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종교학회 발표논문
「요한복음」의 불교적 해석:
「대승기신론」의 구원론을 중심으로
이 찬 수 (강남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I.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상이성과 유사성
주지하다시피 그리스도교는 이 세계의 기원과 근거를 인격적 유일신에게서 보는 반면 불교는 존재하는 세계를 그 자체로 긍정하면서 일체의 기원적 존재, 인격적 신을 거부한다. 그리스도교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신의 주도권을 보고 신과 인간 간의 불가역성(不可逆性)을 주로 말한다면, 불교는 주도권을 쥔 어떤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일적이고 우주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궁극적 실재와 인간 사이에서 주로 가역성(可逆性)을 본다. 인간이 아무리 신을 깊게 체험한다고 해도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일 뿐, 신과 인간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 없는 반면, 불교에서는 원천적으로 인간과 부처의 동일성에 대해 말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불교는 분명히 갈라진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본적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상사에 선행하면서 이 세상을 세상되게 해주는 근본 원리를 가르치고 선포하며, 동시에 그러한 원리를 지금 주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구조적으로 상통한다. 불교든 그리스도교든 현재 드러나 있는 일상적 현실은 그 일상을 일상되게 해주는 원천적 진리와 사실에 근거해 있다고 말하며, 그러한 진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이(붓다․예수)의 눈을 통해 그 진리의 구체적 모습을 제시해준다. 그러면서 무시이래(無始以來) 한결같이 그래온 원천적이고 객관적인 사실, 인간이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당위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지금 주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한다. 저마다의 삶의 체험에 각각 접근해가는 ‘양상’과 그 체험을 드러내는 ‘구조’ 혹은 ‘형식’에 있어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코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내용적으로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상이한 언어와 세계관이 반영하듯, “불교는 불교이고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이다!” 특별히 인간에 대한 신의 존재론적 주도권을 인정하는 그리스도교와 일체의 이원론적 주객도식적 흔적을 일소하고자 하는 불교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서는 그저 차별적인 것들로 치부하기 힘든 ‘깊이’도 비등하게 느껴지며, 그 ‘깊이’를 전달해주는 형식이나 틀에서 비슷함을 보인다. 이 글에서는 그것을 일단 ‘구조적 유사성’이라 규정하면서, 그 유사성을 적절히 보여주는 예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과 신약성서 「요한복음」의 구원론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대승기신론」은 지난 이천여년 동안 가장 고전적인 ‘대승불교통론’으로 받아들여지고 다양하게 해석되어온 대표적인 책이며,1) 「요한복음」 역시 지난 이천여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신학과 신앙적 지침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복음서이다. 이들은 각각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사상적 깊이를 대변해주는 적절한 고전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을 비교 대상으로 삼은 일차적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본 논문에서 이들에 대한 문헌학적이거나 성서주석적 작업을 시도하려는 것은 아니다. 「대승기신론」은 불교의 체계적 논리와 분석들을 담고 있는 전통적 대승불교 ‘논서’(論書)인 반면,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전개된 예수에 관한 전승 모음집에 가깝다. 비록 예수의 언행 및 신분에 대한 요한복음사가만의 해석과 신학도 들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전기적 성격을 띤 호교서에 가깝다. 단순히 말해 「대승기신론」이 ‘논문’이라면, 「요한복음」은 ‘이야기’이다. 이들을 공평하게 판단할 제3의 기준을 가지기는 힘들다.
이 글에서도 애당초 이들 문헌의 비교방법론 자체를 서술하려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 다만 이들에게서 제시되는 인간 구원의 길의 ‘대강’(大綱)을 교차 서술함으로써, 불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이 지닌 인간 구원론의 진지함과 그 ‘깊이’가 비슷한 정도로 드러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나름대로의 비교 방법론이 있다면, 각 전통의 언어를 별도의 기준에 따라 재단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닌, 차별적이고 상이한 언어들을 중시하는 가운데 그 전통의 구원론적 깊이가 비슷한 정도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 뿐이다. 개념이나 내용 분석이라기 보다는, 무명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것을 요청하고 그 놀라운 결과를 제시하는 두 문헌의 구원론적 유사성을 밝혀보려는 것이다. 비록 이들이 동일한 유형의 텍스트도 아니고, 언어들도 상이하지만, 그 언어들을 담고 있는 그릇의 모양새까지 차별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차별성까지 의식하는 가운데 드러내보고자 한다. 이들 종교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섣부른 희망을 자제하고, 또 이들 종교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비관적 절망도 거부하면서, 이들이 상통하는 측면을 ‘구원론적 구조’ 차원에서 제시해보려는 것이다.
II. ‘일심이문’과 빛과 어둠
1. 일심이문(一心二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핵심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대승’(大乘)과 ‘기신’(起信)에 있다. 여기서 ‘대승’, 즉 ‘큰 수레’(Mahāyāna)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절대 진리이며, 그것이 다름 아닌 ‘중생의 마음(衆生心)’이다. 중생의 마음이 ‘생사의 세계’(世間法)와 ‘생사를 넘어선 세계’(出世間法)의 모든 존재들을 포괄하는 절대 진리 자체라는 것이다.
이 마음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진여의 문’(眞如門)과 ‘생멸의 문’(生滅門)이다. ‘진여의 문’이란 중생의 마음이 지닌, 본래 한결같고 변화가 없는 본체의 측면이고, ‘생멸의 문’이란 말 그대로 생멸변화하는 현실적 마음의 측면이다. 일체의 번뇌를 떠난 진여 그 자체로서의 측면이 중생심의 본체라면,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고 흔들리며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중생심의 측면을 ‘생멸문’으로 나타낸 것이다.
