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삶과 철학
(1889-1951)
- 박 병철 교수 -
1. 가계의 배경
18세기 중엽 라이프찌히에 헝가리와 폴랜드로부터 양모를 사서 영국과 네덜란드에 팔아 부를 축적한 유태인이 있었다. 헤르만이라는 이름의 이 유태인 양모상은 스스로를 유태인 사회로부터 멀리하고 개신교로 개종한 뒤 비엔나의 은행가의 딸 화니와 결혼하여 신분상의 변화를 꾀했다. 헤르만 일가는 곧 비엔나로 이주하여 사업을 번창시켰고, 11명의 자녀를 낳아 변호사나 법관, 장군 아니면 교수 등 비엔나의 유력 가문과 혼인을 맺게 하여 자신의 유태인으로서의 특성을 탈색시키면서 비엔나 부르조아의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헤르만과 화니의 조율된 교육에 잘 순응한 다른 형제들과 달리 여섯 번째 아이인 칼은 어려서부터 독립적이었으며 반항적인 기질을 발휘했다.
11세 때 이미 첫 가출 경험이 있었던 칼은 17세가 되던 해 다시 가출하는데 이번에는 무일푼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술집에서 웨이터나 바텐더 일을 하기도 했고, 또 바이올린이나 독일어 교습을 하면서 방랑생활을 전전하다 2년만에 비엔나로 돌아오는 등 강력한 독립심과 자립심을 어려서부터 드러냈다. 비엔나에서 기술고등학교를 나온 후 그의 매형의 소개로 압연공장에서 제도공으로 일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철강공업에 발을 들여놓게 된 칼은 그로부터 5년도 채 되지 않아 그 공장을 경영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고, 타고난 개척정신과 탁월한 경영수완으로 10년 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철강산업가이자 가장 부유한 사람의 하나가 되었다.
칼은 26세가 되던 1873년 은행가의 딸 레오폴딘과 결혼했는데, 역시 다른 열 명의 형제들과 달리 유일하게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태계 신부를 선택했다. 당시 산업계에서 승승장구하여 축적한 부 덕택으로 칼과 레오폴딘은 비엔나의 저택에서 귀족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면서 5남 3녀의 자녀를 낳아 키우게 된다. 레오폴딘은 매우 탁월한 음악적 감각을 지닌 인물로 그들의 저택을 비엔나의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브람스와 말러 등은 칼과 레오폴딘에 의해 정기적으로 초대된 음악가들이었고, 가난하고 불우한 여러 예술가들이 그들의 후원아래 활동할 수 있었다.
이처럼 철저하게 비엔나 상류사회에 적응하며 최고의 부와 문화적 생활을 누리게 된 유태계 양모상의 아들 칼과 그의 부인 레오폴딘에게서 20세기 철학의 전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들 중의 하나가 1889년 4월 29일에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바로 이제부터 이 글에서 다루게 될 내용의 주인공이다.
2. 유소년기
위로 네 명의 형과 누이 셋이 있었던 비트겐슈타인은 어려서 그리 탁월한 재능을 보인 아이는 아니었다. 특히 맏형 한스가 이미 네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면서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비교될만한 음악적 재능을 가졌던 것에 견줄 때, 루드비히는 청년기가 지날 때까지 자신에게 어떠한 진정한 재능이 있는지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공학을 공부하여 철강산업을 일으킨 아버지 칼은 자식들에게도 공학과 비즈니스를 공부할 것을 강요했다. 스스로 반항적 소년기를 보낸 칼은 아들들에게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교육과 규율을 강요했는데, 결과는 비극적인 것이었다. 루드비히의 맏형 한스와 셋째 형 루돌프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예술적 재능에 반하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태도를 못이기고 각각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둘째 형 쿠르트 역시 제1차 세계대전 중 자살한다.
