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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종교

고난의 의미와 가치-떼이야르 드 샤르댕

by 마리산인1324 2009. 10. 28.

고난의 의미와 가치

원제 : La Signification et La Valeur Constructrice de la Souffrance (1933)

― 떼이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hard de Chardin)神父(1881-1955) ―


본래 질병이 주는 인상이란 세상에서 쓸모가 없거나 또는 마땅히 그럴 만하다는 것들에게 걸리게 한다는 것이다. 정말 불가피하게도, 병자들은 인생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단순한 불운때문에 활동하며 돌아가는 현실의 주변에 버려져야만 했던 것 같다 : 그들의 현실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 아울러 일반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주변 환경 속에서, 우리는 병자들을 무활동으로 여길지 모른다.

다음에 몇 가지 반성들은, 어떤 가능성 있는 관점으로 볼 때, 인간 사회가 이루어지는 곳에다 똑같이 고난의 자리와 유효성을 나타내주면서, 설득력을 잃어가는 이런 견해들을 마저 없애버리고자 하는 데 있다.


창조된 세계

 

이 세계는 건설된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깨달아야 할 근본적 진리이다. (그리고) 그 결과 진리는 일상적이면서도 우리 생각의 한 본질적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첫 눈에, 존재와 그들의 운명은 아무렇게나 또는 임의적으로 이 땅 위에 부여된 것처럼 나타나게 될 위험성이 있다. 말하자면 우리들 각각은 다소 빠르거나 늦게, 이곳이든 저곳이든, 그리고 상대적으로 좀 더 다행이거나 불행이거나 간에 획일적으로 생겨날 수 있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마치 우주가, 자기 역사의 처음에서 끝까지 (절대의) 시간 과 공간 속에서, 꽃들이 정원사의 기분대로 바뀌어질 수 없는 일종의 거대한 화단을 이룬 것처럼. 그런데 이와 같은 생각은 옳지 않은 것 같다. 과학, 철학, 그리고 종교 등의 분야에 따라 각각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동원해서 생각하면 할수록, 세상은 바깥으로만 나열된 재료들의 어떤 묶음으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거기에 맞는 어떤 커다란 움직임으로부터 활기를 얻고 있는 몇몇 구성체계로 비교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지난 수 백년 동안 실제로 어떤 전체적인 통일성의 설계가 우리 주변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주 안에서 진행 중인 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그 진행의 결과로서 임신과 출산만은 우리가 잘 알 수 있는 비유일 것이다 : 영혼들과, 그리고 이 영혼들이 물질 속에 있는 영혼들을 불러냈다는 것 때문에 형성된 정신적 실재의 태어남을. 고통스럽게도, 인간적 활동을 통하기도 하고, 활용하기도 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은 모여지고, 나타나고, 순화된다. 아니, 우리는 꽃 한 다발을 이루고 있는 꽃가지 하나 하나에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모든 것은 자기 시간과 자기 자리에서 전체성의 크기와 부름에 따라 나타내는, 어떤 큰 나무의 잎사귀들과 꽃잎들에 대비되는 것이다.


고난의 의미

 

성장 상태에 있는 어떤 세상의 관점은 독자적인 것 같다고 할 수 있지만 역시 임의적인 것이다. 사실 그것은 중요하면서도 실질적인 결론들을 갖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것이 우리가 형성한 이상을 우리의 영감 속에서 전혀 새롭게 해 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인간의 개인적 노력의 가치에서든(세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보편적인 모든 활동으로 커지는 것으로서) ; 인간의 개별 적인 고통의 값에서든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이것뿐이다). 꽃다발과 나무를 예로 들어가면서 바로 이 부분을 조금만 이야기 해보자.

