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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혁명가의 영원한 ‘로망’ 체 게바라는 나의 동지 (한겨레21 제778호)

by 마리산인1324 2009. 9. 15.

 

<한겨레21>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5732.html

 

 

혁명가의 영원한 ‘로망’ 체 게바라는 나의 동지 [2009.09.18 제778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월호]


[Dossier] 착취와 억압을 넘어 혁명으로 2
퇴행적 현실 극복 위해 무장혁명의 길 걸어
태생적 조국을 넘어 인류의 혁명적 영웅으로

 

 

40여 년 전, 저 세상으로 떠난 체 게바라가 시공간을 넘어 우리의 양심을 일깨우고 있다. 체 게바라의 호소는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다. 그렇다, 오직 혁명만이 인간을 빛과 같은 존재로 만들 수 있을 때가 간혹 있다. 볼리비아 난카후아주의 깊은 곳에 옷을 벗고 누워 있는 체 게바라의 몸 위로 빛이 비치는 모습은 우리가 세계 곳곳의 신문에 게재된 사진들을 통해 본 장면이다. 지금 체 게바라는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남아 있다. 체 게바라는 용감한 사람, 양심이 있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비록 천식으로 몸은 쇠약해져갔지만 정신은 강했다. 체 게바라가 발작 때문에 얼굴빛이 푸르스름해지면 난 체 게바라와 함께 블리다 도시 위에 있는 체레아 언덕에 오르곤 했다. 체 게바라가 쓴 <볼리비아 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체 게바라가 얼마나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육체적·물리적 고난을 이겨냈는지 알 것이다.

 

체 게바라에 대해 말할 때 쿠바를 빼놓을 수 없다. 쿠바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그가 혁명의 부름을 받아 참여한 제2의 조국으로서 우리와 그의 삶을 연결시켜주는 곳이다.

 

» 체 게바라

1962년 가을에 미국이 선포한 쿠바 봉쇄로 세계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내가 체 게바라와 알게 된 것은 이 사건이 터지기 전날이었다. 당시 알제리는 빠른 속도로 독립 수순을 밟고 있었다. 독립 후 첫 정부가 들어섰다. 1962년 9월, 난 알제리 정부의 수반으로서 알제리 독립을 축하하는 행사가 거행되는 뉴욕 유엔본부에 참석했다. 유엔본부에서 알제리 국기가 게양되는 상징적인 행사였다. 그것은 알제리 해방 투쟁의 승리이자, 알제리가 자유세계에 공식 참여하는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결정에 따라 난 먼저 유엔을 방문한 뒤 나중에 쿠바를 방문하기로 했다. 그것은 단순한 방문을 넘어 쿠바와 알제리의 정치 협력을 약속하기 위한 자리였다. 알제리는 어려운 국면에 처한 쿠바 혁명과 전적인 연대를 공개적으로 강조하고 싶었다.

 

백악관의 초대를 받아 난 1962년 10월 15일 오전에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쿠바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쿠바와 대결하는 쪽을 택하실 겁니까?”

 

내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직접 물었다. 그러자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소련의 무기가 있다면 대결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대결하지 않을 겁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뉴욕발 직항편으로 쿠바에 가겠다는 날 말렸고, 심지어 쿠바의 공군기를 타고 가다가 마이애미에서 활동하는 쿠바 반대 세력에게 공격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이처럼 은근히 겁을 주었지만 난 이렇게 반박했다. “난 알제리 빨치산 출신으로, 알제리 반혁명 세력이든 쿠바의 반혁명 세력이든 두렵지 않습니다.”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의 작은 촌락 라이게라에 있는 학교의 한 교실. 전날 생포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이곳에서 암살당했다. 장 폴 사르트르로부터 ‘우리 세기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받은 체 게바라가 혁명으로 가득했던 파란만장한 삶을 이렇게 마감했다. 생전에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에서 과테말라까지, 쿠바에서 콩고까지. 마침내 볼리비아까지 누비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따뜻한 희망을 갖고 평생 혁명을 위해 살았다. 아메드 벤 벨라 알제리 전 대통령은 1962년과 65년 사이 체 게바라를 자주 만났다. 당시 알제리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세계 혁명가들의 은신처였다.