왜 본체상 진여 자체인 마음이 이리 저리 흔들리고 동요하며 육도(六道)에 윤회하는가? 그것은 ‘무명’(無明) 때문이다. 무명은 인간의 원초적 어둠과도 같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굳이 이 무명의 기원을 밝히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이 무명이 스며들면서 생멸변화를 일으킨다는 안타까운 현실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이것을 ‘염법훈습’(染法薰習)이라 표현한다.2) 염법훈습이란 본래 순수함 자체인 ‘하나인 마음’(一心)이 현실적으로 동요하게 되는 과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동요하는 마음에서 ‘하나인 마음’의 본래적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무명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라기 보다는, 중생이 그 본래적 사실에 대한 ‘믿음을 일으킴’(起信)으로써 극복해야 할 미망의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무명은 진여에 근거하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와 다른 것도 아니다. 생멸문은 미망의 세계이며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여로서의 중생의 마음 밖에 따로 존재하는 별도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깨치지 못한 미망의 세계 역시 본래 대승 자체인 중생의 마음에 근거해 있고, 거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생멸문이라 하지만, 그 본체는 진여이며, 따라서 생멸문에도 현상계를 포섭하는 ‘깨달음의 세계’(覺)가 이미 들어있는 셈이다. 이 깨달음의 세계를 담고 있는 중생의 마음을 ‘여래장’(如來藏)이라 부른다. 생멸변화에 의해 더러워진 듯 하지만, 마음의 본성은 본래 여래와 같음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중생 안에는 그 생멸변화에 상관없이 여래성, 즉 깨달음의 세계가 이미 들어있는 것이다. 이미 들어있는 깨달음의 세계, 이것이 중생심의 본체론적인 측면, 즉 ‘진여문’이다.
이런 식으로 「대승기신론」에서는 진여문으로서의 마음과 생멸문으로서의 마음이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바닷물과 파도, 진흙가루와 옹기의 관계와도 같다. 바람이 부는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 하면서도 모두 바닷물 바로 그것이듯이, 반죽되고 빚어지기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옹기들이 생겨나면서도 진흙가루이기는 마찬가지이듯이, 진여와 생멸은 모두 중생의 ‘한 마음’(一心), 즉 궁극적 실재의 이중적 표현인 셈이다.
2. 빛과 어둠
「요한복음」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다음 구절부터 보자: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1,1) 이 ‘말씀’은 만물의 창조와 생성 이전부터 선재해 있는 만물의 존재 원리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의하면, 세상은 근원적으로 이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만물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생겨난 것 치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3; 1고린 8,6; 로마 11,36 참조) 「대승기신론」에서 중생심의 본체가 본래 진여와 같다고 하듯이, 「요한복음」에서는 만물이 근원적으로 말씀으로 말미암은 피조물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긍정하든 부정하든 하느님에 의해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 이전에 이미 그렇게 되어있는 일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보면 이것은 인간 전체가 처한 ‘실존론적인’(existential) 상황이다. 만물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그리하여 누구나 하느님과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이 긍정하든 부정하든 하느님에 의해 인간의 경험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는 ‘원사실’(primordial fact)인 것이다. 이것이 요한신학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본래 깨달음이 주어져 있지만 실제로는 깨닫지 못한 채 무명에 휩싸여 있다고 하듯이, 불행히도 세상은 어둠에 가려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요한 1,4-5): “그분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1,10). “어둠 속에서 빛이 비치고 있었고”(1,5),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3,19a). 즉, 빛을 밝혀줄 이가 이미 이르렀지만,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3,20) 원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소경이 해의 혜택을 입어 살면서도 해를 보지 못하므로 해의 혜택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3)
왜 그런가? 「대승기신론」에서도 무명의 기원에 대해 굳이 분석하지 않는 것처럼, 「요한복음」에서도 왜 사람들이 죄악에 빠지게 되었는지, 왜 어둠 속에 갇히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죄악에 빠져있다는 사실, 인간의 행실이 악해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고 있으나, 이미 빛이 와서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만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어둠은 빛이 비췰 때 사라지게 될 그 무엇이다. 아니 믿음의 빛으로 그 어둠을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한결같은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세상(1,10b)과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1,10a;10c)은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다른 세상일 수 없다. 아무리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느님이 외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세상’(3,16a)이며, 아무리 어두운 듯 해도 이미 빛을 담지하고 있는 어둠이다. 이미 빛이 와 있기에 그 어둠 속에는 빛이 들어있다. 그 빛은 한 번도 꺼져본 적이 없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ή σκοτἱα αὐτὸ οὐ κατέλαβεν 1,5b) 비록 현상적으로는 어둠이 빛을 거부하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 이 어둠이라는 것 역시 ‘실존론적’ 차원에서 보면, 하느님과의 원천적 연결성을 이기지 못한다, 생멸문의 본체가 진여이듯이..... 「대승기신론」에서 중생심이 본래 대승과 같다는 낙관적 자세에서 출발하듯이, 「요한복음」에서도 어둠이 결코 이길 수 없을 빛의 세계에 대한 긍정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III. 기신과 믿음
1. 기신(起信)
그러나 「대승기신론」이든 「요한복음」이든 현실적으로 세상은 분열되어 있으며, 이렇게 분열되어 있는 현실에서 돌이켜 그 본래적 연결성의 세계로 전환하게 되면 참 놀라운 세상이 펼쳐지게 되리라며 한결같이 선포한다. 「대승기신론」에서는 그 원천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야(起信)’ 한다고 강조한다. 「대승기신론」이라는 제목도 중생으로 하여금 대승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일으켜(起大乘正信) 부처의 종자를 잇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지은 것이라 한다.4)
그런 점에서 대승은 분명히 믿음의 ‘대상’이다. 그런데 믿음을 일으켜 받아들여야 할 그 대승이라는 것은, 앞에서 본대로, 다름아닌 그렇게 받아들이는 중생의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믿음을 일으키는 셈이다.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해서 믿음을 일으킨다는 말은, 바꾸어 놓고 보면, 마음이 대상으로 삼을 마음이란 따로 없으며, 그저 마음이 스스로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절대 진리로서의 대승 자체라는 사실을 그 마음이 알려주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 ‘진여훈습’(眞如薰習) 내지는 ‘정법훈습’(淨法薰習) 혹은 ‘여래장연기’(如來藏緣起)를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5) 일반적으로는(구체적으로는 유식불교에서) 중생이 무한한 생사의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고서 윤회하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무명에 의한 훈습’(無明薰習)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지만, 「대승기신론」에서는 그와 함께 인간이 본래적인 성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진여가 스스로를 일으켜 무명에 작용함으로써 무명의 상태를 진여의 세계로 바꾸어준다고도 말한다. 이른바 ‘진여에 의한 훈습’인 것이다. 