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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세계화 경제와 불교(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녹색평론34호)

by 마리산인1324 2010. 1. 6.

<녹색평론> 제34호 1997년 5-6월호    

http://www.greenreview.co.kr/

 

 

 

세계화 경제와 불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난 이십여년간 나는 전통문화와 산업화된 서구사회 양쪽에서 불교 공동체들과 끊임없이 접촉해왔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나는 산업발전이 우리의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계관까지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또한 불교의 가르침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지 않으려면 산업화된 세계경제에 속한 사회와 좀더 지역중심 경제에 기초한 사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붓다의 시대에 사회는 자연세계에 훨씬 더 뿌리박고 있었다. 경제는 좀더 지역중심적으로 되어 있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생존이 다른 유정물(有情物)과 피조물과 상호의존 관계에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그러한 규모의 경제였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문화와 자연 사이의 관계는 비교적 직접적이었다. 자연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윤리적 판단의 기초를 제공해주었다. 공동체와 살아있는 세계와의 이러한 직접적인연결에 기초한 사회속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마련된 것이다. 불교는 실제 생명에 관한 가르침이다. 자연세계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순환과정 ― 태어남과 죽음, 기쁨과 슬픔, 꽃의 피어남, 달의 차고 기울음, 즉 모든 생명을 특징짓는 무상(無常)함과 상호의존에 관한 가르침이다.

 

  다른 한편, 근대적 산업세계에서는 복잡한 기술과 대규모 사회기구들로 인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간과 살아있는 세계 사이에 근원적인 분열이 일어났다. 우리의 나날의 삶이 '사람이 만든 세계' ― 경제, 전력, 자동차와 고속도로, 의료시스템 ― 에 크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보다 기술에 더 의존하는 것으로 믿기 쉽다.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우리의 행동이 자연이나 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안다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이러한 형태의 분열은 파편화된 세계관에서 나오고, 또 그러한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는데,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과는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세계관이다. 실제로, 현대사회는 우리가 자연세계와 분리되어 있고, 자연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해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구조와 기구들은 상호의존성과 무상함을 부정하는 무지와 탐욕의 표상들인 것이다.

 

  현실참여적인 불교도들은 (기독교도들이나 회교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신적인 가르침에 비추어 오늘날의 경제적 흐름을 주의깊게 검토하는 책임을 떠맡을 필요가 있다. 나는 그러한 검토작업을 통하여 세계화 경제로 향해가는 추세를 능동적으로 반대하고, 불교경제학과 어울리는 삶의 방식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자유무역협정'과 세계화를 통해서 지금 하나의 경제시스템이 온 지구를 덮어버리려고 위협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그 핵심에 있어서 인간의 욕구와 동기에 대한 매우 편협한 견해에 근거해 있다.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금전적 거래에만 관심을 갖고, 가족이나 공동체, 의미있는 일 또는 정신적 가치와 같은 비물질적 문제들은 대체로 배제하고 있다. 금전적 사회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는 일차적인 동기는 이기적인 이해관계와 끊임없는 물질적 욕망이라는 믿음에 반영되어 있다. 서구의 경제시스템이 우리의 이른바 자기중심적인 탐욕적 본성을 완화해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개개인의 이기적 행동이 사회 전체적으로 혜택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된 경제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나비스코의 대통령은 한때 그것을 '균일한 소비의 세계'로 규정하였다. 즉, 사람들이 어디에서나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꼭 같은 재료로 세워진 집에서 사는 세계 말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가 같은 기술을 이용하고, 다같이 중앙집중적으로 관리되는 경제에 의존하고, 같은 언어를 말하고, 같은 가치를 지니며 심지어 생각도 똑같이 하는 세계이다. 사실상 세계화가 뜻하는 것은 문화적 다양성의 파괴이다. 세계화는 단일문화를 의미한다.

 

  문화적 다양성은 사람들이 지역의 환경과 살아있는 세계에 연결되어 있음을 반영한다. 여러 세기에 걸친 정복과 식민주의, 그리고 '개발'은 이미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을 크게 훼손해왔는데, 지금 경제의 세계화는 그 과정을 급속히 가속화하고 있다. 세계화는 다차선(多車線)의 고속도로와 콘크리트 도시와 함께 지구의 구석구석에 패스트푸드 식당, 헐리우드 영화, 휴대전화, 청바지, 바비인형, 말보로 담배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적 풍경을 만들어놓고 있다.