 

10월 16일 우리가 쿠바에 도착하자 쿠바인들은 우리를 열렬히 환호했다. 우리 대표단이 쿠바에 도착하면 하바나에서 정치에 관한 회담을 하기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하지만 호텔에 짐을 놓자마자, 의전 절차를 생략한 채 우리는 피델,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그리고 우리와 동행한 기타 지도자들과 두서없이 격의 없는 논쟁을 벌였다. 우리는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난 쿠바의 지도자들에게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받은 기억의 느낌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다 보니 의제 거리가 떨어져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쿠바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 짧은 사건은 우리의 회동을 전적으로 파격적인 관계로 이끌었으나, 쿠바 혁명과 알제리 혁명을 잇고,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나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게바라, 알제리 혁명 성공에 적극 도움

이같은 끈끈한 연대감이 실질적으로 강해진 또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63년 10월, 인근 모로코의 침략 도발인 이른바 틴두프 전쟁으로 알제리 혁명이 처음으로 위협을 받았을 때다. 고작 독립투쟁의 전투 경험뿐이었던 알제리 군대는 상공 방어체제도 없었고(알제리에 비행기가 한 대도 없었기 때문이다), 변변한 전투장비도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 군은 최악의 불리한 상황에서 모로코군의 공격에 맞서야 했다. 우리 군의 대응책은 독립 투쟁 때 사용했던 유일한 전술, 게릴라전밖에 없었다. 사막, 나무가 없는 넓디넓은 길들은 오레스, 유르유라, 콜로 반도, 틀렘센 반도의 산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다행히 알제리군이 아주 잘 아는 곳들이었다. 적군은 알제리 혁명이 강한 영향력을 미치기 전에 진압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우리에게 상공 방어체계를 즉시 마련해주었고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기타 쿠바 지도자들이 22대의 전차를 보유한 대대와 병사 수백 명을 보내주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은 시디벨아베스 남쪽 베도로 진입해 전쟁이 계속될 경우 바로 투입할 준비를 끝냈다.

 

쿠바가 보내준 전차에는 적외선 장치가 갖춰져 있어 야간 투입도 가능했다. 이 전차들은 소련이 쿠바에 인도한 것으로, 불가리아 같은 공산주의 국가를 포함해 제3세계에 주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하지만 소련의 조건을 어기고 쿠바는 알제리 혁명을 돕기 위해 이 전차들을 보내준 것이었다.

 

틴두프 사건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모로코 군대를 수송하는 헬리콥터들은 미국인 조종사가 몰았다. 훗날 같은 이유로 쿠바 지도자들은 대서양을 지나 앙골라와 그 외의 지역에도 군사 지원을 하게 된다.

 

쿠바가 알제리에 군 병력을 어떻게 보내주었는지 설명해볼 필요가 있다. 그 무엇보다도 쿠바와 알제리의 긴밀한 관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 피델 카스트로(왼쪽)와 체 게바라.

1962년 10월, 난 쿠바를 방문했다. 그때 피델 카스트로는 약속대로 20억 프랑을 알제리에 지원해주고 싶어했다. 쿠바의 경제 사정을 고려해 20억 프랑을 현금이 아닌 설탕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난 설탕은 알제리보다는 쿠바가 더 필요로 하는 것 같아 그의 지원을 거절했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뒤, 쿠바 선박 한 대가 오랑 항구에 도착했다. 선박에는 쿠바가 약속한 20억 프랑어치의 설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데 쿠바의 전차 10여 대와 병사 100여 명도 함께 승선해 있어 우린 깜짝 놀랐다. 학생 노트에서 찢은 종이에 쓴 짧은 쪽지도 있었다. 라울 카스트로가 보낸 이 쪽지에는 쿠바가 알제리에 든든한 유대감을 갖고 있어 전차와 병력을 지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물론 우리도 쿠바 선박을 빈 선박으로 다시 보낼 수 없어 쿠바에 대한 감사 표시로 알제리 제품을 가득 실었고, 호르헤 세르게라 대사의 조언에 따라 북아프리카 바르바리아 지방의 말 몇 마리도 함께 태워 보냈다. 이렇게 해서 쿠바와 알제리 사이에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물물교환이 시작된 된 것이다. 상황이 어떻든 이같은 물물교환은 두 나라의 관계에서 특별한 부분이었다.