이러한 진여훈습이 말하려는 것은 생멸변화하는 중생의 마음이 대승을 대상으로 하여 믿음을 일으킨 듯 하지만, 사실은 진여가 즉, 중생심의 그 대승적 본체가 스스로를 일으켜 대승의 세상을 이루어준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본다면 대승, 즉 중생의 마음은 믿음의 대상인 동시에 믿음을 그런 식으로 일으켜주는 믿음의 주체 혹은 근거이기도 하다. 중생의 마음은 이미 대승과 같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 앞에서, 그리고 그러한 사실 위에서 믿음을 발하는 행위 역시 대승의 작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대승은 믿음에 뿌리를 두고 일어나는 것이고, 대승은 믿음의 근거가 된다. 중생이 일으키는 믿음이란 대승에서 비롯된 것이며, 대승에 의해서 ‘일으켜지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대승기신(大乘起信)”이라는 말을 풀면 “대승이 믿음을 일으킨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대승이 믿음의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는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킨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대승기신론」의 주 내용은 ‘대승’(大乘)이라는 진리와 진리에 대한 인간의 실천적 태도로서의 ‘기신’(起信)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대승이라는 ‘객관적’ 진리를 주체 안에서 발견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의 실현은 대승에 대해, 자기의 마음에 대해 믿음을 일으킬 때 가능하다. 이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당연한 이유는 믿음이 대승에 뿌리를 두고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그렇게 발해진 믿음은 생멸변화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본체가 되는 대승으로 인해 ‘일으켜진’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는 대승을 대상화해서 믿음을 일으킨 것으로 보이지만, 본체론적으로 보면 그렇게 일어난 믿음 역시 대승의 작용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 믿음
인간이 ‘믿음을 일으킴’(起信)으로써 부처의 세계를 이어가게 된다고 하듯이, 「요한복음」에서도 이미 빛이 와서 어둠 가운데 비추고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선포한다. 하느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역사를 믿음으로 수용하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분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이들 곧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능을 주셨다”(1,12),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토록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모두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3,16)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6,47). 믿는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 비추고 있는 빛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하느님이 보내준 외아들을 인정하는 것이며, 만물이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인해 생겨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의 본래적 연결성을 영원한 하느님께서 구체적으로 실현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중생심의 본체가 진여 자체이듯이, 또 중생의 무명 이전에 그 무명을 포함하는 깨달음의 세계가 이미 주어져 있듯이, 일체 중생은 말씀으로 말미암은 피조물이며, 인간은 애당초 그 영원한 생명을 빛으로 하여 살아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이다.(1,4) 사실상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 사건에 의해 신적으로 방향지어진 삶을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인 것이다.(에페 1,4 참조)
그런 점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분명히 믿음의 결과이지만, 원천적 차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애당초 그렇게 하신 것이기에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당신의 이름을 믿는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1,12-13)이라 말한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라는 요청에 대해 인간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인 행위가 결국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행위라는 말이다. 내가 한 듯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렇게 하도록 이미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진리를 행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자기 행실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3,21)
“자기 행실”이란 물론 자기 스스로 한 행위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사실상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라고도 말한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 한 행위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행위라는 말이다. 예수가 “나는 스스로 목숨을 내놓습니다.....이러한 명령을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았습니다.”(10,18)고 말할 때도 같은 맥락이다. 아들 예수의 전적인 능동성이 아버지 하느님에 의한 피동성과 동일한 것이 되는 셈이다. 중생의 마음이 본래 대승과 같기에 비로소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듯,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 하느님께서 이미 주도하셔서 그렇게 된 일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미리 마련하셨습니다.”(에페 2,10b).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위로부터 새로 나는 것”(3,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3,5)이라 말한다.
이렇게 인간은 애당초 하느님과 더불어 살고 있으며 하느님에 의해 이미 완성되어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브 11,1)이다. 그 “바라는 것”이 “하느님에게서 난 것”(1,13)이기 때문이다. 결국 믿음이라는 행위는 인간 스스로 한 일이면서, 동시에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느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친히 완성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인간이 무엇을 이루었다 할만한 것이 없다(에페 2,9 참조):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3,27) 인간이 스스로 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도 어찌 보면 하느님에 의해 ‘일으켜지는’ 믿음이며,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는 듯 하지만, 사실상 인간의 성취는 이미 이루어져 있던 일들이 드러난 것일 뿐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중생이 대승이라는 대상에 대해 믿음을 일으킨 듯 하지만, 본체론적으로 보면 대승 스스로가 일어난 것이듯이.....
인간의 구원은 하느님 안에서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일이다. 선험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고 있으며, 이미 신적인 완성의 세계 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기신론」에서 그렇듯이, 「요한복음」에서도 그러한 사실의 주체적 현실화는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라며 인간의 실천적 투신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VI. 본각(本覺)-시각(始覺), 아버지-아들
1. 본각(本覺)-시각(始覺)
왜 실천적 투신을 요청하는가? 「대승기신론」의 표현대로 하면, 중생이 사물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이른바 ‘불각’(不覺)의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근원적 어둠인 ‘무명’으로 인해 주․객의 분리가 일어나고, 인식의 주체가 성립되면서, 그 대상도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난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업(業)이 동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닫지 못함, 즉 ‘불각’(不覺)의 상태라고 「대승기신론」에서는 분석한다.
