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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 (Vipassanaa Meditation)

― 통찰 수행에 대한 가르침(Lectures on Insight Meditation) ―


사야도 우 자나카 (Sayadaw U Janaka)  스님(1992)

正圓 옮김(1997)


Chanmyay Yeiktha Meditation Centre

55A Kaba Aye Pagoda Rd,

Mayangon P.O.

Yangon 11061

Myanmar



제1장  바른 이해(正見)를 통한 행복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행복과 평화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주는 참된 길을 찾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이 행복을 얻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 가운데 하나가 불교인데, 불교는 사람들을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해줍니다.

 

괴로움의 원인


붓다는 괴로움(dukkha)의 원인을 발견했습니다. 그 분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것은 조건에 의존해서 발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원인 없이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붓다가 괴로움을 없애버리려고 했을 때, 그는 그 원인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원인이 제거되었을 때, 어떤 결과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일체지자(一切智者)*이신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는 괴로움의 원인은 갈애(渴愛 또는 愛着; ta.nhaa)임을 발견했습니다.

 

<*역주 ; 일체지(一切智)는 남방상좌부에서 말하는, 성문(聲聞) 제자들은 갖추지 못한, 붓다만이 지닌 여섯 가지 지혜(六不共智; cha asaadhaara.na ~naa.na)의 하나입니다. 그 여섯 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중생들의 다섯 가지 기능(五根; 信?精進?念?定?慧)에 대한 앎 indriyaparopariyatte ~naa.na.m,

② 중생들의 개별적인 성향과 잠재된 번뇌에 대한 앎 sattaana.m aasayaanusaye ~naa.na.m,

③ 몸을 둘로 변화시키는 앎(雙身變智; yamakapaa.tihiire ~naa.na.m,

④ 대비정(大悲定)의 앎 mahaakaru.naa- samaapattiyaa ~naa.na.m,

⑤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naa.na.m, ⑥ 무장애지(無障碍智) anaavara.na~naa.na.m

『無碍解道』Pa.tisambhidamagga,「大品」의「智論」Mahaavagga ~naa.na-kathaa, PSM I, p.3, p.158 ff.참조.>

 

탕하(ta.nhaa)라는 말의 의미는 탐욕, 욕정, 욕망, 갈망 등입니다. 불교 학자들은 '탕하'를 갈애(渴愛; attachment)로 번역했으며, 이 말은 모든 형태의 욕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탕하'에 대해서 ‘갈애’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탕하 또는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탕하가 있을 때, 그곳에는 두카(괴로움)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탕하를 없애버릴 수 있을 때, 그는 틀림없이 괴로움을 제거합니다. 이 탕하도 또한 어떤 원인에 의존해서 생겨납니다. 원인이 없다면, 탕하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탕하는 하나의 정신적인 상태이며, 정신의 조건 지워져 있는 한 과정입니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갈애(탕하)의 원인은 잘못된 견해(邪見)임을 발견했습니다. 잘못된 견해란, 영혼, 자아, '나', '너', 인격 또는 개체 등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며,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 또는 아견(我見; atta-di.t.thi)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신견 또는 아견이, 괴로움을 야기시키는 탕하의 원인입니다. 그러면 이 잘못된 견해(유신견 또는 아견)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정신(名; naama)과 육체(色; ruupa)의 자연스런 흐름(과정)에 대한 무지(無知; 팔리어로 moha[癡] 또는 avijjaa[無明])가 영혼이나 자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의 원인임을 지적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과정을 그 진정한 본질의 측면에서 자각하거나(realization) 바르게 이해(正見)함으로써, 우리는 무지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緣起法)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무지는 원인이며, 잘못된 견해(유신견 또는 아견)는 그 결과입니다. 잘못된 견해는 원인이며, 갈애는 그 결과입니다. 갈애는 원인이며, 괴로움은 그 결과입니다.


비로소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과정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 바른 이해에 의해 무지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무지가 제거될 때, 영혼, 자아, 사람, 존재에 대한 어떠한 잘못된 견해도 없어질 것입니다. 이 잘못된 견해가 깨져버렸을 때, 그 어떠한 갈애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갈애가 없어져버렸을 때, 그 어떠한 괴로움도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종류의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즉 괴로움의 소멸(滅諦; nirodha-sacca)을 이룬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의 원인


마음과 몸의 과정에 대한 무지로 인해서, 어떻게 영혼 또는 자아, 인간 또는 존재, '나' 또는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가 생겨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 잘못된 견해 때문에 갈애가 생겨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검토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마음과 몸의) 두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마음과 몸)을 어떤 사람, 어떤 존재, 영혼, 자아라고 간주합니다. 그때, 그 사람, 그 존재, '나', '너'는 부자가 되거나, 왕, 여왕, 대통령, 수상, 백만장자가 되려는 욕망을 지니게 됩니다. 여왕이나 대통령 등이 되려고 하는 이 욕망이 갈애입니다. 그것(갈애)은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생겨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욕망이나 갈애를 뿌리뽑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원인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원인이란 무엇입니까 ? 욕망 또는 갈애의 원인은, 이미 전에 설명한 것과 같이,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나 잘못된 개념입니다. 따라서, 잘못된 견해가 깨져버렸을 때, 부자나 왕, 대통령 등이 되려고 하는, 그 어떠한 갈애도 생겨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무엇인가 되려고 하며, 얻으려고 하고, 무엇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은,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에 대한 잘못된 견해 또는 잘못된 개념에서 생겨납니다. 이러한 욕망이나 갈애가 우리의 마음속에 피어났을 때, 그로 인해 온갖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생명이 없는 사물[無情物]인 집에 집착할 때, 우리는 집에 대해 걱정을 하게 됩니다. 집에 불이라도 나게 되면, 우리는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슬픔은 주된 괴로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괴로움은 집에 대한 우리의 갈애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친척이나 친구, 아이들, 부모에 대해 갈애를 가지고 있을 때, 이 갈애 때문에도 또한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집착하고 있을 때, 우리는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 문제 등에 대해서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의 아이들이 시험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걱정을 하게 되고, 유감스러워 하며, 슬퍼하게 됩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정신적인 괴로움 또는 정신적인 두카(dukkha)이며, 우리의 아이들에 대한 갈애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갈애(ta.nhaa)는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갈애는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 육체적 정신적인 과정을, 사람이나 존재, 영혼이나 자아, '나'와 '너'라고 간주하는 잘못된 개념에서 갈애는 생겨납니다. 인격이나 개체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파괴되어 버릴 때, 어떠한 갈애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갈애가 없을 때, 어떤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  


