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좌파를 공격할 때에 대체로 자주 쓰는 무기는 "현실성"입니다. 전 고교졸업생의 거의 86%가 대학진학을 하는 요즘 같은 사회에서 무상 대학 교육을 하자는 게 과연 현실적이냐, 이러려면 세율을 높이다보면 조세저항에 부딪칠 게 아니냐, 아니면 하도급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100만원 선에서 확 올라버리면 결국 한국 자동차와 휴대폰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 아니냐, 이런 식의 공격들입니다. 무상 대학 교육이나 하도급 영세기업의 노동자에 대한 처우 개선 그 자체가 틀렸다는 말을 이들은 요즘 같은 사회에서 참아 못하는 것이고, 또 이와 같은 조처들이 과세수입이 많고 기업 주식을 갖고 있는 본인들의 이해관계에 맞지 않다는 말도 아무래도 하기가 뭐하지 않습니까? 한국 같이 아직도 "명분"과 "대의"가 공공영역에서 중요시되는 사회에서는 나는 내 잇속만 챙긴다는 인상을 남기면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대신에 "현실성" 타령을 하면 우국지사의 자세를 취하기가 좀 쉽죠. "좌파 얼간이들이 국민 경제를 망가뜨리려 하는데, 오로지 우국충정에 가득찬 나는 국가와 국민을 살리려 한다"는 식입니다. 국가/국민주의가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사회에서는 보수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발화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 번 기본적인 사색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인정할 것을 인정하자면, 좌파의 길은 우파의 길보다 훨씬 더 험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보수의 이데올로기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맞추어서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자는 이야기 정도이고, 보수의 철학적인 기반은 어디까지나 에드먼드 버크 (1729-1797)의 성악론적인 "현실에의 안주" 정도 밖에 발전되기 어렵습니다. "원죄의 멍에를 지고 있는 인간들의 세상은 늘 혼란스럽고 불완전하니 모순된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들의 갈등을 봉합해나가면서 사회 전체를 통섭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와 교회가 필요하다. 유한한 인간은 그 제한된 이성으로 무한한 세계나 우주의 비결을 이해할 수 없으니 이성보다 전통, 전례, 여태까지 해온 방식 등은 먼저다. 불평등한 사유재산제가 없어지면 인간들이 게을러질 것이니 평등은 망상이다. 이성에 기반한 이상보다 현실은 먼저고, 좋을지 나쁠지 알 수 없는 변화보다 현상의 기본적 유지는 먼저다". 프랑스 혁명에 기겁한데다가 인간의 능력 그 자체를 매우 낮게 평가하는 버크의 이 철학을 따르는 것은 사실 마음 편한 길입니다. 버크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입국하고 있는 재벌 총수를 맞이할 때에 무슨 마피아 갱처럼 일제히 깊이 절하는 그 부하들을 이상하게 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인간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재벌과 같은 "사적인 군주국"들이 부득이하게 필요하다는 논리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용산참사에 분개할 것도 없죠. 서로 모순된 이해관계의 갈등을 국가가 그 철권으로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그 모든 비합리성, 부조리를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보수주의 철학을 따르면서, 세상을 아주 마음 가볍게 살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의 기저에 "불완전한 인간과 세계를 그냥 그대로 두자"는 취지가 담겨져 있기에 말씀입니다.