아버지 칼의 강압적인 태도와 관련된 두 형의 죽음을 어려서 목격한 루드비히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소년시절을 보낸다. 13살까지 집에서 가정교사에게서 교육을 받은 루드비히는 재봉틀의 모형을 만들기도 하는 등 공학적 재능도 보인지라 자연스럽게 린쯔의 한 기술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린쯔에서의 3년 동안에도 루드비히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성적은 늘 중하위권에 머물렀고, 친구들과의 교제도 그리 원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린쯔에서의 학교생활이 루드비히에게 가져다 준 영향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의 책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스스로 사악하고 비겁한 유태인임을 혐오하면서 천재로서의 삶이 아니라면 살 가치가 없다는 내용의 책 <성과 성격>을 쓰고 23세의 나이에 베토벤이 임종한 집에서 자살한 바이닝거는 당시 비엔나의 컬트적 인물이었고, 루드비히는 그에 빠져들었다. 그가 1903년경부터 러셀(Bertrand Russell)을 만나게 되는 1911년까지 끊임없는 자살충동에 빠져있었음은 그의 가계가 보여준 자살성향과도 관계가 있겠지만, 바이닝거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실로 비트겐슈타인은 천재로서의 삶을 희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잠재된 천재성은 어린 시절 형들의 비극을 통해 상당기간 동안 표면으로 떠오르지 못했고, 아버지의 공학에 대한 집착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닝거의 책은 '천재가 아니라면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루드비히에게 심어준 듯 하다. 특히 유태계였던 그에게는 바이닝거의 자조적인 유태인 혐오증이 체감으로 느껴졌었던 것 같다.1) 어쨌든 루드비히의 자살충동은 러셀의 지도 아래 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현저하게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아 러셀과의 만남은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천재성이 무엇인가를 확인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루드비히는 한때 린쯔에서 학업을 마치면 비엔나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던 볼츠만(Ludwig Boltzmann) 밑에서 공부할 계획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1906년 볼츠만의 자살은 그 계획을 무산시켰고, 베를린의 샬로텐부르그 기술전문대학으로 진학한다. 베를린에서의 2년 과정을 마친 그는 영국의 맨체스터대학으로 가서 항공공학을 전공하기로 하는데, 이에는 아버지 칼의 기대에 대한 의무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아직 라이트 형제도 알려지기 전 비행기라는 교통수단이 태동되기 직전의 시기에 첨단 공학분야임에 틀림없었던 항공공학을 선택한 루드비히의 결정에 아버지 칼이 기쁨으로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음은 분명한 일이다.
3. 영국행
1908년 만 19세의 나이로 영국으로 유학을 간 비트겐슈타인은 비행기 엔진의 설계와 실험에 3년을 보내게 된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엔진을 사용한 비행을 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어쩌면 비행기 하면 라이트 형제가 아닌 비트겐슈타인을 우리가 기억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저 비행기 엔진의 설계와 제작뿐 아니라 직접 비행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학을 공부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적 문제들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친구들의 권유로 러셀의 <수학의 원리들>(The Principles of Mathematics)을 읽게 되면서 그의 주된 관심사는 수리철학적인 문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미 프레게가 러셀과 유사한 관심으로 수학의 기초에 관한 책을 썼음을 알게 된 비트겐슈타인은 1911년 여름 예나로 프레게를 찾아가지만, 그에게서 케임브리지 대학의 러셀을 찾아가 보라는 조언을 받게 된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철학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바로 1911년 10월 18일 오후 22살의 청년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방에서 동료와 차를 마시고 있던 러셀 앞에 예고 없이 나타난 것이다. 러셀은 수리철학에 대한 정열로 자신에게 배우고자 찾아왔다는 이 이국 청년을 그 날 오후 자신의 강의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2)
러셀의 기록에 의하면, 그로부터 4주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실과 연구실로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질문을 퍼부으며 토론을 이끌어나가다 시피 했다. 러셀에게는 이 외국인 학생이 사뭇 새롭고도 신기했지만 그가 철학적으로 뛰어난 학생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해 가을학기가 끝나던 11월 27일 비트겐슈타인이 찾아와 자신이 철학과 공학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으니 철학에 재능이 있는지를 알려달라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러셀은 그에게서 어떠한 철학적인 특이함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겨울방학이 끝나고 이듬해 1월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재능이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요청했던 글을 받아보게 되면서, 러셀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태도는 물론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운명은 완전히 변하게 되었다. 러셀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확인한 비트겐슈타인은 비행기에 대한 계획을 완전히 접고 2월 1일 케임브리지 대학에 등록한다.