이 (마음과 몸의) 두 가지 과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챙김(알아차림; being mindful)에 의해서, 그것의 내재적인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할 때, 그것에 대해 분석함 없이, 논리적으로 사고함 없이, 철학적으로 생각함 없이, 선입견 없이, 그것이 실제로 발생하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려야(마음 챙겨야)만 합니다. 우리는 매우 주의 깊어야만 하고, 있는 그대로 그 대상에 대해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계를 바라봅시다. 아주 주의 깊고 세심하게 시계를 관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시계에 대해서 아주 주의 깊고 밀착해서 관찰했을 때, 우리는 그 시계의 상표, 디자인, 모양새를 봅니다. (이때) 우리는, 이것은 시계이며, 상표 이름은 세이코이고, 세계 시간표가 있다는 등등에 대해서 이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또는 우리의 관찰이 "나는 이전에 이와 같은 시계를 본적이 있어. 상표 이름은 오메가였지"라는 선입견적인 관념과 결합되어 있다면, 시계를 보는 순간, 우리는 오메가라고 간주해 버리게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우리가 그 시계를 주의 깊게, 밀착해서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계를 볼 때, 선입견적인 관념을 사용하곤 했다면, 선입견적인 관념 때문에 우리는 그 시계에 대해서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만일 선입견적인 관념을 한 쪽에 놓아두고 단지 그것을 주의 깊게, 밀착해서 관찰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세이코이고, 일제이며, 또한 세계 시간표가 붙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시계를 관찰할 때, "오메가"라는 선입견적인 관념을 한 쪽에 놓아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마음-몸의 과정들을 그 진정한 본질에서, 또는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분석해서도,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굴려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이리 저리 따져보아서도(reason), 안되며, 어떠한 지적인 지식도, 어떤 선입견적인 관념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한 쪽에 놓아두고, 있는 그대로의 마음-몸에서 현재 무엇이 발생하고 있는가에 대해 단지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몸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몸에서 뜨거움을 느낄 때, 우리는 뜨거움을 뜨거운 느낌으로 알아차려야(note) 합니다. 몸에서 차가움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차가운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통증을 느낄 때, 그것을 통증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행복을 느낄 때, 그것을 행복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분노를 느낄 때, 그것을 분노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비탄을 느낄 때, 그것을 비탄이라고 마음 챙겨야 (알아차려야) 합니다. 슬픔이나 실망을 느낄 때, 우리는 슬픔과 실망이라는 감정의 상태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be aware) 합니다.


하나 하나의 그리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과정들을 그것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대로 관찰해야만 하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참된 본질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바른 이해에 의해 무지는 사라지게 됩니다. 무지가 제거되면, 우리는 마음-몸의 과정을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라고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마음-몸의 과정을 단순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파악(take)하게 된다면, 어떠한 갈애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갈애가 깨져버릴 대, 우리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며, 괴로움의 소멸(涅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참된 본질에서의 마음-몸에 대한 마음챙김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지자이신 붓다가 "네 가지 마음챙김(四念處)"에 대한 가르침에서 설하신 길입니다.


이 경전에서,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정신과 육체의 현상에 대해, 실제로 있는 그대로 마음 챙기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 마음 챙겨야 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음의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육체적인 과정에 대한 마음챙김 (kaayaanupassanaa satipa.t.thaana)

2. 느낌 또는 감각에 대한 마음챙김 (vedanaanupassanaa satipa.t.thaana)

3. 마음(의식)에 대한 마음챙김 (cittaanupassanaa satipa.t.thaana)

4. 마음의 현상들에 대한 마음챙김 (dhammaanupassanaa satipa.t.thaana)