꽃 한 다발을 보면서, 원래의 자기 모습을 잃은 꽃들을 보게 되는 <고통스러움>이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른다. 이를테면 꽃가지를 한 송이씩 따 모아서 부자연스럽게 한 다발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 발달의 내면적 경험들과 자기 주위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항해서 싸움을 가졌던 어떤 나무를 생각 할 때, 꺾여진 가지들, 찢겨진 잎사귀들, 시들고 허약하며 퇴색해 버린 이 나무의 꽃들은 역시 <제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다> : 이것은 그런 모양새들을 이루고 있는 가지들을 통해서,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다소간의 어려웠던 형편들 을 옮겨 놓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피창조물 각각이, 완전히 닫혀지고, 그 자신을 위해서 원했으며, 이론적으로는 의지가 바뀔 수도 있었던 한 작은 공간을 만들었을 어떤 장소에서, 우리는 개인 각자가 그들의 가능성과 그들의 약진 도중에 비통하게도 정지된 현재 모습을 정당화 는 몇 가지 아픔을 우리의 영감으로 보게 될 것이다.

어째서 이런 불공평과 제약이 제멋대로 이루어진단 말인가? …… 뒤집어서 생각할 때, 가령 세계가 지금 진행 중인 정복 활동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면, -실제로 우리는 태어남으로서 완전한 전쟁터에 내던져진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우리는 (거기에서 부려지는)하수인들로서, 그리고 게임에서의 승부 때문에 통상적인 노력의 열매를 따기 위하여, 불가피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게 된다. 세계는, 경험적으로 우리 단계에서 볼 때, 거대한 모색이고, 탐구이며, 공격(하는 대상)이다 : 이런 것들의 진척은 숱한 실패와 상처의 댓가로만 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들어 있는 몇 가지 고통들은 지독하지만 고상한, 그 조건의 표현이다. 이들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쓸데없거나 또한 사소한 요소들이 아니다. 단지 먼저 행진하고 그리고 구성원 모두의 승리를 위해서 치르는 댓가일 뿐이다. 즉 영예의 터에 묻힌 무덤들이다.


고난의 창조적 가치

 

좀 더 멀리 내다보도록 하자. 이 전체적 조화의 문제 속에는 (성 바울이 말한 바 있는) 여러 가지 기능들과 서로 다른 기관들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신비체> 안에서 구세주(Christ)에게 복종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부분이 진보와 정복의 일반적 작업을 매우 특별하게 승화시키고 정신화 하도록 그릴 수 있었을까? 분명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과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역시 아주 확실하게는 병자들과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본래 고통을 받는사람들은 그 성격상, 현재의 생활권 밖으로 그 자신들이 쫓겨 나가게 되어서 드러나게 된다. 괴로운 현실로 인하여, 그들은 그 때부터 언제나 한층 밝은 곳을 향해서, 가까워지는 저 평온의 세상에 이르는 일을 위하여 숙명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숭고함을 향해서 지향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더 확실하고 더 순수한 것이다. 병자들은 광맥의 갱도 끝에서 작업하는 광부들처럼, 그들의 동료들에게 휴식을 취하도록 해 주는 이웃들이 있다. 이와 같이 쇠약해진 육체를 지니고 지금 흘러가고 있는 세계의 무거운 짐을 바로 받쳐 주는 그 들이야말로 섭리(Providence)가 작용하는 아름다운 보상 때문에, 희생자들과 비관주의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진보 자체의 가장 활동적인 요인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고난의 전환

 

이런 인식이 옳다면, 병자들은, 겉으로는 아무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이루어 내야 하는 가장 아름다운 의무를 눈앞에 두고 있는 존재이다. 물론, 병자가 자기 건강의 회복과 질병의 치료를 위해 온갖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것은 결코 중단할 수 없는 일이다. 나아가서, 그는 이따금 비상하게 주어진 힘을 여러 가지 형태의 일에 사용해야 하며, 그에게는 그것이 허락된 채 남아있다. 사실상, 기독교적인 복종이란 바로 타협의 역명제이다. 또한 병자는, 자기가 앓았던 정도에 따라 한번 치렀던 병에 대해 저항했던 부분을 어떠한 사람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자기가 수행해야 할 어떤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 인간적 고통으로부터 전환(말하자면 회개인데) 차원에서의 협력하는 그 무엇이다.

