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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전국민 의료보험, 100년 꿈은 이루어지나 (한겨레21 제778호)

by 마리산인1324 2009. 9. 23.

 

<한겨레21> 2009.09.18 제778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5753.html

 

 

 

전국민 의료보험, 100년 꿈은 이루어지나
선진개발국 중 의무보험 없는 유일한 나라…
오바마, 공화당의 왜곡된 비판에 “거짓말”이라고 역공 나서

 

 

미 노동부가 지난 9월4일 내놓은 자료를 보자. 8월 말 현재 미국의 실업률은 9.75%까지 치솟았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이던 1983년 이후 최악의 상황이란다. 8월 한 달에만 모두 21만6천여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일자리를 잃으면, 다른 것도 잃게 된다. 할부금을 내지 못해 차량을 압류당하는 건 예사다. 집세를 내지 못하면 거리로 내몰리고, 과도한 대출을 받아 집을 산 경우라도 은행의 압류를 피해갈 수 없을 게다. 무엇보다 실업은, 더 이상 직장의료보험의 수혜를 받을 수 없음을 뜻한다.

 

» ‘웬만하면 하지 말지~!’ 한 세기 넘도록 지지부진한 의료보험 제도 개혁 문제로 미국이 홍역을 치르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의회 연설을 한 다음날인 9월10일 미 외과의사협회 회원들이 워싱턴 중심가에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AP연합

당뇨병보다 ‘치사율’ 높은 의료보험 미가입

 

‘선진개발국’ 가운데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다. 미 통계청이 내놓은 최신 자료(2007년 8월)를 보면, 미국에서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인구는 약 4600만 명에 이른다. 정부의 의료지원(메디케이드)을 받는 65살 이상 인구를 빼면, 전체 인구의 약 18%가 의료보험 미가입자란 얘기다. 지난해 금융위기로 실업률이 급격히 올라갔으니, 의료보험 미가입자가 늘어났을 것임은 자명하다. 전미의료개혁연합(NCHC)이 펴낸 자료를 보면, 2008~2010년에만 약 700만 명이 의료보험을 떼일 것으로 추정했다.

 

의료보험이 없으면 병원 치료를 받기 어렵다. 미국의 병원 진료비가 워낙 고가인 탓이다. NCHC는 자료에서 “해마다 25~64살 미국인 가운데 의료보험 미가입으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이들이 약 2만2천 명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주요 성인병인 당뇨병(합병증)으로 목숨을 잃는 같은 연령대 미국인이 연간 1만7천 명 수준이라니, 의료보험 미가입은 당뇨병보다 ‘치사율’이 높은 셈이다. 미 의회와 행정부가 얼굴을 바꿀 때마다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워싱턴 정가를 달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가 거의 한 세기 전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추진한 이래 제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수많은 논쟁과 물밑 협상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성과는 전무했다. 민권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60년대 메디케이드와 함께 메디케어(빈민의료보장)가 도입된 게 고작이다. 그만큼 어려웠다. 9월9일 저녁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보험 개혁을 주제로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50분 남짓 연설을 한 것도 이를 반영한다. 미 대통령이 단일 주제로 의회 연설에 나서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제가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한 첫 번째 대통령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혁을 완수해) 이를 추진한 마지막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날 연설은 ‘초당적 합의’를 강조하던 기존의 수세적 태도와는 사뭇 달랐다. 반대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가 하면, 왜곡된 비판에는 “거짓말”이라고 일축했다. 앞서 오바마 대통령은 의회 연설 이틀 전인 9월7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열린 미국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주최 행사에서도 “공화당 쪽의 해법은 뭐냐. 아무것도 없지 않으냐”고 닦아세웠다. 의회가 휴회에 들어간 8월 한 달 미 전역에서 들끓었던 의료보험 개혁 논쟁이 더 이상 왜곡되게 내버려둘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불법이민자 의료보장” “정부 돈으로 낙태” 공격

 