선택 없는 알아차림  


우리의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서 마음 챙길 때, 우리는 수행의 대상으로 어떤 특정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과정을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이 스스로 (마음챙김의) 대상을 고르게 될 것입니다. 만일 수행(명상)의 대상으로 어떤 특정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과정을 선택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 대상에 애착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행하고 있는 동안에, '알아차리는 마음(noting mind)'이나 '관찰하는 마음(observing mind)'은 스스로 대상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 대상들은) 아마도 성공했을 때의 행복감이나, 고통스런 감각이나 또는 (호흡에 따라 일어나는) 복부의 움직임이 될 것입니다.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려고 하더라도, (몸의 어떤 부위의) 통증이 보다 뚜렷하고, 보다 두드러지다면, 마음은 그곳(복부의 움직임)에 머무르지 않게 됩니다. '알아차리는 마음(noting mind)'은 통증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관찰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보다 뚜렷한 느낌에 마음은 아주 강하게 쏠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을 선택할 필요가 없고, 단지 마음이 선택한 대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주의 깊고 밀착된 알아차림을 통해서 통증이 사라졌다면, 그 때 마음은 가장 두드러진 다른 대상을 선택할 것입니다. 만일 등의 가려운 감각이 복부의 움직임보다도 더욱 뚜렷하거나 더욱 분명하다면, 마음은 가려운 감각으로 달려가서 그것을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 하고 관찰하게 될 것입니다. 강한 마음챙김(strong mindfulness)과 깊은 마음집중(deep concentration)에 의해서 가려운 감각이 사라졌을 때, 마음은 (예컨대) 복부의 움직임을 그 대상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대상들보다도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복감이 복부의 움직임보다도 더욱 두드러지다면, 마음은 행복감을 그 대상으로 선택해서 그것을 '행복, 행복, 행복'하고 관찰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 또는 마음챙김 수행의 원리(principle)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인 현상들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지켜보고, 알아차리는[마음 챙기는] 것입니다. 이 마음챙김 수행은 아주 단순하고 쉬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적인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는데 있어서도 아주 효과적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먹는 행위에 수반되는 모든 행위, 모든 동작에 대해 알아차려야 합니다. 팔을 뻗을 때, 우리는 팔을 뻗는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손이 숟가락이나 밥에 닿을 때, 닿는 감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숟가락을 집을 때, 집는 감각을 관찰해야만 합니다. 숟가락이 카레 속으로 들어갈 때, 들어가는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 숟가락으로 카레를 떴을 때, 그 동작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먹는 행위에 수반되는, 하나 하나의 그리고 모든 동작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체적인 과정이 완전히 자각되어야만 잘못된 견해의 원인인 무지가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목욕을 하는 동안에도, 사무실이나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그에 수반되는 모든 동작이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집중수행기간(retreat) 동안, 걷는 수행을 할 때, 발을 드는 움직임,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내려놓는 움직임 등의 발의 움직임을, 밀착해서 정확하게, 실제로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이름 붙이기


어떤 대상에 대해서 마음 챙길 때, 명칭이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걷기 위해서 발을 들어올릴 때, 우리는 그 동작에 '들어올림'이라고 명칭을 붙여야 합니다. 발을 앞으로 밀 때에는 우리는 '나아감'이라고 명칭을 붙여야 합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음'하고 명칭을 붙여야 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또는 '듦, 나아감, 놓음'],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명칭을 붙여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명칭을 붙이거나 이름을 붙임에 의해서 마음은 (마음챙김) 수행의 대상에 밀착해서, 정확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됩니다.  (명칭을 붙이는 일은)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수행의 대상에 집중하는(focus) 데에도 또한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수행의 대상에 명칭이나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는 수행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명칭을 붙이는) 대신에 그들은 단지 대상을 관찰하기만 합니다. 그들은 단지 발의 움직임을, 발을 들어올리는 동작의 바로 처음 순간부터 발을 내려놓는 동작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지 관찰하기만 합니다. 마음은, 생각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주 밀착해서 발의 움직임을 따라잡아야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하면, 마음집중을 이전보다 더욱 깊게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때에는 마음은 아주 자주 헤매이곤 합니다. 마음이 헤맬 때마다, 여러분은 그 마음을 따라잡아 관찰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집안 일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면, 그 생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마음속으로 '생각함, 생각함, 생각함'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에 의해서) 처음의 (집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게 되면, 다시 걷는 동작으로 돌아와서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하고 보통 때처럼 알아차리기를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 선정[마음의 고요;止]과 지혜[통찰; 觀]


이제 우리는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사마타란, 마음집중, 평온, 고요함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깊게 집중되었을 때, 마음은 평온해지고 고요해집니다. 사마타 수행의 목적은, 하나의 대상에 깊은 마음의 집중을 얻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의 결과는 안지정(安止定; appanaa-samaadhi, jhaana) 또는 근접정(近接定; upacaaraa-samaadhi)*과 같은 깊은 마음집중(삼매 또는 定)을 얻는 것입니다.


<역주 : 안지정(安止定; appanaa-samaadhi, jhaana)이란 초선(初禪)에서 사선(四禪)에 이르는 색계정(色界定)과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에서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는 무색계정(無色界定)에 완전히 도달해 있는 상태를 말하며, 근접정(近接定; upacaaraa-samaadhi)이란 이러한 안지정에 도달하려고 접근해 가는 선정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이 수행의 대상에 깊게 집중되어 있을 때, 욕정, 탐욕, 분노, 욕망, 자만, 무지 등과 같은 모든 번뇌들은, 대상에 몰입해 있는 마음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마음이 모든 번뇌나 덮개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는 평온함, 고요함, 행복, 평화로움을 느낀다. 따라서 사마타 수행의 결과는, 안지정(安止定) 또는 근접정(近接定)과 같은 깊은 마음집중(삼매 또는 定)을 얻음을 통한 어느 정도의 행복감입니다. 하지만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마타를 닦는 수행자는 수행의 대상으로서 어떤 장치 또는 [둥근 원판 모양의] 카시나(kasina)*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역주 : 카시나(kasina)라는 말은 '전체', '전부', '모든'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의 k.rt.sna와 연관된 용어라는 설이 있으며, 한문으로는 편(遍)이라고 번역됩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삼은 '카시나'를 의식에 가득하게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즉, 청색의 카시나를 대상으로 삼을 경우, 청색이 칠해진 둥근 원판을 만들어 놓고, 처음에는 이 원판을 보면서 의식을 집중시키면서, 눈을 감아도 의식 내에 청색의 원판이 떠오르도록 합니다. 이렇게 청색으로 의식을 가득 채워 가며 마음을 집중시켜나가 초선에서 사선에 이르기까지 수행을 해나갑니다.