그러나 그렇게 분석하는 이유는 불각의 상태에 빠져있는 중생이 망념을 떨치고 각(覺)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원효의 주석에 의하면,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나는 것”6)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망념을 떠나는 것, 즉 깨치지 못한 상태(不覺)에서 깨침의 상태(覺)로 나아가는 것을 일컬어 ‘시각’(始覺)이라 부르며 중시한다.
‘시각’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각은 전혀 없던 것을 새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비로소 깨닫는다는 것은 여래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평등한 법신(法身), 즉 진리 자체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생심이 본래 진여(眞如)와 같기 때문에 그 진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며, 바꾸어 말해, 중생심의 진여와 같은 측면이 없고서는 비로소 눈뜨는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비로소 눈뜨는 경험(始覺)이란 중생심의 본래적인 측면으로서의 진여가 스스로를 일으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중생심에는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본래적인 측면이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를 본래적인 깨달음, 즉 ‘본각’(本覺)이라 말한다. 중생은 본래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본래 깨달아 있다는 점에서는 새삼스럽게 비로소 깨달을 것이란 없다. 인간은 그 자체로 진여의 성품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고 본래 주어져 있는 것이지, 전에 없던 것을 인간이 새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각’(始覺)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앞으로 일어나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말도 맞다.7) 여전히 떨쳐버려야 할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원효는 깨달음이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나는’ 것이라 주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본래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실상 떠날 망념이라는 것은 없다. ‘본래 떠나있기’ 때문이다. 「금강삼매경론」에서는 그 본래 떠나있음을 ‘본리’(本離)라 하고, 비로소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나는 것을 ‘시리’(始離)라고 한다. ‘본리’와 ‘시리’의 관계는 본각과 시각의 관계와 같다.8)
아무튼 중생의 마음이 대승과 같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본래적인 깨달음의 내용이다. 이 깨달음의 내용이 스스로를 일으켜 인간의 경험 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시각(始覺)이다. 깨달음의 내용이 스스로를 일으키는 것이기에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할 것도 없다. 결국 시각이란 깨달을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인 셈이다.9) 원효는 이렇게 주석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이 없다는 도리를 깨달아 알면 곧 시각(始覺)이 본각(本覺)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10)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정식(情識)이란 비고 고요하여 생겨나는 것이 따로 없음을 깨닫는 이것이 시각(始覺)의 의미이다.”11) 왜냐하면 지금 주어져 있는 중생의 마음이 그대로 텅 비어 고요한(空寂) 진여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마음과 진여의 무차별성이라는 본래적인 사실, 즉 본각(本覺)을 아는 순간 그것이 바로 시각(始覺)이 되는 것이다.
2. 아버지-아들
이러한 본각과 시각의 관계는 「요한복음」에서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통한다. 다음을 보자: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주셨다.”(1,18) 즉, 본각이 시각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원천적 사실이듯이, 아버지는 그 외아들에 의해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비록 완성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것은 가려져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시각’에 의해 ‘본각’이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아들에 의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육화(incarnation)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1,14a)
「요한복음」에서는 계속 증언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3,34) 외아들 예수는 하느님이 보낸 자이며, 따라서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하느님의 말이 된다는 것이다. 다음의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들을 아들도 똑같이 합니다.”(5,19b)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바로 그 일을 위해 났으며, 또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18,37)
여기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들”/“진리”는 ‘본각’의 차원과 통한다. 아버지께서는 본래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 보여준 이는 아들 예수이다. 따라서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의 구체화이다. 아들은 본각의 구체화, 즉 즉 ‘시각자’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아버지의 일과 똑같다. 시각 이후에 본각을 알게 되듯이,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보인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시각하게 되는 순간 그것이 본각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듯, 「요한복음」에서는 결국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10,30)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들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 것이다.”(17,10) 그리고 아들의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온 영광이다.”(1,14b) 중관불교의 표현을 따르건대, 아버지가 “진공”(眞空)이라면, 아들은 “묘유”(妙有)인 셈이고, 정토진종의 표현을 따르건대, 아버지가 형상을 초월해 있는 법성법신(法性法身)이라면, 아들은 형상을 지닌 방편법신(方便法身), 즉 아미타불인 셈이다.12)
그러나 ‘불각’에 빠져있는 이들, 가령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는 그저 나자렛이라는 시골 촌뜨기일 뿐이다. 아니 유대교의 율법을 무시하고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위험인물일 뿐이다. 이들은 예수의 본래적 차원, 즉 ‘하늘’의 차원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땅’의 질서에 따라서만 판단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고 땅의 일을 말합니다.”(3,31a): “당신들은 당신들의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44) “땅에서 난 이”는 물론, “악마”, “살인자”와 같은 험악한 표현들은 모두, 「대승기신론」의 표현대로 하면, ‘불각’의 현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이다.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음의 세계를 무시하고, 그 깨달은 이를 죽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이 위에 계시며,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3,31b)고 말한다. 이 때 “하늘”이 ‘본각’에 해당한다면, “거기서 오셔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이는 ‘시각’의 차원에 해당한다. 즉, 본래 그러한 자리의 구체화이다. 본래 그러한 자리에 있는 자이기에 그가 하는 모든 언행은 본래 그러한 자리를 대변해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3,34) 아들의 말은 아버지로부터, 예수의 말은 하늘로부터 왔다. 역으로 하늘에서 왔기에, 겉보기에는 땅의 말을 하는 듯 하고, 땅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듯 하지만, 그 속에 ‘하늘’의 말이 담겨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3,27)고 말한다. 예수의 일은 모두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본각-시각’의 구조는 ‘하느님-예수’/‘아버지-아들’의 구조와 상통한다.
