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립니다. 정 총리 후보자의 제자인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청문회에 앞서 글을 보내왔습니다. <편집자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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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된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3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 유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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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총리지명자께 드립니다.
선생님. 아직 이렇게 불러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께서 어떤 자리에 가시든 제게는 영원히 선생님이시길 바라면서 입에 익은 이 호칭을 사용하겠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셨습니다. 선생님이 차기 총리에 지명되셨다는 소식을 기자들에게 전해 듣고 놀라기도 했고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가까운 제자들과 전혀 상의가 없으셨던 것에 조금 섭섭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고심에 찬 결단을 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선생님께서 총리직을 받아들이시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총리직을 거절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결단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총리 자리가 욕심이 나서 제의를 수락하신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철학도 없이 자리를 탐하여 여기 저기 기웃거리는 사람을 누구보다 싫어하셨던 선생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뭐라 하던 저는 선생님께서 우리 국민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시기 위해 결심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당장 인사청문회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어려운 일도 많으실 텐데, 제가 직접 도와드릴 수는 없는 입장이라서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저로서는 함께 할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을 하셨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대신 이렇게 편지라도 드려서 선생님께 받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합니다.
선생님의 앞길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심정
많은 국민들이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선생님의 앞길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그동안 편향된 정책과 공격적인 국정운영으로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서부터 시작해서 4대강 사업이나 미디어법 등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밀어붙이기를 일삼았으며, 정부에 반대하거나 밉보인 사람들을 탄압했습니다. 촛불시위 참가자, 미네르바, PD수첩, 용산참사, 한예종,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박원순 변호사… 등등이 얼핏 머리에 떠오릅니다. 오죽하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행동하는 양심"을 다시 외치셨겠습니까?
이명박 정부는 부자들이 내는 세금은 깎아주고, 서민을 위한 복지예산은 축소했습니다. 공기업선진화라는 명분 아래 정규직 일자리는 줄이고, 커피인턴·카피인턴만 늘렸습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지원하기는커녕 과장된 '대란설'을 유포하면서 비정규직 오남용 체제를 더욱 확대하고자 했습니다. 4대강 사업 등 토건예산은 급증하는데, 미래를 위한 교육투자에 대한 비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금융위기에 대처하면서 정부는 재정과 발권력을 총동원하여 금융권과 기업에 막대한 지원을 하면서도 필요한 구조조정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경기가 회복되고 있지만, 이렇게 구조조정 없이 돈만 뿌린 후유증은 매우 심각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이명박 정부는 변하겠다고 합니다. 중도실용노선으로 복귀하고 친서민정책을 펴겠다고 합니다. 아직 많은 국민들이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과거와는 다른 조금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세제개편안을 비롯해서 몇 가지 개선된 면들이 보입니다.
선생님께서 총리직 제의를 받게 되신 것도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기에 국민들은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도실용과 친서민이 정치적 수사와 책략에 머물지 않고, 진정으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로 확실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역할을 하시기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이고, 이명박 대통령과 선생님께서 성공하는 길입니다.
선생님은 진정으로 마음이 따뜻한 분, 상처받은 국민 감싸 주시길
물론 대통령제 아래서 총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입니다. 어떤 총리들은 얼굴 마담이라는 혹평까지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분들과는 근본이 다른 사람입니다. 평생 이러저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철학과 소신을 지켜 오신 분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따듯한 분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인간적인 약점이 없을 수야 없겠지만, 우리 사회의 지도층 가운데 어느 누구에 비해보아도 정말 바른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적당히 자리나 지키고 있는 총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총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의 우편향 정책을 중도로 돌리고, 무엇보다 편 가르기 정치를 통해 상처받은 국민들을 감싸고 사회를 통합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여건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대화해보니 경제철학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이명박 정부가 추진해온 경제정책과 선생님의 경제철학이 크게 어긋난다는 것은 선생님 스스로도 여러 번 밝히신 바이니, 두 분 중에 한 분은 철학이 바뀌신 것입니다.
군사독재 아래서 교수직을 걸고 몇 번이나 서명운동을 주도한 선생님입니다. 곡학아세와는 거리가 먼 선생님입니다. 중도실용·친서민 해보니 지지율이 올라간다고 좋아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상인적 감각이 경제철학의 변화까지 유도한 것으로 믿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선생님께서 정부의 변화를 이끌 나가시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마땅하고, 또 그렇게 하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꼭 하셔야할 일 세가지와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 한가지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꼭 하실 일들이 있습니다.
취임하시게 되면 가장 먼저 용산참사 현장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사건이 발생한지 7개월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망자들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다섯 구의 시신이 영안실 냉동고에 있습니다. 이들의 원혼을 달래지 않고서 어찌 국민통합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용산 참사 유족들뿐만 아니라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국무총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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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
ⓒ 남소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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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사업을 재검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업에 대한 대통령의 집착을 고려할 때 백지화는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총리 지명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4대강 사업이 "친환경적이고 수변 지역을 쾌적한 중소도시로 만든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현재의 계획이 친환경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나아가 막대한 국고의 낭비를 초래할 것으로 봅니다. 진정으로 친환경적이고 경제적 효율성도 있는 사업으로 축소 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금산분리 완화를 막아야 합니다. 재벌이 은행을 지배하게 되면 어떤 재앙이 닥치게 될 지는 저보다도 선생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작년까지 IMF의 수석경제학자를 지냈던 사이먼 존슨 MIT 교수는 미국의 금융위기가 금융엘리트들이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구축하고 이를 이용해서 무한정한 욕심을 부린 결과라고 합니다. 이미 법 위에서 노는 한국의 재벌들이 은행을 지배하게 된다면 벌어질 일들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더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총리직 수락을 대권 도전의 발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대권 생각일랑 아예 마십시오. 선생님께서 이미 정답을 얘기했습니다.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다. 우선 대통령을 보필해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고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다." 그 마음 그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진정성이 새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한 마디가 제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위 운동권 학생이었던 저에게 생각을 바꾸라거나 데모하지 말라는 말씀은 한마디도 안 하시고, 학생운동은 열심히 하더라도 성적관리는 좀 해 놓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야단치면서 하신 말씀이면 듣지 않았을 충고를 격려와 지원을 보내면서 하신 말씀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제적과 투옥과 강제징집 등 파란만장한 대학시절을 마친 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생 고생하며 사는 옛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덕분에 나름대로 역할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의 장황한 편지가 선생님의 앞길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존경받는 총리가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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