다른 수행법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카시나를 수행 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혼자서 책만을 보고 시도하지 말고 반드시 수행지도를 잘 해줄 스승의 지도하에서 해야합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경전(AN I, p.41, AN V, p.46ff, DN III, p.68, MN II, p.14 etc)과 『청정도론』에서는 10가지의 카시나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경전에 제시되어 있는 카시나는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청황적백(靑黃赤白) 공간(空間; aakaasa) 의식(意識; vi~n~naa.na)의 10가지이며, 『청정도론』에서는 의식과 공간 대신에 한정공간(限定空間; paricchinna-aakaasa)과 광명(光明; aaloka)이 제시되어 있습니다.(Vism 5장 참조) >

 

예를 들면, {청정도론}에 따르면, 어떤 색깔(예컨대 붉은 색)의 카시나를 만들기 위해서, 그는 방바닥에서 60cm 정도의 높이의 벽에, 붉은 색 원반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접시 크기 만한 붉은 원반을 만들되, 색깔은, 전체가 고르고 부드러운, 순수한 붉은 색이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장치가 만들어지면, 그는 벽에서 60cm 정도 떨어진 방바닥에 앉아서, 붉은 원반을 보면서 마음을 그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이 헤매이게 되면, 헤매는 마음을 따라가서는 안되며, 마음을 수행의 대상 즉, 붉은 원반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붉은 원반에 마음을 집중시켜, '붉음, 붉음, 붉음' 하면서 그것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것이 간략한 사마타 수행의 방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경우에, 그 목적은, 정신과 육체의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올바르게 이해함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을 얻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마음집중*을 필요로 합니다.

 

<역주 :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에서 필요한 마음집중(定; jhaana, 또는 三昧; samaadhi)은 순간적인 마음집중(刹那三昧; khanika-samaadhi)입니다. 순간적인 마음집중이란 관찰 대상에 한 순간 한 순간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있을 때 생기는 마음집중으로, 이러한 마음집중이 생길 때, 다섯 가지 덮개(五蓋)가 극복되면서 위빠사나 수행이 본 궤도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순간적인 마음집중을 바탕으로 한 위빠사나 수행을 '순수 위빠사나'(suddha-vipassanaa)라고 하며, 이렇게 수행하는 수행자를 '위빠사나를 수행법으로 하는 자'(vipassanaa-yaanika)라고 합니다.


'순수 위빠사나'와는 달리 위빠사나 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사선(四禪)이나 팔선(八禪)을 먼저 닦는 방법이 있습니다. 사선이나 팔선을 먼저 닦아서 다섯 가지 덮개를 마음집중의 힘으로 극복한 후, 선정 수행에서 경험한 정신적인 상태를 관찰의 대상으로 하며 위빠사나를 닦습니다. 이렇게 사선 등의 마음집중 수행을 바탕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를 '마음집중을 수행법을 하는 자'(samatha -yaanika)라고 합니다.


'위빠사나를 수행법으로 하는 자'와 '마음집중을 수행법을 하는 자' 양자의 차이는 마음집중의 종류에서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불교 수행의 구조인 '마음집중(定)을 바탕으로 한 지혜(慧)'의 향상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양자 모두 붓다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경전의 가르침을 통해서 확인됩니다. >

 

이 마음집중은, 마음-몸에 대한 지속적이며, 끊어짐 없는 마음챙김을 통해서 얻어집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에는 다양한 대상이 있습니다. 행복감도 수행의 대상이며, 분노, 슬픔, 고통스런 감각, 뻗뻗함, 저림 등도 수행의 대상입니다. 어떤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도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과 결과는, 그 방법들이 다르듯이 서로 다릅니다.


앞에서 설명했던 내용으로 되돌아 가봅시다. 걸을 때, 우리는 들어올림, 나아감, 내려놓음 등의 발의 움직임을 관찰합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우리의 마음은 다리(의 움직임)에 제대로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헤맬 때, 우리는 그 마음을 따라잡아서 헤매는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합니다. 헤매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에 라야, 우리는 평상시처럼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나갑니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잘 집중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것은 들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발의 움직임이지, 발의 겉모양이나 걷는 동안의 몸의 모습이어서는 안됩니다. 발을 들어올릴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들어올림'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나아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발을 내려놓을 때, 마음은 그 동작을 '내려놓음'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동작들을 자연스런 움직임의 과정이라고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또한 마음이 그 동작들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게 됩니다. 들어올리는 움직임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또 다른 하나의 과정입니다. 나아가는 움직임은 하나의 과정이며, 그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은 또 다른 하나의 과정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정신적 현상과 육체적 현상의 두 과정을 완전하게 자각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과정을 단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자연스런 과정이라고 올바르게 이해합니다. 우리는 그 과정들을 사람이니 존재니, '나'니, '너'니 하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때 인격, 개체, 영혼 또는 자아라고 하는 그 어떠한 잘못된 개념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이 깨져버릴 때,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어떠한 애착이나 욕망도 생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애착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실제로 갈애의 결과인 어떠한 괴로움도 생기지 않습니다. 발을 들어올리고, 나아가고, 내려놓는 움직임의 과정을 단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경험하는 순간, 우리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습니다.


