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umber 1853 Socialist Worker(영국) May 31, 2003
자본주의 이후의 삶
더 나은 세상을 운영하는 데 우리 모두가 어떻게 참여할 수 있을까?
Znet의 마이클 알버트(Michael Albert)가 《사회주의 노동자》의 새 연재물 <자본주의 이후의 삶 Life After Capitalism>의 첫번째 기고자가 되어주었다. 그는 반자본주의 운동 진영의 저명 인사로 《페어콘: 자본주의 이후의 삶 Parecon: Life After Capitalism》의 저자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에 대한 당신 비판의 주안점은 무엇인가?
자본주의는 무자비한 부동의(不同意) 속에 자행되는 탐욕의 강화이다. 자본주의는 생태적 재앙을 수반하는 구속받지 않는 축적이다. 자본주의는 품위와 성실함을 부정하는 소외된 생산이자 소비이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연대와 희망을 말살하는 반사회적 경쟁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물의 사적 소유, 교섭력과 이윤 추구에 대한 보상, 위계적 노동 분할, 시장 분배를 내재화한다. 이러한 제도는 연대가 아니라 사회 파괴를, 공평함이 아니라 빈부 격차를, 다양성이 아니라 소외와 획일화를, 자치가 아니라 권위적 기업 독재를 낳는다.
페어콘의 중심 사상은 무엇인가?
페어콘, 다시 말해 참여 경제(Participatory Economics)는 경제의 결정적 제도들이 생산·소비·분배를 용이하게 해 필요를 만족시키고 잠재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경제는 자원·에너지·재능,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특질들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경제는 연대·평등·다양성·자치를 확대해야 한다.
페어콘은 자치의 원리에 기반해 의사를 결정하는 노동자와 소비자의 의회,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상, 안정된 직업, 참여적 계획을 지지한다. 달리 얘기해 보자. 페어콘은 인류를 적대하는 계급으로 분열시키는 조건을 제거한다. 페어콘에는 지배하는 소수와 복종해야만 하는 다수, 번영하는 소수와 멸망해 가는 다수가 없다.
아울러 페어콘은, 계급 분열을 종식하려면 우리가 소수 자본가 계급이 전유하고 있는 생산물 소유권과 이윤을 박탈하는 경제적 조치뿐만 아니라 좀더 크지만 여전히 소수에 불과한 “조정자 계급(coordinator class)”이 독점하고 있는 의사 결정 수단에 대한 막강한 장악력을 제거하는 조치도 취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페어콘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비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답하겠는가?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것을 두고 유토피아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무가 한 그루 있다고 치자. 그 나무에게 날아보라고 요구하거나, 사랑과 애정으로 우리를 감싸안아 달라고 한다면 그건 분명 유토피아적이다.
똑같은 의미에서, 아니 좀더 관련이 있다... 사람에게 자본가로 행세하면서 동시에 이윤을 추구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그건 유토피아적일 것이다. 시장에 연대감을 창출하라거나, 중앙집중적 계획 또는 법인 기업의 중심 세력에게 자치를 시행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독재자에게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유토피아적이다. 평등과 정의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시장과 노동의 분열을 용인한다면 그건 유토피아적이다.
그러나 나무에게 날거나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짓과 비교해 볼 때, 나의 가치 기준에 더 잘 부합하는 나무와 관련된 방법을 찾는 행위에서 유토피아적인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의 가치 기준에 더 잘 부합하게 생산과 소비와 분배를 조직하려고 노력하는 행위는 유토피아적인 게 아니다.
기성의 억압 체제를 대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 행위는 전 역사를 통해 언제나 반동의 보루였다. 노예에 관한 노예 소유주들의 웅변에서, 왕족의 지배에 관한 왕과 군주들의 말에서, 여성에게 투표권과 직업을 줘서는 안 된다는 (많은) 남성들의 주장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또는 미국의 짐 크로(Jim Crow) 인종주의와 관련한 (많은) 백인들의 담론에서 대안은 없었다.
이런 사악한 관계에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합리화일 뿐이었다.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초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유토피아적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당신은 그가 웃고 있는지 절규하고 있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게 대안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면 절규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에 우리가 노예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리라. 대중에게 특히 노예들에게 그렇게 가혹한 소식을 전달한 사람이 진정으로 인간성을 염려했다면 분명 이런 사태를 고소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여 경제를 쟁취하기 위한 당신의 전략은 무엇인가?