대표적인 왜곡 사례가 이른바 ‘데스패널’(죽음심사위원회) 논란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제시한 개혁 법안에는 ‘사전의료상담’이란 조항이 있다.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이 5년마다 주치의와 향후 어떤 의료지원이 필요한지에 대해 상의하도록 하자는 게 뼈대다. 이미 일부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환자 본인이 원치 않는 과도한 의료행위가 줄면서 의료비용 절감 효과를 보고 있단다. 하지만 일부 공화당 인사들이 이 조항을 집중 비판하고 나서면서 논란이 엉뚱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사악한 짓이다.” 지난 대선에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는 지난 8월 초 < AP통신 > 등과 한 인터뷰에서 “노인들에게 ‘데스패널’에 출석해 자신이 의료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임을 입증이라도 하라는 말이냐”고 매도했다. 때를 같이해 극우 성향의 라디오·케이블TV 토크쇼에서도 ‘데스패널’을 최신 유행어의 반열에 올려놓느라 혈안이 됐다. 일부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 대학살을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라거나 “노인들을 안락사시키겠다는 발상”이라는 극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왜곡된 정보에 바탕한 반발 여론이 커지자, 선거 패배 뒤 숨죽이고 있던 공화당 매파가 기세를 올린 것은 당연했다.

 

민주당 진보파가 의료개혁의 핵심으로 꼽고 있는 ‘공공의료보험’(퍼블릭옵션)에 대한 음해도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거대 민간업체가 장악한 의료보험 시장을 개혁하기 위해 연방정부가 공공의료보험기구를 설립해 경쟁을 유도하겠다는 게 오바마 행정부의 복안이었다. 하지만 공화당 쪽에선 “정부가 의료보험 시장을 통째로 장악하겠다는 말”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불법 이민자에게도 의료보장을 해주고, 연방 예산으로 낙태 시술까지 해주게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소문마저 떠돌았다. 진원지는 ‘데스패널’과 동일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이를 조목조목 비판했는데, 공화당 조 윌슨 하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주)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외마디 소리를 낸 것도 이 대목에서다.

 

“많은 국민이 개혁안에 대해 불안해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국민이 불안해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개혁을 막는 게 유일한 목표인 사람들이 퍼뜨린 거짓 주장 때문이다. …선택과 경쟁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된다. 그것이 시장의 작동 원리다. …불행히도 미 전역 34개 주에서 5개 이하 업체가 전체 의료보험 시장의 75%를 장악하고 있다. 앨라배마주에선 1개 업체가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경쟁이 없다 보니 보험료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의료 서비스의 질은 떨어지기만 한다. 질병이 있는 사람은 아예 보험 가입조차 거부하는 등 보험사의 일방적인 행태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회 연설이란 ‘승부수’에 대한 여론의 평가는 후했다. < CNN방송 >이 이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의료개혁을 지지한다는 여론이 연설 전(53%)보다 14%포인트 높아졌다. 취임 초기인 지난 1월 60%를 상회하던 지지율이 지난 8월 50% 밑으로 떨어지면서 휘청이던 오바마 대통령으로선 힘을 받을 만하다. 공화당이 기세를 올리는 새 ‘퍼블릭옵션’을 두고 강온파로 갈려 내분 양상을 보였던 민주당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시간이다. 올 연말까지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 <뉴욕타임스>가 9월10일치 사설에서 지적한 것처럼 “허울뿐인 ‘초당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지나치게 오랜 시간 논쟁의 주도권을 반대파에게 내준” 건 아닐까?

 

1992년의 아픈 기억

 

지난 1992년 대선에서 12년 만에 백악관을 탈환했던 민주당은 빌 클린턴 행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이 좌절되면서 1994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에 상하 양원을 내준 경험이 있다. 벌써부터 당시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힘쓸 때를 놓치면, 여론은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진보적 시사주간지 <네이션>이 9월10일 인터넷판에서 오바마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 대해 “목소리는 컷지만 손에 든 몽둥이가 너무 작았다”고 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네이션>은 “대통령의 연설을 들어보면, 여전히 좌파와 우파를 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중간 지대’를 찾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꼬집었다. 더 공세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얘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