우리가 정진해 나아가면, 마음챙김은 더욱 순일해지고, 끊어지지 않고, 강해집니다. 마음챙김이 순일해지고, 강해지면, 마음집중은 더욱 깊어지고 강력해집니다. 마음집중이 깊어지고 강력해질 때, 정신적 과정과 육체적 과정에 대한 우리의 자각 또는 꿰뚫어 보는 지혜는 한층 명료해집니다. 이때가 되면, 들어올리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series)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나아가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되며, 내려놓는 움직임의 많은 단계들이 순차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험을 하는 동안에, (움직이는) 과정의 그 어떠한 부분들도 지속적이거나 영속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움직임의 모든 과정은 변하기(anicca; 無常) 쉽습니다. 즉, 아주 빠르게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것들은 달가운(good) 과정이 아니라, 그리 달갑지 않은(bad) 과정들입니다. 이때,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인 괴로움(dukkha; 苦)을 자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육체적인 움직임의 과정의 무상(無常)하고 고(苦)인 본질을 자각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영속적인 실체 즉, 사람, 존재, 영혼 또는 자아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 정신적 과정의 본질로, 무아(anatta; 無我)이며, 영혼이 없음(no-soul)이며, 자아가 없음(no-self)이며, 에고가 없음(no-ego)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無常; anicca), 고(苦; dukkha), 무영혼 또는 무아(無我; anatta)를 깨닫습니다.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자각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자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한 위빠사나지(知) 즉, 꿰뚫어보는 앎(vipassanaa -~naana; insight knowledge)의 모든 단계들을 순차적으로 밟아 나아갑니다. 위빠사나지(知)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면, 그는 첫 번째도(道)인 수타원도(sotaapatti-magga)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첫 번째 도를 얻은 순간, 수행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즉,

괴로움의 진리(苦諦; Dukkha-sacca),

괴로움의 원인의 진리(集諦; Samudaya-sacca),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諦; Nirodha-sacca),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진리(道諦; Magga-sacca)


수행자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정신적 육체적 현상을 깨달을 때, 이는 곧, 그가 괴로움의 진리를 깨달았음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가 제거되어, 수행자는 괴로움이 소멸해버린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正道)


(깨달음을 얻은) 그 순간, 그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완전하게 갖추게 됩니다.


1. 바른 이해 (正見 ; Sammaa-di.t.thi)

2. 바른 사유 (正思 ; Sammaa-sankappa)

3. 바른 말   (正語 ; Sammaa-vaacaa)

4. 바른 행위 (正業 ; Sammaa-kammanta)

5. 바른 생계 (正命 ; Sammaa-aajiiva)

6. 바른 노력 (正精進 ; Sammaa-vaayaama)

7. 바른 마음챙김 (正念 ; Sammaa-sati)

8. 바른 마음집중 (正定 ; Sammaa-samaadhi)


수행자가, 정신적 육체적 과정이라는 수행의 대상에 대해서 폭넓게(large extent)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을 때부터, (비록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이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닦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시킬 때, 그는 마음으로 노력을 기우려야만 합니다. 이 마음의 노력이 '바른 노력 (正精進; Sammaa-vaayaama)'입니다. 이 마음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는 마음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되고 따라서 그는 발의 움직임에 제대로 마음을 챙길 수 있게 됩니다. 이 마음챙김이 '바른 마음챙김 (正念; Sammaa-sati)'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챙김에 의해서,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한 바른 이해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발의 움직임에 집중해있을 때, 마음은 한 순간 동안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된다(刹那三昧). 하지만 마음집중이 지속되어 끊어짐 없고, 더욱 강해지고, 더욱 깊어지게 되면, 그 마음집중이 '바른 마음집중 (正定; Sammaa-samaadhi)'입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이 헤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수행자가 많은 노력을 기우리더라도, 처음에는 마음이 발의 움직임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때, 발의 움직임에 대한 마음챙김과 함께 생겨나는 하나의 마음 상태가 있어서, 마음을 수행의 대상인 발의 움직임으로 인도합니다. 수행의 대상으로 마음을 인도하는 이 마음 상태가 '바른 사유 (正思; Sammaa-sankappa)'입니다. '바른 사유'의 기능은 수행의 대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수행의 대상인 발의 움직임에 마음은 잘 집중하게 됩니다. 그때, 마음은 육체적인 움직임의 과정의 참된 본질로 꿰뚫고 들어가게 되어, 자연스런 과정으로 그 움직임을 알게 됩니다. 자연스런 과정으로서의 (발의) 움직임에 대한 이 앎 또는 이 이해가 '바른 이해 (正見; Sammaa-di.t.thi)'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길 때,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의 다섯 가지 정신적인 요소를 닦아온 것이 됩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바른 노력 (正精進 ; Sammaa-vaayaama)

2. 바른 마음챙김 (正念 ; Sammaa-sati)

3. 바른 마음집중 (正定 ; Sammaa-samaadhi)

4. 바른 사유 (正思 ; Sammaa-sa"nkappa)

5. 바른 이해 (正見 ; Sammaa-di.t.thi)


이 다섯 가지 정신적인 요소들은, 마음-몸의 과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기는 일로 모두 귀결됩니다. 마음챙김 수행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잘못된 말, 잘못된 행위, 잘못된 생계를 삼가게 됩니다. 잘못된 말을 삼가는 것은 바로 '바른 말 (正語; Sammaa-vaacaa)'을 뜻합니다. 잘못된 행위를 삼가는 것은 바로 '바른 행위 (正業; Sammaa-kammanta)'를 뜻합니다. 잘못된 생계를 삼가는 것은 '바른 생계 (正命; Sammaa-aajiiva)'를 뜻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모든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에 대해서 마음 챙기고 있는 동안,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이라는 여덟 가지 정신적인 요소가 모두 갖추게 됩니다. 우리가 고귀한 여덟 가지 길을 닦아나갈 때, 우리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 가운데 하나의 요소인 바른 이해(正見)의 힘으로 잘못된 견해(有身見 또는 我見)를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첫 번째도(道)인 수타원도에 들어갈 때, 그는 고귀한 여덟 가지 길(八支聖道) 즉,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게 하는 도의 진리(道諦; Magga-sacca)를 완전하게 갖추게 됩니다. 이것이, 정신적 육체적 과정에 대해 그 참된 본질에서 마음챙김을 닦는 것에 의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방법입니다.

 


제2장 수행자를 위한 예비적인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세 가지 익혀야할 것(三學)이 있습니다. 도덕적인 행위(戒)를 익히는 것, 마음집중(定)을 익히는 것, 그리고 지혜, 통찰 또는 깨달음(慧)을 익히는 것이 그것입니다.