 

게바라, 또다시 혁명의 길로

한편 체 게바라는 현실적으로 규제와 제한이 많아서 진정한 혁명을 완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혁명이란 비정한 시장 논리 및 상업 우선주의와 직간접으로 얽히는 순간부터 그 과업을 이뤄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다. 체 게바라는 1965년 2월 알제리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회의에서 시장 논리와 상업 우선주의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더구나 쿠바 봉쇄 같은, 소련과 미국이 체결한 협정은 씁쓸함을 남겨주었다. 나는 알제리 주재 소련 대사와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봐도 거대한 혁명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 게바라는 이같은 상황을 보며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이들을 위해 무장혁명을 벌이겠다고 했다.

 

나는 체 게바라의 방식이 성숙한 혁명을 위한 길은 아닌 것 같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무장혁명이 해외에서 해결책이 되려면 먼저 해당 국가 내부에서 혁명을 일으킬 원동력이 충분히 마련되어야 승산이 있다고 본 까닭에서였다. 하지만 체 게바라를 설득할 수 없었다. 체 게바라는 온몸을 아끼지 않고 혁명에 참가하겠다고 하면서 앙고라의 카빈다, 브라자빌 콩고를 여러 번 방문했다.

 

나는 그에게 좀더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개인 비행기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전세계에 파견돼 있는 알제리 대사들에게 체 게바라를 도와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그가 아프리카에서 돌아올 때마다 다시 만났고 그와 함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체 게바라는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풍부한 문화유산을 보며 감동에 사로잡혔지만 아프리카 지역의 이기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마르크시스트 정당들에 대해선 못마땅해했다. 예를 들면 앙골라 카빈다, 콩고민주주의공화국의 킨샤사 등지에서 그가 경험한 게릴라 세력에 실망스러워했다. 체 게바라가 자기 방식의 혁명투쟁을 벌이는 동안 우린 다른 방식으로 자이르 서부의 무장혁명을 지원했다. 알제리는 탄자니아 대통령 줄리어스 니에레레,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 말리의 정치가 모디보 케이타, 가나의 정치가 콰메 은크루마, 케냐의 정치가 조모 케냐타, 기니의 정치가 세쿠 투레와 각각 협약을 맺어 항공편으로 무기를 실어 이집트를 경유해 보내주었다. 그리고 우간다와 말리 공화국은 전차를 제공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나는 회의를 주재해 우리 모두의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했으며 투쟁을 벌이는 각국의 지도자들로부터 간절한 요청이 있을 때 바로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원은 종종 너무 늦었다. 이로 인해 루붐바 콩고 초대 총리는 반혁명 세력에 의해 암살되기도 했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체 게바라는 알제리에 머물던 어느 날 피델의 요청을 대신 알려주었다. 쿠바는 당시 봉쇄된 상태였기에 라틴아메리카로 무기와 군 지휘관을 보낼 수 없었다. 군 지휘관들은 쿠바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알제리가 중간 역할을 해주면 안 되겠냐는 것이었다.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가 멀기에 비밀리에 작전을 성공시킬 확률이 컸다. 내 대답은 물론 긍정적이었다. 얼마 후 체 게바라의 지휘로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조직을 알제리로 맞아들이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모든 혁명조직의 대표들이 알제리로 이동해왔다. 난 체 게바라와 함께 이들을 만나봤다. 혁명조직을 통합한 수뇌부는 수도 알제의 한 언덕에 위치한 커다란 건물에 마련되었다. 오른쪽에는 정원이 있었다. 이곳 수시니 빌라는 나중에 유명한 곳이 됐다. 알제리 독립투쟁 시절에 이곳 빌라는 여러 레지스탕스들이 고문을 받아 목숨을 잃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체 게바라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메드, 큰일이 일어났어. 수시니 빌라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국경지대에서 (체 게바라가 언급한 나라 이름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잡혔어. 혹시 고문을 이기지 못해 비밀 사항을 말할까봐 두렵군.” 체 게바라는 무장 활동을 준비하는 수시니 빌라가 탄로나고 우리가 라틴아메리카에 세운 수출입회사가 실제로 어떠한 곳인지 적들에게 노출될까봐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1965년 6월 19일 알제리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고 체 게바라는 이곳을 떠났다. 체 게바라는 군사 쿠데타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했다. 그는 알제리를 거쳐 볼리비아에서 생을 마쳤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하지만 루뭄바 콩고 초대 총리가 암살된 후 제3세계의 진보 체제, 특히 은크루마, 케이타, 수카르노, 나세르 등이 이끈 진보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이것이 바로 후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혁명가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게바라