 

  세계화 경제를 만들어가는 추진력은 지역에 기반을 둔 생산형태 대신에 자연적 순환에서 갈수록 멀어지는 산업생산 시스템을 들여앉히고 있다. 이것이 농업에서 뜻하는 것은 좁은 폭의 수송가능한 식품을 세계시장에 내놓기 위하여 고안된 화학물질 의존성 중앙집중적 관리체제이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은 에너지 및 자본집약적 기계에 의해 밀려나고, 지역공동체를 위한 다양화된 식품생산은 수출입에 기초하는 단작(單作)에 의해 밀려난다.

 

  세계화가 단일문화를 가져오고 있다면 그 가장 심각한 영향은 제3세계에 미칠 것이다. 제3세계는 지금껏 남아있는 문화적 다양성의 많은 부분이 발견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제3세계에서는 아직도 대다수가 마을에 살고 있으며, 다양한 지역경제를 통해 다채로운 지역자원에 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아직도 기술권보다 생명권에 더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의 압력 때문에 그러한 경제는 지금 파괴되고 있고, 마을사람들은 도시 변두리 판자촌의 누추함 속으로 급속히 끌려들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정부는 앞으로 20년 안에 도시인구를 4억4천만명까지 증가시키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체적인 인구성장률의 몇배에 해당하는 폭발이다.

 

  개발은 농민들을 땅에서 떼어놓을 뿐만 아니라 도시 중심부로의 경제적 인력(引力)을 강화함으로써 도시의 직업기회와 정치권력을 집중화한다. 한편으로는, 광고 및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는 증가된 소비에 기초한 좀더 '문명화된' 생활을 추구하도록 사람들에게 강력한 심리적 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일자리가 드물기 때문에 오직 일부만이 성공한다. 대다수는 결국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슬럼에 살게 된다. 이러한 재앙을 초래하는 데도 불구하고, 모든 정부의 정책은 세계화를 지원함으로써 이런 추세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농촌생활이 붕괴하고, 한때 바로 이웃의 자원에 의존하던 사람들이 세계경제에 묶이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전통건축을 생각해보자. 전통적으로 건축구조는 지역자원으로 세워졌다. 즉, 프랑스에서는 돌, 서부아프리카에서는 진흙, 티베트에서는 햇볕에 말린 벽돌, 필리핀에서는 대나무와 짚, 몽고에서는 펠트 등등이었다. 이러한 건축전통이 사라지고 '근대적인' 방법이 들어설 때, 저 풍부한 토착재료들은 아무런 쓸모없이 내버려두어지며, 콘크리트와 강철과 목재같은 극히 한정된 건축재료들에 대한 경쟁이 하늘로 치솟는 것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동일한 주식을 섭취하고, 똑같은 섬유로 만든 옷을 입으며, 똑같은 한정된 에너지원에 의존하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난다. 세계화는 모든 사람을 똑같은 자원에 매달리게 하기 때문에 기업들을 위해서 효율성을 높여주지만, 소비자들에게는 인위적인 희소성(稀少性)을 만들어준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 사다리의 가장 아랫칸에 있는 사람들은 커다란 불이익을 받는다.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분노와 원한과 갈등이 불어난다. 이것은 제3세계에서 특히 그러하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족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도시로 끌려들어와, 공동체와 문화적 뿌리로부터 절연된 채, 일자리와 기본 생필품을 위한 가혹한 경쟁에 직면하고 있다. 개인적 및 문화적 자존심은 매스미디어와 광고가 제공하는 상투형을 본받아 살아야 한다는 압력으로 심하게 훼손된다. 그 상투형은 어김없이 서구식 도시소비자의 모델 ― 금발이고, 푸른 눈을 가졌으며, 깨끗한 ― 에 기초한 이미지들이다. 자신이 농민이거나 검은 살갗을 가진 사람이라면 스스로 원시적이고, 뒤떨어진 인간이라는 열등감을 느끼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 결과, 세계 전역에서 여성들은 자신들의 피부와 머리칼의 색깔을 엷게 하기 위하여 위험한 화학물질을 사용하며, 푸른빛 나는 콘택트렌즈의 판매시장은 방콕에서 나이로비 그리고 멕시코씨티에 이르기까지 커가고 있다. 아시아 여성들은 심지어 좀더 서구적인 눈매를 갖기 위하여 수술도 받는다.