4. 케임브리지
비트겐슈타인이 러셀과 함께 케임브리지에서 철학을 공부한 것은 방학기간을 다 합해봐야 약 1년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의 학문적 열정과 흡인력에 완전히 반한 나머지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자서전에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을 전통적으로 이해할 때 열정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며 우월한, 그가 아는 가장 완벽한 천재의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3) 그가 예전에 동료 철학도였던 무어에게서 발견했던 전형적인 천재성의 모델을 이제는 자신의 젊은 제자에게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는 수학의 기초에 대해 연구를 끝낸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후계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이 연구를 이어나가 주기를 기대하게 된다.
러셀은 논리학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이미 저명한 논리학자였던 존슨(W. E. Johnson)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그 지도라는 것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존슨과의 첫 만남에서 존슨이 자신에게 가르쳐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고, 존슨도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을 가르치려 하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천재성과 더불어 비트겐슈타인의 직선적이고 굽힐줄 모르는 성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러셀의 학생으로 머물 수만은 없게 했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준 철학적 영향력은 이제 마치 던져진 부메랑처럼 방향을 전환하여 러셀 스스로에게 새로운 힘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때 러셀은 철학에 대한 자신의 열정이 눈덩이라면 비트겐슈타인의 그것은 눈사태와 같다고 했는데, 곧 그것이 열정에만 해당되는 비유가 아니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는 발표하기 위해 쓰고 있던 글을 수시로 비트겐슈타인에게 보여주었고,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입장이 러셀의 그것과 다르다고 생각되면 여지없이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러셀은 그러한 젊은 제자의 비판에 불편해 했고, 그러한 긴장은 1913년에 이르러 심각한 지경에 이른다.
러셀은 당시 <수학원리> 이래 자신의 철학체계의 완성을 위한 왕성한 의욕을 가지고 판단의 이론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때까지 쓴 원고 중 여섯 챕터의 분량만이 몇 년 뒤 철학지 <모니스트>에 실렸을 뿐 책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원고를 읽은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에서 온 충격 때문에 출판을 포기한 것이었다. 어느새 자신이 1년여 가르친 제자로부터 배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러셀이 보낸 한 편지에서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내뱉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전부 틀렸으며, 그 이론이 가지는 난점을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즉 그가 이미 내 입장을 시도해 보았지만 그것이 제대로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나는 그의 반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설명이 무척 불명료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옳으며, 내가 보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보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내 이론에서 무엇이 틀렸는지 나도 알 수 있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군요. 그리고 그런 우려가 계속해서 원고를 쓰는 기쁨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점만을 가지고 계속 쓸 수밖에 없는데, 그게 전부 틀린 내용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또, 그렇게 틀린 내용을 계속 쓴다면, 비트겐슈타인은 나를 정직하지 못한 사기꾼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아, 이제 젊은 세대가 문을 두드리고 있군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비트겐슈타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할까 봅니다."4)
케임브리지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은 러셀 외에도 무어의 강의를 들었으며, 경제학자 케인즈(John M. Kaynes), 평론가 스트라키(Lytton Strachey)와도 교분을 가졌다. 특히 그는 무어의 순수성을 좋아하여, 자주 만나 철학을 논하고 음악회에 같이 가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1913년에 케임브리지를 떠나 아이슬랜드와 노르웨이로 여행을 한 뒤 노르웨이의 오지에 오두막을 짓고 1914년 여름까지 그곳에 칩거했는데, 겨울에는 무어를 그곳으로 초대하여 그가 연구한 논리학에 대한 생각을 무어로 하여금 받아 적게 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그는 무어에게 그 글을 학사학위의 논문으로 제출해 줄 것을 요청하지만, 케임브리지로 돌아간 무어로부터 서문과 각주 등 논문형식을 갖추지 않은 글을 논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학교당국의 입장을 전달받는다. 무어에게 아무 책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격노하여 무어에게 절교를 선언하고, 그로부터 15년 후의 어느 날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재개하기 위해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오던 날 기차 안에서 둘이 우연히 만날 때까지 소원한 관계를 유지한다.