» 총살당한 체 게바라의 주검.

1967년 10월 9일이라는 날짜는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그날, 난 외롭게 투옥돼 있었다. 그런데 라디오를 통해 체 게바라가 죽음을 맞았고 적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67년 10월 난카후아주에서 게릴라전은 끝을 맺었다. 게릴라전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옅어진다. 하지만 1967년 10월이라는 날짜에서 멀어질수록 투쟁하고 희망을 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체 게바라에 대한 기억은 오히려 더욱 뚜렷해진다. 체 게바라는 영원히 이들의 일상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투쟁하고 희망을 품는 사람들에게 체 게바라에 관한 것은 가슴속과 머릿속에 남아 있다. 마치 가장 깊고 화려한 곳에 숨겨진 보물처럼 말이다.

 

내가 갇힌 감옥은 수백 명의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지키고 있었다. 감옥과 그 주변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고 있었다. 1972년 5월의 어느 날, 갑자기 감옥 주변이 술렁였다. 몇백m밖에 안 떨어진 지점에 피델이 있었던 것이다. 피델은 근처 농가를 방문하려고 이곳에 온 것이었고 내가 여기 외딴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내가 투옥된 감옥은 언덕 위 외딴 곳이라 피델은 나무 꼭대기 너머 지붕만 겨우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곳이기에 한때 제국주의 국가의 군대가 고문하는 장소로 택하기도 했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기억, 여러 얼굴들이 오랜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비록 체 게바라와 난 헤어졌지만 그때는 체 게바라가 내 머릿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실제로, 나와 내 아내는 체 게바라에 대한 기억을 계속 안고 살았다. 우리가 갇혔던 감옥의 벽에는 체 게바라의 커다란 사진이 언제나 붙어 있었고 체 게바라의 눈빛은 우리의 일상, 기쁨, 고통을 바라봤다. 잡지에서 오린 체 게바라의 작은 사진은 마분지에 붙인 후 비닐로 싸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 늘 갖고 다녔다. 우리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진이었다. 지금 이 사진은 내 고향 마을인 마그니아에 있는 집에 있다. 예전에 부모님이 사셨던 집이었다. 이 집은 유배를 떠나기 전 가장 소중한 기억을 남긴 곳이었다. 바로 이 사진 속에서 체 게바라가 상반신을 벗은 채 누워 있고 그의 몸 위로 무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희망의 빛이었다.

 

글· 아메드 벤 벨라

알제리 초대 대통령. 알제리 국민해방전선(FLN)의 전설적인 지도자로서, 알제리 독립을 이끈 뒤 1962년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1965년 6월 우아리 부메디엔 대령의 쿠데타로 쫓겨나 오랜 수감 생활을 했다.

 

번역· 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