3. 차이
물론 「대승기신론」과 「요한복음」에는 차이도 있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깨달음, 즉 ‘시각’의 순간에는 누구든 본래 타고난 그 여래의 성품을 이루게 된다. 중생과 부처의 원천적 동일성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중생들간 차이는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각’의 구조는, 앞에서 본대로, 아버지-아들의 관계에만 주로 해당된다.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여느 인간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느 인간이 하느님의 비밀을 알고 그 구원적 섭리에 동참하려면, 육화로서의 예수라는 중개자가 필요하다. 물론 「대승기신론」도 그 모든 깨달음의 진리는 석가모니불로 인해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그 석가모니불과 여느 중생은 결국 ‘불’이라는 사실에서 원천적 동일성을 지니는 것과는 달리 믿음으로 빛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사람이 곧 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물론 앞에서 본대로 불교와 그리스도교 전반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누구든 ‘아들’이라는 중개자를 통할 때, 그 아들이 아버지와 누리는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그 아들과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처럼, 그 아들을 믿는 이는 그 아들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믿는 이’를 예수의 친구라고까지 격상시킨다.
“내가 여러분에게 행하는 일을 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더 이상 종들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사실 종은 자기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친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여러분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15,14-15)
예수가 알려준 하느님과 인간의 원천적 관계를 실존적으로 실현할 때,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친구’라는 음성이 들여온다. 종은 주인과 수직적 관계에 있지만, 친구끼리는 수평적 관계에 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예수가 알려준 진리를 실현하게 될 때, 그 실현자는 예수와의 원천적 관계 안에 수평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한다: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저를 파견하신 사실과 또한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신 사실을 세상이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7,22-23)
아들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광을 다시 제자들에게 준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듯이 아들이 믿는 이 안에 있음을,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한 것처럼, 믿는 이들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 한다. 아버지의 인간 사랑은 아들 사랑에서 이미 다 보여졌다. 인간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체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아들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여느 인간들도 그 아들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압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10,14-15)
이런 식으로 해서 여느 사람들도 그 아들과 같은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믿는 이들이 예수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예수에게 ‘외아들’(monogenes)이라는 표현을 쓴다. 예수는 사실상 하느님의 ‘외아들’이다.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표현이다. 다른 이들도 원칙적으로 ‘아들’일 수 있지만, 결코 ‘외아들’은 아니다. 아들의 성품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예수와 ‘친구’로 불릴 수는 있지만, ‘외아들’의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외아들과 아버지가 누리는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외아들과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대승기신론」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전반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V. 아미타불과 예수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 할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지금까지의 비교는 대부분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지상 생애와 관련된 이야기들과 「대승기신론」의 비교였다. 그런데 예수가 지상을 떠날 무렵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정토불교의 시각과 대단히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특히 이것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두드러진다. 몇 가지 구절만 살펴보자: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겠습니까?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14,3)
예수는 아버지 집에 제자들이 머물 ‘자리’(mone)를 마련하러 간다고 한다. 아마도 불자라면 이것을 보고 법장(法藏)보살의 서원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토종의 소의경전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은 언젠가 법장보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무한한 과거세에 법장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보고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지복의 땅’(極樂, sukhavati)을 건설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는 무한히 오랫동안 고행을 한 끝에 자신의 서원을 완전히 성취하고 정토의 부처인 아미타불(阿彌陀佛), 즉 무량수(無量壽, Amitayus)불/무량광(無量光, Amitabha)불이라는 상징적 형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아미타불은 보신불(報身佛)이다. 보신불은 불타의 공덕, 법력, 기쁨의 형상이며, 중생을 구원하는 자비의 몸을 상징한다. 일체의 상(相)을 초월한 법신불이 상 아닌 상의 세계로 자신을 제한하여 내어준 부처인 것이다. 이러한 아미타불의 공덕으로 이미 구제의 길은 마련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은 법장보살이 그의 목적을 달성했고, 그 서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제 구제의 길은 모든 중생에게 열려 있다고 선언한다. 이제 중생의 할 일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외우는(南無阿彌陀佛!), ‘쉬운 실천’(易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을 실천할 때 정토에 왕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복된 소식’을 전해준 이는 석가모니불이었으니, 보신불은 화신불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알려지게 된 셈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진리란 인간의 창작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구체적인 노력에 앞서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체의 이름과 상을 초월한 불타로부터 상의 세계로 향하는 움직임이 먼저 있고서야 석가모니로 인한 역사적 매개도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을 초월한 절대(법성법신)가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부정하여 상대적 절대(방편법신)로 나타나는 움직임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3) 그래서 석가모니가 전한 구원 드라마는 사실상 법성법신의 자기 전달이다.
예수도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해놓고 다시 돌아와 자기가 있는 곳에 제자들도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약속을 믿을만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14,10a)는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들은 내 나름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물러 계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들을 하시는 것”(14,10b)이라는 사실, 한 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의 ‘불이적’(不二的) 관계이다. 아들이 말하고 일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아들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모습으로 스스로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 말의 신실성을 뒷받침해준다. 마찬가지로 ‘저쪽’에서 먼저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셨기에 인간의 구원 드라마는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은 “여러분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택한 것”이라 말한다(15,16a) 진여가 무명에 훈습하기에 그 무명을 제거하고 깨칠 수 있는 것이듯, 중생의 존재에 선행하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이미 있기에 중생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듯, 인간은 아들에 의한 본각의 구체화라는 사건이 먼저 있었기에, 즉 먼저 구원으로 택해졌기에 비로소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제자가 예수를 택했기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를 택했기에 구원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돌아와 제자들을 데려가겠다 말하는 예수는 분명히 역사적 예수이면서도 동시에 단순히 역사의 인물로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 말하지만, 사실상 이 때 예수는 떠나본 적이 없는 일상의 예수가 아니라, ‘다시 돌아온 예수’의 차원에서 말한다.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하지만, 그 ‘돌아올’ 예수는 사실상 다시 ‘돌아온’ 예수와 같고, 더 나아가 예수가 ‘앞으로 마련하겠노라’는 자리도 사실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자리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내주적(相互內住的) 관계(10,30; 14,9-10)에서 보듯, 제자들의 자리가 마련될 “아버지의 집”(14,2)은 동시에 “아들의 집”이기도 하며, 아들 예수는 이미 그렇게 마련되어 있는 진리의 완전한 구현자이기 때문이다. 법신불의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보신불인 아미타불에 대해 말하고 있듯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구체화로서 ‘지금 여기 있는 아들’이 ‘다시 돌아올 아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법신불, 화신불, 보신불이 부처 세계의 세 차원이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상즉적(相卽的)이고 상동적(相同的)인 존재이듯이, 아버지, 역사적 예수, 돌아올 아들 역시 비슷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삼대”(三大), 즉 본체(體), 속성(相), 작용(用)의 구조와도 통한다. 삼대(三大)가 대승인 일심(一心)의 세 측면이듯이, 아버지, 현재의 아들, 돌아올 아들은 한 분 하느님의 세 측면이다. 모두 상즉적(相卽的)이고 상호내주적(相互內住的)이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육화’, 즉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그랬듯이, 예수도 단순히 역사내적(歷史內的)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라는 화신불이 법신불의 초역사적 구체화로서의 보신불에 대해 진술하듯이, 역사적 존재인 예수가 다분히 초역사적 존재인 ‘다시 돌아올 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다시 돌아올 아들을 분명히 보여줄 이로 「요한복음」에서는 ‘협조자’(παρακλητος)를 거론한다.