5. 1차대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군에 입대한다. 탈장으로 인해 군 면제 판정을 받았으나 자원한 것이었다. 대학 교육을 받았고 공학적 지식이 있었으므로 후방에 배속되어 전차 수리 등의 임무를 부여받을 수 있었으나, 그는 최전방의 가장 위험한 지역에 배치되기를 강력히 원했고, 한때는 그러한 위치에서 목숨을 건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참전용사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의 군 경력은 1919년 8월 이탈리아의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남으로써 마감하게 된다. 약 10개월간의 포로생활을 포함한 5년여의 참전기간 동안 그는 훗날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로 알려지게 되는 책의 원고를 완성한다. 원고는 그가 포로가 되기 전에 이미 완성이 되었지만, 몬테 카지노의 수용소에서야 러셀과 프레게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복사본을 보낸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이 두 사람의 반응을 기다렸지만, 프레게에게서 날아 온 편지를 보고 그가 자신의 원고를 단 한 줄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반면 그는 러셀만은 그의 저작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의 책이 단 하나의 영혼에 의해서도 이해되지 않기는 매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논고>의 축약적이고 간결한 문체로 인해 러셀도 그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19년 겨울 헤이그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만나 머리를 맞대어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게 된다. 그 결과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전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러셀은 <논고>를 매우 훌륭한 저작으로 인정하고 출판을 추진하기로 한다. 그러나 세계대전을 치른 유럽의 어려운 경제사정은 둘째치고, 무명의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출판목록에 올리기를 원하는 출판사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가 출판되기를 무척 고대했지만, 출판의 성패를 떠나 이미 철학을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산간 지방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될 작정으로 교사자격증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철학을 포기하기로 결심한 내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러한 결심의 논리적 이유는 <논고>에서 살필 수 있다. "서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이로써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저작이 완전무결한 것이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풀어야 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사람에게 철학을 떠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던 것이다.
결국 출판 문제를 위임받은 러셀의 노력으로 <논고>는 세상 빛을 보게 된다. 1921년에 독일어 원본이 출판되었고, 1922년에는 영국에서 독영 대역본이 나왔다. 독일어 판은 출판사의 무성의 덕분에 논리적 기호들을 포함한 많은 오자가 교정 없이 그대로 인쇄된 반면, 독영 대역본은 번역에서부터 교정까지의 과정이 비트겐슈타인과의 접촉 아래 이루어졌다. 출판사 케간 앤 폴(Kegan and Paul)은 러셀의 해제를 본문 앞에 실을 것과 인세를 줄 수 없다는 조건 아래 출판을 승낙했다. 그러나 <논고>의 출판에 진정 특이할 점이 있다면, 그것을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당시 18살의 케임브리지 학부생 램지(Frank Ramsey)였다는 것이다. 그의 어린 나이 덕으로 출판된 <논고>의 표지에는 비트겐슈타인과의 접촉부터 편집과 출판의 모든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을 주관한 오그덴(C.K. Ogden)의 이름이 찍히게 되었다.5)
6. 초등학교 교사
책이 출판될 무렵 이미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20세기 철학의 걸작을 쓴 그는 더 이상 철학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초등학교 교사 이전에도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직업적 의미의 철학자로서의 그것은 아니었지만, 5년간의 참전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훨씬 더 종교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주둔지에서 구해서 읽은 톨스토이의 <복음서>에 감동하여 늘 그 책을 지니고 다녀 군 동료들로부터 "복음을 지닌 자"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다. 