도덕적인 행위를 지켜나갈 때, 그것은 말과 행위를 삼감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재가자의 경우에는 최소한 5계 또는 8계를, 상가(승려)의 경우에는 227계 또는 별해탈(別解脫; pa.timokkha)이라는 지켜야할 규범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온전치 못한(unwholesome; akusala; 不善)행위와 말을 삼갈 때, 이 계들을 온전하게 지니는 것입니다.


5계를 지닐 때, 우리는 살생, 도둑질, 잘못된 성행위, 거짓말 그리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어떤 종류의 술이나 약물을 사용하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첫 번째 계인 살생을 삼간다는 것은, 온전치 못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계인 도둑질과 소유자가 주지 않은 물건을 불법적으로 취하는 것을 삼간다는 것도, 온전치 못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계와 다섯 번째 계인 잘못된 성행위를 삼가는 것과 술을 마시는 것을 삼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온전치 못한 행위를 피하는 것을 뜻합니다. 네 번째 계인 거짓말을 삼가는 것은, 잘못되고 온전치 못한 말을 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온전치 못한 말과 행위를 피한다면, 우리는 계(戒; siila)를 완전하게 지니게 될 것입니다.


집중수행기간 동안에는, 8계를 지녀야만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보다 많은 시간을 수행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의 계는 오후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음식을 먹는 것을 삼가는 것입니다. 이 시간 동안에 어떤 종류의 음식도 삼가해야만 하지만, 꿀과 오렌지 주스 그리고 레몬 주스와 같은 과일 주스는 먹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계를 지키기 위해서는 춤추고, 노래하고, 음악을 연주하거나 듣는 것 그리고 꽃이나 향수 등을 사용해서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을 삼가해야만 합니다.


여덟 번째 계는 높고 사치스러운 침구를 삼가는 것입니다.


8계 가운데의 세 번째 계는, 단지 잘못된 성행위가 아니라, 모든 성행위를 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피함으로써, 여러분의 말과 행위는 청정해집니다. 이것이 집중수행기간 동안에 여러분이 지녀야만 할 8계입니다.


8계를 지니는 것은 도덕적 행위의 정화(戒淸淨; siila-visuddhi)를 의미합니다. 계청정은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서 향상을 이루기 위한 선행 조건입니다. 도덕적인 행위(戒)가 청정해졌을 때, 절대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식이 없을 때, 그의 마음은 안정되고, 따라서 그는 어렵지 않게 마음집중(定)을 얻게 될 것이며, 그 다음에 꿰뚫어보는 지혜(慧)가 생겨날 것입니다.

 

위빠사나란 무엇인가 ?


위빠사나(vipassanaa)는 두 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하나의 법(Dhamma)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위(vi)'라는 말은, 마음과 몸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불만족 또는 괴로움, 무영혼, 무아 또는 에고가 없음을 말합니다.  '빠싸나(passanaa)'라는 말은, 바른 이해 또는 깊은 마음집중을 통한 깨달음(realization), 또는 마음(名; naama)과 몸(色; ruupa)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바른 이해를 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 또는 마음챙김 수행을 할 때, 그 목적은 현상의 세 가지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깨닫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의 세 가지 특성을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탐욕, 욕정, 욕망, 갈망, 분노, 악의, 질투, 아만, 혼침과 수면, 슬픔과 걱정, 들뜸과 회한 등과 같은 온갖 번뇌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번뇌들을 없애버렸을 때, 우리는 해탈 또는 괴로움의 소멸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번뇌들 가운데 어떤 것이라도 남아있는 한, 우리는 여러 가지 괴로움을 경험할 것임에 분명합니다. 번뇌는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번뇌가 제거되어 버릴 때, 온갖 괴로움도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네 가지 요소(四大)에 대한 마음챙김


수행을 하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 하나의 그리고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을 그것들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관찰해야만 합니다. 수행(坐禪의 경우)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우리는 대장로(大長老)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에 따라서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역주 : 호흡에 동반된 복부의 안쪽으로의 움직임과 바깥쪽으로의 움직임을 한국어로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명명하는 데에 문제를 제기하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일어남, 사라짐' 이라는 용어는 영어의 'rising, falling'의 번역입니다. 실제로 복부가 일어난다는 표현과 사라진다는 표현보다는 '불러옴, 꺼짐' 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도 모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관찰대상에 이름을 붙여가면서 관찰을 하는 이유는 집중력의 향상과 대상에 대한 분명한 파악을 위해서 입니다. 따라서 실제로 자신의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어떤 용어를 쓰던지, 그 대상을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 됩니다. 역자의 경우에는 '일어남', '사라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불러옴', '꺼짐'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어로 'rising', 'falling'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명칭을 붙이는 것은 수단입니다. 자기에게 맞는 수단을 잘 사용해서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목적을 이루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은 {대념처경}(Mahaa-satipa.t.thaana Sutta)에 따른 것입니다. 이 경에는, 네 가지 요소에 대한 마음챙김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붓다는 우리들에게 네 가지 요소(땅의 요소[地界; pathavi-dhaatu], 물의 요소[水界; apo-dhaatu], 불의 요소[火界; tejo-dhaatu], 바람의 요소[風界; vayo-dhaatu])가 발생할 때, 그것들에 대해서 마음을 챙기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네 가지 요소뿐만 아니라, 모든 정신적 육체적 현상들도 관찰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땅의 요소(地界)가 실제적인 땅(地)이 아니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대신에 그것은 땅의 요소의 참된 본질을 가리킵니다. 땅의 요소란, 딱딱함(hardness), 부드러움(softness) 등과 같은 그것의 개별적인 특성에 주어진 명칭입니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딱딱함, 부드러움이 땅의 요소의 개별적이며, 독특한 특성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몸의 어느 부분에서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을 자각했을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땅의 요소의 참된 본질 또는 개별적인 특성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물의 요소(水界)는 실제적인 물(水)이 아니라, 그 요소의 개별적인 특성에 주어진 명칭입니다. 유동성과 팽창성이 물의 요소의 특성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몸의 어느 부분에서 유동성이나 팽창성을 자각했을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물의 요소를 자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의 요소(火界)는 실제적인 불(火)이 아니라, 그 요소의 독특한 특성을 말합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불의 요소의 독특한 특성입니다. 바람의 요소(風界)도 마찬가지로 바람(風)이 아니라, 바람의 요소의 독특한 특성에 주어진 명칭입니다. 그 특성이란, 여러분 몸의 어느 부분에서의 움직임, 동작, 떨림 또는 지탱해주는 힘(support)을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몸의 어느 부분에서 움직임, 동작, 떨림 또는 지탱해주는 성질을 느끼고, 자각하고, 바르게 이해할 때, 그것은 여러분들이 바람의 요소를 자각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네 가지 요소에 대한 마음챙김입니다.