좌파는 다르다는 것은, 좌파가 추구하는 이상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속에서 존재하지 않다는 점부터입니다. 예컨대 평등 같은 이상부터 이야기하자면, 자연의 먹이사슬에서 사슴과 호랑이가 절대 평등할 수 없죠.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그 운명들이 갈라지는 것이고 먹이사슬 그 자체는 하나의 서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500년전까지만 해도 미주, 호주,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많은 평등한 사회들이 존재했지만 결국 엄청나게 폭력적 자본주의 세계 체제 확장 과정에서 유럽인에게 다 먹히고 말았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동물왕국식의 약육강식이 실로 행해진데다가 그 원칙은 140년전부터 소위 "사회진화론"이라는 중심부의 매우 영향력 높은 이데올로기의 금과옥조까지 됐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좌파의 평등주의는 자연을 따르는 것이기보다는 우리 마음 속의 자연, 즉 우리의 이성대로 자연의 원칙을 다소 수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알아서 되라고 하여 몇 명의 청소년들을 무인도에 내버려두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나름의 민주적 리도싶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라면 화목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윌리암 골딩의 <파리의 대왕>에서 보이는 장면 - 가장 힘세고 야만적인 아이들이 우이를 잡아 약체들을 부하로 만들고 경쟁자 살인을 통해 그 위치를 재확인하는 우승열패적 풍경 - 들이 연출될 확률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여기에서 좌파는 인간의 아주 근원적인 문제점들 - 탐욕, 어리석음, 폭력에의 지향 등 - 을 해결해주는 "도덕 선생"의 노릇을 하는 것이죠. 불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탐진치를 극복하다록 같이 용맹정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평등과 마찬가지로 평화란 어디까지나 근대 인간의 사상적 창조물이지 원래부터 있어온 것은 아닙니다. 구석기 이래로 인간은 짐승들과 싸우면서 자연의 먹이사슬에서의 그 위치를 조금씩 "최강 잡식동물"의 입장으로 바꾸어나갔지만, 신석기 후기부터 생산수단이 개선돼 잉여가 생기고 나서 서로끼리 그 잉여를 빼앗으려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평화"라는 것은 이상으로 가끔 언표될 수 있었지만 실재한 적은 없었습니다. 전쟁이 아니면 전쟁 대비가 인간 사회의 "통례"가 됐습니다. 초기 기독교 등 가끔가다 종교적 비판이 있어왔지만, 대체로 20세기초까지 전쟁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이 "합법적"이라는 게 "국제사회의 상식"이었습니다. 이 "상식"에 반대한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의 비주류 종교인 (퀘이커, 여호와의 증인 등)이나 극소수 부르주아 중산층 "인본주의자" (그 유명한 «Die Waffen nieder!»라는 소설을 쓴 준트네르 후작부인 등 중산층 평화주의자), 그리고 정계의 소수자라고 할 초기 사회주의자들일 뿐이었습니다. 제1,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경험도 있고 해서 그 보잘것없는 소수의 의견이 이제 상당히 주류화돼 공개적으로 전쟁을 찬양하는 정치인들은 100년전보다 많이 없어졌지만, 100년전의 현실의 기조는 어디까지나 그대로 존속됐습니다. 지금도 초강대국 내지 지역강대국의 자격이란 외부/내부적과의 대전 능력이 있다는 것은 가장 먼저고, 그 초강대국/지역강대국으로 평가되는 모든 국가들 (미, 중, 인도, 러, 독 등)은 지금으로서 각종 내/외부 전쟁 중입니다. 평화는 여전히 현실이 아닌 꿈으로 남아 있고, 그 꿈을 버리지 않으려는 좌파들은 늘 "비현실적"이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고 봤듯이, 오늘날의 좌파도 이 세상에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가치들을 이 세상에 이식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신석기 말기부터 불평등해지고 전쟁을 다반사로 만들기 시작한 이 세상을 "아주 근본적으로" 바꾸어보자는 것은 좌파의 궁극적 이상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는 좌파는 비록 현실 정치 참여 차원에서 나라마다 조직을 다르게 꾸미고 다르게 움직이지만, 근본적으로 국지적이기보다는 "지구적", "인류적" 현상이라 봐야 합니다. 그 대의는 인류사 그 자체를 바꾸자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또한 당면 현실 이외에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 근시안적 분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기독교가 쇠퇴한 유럽 같으면, "거대한 꿈"이 남아 있는 것은 좌파 말고 또 있나요? 이 꿈은 신석기 후기 이후의 인류사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기에 저의 살아생존에 이루어질 리도 없을 것입니다. 한데, 이와 같은 꿈이 있기에 원래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순간적 춘몽만 같기도 하는 인생에는 그 어떤 "뜻"이 부여되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