종교적 테마가 스며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까라마조프의 형제들>도 탐독하였으며, 전장에 투입되기 전에는 일기에 신의 가호를 비는 기도를 자주 적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은 전쟁에서 돌아와서 그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한푼도 남기지 않고 전부 그의 누이들과 형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러한 행동 역시 종교적 영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발발 전까지만 해도 그는 갑부의 아들답게 가구 하나를 골라도 값에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예술작품 수준의 물건을 고르는데 여러 날을 소비할 정도였다. 노르웨이로 여행할 때 케임브리지에서 사귄 유일한 동년배 친구 핀센트(David Pinsent)를 위하여 고급 호텔에서의 숙박을 포함한 여비 일체를 대신 지불하기도 했던 비트겐슈타인이었다. 그러나 5년 동안의 전쟁이 그를 바꾸어 놓았다. 재산양도를 위한 공증 절차를 밟으면서 자신에게 남겨진 재산이 단 한 푼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번 확인했다고 하니 그는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러셀과의 관계도 소원해진다. 그가 무어에게 그랬듯이 참을성 없고 직설적 성격 때문에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러셀과 절교한 것처럼 여길 수도 있으나, 둘 사이에 편지왕래가 끊긴 것은 사실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대해 답장을 하지 않게 되면서부터이다. 러셀의 그러한 행동 역시 종교적 계기가 내재된 것으로 보인다. 유명한 무신론자였던 러셀은 도덕적으로도 자유분방한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러셀은 오랜 정부였던 모렐 여사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도라 블랙(Dora Black)과 재혼하기 위해 아내 알리스와 이혼했다. 러셀의 성적 분방함을 못마땅히 여기던 비트겐슈타인은 그에게 종교인이 될 것을 권유했다. 무신론에의 신념이 극에 달했던 러셀로서는 <논고>를 통해 신비주의를 보았고, 마침내 비트겐슈타인이 신비주의의 절정에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상황은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적인 진지함이 부담스러워진 러셀이 연락을 끊게 만든 것이다.6)
이렇게 변해버린 인간 비트겐슈타인의 산간마을 교사로서의 새로운 삶은 그리 만족스럽지도 성공적이지도 못했다. 그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철자 사전을 만들어 출판할 정도로 진지한 교사였지만, 어린 학생들을 잘 다루는 재능은 없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너무 높은 수준의 산수를 요구하곤 했고, 자신의 방식대로 잘 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는 체벌을 가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당연히 학부모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동료 교사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처음 부임했던 트라텐바흐(Trattenbach)에서 푸크베르그(Puchberg)로, 그리고 다시 오테르탈(Otherthal)로 전근해야 했다. 마지막 부임지가 된 오테르탈에서 체벌 중에 한 학생이 쓰러진다. 이 사건은 결국 비트겐슈타인을 교직에서 떠나게 만들었다. 1926년 4월이었다.
7. 건축가 비트겐슈타인
다시 비엔나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교사로서의 삶에서 맛본 좌절을 치유할 계기가 필요했다. 그는 카톨릭 수사가 될 것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수도원의 정원사로 일하면서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안식을 꾀했다. 그리고는 이어서 그의 누이 그레틀이 추진하고 있던 저택 건축작업에 관계하게 된다. 사실 이 일은 건축가였던 그의 친구 엥겔만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청년시절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 근대 건축에 매료된 비트겐슈타인은 초기에는 엥겔만과 공동작업으로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의 내부에 관한 한 완벽히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어갔다. 그는 마치 <논고>의 논리적 엄밀성을 건축에 체현하기라도 하듯이 밀리미터의 오차에 신경을 써가며 문짝과 창문틀 그리고 문고리 등이 디자인에 맞게 정확하게 시공이 되는지를 철저하게 감독했다. 모든 장식은 악이라는 로스의 모토를 충실히 따라 일체의 불필요한 장식이나 치장이 결여된 이 저택은 만 2년만에 완성되었고, 이 작품으로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에서 건축가로 알려지기도 했다. 이 건물은 2차대전시에는 러시아 군이 접수하여 사용했고, 1971년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스톤보로에 의해 매각되어 재개발의 운명에 놓이기도 했다. 지금은 비엔나의 유적으로 지정되어 불가리아 대사관에서 사용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교사와 정원사, 그리고 건축가로서 30대를 보내고 있을 때,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다. 