문가들의 진단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라며 “아프간 주둔 병력을 대폭 줄이는 한편, 군사전략을 바꿔 정보 수집과 무인기·미사일·공습을 동원한 공격, 파키스탄 국경지대 특전사 투입 등으로 군사작전을 제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시 행정부 초기 아프간 정책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던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CFR) 회장도 최근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한때 아프간전쟁을 필요에 의한 전쟁이라고 판단했지만 이제는 선택에 의한 전쟁이라고 생각한다”며 “대규모 병력이 주둔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다가오는 9·11 동시테러 8주년은 아프간 침공 8주년과 맞닿는다. 때맞춰 미 의회에선 매크리스털 사령관의 병력 증파 요청을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질 게다. 오바마 대통령 당선 이후 숨고르기에 들어갔던 반전·평화 단체들이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뉴욕타임스>는 8월30일치에서 “그동안 활동이 주춤했던 반전단체들이 아프간 침공 8주년을 맞는 오는 10월 한 달 동안 적극적인 반전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준비작업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톰 앤드루스 ‘전쟁 없는 승리’(WWW) 대표는 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진보·개혁 인사들은 오바마 행정부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며 “아프간전쟁을 지속하는 것이 오바마 대통령의 국내 정책에 심각한 부담이 될 것이란 점을 강조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이라크는 ‘부시의 베트남’이었다. 취임 8개월째, 아프간전쟁은 이미 ‘오바마의 전쟁’이 돼버렸다. 아프간은 ‘오바마의 베트남’이 되고 마는가? 분수령이 멀지 않은 듯싶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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