고통의 전체성을 전 지구상에 끊임없이 확대시킨, 인간적 고통이란 얼마나 큰 바다인가! 그런데 이 고통의 덩어리는 무엇으로 구성되었을까? 어두움으로선가, 결함으로선가, 찌꺼기로선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에너지의 가능성으로 옮겨 보면 고통 속에는 바로 극도의 밀도를 지닌 세계의 양력 (揚力)이 숨겨져 있다. 모든 의문은 고통이 의미하고 있으며 또 고통이 해결할 수 있다는 신앙을 환자에게 제공함으로써 풀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 만약 모든 병자들이 삶의 터전의 정복과 체계를 통해서 신(神)의 시대를 급속하게 성숙시킨다는 공통의 욕망으로 그들의 비애를 한꺼번에 전환시킬 수 있다면, 신을 향해서 세상은 얼마나 큰 도약이란 말인가. 이 지구상의 모든 고난들은 세상의 슬픔이 원대하고 독특한 의식 행위, 순화 행위, 그리고 통합 행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고난들을 단일화하는 것이다 : 우리의 눈으로 우주 창조의 신비적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여러 가지 형태들의 하나가 있는 곳이 바로 이 고난의 세계가 아닐까?

바로 그것 때문에, 기독교에 관한 한, 예수의 수난에서 삶의 창조가 성취된다는 것은 아닐까? 십자가에 관해서도, 우리는 아마도 단지 개인적 고난과 단순한 속죄의 대상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이 죽음의 창조적 힘은 우리들에게서 멀리떨어져 있다. 좀 더 넓게 생각해 보자 :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십자가의 밀도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행위의 상징과 발원지라는 것이다. 그와 똑같이 세속적인 관점에서 충분하게 인식하고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내버려진 것도 아니고, 무슨 패배자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반대로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을 향해서 항상 보다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발원지이며, 일반적 행보의 전진을 말한다. 그 분과 함께 살기 위하여, 그 분과 함께 하나가 된 우리가 태어났으므로, 그 분처럼 이루어지게 하소서.
 
 
 


□ 이 글(원제 : LA SIGNIFICATION ET LA VALEUR CONSTRUCTRICE DE LA SOUFFRANCE)은 <샤르뎅 전집> 6권 2장에서 발췌 하였다. 원래는 가톨릭 환자 동맹(l'Union catholique des Malades)의 기관지 '동맹수단 (Trait d'Union)', 1933년 4월 1일자에 실렸던 것이다. 
 
 
 


□ '씨알사상'을 생각하면서, 떼이야르 드 샤르뎅(Pierre Teihard de Chardin) 神父(1881-1955)의 글을 읽어보기로 하였다. 생전에 서양문명을 준엄하게 비판했던 함선생이 떼이야르로부터는 특히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북경원인> 발굴에 참가했던 고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신학자인 떼이야르는 과학기술과 종교를 적극적으로 관련시킨 사상가로 알려졌다. 이미 오래 전에 <컴퓨터>의 등장을 예견했으며, '신유물론자'처럼 정신과 물질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그들과는 다르게 진화상 물질의 본질이 정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전집을 간행한 이들은 "그의 생각은 전통적 학문의 범주로는 어떠한 수준에서도 표현되지 않는다. 그는 원점에서 새 출발하고자 했다.…… 떼이야르는 삶의 일반적 법칙, 복잡화의 법칙, 진화의 법칙, 인격화의 법칙, 사회화의 법칙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러한 법칙들은 모든 차원에서 검증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당대에 제공된 과학적 지식으로 해석했다."고 평가하였다. 이들 간행위원회는 세계 12개국의 53명의 저명한 정치가, 고생물학자, 신학자, 철학자, 문학자, 고고학자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7권의 그의 전집을 1962년까지 내었다. 대표작 <인간현상>에 대해서 역사학자 A.토인비는 "<정신권> <오메가 포인터>라는 용어는 새로운 전망의 한 표현 수단이다.……그의 저서는 정신적 해방의 한 행동이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함선생은 이 서양의 사상가의 글을 만나기 훨씬 전에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썼는데, 떼이야르가 이 <고난의 의미>를 한 잡지에 실을 때도 거의 똑같은 시기(1933년)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고 하겠다. 그저 조금이라도 '씨알사상'에 이해를 더해보자는 생각에서 이 짧은 글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