일부 철학자들은 <논고>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아보았지만, 너무도 간결하게 씌어진 그 책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결국 케인즈가 중심이 되어 비트겐슈타인을 대학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논고>의 숨은 번역자 램지가 산간마을로 비트겐슈타인을 서너차례 찾아가지만 함께 <논고>를 상세히 읽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풀어야 할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철학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1920년대 초 새로운 논리학과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카르납(Rudolf Carnap), 슐릭(Moritz Schlick), 노이라트(Otto Neurath) 등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비엔나 써클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가 마치 그들의 성서처럼 읽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 그 중 <논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슐릭은 수년간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을 추진하지만, 그 모임은 1927년에서야 실현된다. 그는 비트겐슈타인을 자신의 써클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몇몇 써클의 멤버들과 비트겐슈타인의 집에서 주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 첫 모임에는 슐릭과 더불어 카르납,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 파이글(Herbert Feigl) 등이 참여하였는데, 철학적 주제에 대한 진지한 의견을 듣기 위해 찾아온 이들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라는 이유로 등을 돌리고 앉은 채로 타고르의 시를 읽었다고 한다.
비엔나 써클의 멤버들과의 모임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누이를 위한 저택의 건축에 몰두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의 만남은 궁극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이 다시 철학을 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비엔나 써클과 사상적 동질성을 공유한 것은 아니었고, 써클의 일부 멤버들도 비트겐슈타인과의 조우를 통해서 그의 입장이 자신들의 생각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슐릭을 통해 수학의 기초에 관한 램지의 논문을 접하게 되고, 램지와의 편지를 통해 철학적 아이디어를 교환하게 된다. 램지는 <논고>를 기초로 하여 러셀이 <수학원리>에서 제시한 논리주의의 관점을 발전시키고자 했는데, 이점에 자극받아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서서히 철학적 사색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결국 진행 중이던 건축작업이 마무리된 1928년 말 비트겐슈타인은 케인즈에게 편지를 보내 케임브리지를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8. 다시 케임브리지로
1929년 1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기차역에서 케인즈의 영접을 받게 되어있었지만, 그의 귀환을 축하라도 해주듯 비트겐슈타인은 기차 안에서 우연히 자신의 옛 스승 무어와 마주친다. 1914년의 절교 후 첫 만남이었지만, 이 둘은 다시 만나는 순간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시 우정을 이어간다. 비트겐슈타인은 무어와 케인즈 외에도 램지와 급속히 친해진다. 사실 그는 램지를 지도교수로 한 학생신분으로 케임브리지에 복귀한 것이었다. 이미 전설 속의 인물이었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케임브리지에서의 제자리를 찾아주기 위해 <논고>를 논문으로 하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결국 무어와 러셀이 심사위원이 되고, 26세의 수학교수 램지가 지도교수가 되어 비트겐슈타인의 박사학위 심사가 이루어졌다. 1922년 이후 비트겐슈타인과 절교 상태로 지내온 러셀은 편안한 마음으로 심사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심사를 시작하면서 "내 생애에 이렇게 불합리한 일을 해본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미 철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책을 심사하여 학위를 주는 일은 분명 불합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은 바로 다음 날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학생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한 지원이었다.
이듬해부터 비트겐슈타인은 강의를 맡게 된다. 강의의 제목을 무엇으로 했으면 좋겠냐는 브래스웨이스 교수의 물음에 그는 "강의의 주제는 철학이 될 것입니다. 철학 외에 어떤 다른 제목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이후의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강의는 "철학"이라는 제목 아래 행해졌다. 그는 처음에는 강의실에서 강의를 했지만, 대학 내에 숙소를 배정받은 후부터는 주로 자신의 숙소에서 15명 남짓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쳤다. 그의 학생들 중에는 옛 스승 무어도 끼어있었는데, 무어는 3년간 충실히 노트를 해가며 옛 제자의 강의를 들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강의 방식은 그의 글만큼이나 독특했다. 미리 강의안을 준비하는 일은 없었고, 항상 진지하고 심각한 생각을 짜내듯이 강의했다. 때로는 오랜 침묵을 동반했으며, 때로는 자신의 멍청함을 질책했고, 놀라운 집중력으로 스스로를 탈진시키곤 했다.