민중의 현실의 삶을 개선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향후에도 진보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는 변화를 쟁취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지금 비개량주의적 개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급진적인 비판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전망을 제시하는 사람도 많아져야 하며, 이를 추구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도 많아져야 한다.
바로 여기서 힘을 모아 우리의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집중함으로써 현실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조직을 건설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런 조직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에 부응하여 새로운 구조를 발전시키고 배우며 미래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조직은 우리가 원하는 사회로 녹아들어가야 한다. 미래 사회의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참여 경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한가지 교훈은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할 계급이 둘이 아니라 셋이라는 점이다. 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내가 조정자 계급이라고 부르는 존재 말이다. 따라서 염두해야 할 경제 제도가 두개--자본주의와 좀더 나은 무엇, 곧 소위 사회주의--만 있는 게 아니다.
더 자세히 말해보자. 우선 자본주의가 있다. 또, 시장 또는 중앙집중적 계획을 기업 법인 및 공영·국영 소유권과 결합하는 체제도 있다. 사람들은 보통 사회주의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런 체제를 조정주의(coordinatorism)라고 부르겠다. 이 체제에서는 내가 조정자 계급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급이 없는 체제가 있다. 이 사회에서는 계급 분열과 계급 지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당한 영향력을 발휘해 자신의 노동과 소비를 통제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참여 경제(participatory economics)라고 부르겠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며 사회주의라는 미명하에 수행된 부끄러운 작태 역시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과 중앙집중적 계획, 노동 분열, 권력과/또는 생산에 대한 보상, 주요 직책을 독점하고 있는 자들의 계급 지배 등등을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함정을 피하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회 구조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나는 이런 통찰이 현재 우리가 쟁취하고자 노력하는 경제적 이익--더 많은 보수, 더 짧은 노동시간, 더 나은 생활조건, 상이한 투자 형태, 특히 경제 권력의 재분배--은 물론 우리의 조직화 방법과 관련해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런 통찰은 새로운 사회 경제의 기반을 창출하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를 조직하는 방법과 관련해서도 중요하다.
우리의 노력 속에 계급 분열, 보상과 의사 결정에서의 계급 차별적 태도, 우리 자신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의 계급 차별적(또는 권위적) 구조가 끼어들도록 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의 노력에는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의 논리가 구현되어야 한다. 참여 경제를 지지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안정된 일자리, 현재의 우리 노력 속에서 자치적 의사 결정 방법과 구조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비개량주의적 개혁을 쟁취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체현하고 또 전진하는 조직을 창출해야 한다. 특히 (예를 들어 현재 아르헨티나에서처럼) 노동자 소비자 회의(worker and consumer councils)가 필요하다. 우리는 안정된 일자리와 자치의 사상을 실행하고 확산시켜야 한다. 이것은 사회 진보의 형태를 띠어야 하고, 우리 자신의 제도 속에서 확대되고 섬세하게 고안되어 말 그대로 우리가 기성의 경제 구조를 새롭고 진보적인 경제 구조로 대체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우리가 지금 토론하고 있는 바, 경제가 중요하지만 그건 자체만으로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결론을 맺고 싶다.
나는 우리에게 경제와 관련한 비전뿐만이 아니라 친족 관계(가족, 양육, 섹슈얼리티, 사회화 따위), 문화(인종, 민족성, 영성 따위), 국가 조직(입법, 사법, 행정 따위)과 관련한 비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경제뿐만 아니라 이런 분야에서도 제도를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투쟁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투쟁이 왜 필요한가? 희망을 만들고 고무하기 위해서다. 명확한 지향을 갖기 위해서다. 우리가 거부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획정하기 위해서다. 우리 스스로를 조직해, 우리가 결코 참을 수 없는 또다른 억압적 체제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사회에 새로운 기반을 건설하기 위해서이다.
☞ Znet은 반자본주의 운동 진영의 귀중한 자산이다. 이 무료 웹사이트를 방문하면 반자본주의·반전 운동 진영에서 활동하는 주요 인사들의 논설과 연설, 인터뷰를 읽을 수 있다.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로버트 피스크(Robert Fisk),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등이 여기 참여하고 있다. 사이트는 정기적으로 갱신된다.
www.zmag.org/weluser.htm
★政明爲 옮김/sumbol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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