 

  그 주창자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중앙집중적으로 계획된 세계화 경제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없앰으로써 조화와 이해(理解)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도달불가능한 도시적 꿈을 사들임으로써 농촌공동체로부터 뿌리뽑혀져 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분노와 적대감이 ― 특히 젊은 남자들 사이에서 극적으로 증가된다. 이들이 직면하는 극도로 경쟁적인 상황에서 차이는 어떤 종류이건 갈수록 중요해지며, 그 결과 종족적 . 인종적 폭력이 거의 불가피한 것이 된다.

 

  나는 라다크와 부탄왕국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세계화 경제와 종족갈등 사이의 이러한 연관을 깨닫게 되었다. 라다크에서 인구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불교도와 소수를 이루고 있는 회교도들은 600년 동안 단 한차례의 기록된 집단적 갈등 없이 함께 살아왔다. 부탄에서는, 힌두교 소수파는 마찬가지로 오랜 기간에 걸쳐 그보다 약간 많은 수를 이루고 있는 불교도들과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그런데, 두 문화 모두, 외부의 경제압력에 노출된 겨우 15년 동안의 경험이 많은 사람의 사망을 초래한 폭력으로 치달은 것이다. 여기에서 갈등을 이끈 것은 분명히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들의 경제능력과 정체성(正체性)의 훼손이었다. 세계화가 계속된다면 갈등과 폭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될 것이다. 결국, 세계화는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의 생계와 문화적 정체성을 뿌리로부터 망가뜨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 많은 불교도들은 이러한 세계화의 사회적 . 경제적 충격에 대응하는 데 망설이는가? 내 생각에 그 주된 이유는 세계에 관한 불교의 가르침이 사실상 자연세계에 관한 ― 인공적으로 구축된 '기술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 것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불교도들에게 과해진 숙제는, 지역중심의 사회경제적 상호작용의 시대에 가르쳐졌던 불교의 원리를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고도로 복잡하고 갈수록 세계화되는 세상에 적용시키는 일이다.

 

  쉽게 오해될 수 있는 한가지 개념은 불교가 말하는 상호의존성의 원리 ― 모든 생명은 하나로서, 그 어떤 것도 자신만의 분리되거나 정지된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분리불가능한 거미줄을 이루고 있다는 원리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개념을 '지구촌'이나 자유무역의 국경없는 세계라는 이상과 혼동해버리는 덫에 빠진다. '균제'니 '통합'이니 '연합'이니 하는 세계화의 용어들 때문에 세계화라는 것이 우리가 서로서로 또는 자연세계와 더욱 상호의존적으로 되게 한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렇기는커녕 세계화는 대규모 경제구조와 기술에, 그리고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드는 거대한 다국적기업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을 강화할 뿐이다. 이러한 과정을 붓다가 말한 상호의존성(연기법, 緣起法)과 혼동한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생명과정과 세계화 경제시스템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무상함이라는 불교의 개념 또한 왜곡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자연세계에 있어서의 변화와 무상함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생명권속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의 흐름, 삶과 죽음의 순환, 모든 존재의 무상함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초래하는 변화는 붓다가 관찰한 자연에 있어서의 무상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나 댐이나 초고속도로와 같은 거대 프로젝트들은 붓다가 우리더러 받아들이라고 가르친 생명의 흐름에 속한 것이 아니다. 생명공학을 통하여 유전자를 조작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들은 오히려 자연을 정복하려 하고, 생명은 정지된 것으로 조각조각으로 분리할 수 있으며, 기술의존의 소비자문화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조작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계관의 표현들이다.

 

  두개의 다른 불교적 개념 ― 카르마(業)와, 탐, 진, 치 삼독심(三毒心) ― 또한 사회적 무관심을 지지하는 가르침으로 오해되고 있다. 심화되는 빈부격차를 설명하는 데 카르마의 법칙을 이용하는 것은 유혹적이다. 즉, 한사람이 부유하다면 그는 전생에서 선업을 쌓았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깊이 검토해보면, 사회적 불평등의 좀더 직접적인 원인은 소수가 다수의 희생 위에 번영하도록 허용하는 세계경제의 시스템인 것이다. 우리는 빈부의 차이를 전생의 행동에 따른 업에 전가시키지 말고, 특히 도시화된 서구적 생활스타일이 뜻하는 바를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생활스타일이 본질적으로 지혜와 연민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세계의 산업화된 부분에 살고있는 우리들은 세계자원 가운데 우리의 몫보다 줄잡아 열배나 넘게 소비하면서, 이것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헤아릴 수 없는 손상을 끼치는 것에 대하여 흔히 잊어버리고 있다. 서구의 우리들은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착취와 사회적 와해를 장려하고, 흔히 안 보이는 세계의 다른 편에서 불평등과 파괴를 격화시키는 세계화 체제에 우리가 집단적으로 어떻게 공헌하고 있는지 면밀히 따져보아야 한다.