강의와 더불어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참전 시에 그랬듯이 공책에 일기 쓰듯이 날짜를 적어가며 자신의 철학적 사색의 결과물을 토해냈다. 일단 쓴 글을 뒤에 다시 고치고, 어느 정도 마음에 들면 타자본으로 만든 후 다시 고치는 방식으로 그의 사상의 발전을 기록해 나갔다. 그런데 이제 그는 군인도, 교사도, 정원사도, 건축가도, 부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연구비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에 다시 연구비를 신청하는데, 후에 <철학적 의견>(Philosophical Remarks)으로 출간된 책이 당시 연구비 심사를 위해 제출한 원고였다. 또 그는 자신의 강의를 학생들로 하여금 받아 적게 하곤 했는데, 그 결과물 중의 하나가 우리가 지금 <청색책과 갈색책>(The Blue and Brown Books)으로 알고 있는 책이다. 비트겐슈타인의 1930년대의 생각을 대변하는 이들 저작은 <논고>에서 그가 제시한 내용과는 다른 생각들을 포함하고 있다. 과거 그가 확신했던 것과는 달리 <논고>에서 시도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완결적이지는 못했던 것이다.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철학을 떠난 것이 그에게는 논리적 귀결이었듯이, 이제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고 다시 철학으로 돌아온 것 역시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역할이 그에게 잘 어울리지 않았듯이 대학에서의 강의도 그에게 성공적인 것이었는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여느 교수들과 다른 독특함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분명하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기는 했지만, 그가 그런 생활을 편안해하고 만족해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철학을 그만둘 것을 종용하곤 했으며, 박사과정 중에 미국에서 유학 온 말콤(Norman Malcolm)에게는 대학교수가 되려는 계획을 재고해 볼 것을 권유하곤 했다. 그는 권위적인 케임브리지의 분위기도 혐오했는데, 일례로 넥타이를 매고 점잖게 식사하기를 요구하는 교수식당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의 강의는 언제나 소수의 충성스런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철새와 같은 학생들이 자신의 강의에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방대한 양의 글을 끊임없이 쓰고 있었지만 발표하지 않았던 그의 행동은 자신을 철학계는 물론 케임브리지로부터 스스로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케임브리지의 경직된 분위기에 대해 지속적인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1935년 소련을 여행한다. 궁극적으로는 소련에 이주할 계획으로 그의 제자였던 스키너(Francis Skinner)와 러시아어를 배우기도 했던 터였다. 그러나 그의 여행은 모스코바의 분위기가 케임브리지 이상으로 경직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했던 것 같다.