예수는 아버지께 요청해 ‘협조자’를 세상에 보내주겠다 한다.(14,16) 그런데 이 협조자는 이미 제자들 안에 함께 머물고 있는 “진리의 영”이다.(14,17) 동시에 아버지가 보내주는 아들의 다른 이름이다.(14,26a) 그이가 오면, 그 동안 아들이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줄 것”이라 한다.(14,26b) 그 생각나는 내용의 핵심은 무엇이던가?: “그 날 여러분은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은 내 안에 있으며 나도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4,20) 즉, ‘아버지-아들-여러분’ 사이에 벌어지는 삼중적 상호내주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미래가 아니라 사실상 현재의 사건이다. 예수가 떠난 듯 했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듯 사실상 언제나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협조자가 오면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아들이 떠나고 협조자가 오고 과거의 일이 다시 떠올려지는 식으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이 진행되는 듯 해도,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사건은 영원부터 이루어져 있는 본래적 사실의 구체화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앞으로 ‘돌아올’ 것처럼 말하지만, 그는 이미 ‘돌아온’ 이나 다름없는 이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예수는 일체의 상을 넘어선 아버지의 전적인 구체화이다. 그래서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14,6)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은 그 아버지를 보여준 이(14,9)를 통해서일 뿐이다. “나무아미타불”을 믿고 외움으로써 정토에 왕생하듯이, 그래서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들이 다 해준다”(14,13-14)고 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쉬운 실천’(易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는 마치 아미타불이 불자들에게 지니는 그 깊이와 상통하는 깊이를 지닌다. 물론 ‘예수 = 아미타불’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가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정토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뜻도 아니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제자들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을 보는 불자들의 깊이와 상통하는 깊이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예수가 마련하고자 한 “여러분을 위한 자리”라는 표현을 듣고서 자신들의 “자리”/“있을 곳”을 떠올리는 그리스도인의 내적 깊이와 정토에 대한 믿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불자들의 내적 깊이는 서로 통하는, 비슷한 깊이의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의 결론도 어느 정도는 이와 통한다: “정토불교 신자들이 아미타를 실재의 총체적 양상으로 파악할 때 그것은 마치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그렇게 파악한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14) 그는 계속 말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말하게 될 때, 우리는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속에서 창조적으로 구속적으로 일하시는 영원한 말씀으로서 하느님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진리를 향해 문을 여는 진리 자체이다. 마찬가지로 정토불교에서도 아미타는 많은 다른 부처 가운데 한 부처가 아니다. 아미타는 모든 부처들 가운데 성육화된 실재 대신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 생기는 질문은 모든 부처 속에 성육화된 것으로서의 아미타와 이 세계 안에서 창조적 구속적 행위를 하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가 같은 실재에 대해 이름하는가이다. 내가 믿기로는 그렇다는 것이다.”15)
길희성도 같은 맥락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는 아미타불이 된 법장보살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존재로서 그의 육화라 해도 좋다.”16) 그래서 캅에 의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반대로 불교 신자들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17) 물론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미타불에 대해, 불자가 그리스도에 대해 서로 배움으로써 풍요로워질 수 있으리라는 캅의 지적에 대해 동의한다.