일체지자이신 붓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정신적 또는 육체적인 과정도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만 합니다." 라고. 우리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우리의 마음과 몸의 과정에 마음을 모을 때, 처음에 어느 대상을 관찰해야 하는가 모를 때가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대장로 마하시 사야도는 수행자들에게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과 함께 수행을 시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숨을 들여 마실 때, 복부는 불러오고, 숨을 내쉴 때는 복부는 꺼집니다. 우리는 이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복부가 불러올 때, 우리는 그것을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복부가 꺼질 때, 그것을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복부의 안쪽으로의 움직임과 바깥쪽으로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러한 바람의 요소의 독특한 특성을 완전하게 자각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 때, 수행자들은 사람이니, 존재니, 영혼이니 하는 잘못된 견해를 깨버릴 수 있습니다. 수행자들은 복부의 안쪽으로의 움직임과 바깥쪽으로의 움직임 또는 복부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움직임을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하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면서 관찰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기는 수행을 하는 동안에, 알아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큰 소리가 들릴 때, 여러분들은 '들음, 들음, 들음'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을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여러분은 그 (시끄러운) 소리를 이겨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능하면 많이 '들음, 들음'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소리를) 알아차리는 일을 그만둘만하다고 생각될 때, 여러분은 일차적인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때는 소리가 1-2초 동안 지속될는지도 모릅니다. 소리가 사라져버렸을 때, 여러분들은 평상시 알아차려야 하는, 일차적인 대상인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자연스럽게 되돌아갈 것입니다.  

 

정신적인 상태와 감정적인 상태에 대한 마음챙김


여러분이 행복함이나 불행함을 느낄 때, 또는 유감스러움이나 슬픔을 느낄 때, 이러한 감정적인 상태도 있는 그대로 '행복, 행복', '불행, 불행' 또는 '슬픔, 슬픔'하고 마음으로 알아차리면서 관찰해야 합니다. 감정적인 상태가 사라지고 난 후, 알아차리는 마음은, 평소 관찰해야 하는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으로 자연스럽게 되돌아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일차적인 알아차림의 대상을 놓쳐 버리고) 밖으로 나돌아다니며 일이나, 가족, 친척들에 대해 생각할 때, 여러분들은 복부의 움직임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헤매는 생각을 관찰하면서, 마음으로 '생각, 생각'하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점에서 여러분은 아주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정신적인 상태나 감정적인 상태를 관찰할 때, 알아차리는 마음은 활기 있고, 주의 깊고, 정확하고, 어느 정도 민첩해야만 하는데 그래야만 그 알아차리는 마음이 지속적이고, 끊어짐이 없고, 항상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리는 마음이 강해질 때, 생각이나 관념, 또는 생각하는 마음은 저절로 멈추어버립니다. 그때, 알아차리는 마음은 더 이상 알아차려야 할 대상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평상시 알아차려야 하는 복부의 움직임으로 되돌아옵니다.

 

걷는 수행(行禪)


붓다는 걷고(行), 서고(住), 앉고(坐), 눕는(臥) 네 가지 동작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지녀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걷고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서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앉아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누워 있을 때, 그 동작에 대해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자세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수행자들이 걷는 수행(行禪)과 앉는 수행(坐禪)을 번갈아 가며 실행하라고 지도합니다. 그래야 그들은 보다 쉽게 마음을 집중할 수 있게 되어, 걷는 과정과 앉는 과정에 대한 꿰뚫어 보는 앎(insight)을 얻게 됩니다. 매번 (좌선을 하기 위해) 앉기 전에는 걷는 수행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걷는 수행에서의 발의 움직임은 앉아 있을 때의 복부의 움직임 보다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수행이 점차 향상되면, 그때는 걷는 수행보다도 앉는 수행을 오랫동안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이 위빠사나 앎(Insight Knowledge)의 제 6단계에 이르게 되면, 걷는 수행보다 앉는 수행을 더 오래 하게 될 것입니다. 앉는 수행을 2-3시간 동안하고 걷는 수행은 1시간 정도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여러분의 마음집중은 정신적 육체적 현상의 소멸을 자각하는데(名色消滅智) 충분할 만큼, 좋고, 깊고, 강합니다. 하지만 처음 수행을 시작할 때에는, 좌선보다 행선을 오래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오랫동안 앉아 있을 수는 없더라도 오랫동안 걸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좌선할 때보다는 행선할 때, 어느 정도 마음집중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선, 여러분은 발걸음을 알아차리면서 걷는 수행을 해야합니다. 왼발을 내딛을 때, '왼발'하고 알아차립니다. 오른발을 내딛을 때, '오른발' 하고 알아차립니다. 이런 식으로,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또는 '걸음, 걸음'하고 알아차립니다. 명칭 붙이기나 이름 붙이는 것은,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마음만큼은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발의 움직임에 대한 알아차림, 예리한 알아차림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걷는 수행을 할 때, 눈을 감아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편안하게 보통 상태로) 눈을 반개 해야 하며, 여러분의 발 앞의 1-1.5미터 전방의 바닥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머리는 앞으로 너무 수그려서는 안됩니다. 고개를 너무 수그리면, 목과 어깨에 바로 긴장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두통이나 어지러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발을 바라보아도 안됩니다. 만일 발을 바라보면, 발의 움직임에 제대로 마음을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게 되면, 마음은 눈과 함께 움직여서, 여러분의 마음집중은 깨지고 맙니다. 누군가 여러분 앞으로 다가오거나 지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여러분은 쳐다보려고 하는 경향이나 욕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쳐다보려고 하는 경향이나 욕구는 즉시 관찰되어야 하며 '경향' 또는 '바라보려고 함' 하면서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한 경향이나 욕구가 사라지면, 주위를 둘러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마음집중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주변을 둘러보지 않도록 주의해서 여러분의 마음집중을 지속시켜나가고, 걷는 수행을 통해서 마음집중을 이루는데 향상을 이루기 바랍니다. 손의 위치를 바꾸어야 하겠다고 느꼈다면, 바꾸어도 좋으나 마음을 챙기고 바꾸어야 합니다.