 

  탐, 진, 치 삼독심은 다소간 인간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러나 문화적 시스템이 이런 요소를 부추기기도 하고 또는 저지하기도 한다. 오늘의 세계적인 소비자문화는 개인이든 사회적 수준이든 '삼독심'을 장려하고 있다. 현재 세계 전체적으로 4천5백억달러가 해마다 광고에 쓰여지고 있다. 광고의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찍이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던 것 ― 코카콜라나 기관총이 달린 플라스틱 람보인형 같은 ― 에 대한 욕구을 느끼도록 설득하려는 것이다. 소비주의가 발흥하기 전에는 이러한 형태의 탐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문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화 경제시스템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욕심과 물질주의가 불가피한 인간본성의 산물이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우리는 세계적인 소비주의 문화속에서는 우리의 불성(佛性)을 드러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나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자비롭고 비폭력적인 존재가 되게 고무함으로써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들 가운데 다수는 세계적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공헌이 폭로될까 두려운 나머지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살펴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사회적 분열과 심리적 박탈 그리고 환경파괴를 일으키는 것은 복잡한 세계경제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불교는 우리가 그러한 시스템과 그 구조적 폭력에 초점을 맞추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가 상호간 및 우리의 환경에 대하여 끼치는 복잡다단한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하며, 상호이해와 생명에 대한 깊은 긍정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이러한 시스템의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가를 인식함으로써만 이 생명을 부정하는 구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능동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다. 불교는 그 전일적인 접근방식 때문에, 다양한 증상들이 어떻게 상호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직면한 위기들이 어떻게 계통적인 것이며, 경제적인 논리에 뿌리박고 있는 것인지를 우리가 알아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문제들 사이의 수많은 연관을 이해하면 우리는 우리의 노력을 위기의 증상들에 허비하지 않고, 근본적인 원인들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다. 표면을 뚫고 들어가보면, 인종분규나 물과 대기의 오염, 가족해체나 문화적 분열과 같은 겉으로 보기에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이 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심리적으로 볼 때, 문제의 본질을 보는 눈에 있어서의 그러한 변화는 우리에게 큰 힘을 부여해준다. 겉보기에 아무런 연관이 없는 듯한 일련의 문제들에 압도되어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지만,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수렴되는 접점을 발견함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좀더 집중적 .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체 국면에 영향을 미치는 올바른 고리를 잡아당기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다.

 

  구조적인 수준에서 볼 때, 근본적인 것은 규모의 문제이다. 자꾸만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규모는 우리가 하는 행동의 결과를 보이지 않게 한다. 실제로 우리의 팔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우리는 갈수록 무지해지며, 그 때문에 우리는 연민과 지혜를 실천하지 못한다. 좀더 규모가 작은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의 결과를 볼 수 있으며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다. 작은 규모로 된 구조에서는 또한 한 개인이 떠맡는 권력의 양이 제한되어 있다. 큰 국민국가의 지도자와 작은 읍의 지도자 사이에 있는 큰 차이를 보라. 한쪽은 아무런 진정한 접촉도 없이 얼굴없는 수백만 사람들 위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다른 쪽은 몇천명 정도의 사람들의 문제를 조정하면서 공동체의 능동적인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국민국가의 규모는 너무나 커졌기 때문에 지도자들은 설령 그들이 원한다 하더라도 상호의존성의 원리에 따라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 최종결정은 경제원리에 따라 ― '진보'의 이름으로 ― 흔히 사회구성원 개개인과 자연세계에 미칠 영향은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좀더 탈중심화된 경제 및 정치구조에서는 무상함과 상호의존성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 어렵다. 공동체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 공동체의 변화하는 사회적 및 환경적 동역학(動力學)에 일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은 공동체에서는 어떠한 행동이라도 그 결과는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일을 결정하는 것은 좀더 지혜와 연민속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힘들게 들릴지 모르지만 불교도로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는 상호의존성과 무상함이라는 불교적 개념에 기초한 삶이 가능한 좀더 작은 규모의 사회적 및 경제적 구조를 재건하는 방향으로 사회가 움직이도록 도울 필요가 있다. 기억해야 할 것은 갈수록 세계화와 좀더 큰 규모로 향해가는 경쟁적 질주를 계속하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화 경제는 불가능한 꿈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이 의존하고 있는 다양성을 뿌리뽑는 것이기 때문이다.