그러나, 위 인용문에서처럼, 그리스도와 아미타불을 같은 실재에 대한 다른 이름처럼 파악하는 데 대해서는 조심스럽다. 같은 실재라고 단언할 그 어떤 근거와 기준도 역사적 현실 안에 제약되어 있는 우리들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같은 실재라고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주장 역시 저마다 처한 형편에 따라 달리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18) 다만 그리스도인에게 지니는 그리스도의 ‘깊이’와 불자에게 지니는 아미타불의 ‘깊이’가 상통한다는 차원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이 ‘깊이’는 그리스도인이 불교를 보고 불교 역시 인간 구원의 종교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교적 근거이며, 마찬가지로 불자가 그리스도교를 보고 그리스도교 역시 인간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구제의 종교일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불교적 근거라고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동일한 실재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생명력을 유지해나가게 하는 그 근거가 저마다 비슷한 깊이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가 법장보살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그의 육화라며 다소 중립적으로 접근하는 길희성의 말이 본 논문의 취지와 더 부합하는 듯 하다. 그리스도와 아미타불은 동일한 실재라기 보다는, 각각 그리스도인과 불자들의 체험 안에서 서로 비슷한 깊이를 지니는 실재들인 것이다. 「대승기신론」은 물론 정토불교와 「요한복음」은 저마다의 구원론을 통해 그러한 깊이를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VI. ‘미혹에 빠진 아들’과 ‘탕자’
지금까지 정토불교적 시각을 참조하면서 「대승기신론」과 「요한복음」을 교차 서술하는 가운데 차별적인 언어들 안에 나타난 인간 구원의 길을 비교해보았다. 무엇보다 이들이 그저 상이한 말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론적 구조에서 상통하는 ‘깊이’가 있음을 보고자 하였다. 이 구조의 핵심은 역시 불각의 상황 안에 제시된 본각-시각의 관계와 인간의 어두운 현실 안에 제시된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서로 유사하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원천적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발생하는 결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비슷한 깊이의 실재가 차별적인 언어들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는 「금강삼매경론」과 「루가복음」 안에서도 보인다. 글을 마무리하며, 「금강삼매경론」에 실린 다음의 비유를 살펴보자:
“미혹에 빠진 아들이 손에 돈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시방(十方)을 돌아다니면서 50년이나 보냈다. 빈궁하고 곤고하여 그저 찾아 헤맬 뿐이었으나 제 몸을 지탱하기에도 부족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이와 같은 사정을 보고 말했다. ‘너는 돈을 쥐고 있으면서 왜 가지고 쓰지 않느냐? 뜻대로 필요한 바를 다 충족시킬 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 아들이 비로소 깨어나 돈을 얻고는 마음에 크게 기뻐하면서 돈을 얻었노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하였다. ‘미혹된 아들아 좋아할 것 없다.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뭐 좋아할 것이 있겠느냐.’”19)
이 비유의 요지는 돈(本覺)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줄 모르고 찾아 헤매던 아들(不覺)이 아버지(如來)의 도움으로 자기에게도 본래 돈이 있었음을 알고 기뻐하자(始覺) 아버지께서는 그 돈은 네가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이니 기뻐할 것도 없다며(本覺=始覺) 가르쳐 주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20)
그 메시지도 비교적 분명하다. 중생에게는 누구나 본래적인 깨달음이 주어져 있으니 그러한 사실에 눈을 뜨라고 이 비유에서는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깨닫기 전에는 깨달음을 찾아 헤매지만, 깨닫고 나면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비로소 깨닫는 듯 하지만, 사실 그것은 본래 주어져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새롭게 얻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인간은 본래 완성되어 있는 진리로 인해 구원되며, 이미 완성되어 있고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구원이 없고서는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는 말도 할 수 없다는 뜻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를 듣는 그리스도인은 아마도 ‘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듯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이른바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돈이 있음을 알지 못했던 ‘미혹된 아들’이 어느 순간 자기에게도 돈이 있음을 알게 되듯이, 저만의 욕심을 따라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이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는 아버지의 집임을 알고서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아들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다. 성서는 이 비유를 통해 아들이라는 신분은 도대체 아버지와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아들과 아버지는 도대체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예수의 다음과 같은 기도도 이와 통한다: “아버지께서 세상 창조 이전부터 저를 사랑하셨기에 제게 주신 저의 영광을 그들이 보게 하여 주소서.”(18,24) 이것은 언제나 사랑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야말로 인간 구원의 완성이요 희망이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사실로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미 누리고 있던 아버지와의 삶으로 돌아감으로써만 비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 역시 애당초 누리고 있던 본래적인 삶에 대한 기억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 본래적 삶으로 발생한 믿음 안에 그 본래적인 삶이 구체적으로 담기게 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의 사유 구조도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르면, 이미 깨달아 있어서 비로소 깨달을 것도 없이 완성되어 있는 인간 마음의 본체론적 측면, 즉 ‘심진여문’으로 인해 진지한 믿음의 발생(起信)도 가능해지고, 그로 인해 깨달음이 성립된다. ‘본각’이라는 선험적 진리와 그것의 주체적 수용인 ‘시각’이라는 후험적 실천에 의해 구원된다는 사실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시각’이란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이다. 사태를 잘 살피고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믿음 역시 ‘본래적인 깨달음’의 자기 구체화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대승기신론」에서는 강조한다. 본래적인 사실과 비로소 이루어진 사실 사이에서 가역성(可逆性)을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역성은 원천적 사실에 대한 실존적 체현 이후에 보이는 가역성이다. 체현되기 전에는 여전히 망상과 망념에 싸여 이러한 가역성을 보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 그에게 부여되어 있는 본래적 진리란 자신과 대상적으로 분리된 추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가역성은 실존적 체현 이후에 확증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입을 통해 “나의 아버지께서는 만유보다도 크시다”(10,29)며, 결국 신의 존재론적 주도권과 초월성을 인정하고, 실존적 체현 이후에도 신은 인간의 구체적 체험 안에 다 갇히지 않는 분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존재론적 우선성과 초월성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실존적이고 주체적인 체현 이후에 불성의 존재론적 주도권을 별도로 인정하지 않는 「대승기신론」과는 차별적이다. 그렇더라도 실존적 체현 이전의 세계에서 보자면, 인간의 경험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는 진리’와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진 진리’라는 이중적 진리관을 지니기는 양쪽 다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 드러나는 불교적 깊이와 「요한복음」에서 드러나는 그리스도교적 깊이가 서로 상통할만큼 깊으면서도 상대방을 자기 안에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포용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들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성과 차별성은 그리스도교와 불교 전반으로 확대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구원론적 형식 혹은 구조는 불교와 그리스도교를 저마다의 독특성 안에서 서로 연결해주는 든든한 하나의 다리가 되는 것이다.
1) 「대승기신론」의 원저자는 전통적으로 서기전 1-2세기 경 인물인 마명(馬鳴, Asvaghosha)으로 알려져 왔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 중국에서 찬술된 것이 분명하다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2) 馬鳴, 「大乘起信論」, ꡔ大正ꡕ 卷32, p.578ab; 「대승기신론」에서는 ‘염법훈습’을 ‘무명훈습’(無明薰習), ‘망심훈습’(妄心薰習), ‘망경계훈습’(妄境界薰習)의 세 종류로 구분하면서 이들이 각각 서로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보든 모두 순수한 하나인 마음이 현실적으로 동요하게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는 마찬가지이다.