(손의)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 의도가 생겨났을 때, 여러분은 (먼저 그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아주 천천히 자세를 바꾸면서, 자세를 바꾸는 행위에 따르는 모든 행위와 움직임은 관찰되어져야 합니다. 어떤 움직임이나 행위에 대해서도 마음챙김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손의 자세를 바꾸고 난 후, 여러분은 다시 전처럼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좌선의 경우에도 역시, 어떤 이들은 적어도 45분 동안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앉아있어야 한다는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초보자들은 최소한 20-30분 정도는 자세를 바꾸지 말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만일 초보자가 (주로 다리의 어느 부분에서) 생겨난 심한 통증을 참을 수 없을 경우에, 그는 자세를 바꾸었으면 하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면 자세를 바꾸기 전에, 먼저 자세를 바꾸려고 하는 의도를 '의도함, 의도함'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세를 바꾸는데 따르는 모든 동작과 행위를 알아차리면서, 아주 천천히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자세를 다 바꾸었으면, 다시 일차적인 (알아차림의) 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으로 돌아와서 평상시처럼 알아차려야 합니다.

 

침묵 속의 알아차림

 

집중수행기간 동안에, 어떤 행위나 움직임도 빠르게 해서는 안됩니다. 가능한 만큼 모든 행위나 움직임을 천천히 해야하는데,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매 순간의 몸의 움직임이나 행위에 마음챙김을 적용시킬 수 있게 됩니다. 가정에서는, 이러한 모든 행위와 움직임을 천천히 할 필요는 없으며, 평상시대로 하되 마음을 챙겨서 관찰해야 합니다. 모든 행위와 움직임은, 있는 그대로 마음 챙겨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일상적인 마음챙김입니다. 집중수행기간 동안에는, 모든 행위와 움직임을 천천히 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과 몸의 모든 행위들에 대해 마음 챙기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해야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몇 마디의 말을 제외하고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몇 마디의 말도 천천히 부드럽게 해야하며, 이 말 때문에 다른 수행자들의 마음집중이 방해받아서는 안됩니다.

 

<역주 : 집중수행 동안에 마음챙김이 끊어지는 가장 큰 원인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수행과는 관계가 없는 잡담은 결정적으로 마음챙김에 단절을 초래합니다. 수행과 관계가 있는 말(법문이나 법에 대한 토론)도 일정한 시간(길어도 1 시간 정도)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해야하며, 말을 하는 당사자는 최대한 마음챙김을 지니고 해야합니다. 역자가 받은 충고로는 부득이 말을 하게될 때에는 자신의 입술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기면서 말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언어활동의 배경에는 의식의 흐름이 있지만, 이 의식의 흐름에 마음을 챙기기는 어렵기 때문에, 육체적인 현상인 '입술의 움직임'을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해야된다는 충고였습니다. 상당한 마음챙김의 힘이 있어야 자신의 입술의 움직임을 알아차려 가면서 고요히, 법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입술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때에는 단지 입술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면서 말을 하면 됩니다. 입술의 움직임에 명칭을 붙이는 일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일들을 아주 소리가 적게 또는 아예 아무 소리도 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신을 끌거나 몸이 축 쳐져 걸으면서 소리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챙기고 있다면, 걸으면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과 몸의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라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음식을 먹을 때, 모든 먹는 행위와 동작에 대해서 마음을 챙겨야 합니다. 목욕을 할 때, 옷을 입을 때, 물을 마실 때, 여러분은 모든 행위를 천천히 해야 하며, 그 움직임을 관찰해야 합니다. 앉을 때에도, 모든 앉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아주 천천히 앉아야 합니다. 일어날 때에도 그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아주 천천히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정신적 또는 육체적 과정을 그 참된 본질에서 자각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즉,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생겨났다가는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는 정신적 육체적 과정들의 이러한 참된 본질을 자각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행위와 움직임을 천천히 해야 합니다.


마음챙김(念)과 마음집중(定)은 지혜(慧)가 펼쳐지기 위한 길을 장엄해줍니다. 마음챙김이 이어질 때, 마음집중은 자연스럽게 더욱 심화됩니다. 마음집중이 더욱 심화될 때, 지혜는 저절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끊어짐 없고 지속적인 마음챙김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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