9. 철학교수
1936년에 그가 소속했던 트리니티 칼리지와의 계약도 끝나게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고독을 즐길 수 있는 노르웨이로 가서 칩거하며 연구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1937년 나찌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게 되자 그는 영국으로 귀화할 의향을 가지고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마침 1939년 무어가 철학교수직을 퇴임하자 비트겐슈타인은 그 후임으로 선임된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던 브로드(C.D. Broad) 조차도 "비트겐슈타인을 철학교수직에 앉히지 않는 것은 아인슈타인을 물리학교수직에 앉히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철학교수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오래 지속된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이번에는 영국의 병원 등지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였으며, 1947년에는 그나마 교수직을 사퇴한다. 1929년 이후의 비트겐슈타인은 대학에 속해있기는 했지만, 그 전과 마찬가지로 자원봉사, 여행 등 여러 활동을 계속해서 하고 있었다. 물론 철학 연구도 지속적으로 해나갔다. 그래서 그가 1930년대 중반부터 써온 원고를 묶어 책으로 출판하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은 통상적으로 그의 후기 철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지게 되는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의 원고였다. 그는 1938년과 1944년에 각각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와 접촉하여 출판에 합의했지만, 그가 살아있는 동안 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처럼 그는 자신을 학계로부터 격리시키면서 소수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 사람들은 <논고> 이후에 그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갔는지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 1930년대에 그가 그의 강의를 학생들로 하여금 받아 적게 했던 노트들은 청색 표지와 갈색 표지로 각각 제본되었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널리 읽혀졌다. (<청색책과 갈색책>) 그의 철학에 대한 이 같은 비공식적인 전파는 때로는 비트겐슈타인을 무척 화나게 했다. 그는 자신이 그러한 방식으로 알려지면서 자신의 입장이 완전히 왜곡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서 힌트를 얻어 그들의 독창적인 생각으로 세상에 발표할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일례로 비트겐슈타인은 1933년 브래이스웨이트(R.B. Braithwaite)가 쓴 "철학"이라는 글을 읽고 격분하는데, 그것은 당시 케임브리지에서 가르치고 있던 브래이스웨이트가 그 글에서 최근의 자신의 철학적 경향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 자신의 입장을 왜곡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의 저명 철학잡지 <마인드>에 기고문을 보내어 브래이스웨이트의 글이 자신의 입장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렸고, 브래이스웨이트로 하여금 역시 <마인드>에 그점을 인정토록 하는 기고문을 편집자에게 보내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완벽에 가까운 지적 결벽증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물론 1951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까지도 그의 철학에 대한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데 일조했다.
10. 멋진 삶
교수직을 그만 둔 비트겐슈타인은 아일랜드의 한적한 해변가 마을에 칩거하는데, 1949년에는 말콤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3개월 동안의 미국여행 중 그의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영국으로 돌아와 진단을 받은 결과 암으로 판정된다. 악화된 건강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사색을 멈추지 않았으며, 글쓰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은 여생을 과거에는 제자였지만 이제는 절친한 친구가 된 폰 리히트(G.H. von Wright), 앤스콤(Elisabeth Anscomb), 리스(Rush Rhees)와 같이 살기 위해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런던 등지를 오가며 보낸다. 마지막까지 그를 돌본 의사는 그의 제자 드루리의 소개로 알게 된 베반 박사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의 병원에서 임종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했고, 결국은 베반 박사의 배려로 그의 집에서 생의 마지막 몇 주를 보낼 수 있었다. 멋진 삶을 살았다고 사람들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뒤로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1951년 4월 29일이었다.
62년간의 그의 생애가 과연 멋진 것이었는지는 물론 비트겐슈타인 스스로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눈에 그것은 결코 평범하거나 순탄한 삶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청년기까지는 갑부의 집안에서 부를 향유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누렸지만, 30대 이후에는 스스로를 가난의 지경으로 몰고 가 소유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또 그는 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를 확인할 정도로 일생동안 일종의 종교적 죄의식에 시달렸으며, 최소한 두 명의 제자와 이룰 수 없는 동성애 관계에 빠지기도 했지만,7) 한 때는 조카의 소개로 만난 스위스 출신의 마구어리테(Maguerite Respinger)라는 여인과의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그는 마구어리테와 노르웨이의 통나무집으로 단 둘이 여행을 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지만, 당시 비엔나의 멋쟁이 여성과 팔꿈치가 다 헤어진 외투를 입고 다니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비트겐슈타인이 잘 어울리는 커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단 둘만의 여행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은 마구어리테를 하루 종일 방치한 채,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면서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구어리테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일 것이다.
결국 독신으로 외로운 삶을 마감했지만 그에게는 역시 충실한 제자와 친구들이 있었다. 그는 유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원고에 대한 소유 및 처분권을 폰 리히트, 앤스콤, 리스에게 준다고 적었다. 이들 세 사람 모두 나중에 그 소식을 알고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원고를 검토했는데, 그 방대한 분량에 놀랐다고 한다. 특히 폰 리히트의 꼼꼼하고 탁월한 원고의 검토 덕으로 현재 비트겐슈타인의 유고는 매우 체계적인 카탈로그 분류가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서 최근에는 유고 전체가 CD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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