3) ꡔ원불교전서ꡕ, 「대종경」, “전망품” 15.
4) 馬鳴, 앞의 책, p.575b.
5) 馬鳴, 앞의 책, p.578a.
6) 원효, 「대승기신론소」, ꡔ한국불교전서ꡕ, 1-748b.
7) 은정희 역주, ꡔ원효의 대승기신론소․별기ꡕ(서울: 일지사, 1991), pp.144-45.
8) 원효는 본각과 시각을 본리(本離)와 시리(始離)라는 말을 가지고 다시 설명한다.(원효, 「금강삼매경론」, 앞의 책, 1-611c) 본리(本離)란 말 그대로 본래적인 떠남이고, 시리(始離)란 비로소 떠남을 일컫는다. 비로소 망념이라는 것을 떠난 듯 했지만, 사실상 본래적으로 보면 떠날 아무 것도 없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떠난 것이 아니다. 경험적으로는 망념을 비로소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始離), 그 망념이라는 것 역시 본래 떠나 있었던 것이라는 점에서(本離), 사실상 비로소 떠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비로소 망념을 떠난다고는 하지만, 떠나고 보면 사실상 떨쳐진 것이란 아무 것도 없고, 새삼스럽게 일어난 변화도 없다. 본래적인 떠남이 스스로를 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리(本離)와 시리(始離)는 동일하며,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깨달음, 즉 ‘일각’(一覺)인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시각은 본각으로 인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시리 역시 본리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생심이 본래 진여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고, 중생심이 본래 더 이상 떠날 것도 없이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비로소 떠남으로써 그 본래적인 자리로 돌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없던 진리를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진리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요한 8,32). 본래적인 깨달음으로 인해 경험적인 깨달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9) 「대승기신론」에서는 종종 시각(始覺)을 불각(不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의 네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곤 하지만, 사실상 단계랄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다. 위 단계들은 본래적인 모습을 가리는 망념을 떨쳐버리는 정도에 따라 방편적으로 나눈 것일 뿐, 그 정도라는 것은 도대체 있지 않다고 「대승기신론」에서는 말한다. 중생심의 본체는 깨끗한 진여 그 자체이므로 단계라든지 망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단계를 구분하는 망념의 시초, 즉 중생심이 움직이는 시초를 주시하면 마음에 본래 망념의 시초란 없음을 알게 된다고 「대승기신론」에서는 말한다. 그렇다면 시각(始覺)이란 깨달을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인 셈이다.
10) 원효, 「금강삼매경론」, 앞의 책, 1-637a.
11) 원효, 「금강삼매경론」, 앞의 책, 1-631a.
12) 특히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에 의하면, 아미타불은 육도의 세계에 떠도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형상을 초월해 있는 법성법신(法性法身)이 형상을 지닌 방편법신(方便法身)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미타불은 무상(無相)의 세계를 버리고 중생이 살고 있는 상(相)의 세계로 오신 진여인 것이다. 스즈키(鈴木大拙)는 이 아미타불을 그리스도와 관련짓는다: “정토진종에서 아미타는 어떤 면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아미타는 빛(abha)이요 생명(ayus)이요 사랑이며, 그의 사랑과 생명으로부터 그의 원들을 발하며, 이 원들을 통해 아미타는 우리와 연결되는 것이다. 원은 중보자이며 아미타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수행하는 증보의 역할은 그리스도와 같은 효력을 지닌다.”(길희성, ꡔ일본의 정토사상ꡕ, 서울: 민음사, 1999, pp.251-52에서 재인용) 본원은 아미타불의 구원 의지와 힘이다. “다시 말하면 본원은 인간적 술어로 표현된 아미타 자신이다.”(길희성, 앞의 책, 같은 곳) 그리스도가 말씀(로고스)이며, 그 말씀으로 인해 일체 존재자들이 생겨난 것처럼, 아미타의 본원은 중생과 아미타를 잇는 중보자로서의 아미타 자신이다. 그리고 말씀의 구체적 육화가 역사의 예수이듯이, 이러한 아미타의 놀라운 구원 의지를 전해준 분은, 정토진종의 개조 신란(親鸞)에 의하면, 석가모니이다. 석가모니를 보면 실상 아미타를 보는 것이고, 아미타를 보면 실상 법성법신, 즉 진여 자체를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예수를 보면 초월적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단적으로 “나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는 예수의 말은 상(相)의 세계와 법신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13) 길희성, 앞의 책, p.263.
14) 존 B. 캅, ꡔ과정신학과 불교ꡕ, 김상일 옮김(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8), p.176.
15) 존 B. 캅, 앞의 책, p.172.
16) 길희성, 앞의 책, p.274.
17) 존 B. 캅, 앞의 책, p.177.
18)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졸저, ꡔ인간은 신의 암호ꡕ(왜관: 분도출판사, 1999), 제8장 및 졸고, “답답한 종교들의 세계”, ꡔ국제한국학회지ꡕ 제3집(1998)을 참조할 것.
19) 원효, 「금강삼매경론」, 앞의 책, 1-635a.
1) 제 손에 있던 돈을 확인하고 기뻐한다는 말은 그 전에는 그것이 없었다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뻐한다는 말은 무언가 새로 얻었다는 말이며 이것은 이전에 있던 것이 여전히 불충분한 것이었다는 말이 된다. 이미 주어져 있던 깨달음이 완성되어 있던 것이라면 비로소 깨닫는다고 하여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진정한 깨달음에는 기쁨으로 더해질 무엇이 있지 않다. 열반(涅槃)도 본각(本覺)도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원효, 「금강삼매경론」, 앞의 책, 1-634c) 또 모두에게 본래적인 깨달음이 주어져 있다는 점에서 범부와 성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자세한 해설은 원효의 주석을 볼 일이다(앞의 책,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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