 

  좀더 작은 규모의 인간적인 기구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그것이 장소의 감각을 되찾게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저마다 그 환경과 주민과 문화에 있어서 극히 개성적이다. 인간적인 규모에서는 경직된 법제화의 필요성이 최소한도로 되며, 좀더 유연한 결정과정이 허용된다. 거기에서는 특정한 맥락의 필요에 기초한, 자연법칙과 조화된 행동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운명이 멀리 떨어진 경직된 관료체계와 변덕스러운 시장에 좌우될 때 수동적으로 되고 무력한 느낌을 갖게 된다. 반면에 탈중심화된 구조는 사람들에게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 반응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준다.

 

  탈중심화된 경제활동이 제공할 수 있는 많은 환경적, 사회적, 그리고 심지어 윤리적 혜택에도 불구하고 정부들은 맹목적으로 꼭 그 반대의 것 ― 전지구 규모의 엄청난 중앙집중화를 추구한다. 경제적 집중화가 '하나됨'과 '상호의존'이라는 이름으로 촉진되고 있으므로 우리가 불교도로서 떠맡아야 할 첫 과업 중의 하나는 이러한 용어가 불러일으키는 혼란에 대하여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일이다. 행동으로서의 교육을 강조하고, 토론을 장려하며 정보를 나눔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탐욕과 폭력의 체계를 지원하게 되는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단 우리가 좀더 깨어나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합심하여 정책 변화를 위하여 정부에 압력을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세계경제는 어떤 정부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다국적기업들에 의하여 추진되고 있으므로 가장 긴급히 필요한 정책변화는 국제적 수준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러한 수준에서의 해결은 이론적으로는 단순하다. 즉, 가트의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을 재가한 정부들은 다시한번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국적기업들의 편에서 비밀리에 하지 않고, 대다수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로지 풀뿌리 수준에서 좀더 많은 깨달음 ― 정책결정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정책변화를 위하여 압력을 넣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더이상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뜻있는 정치적 변화를 위한 모든 희망을 포기해버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세계화는 누구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오늘날 세계화를 추진하고 있는 정치지도자들과 기업경영자들에게도 이로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 말하여, 세계화라는 낡은 경제적 도그마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버리는 것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엄연한 명분이 있는 것이다. 세계화의 또다른 효과 가운데는, 국민국가의 권능과 조세기반을 침식하고, 그 결과로 의회의 영향력을 축소시킨다는 점이 있다. 세계화는 또한 일자리의 안전성  ―  기업사회의 가장 고위직 수준에서도 일자리의 안전성을 위협한다.

 

  자본의 움직임을 축소하고, 지역 및 국가적 수준에서의 경제활동을 다기화(多岐化)하는 쪽으로 약간이라도 정책변화가 이루어진다면 엄청난 포괄적인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하룻밤 사이에 경제는 실업문제를 완화하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시장을 향하여 나아가게 될 것이다. 거기에서는 좀더 강력한 중소규모의 기업들이 경쟁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지역 및 국가적 통치기구가 사회에 대한 임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세금이 조달될 수 있을 것이다.

 

  파괴를 향해 치닫고 있는 세계경제 시스템의 현실에 직면한 불교도로서 우리는 현실참여를 선택할 도리밖에 없다. 불교는 우리에게 세계 전체에 걸쳐 고통을 낳고 고통을 영속화하는 경제구조에 도전할 수 있는 논리와 도구를 제공해주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불교도라고 자처하면서 동시에 붓다의 가르침에 명백히 위배되는, 즉 생명 그 자체에 적대적인 구조를 지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Helena Norberg-Hodge) ― 스웨덴 출신 녹색운동가.《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의 저자. 이 글의 출전은 Resurgence 1997년 3-4월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