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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재앙을 넘어 공동체로(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녹색평론24호)

by 마리산인1324 2010. 1. 6.

<녹색평론> 제24호 1995년 9-10월호    

http://www.greenreview.co.kr/

 

 

재앙을 넘어 공동체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늘날 사회는 두 가지 상반되는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산업이 지지하는 길은 갈수록 세계화되는 경제로 나아가며, 다른 하나의 길은 강력한 지역경제로 나아간다. 후자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증가하는 범죄로부터 지구온난화에 이르는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길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리석을 정도로 단순한 생각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확신은 세계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각기 다른 수준에 있는 사회들 ― 깊이 산업화되어 있는 미국, 사회주의 스웨덴, 농촌적인 스페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라다크의 오랜 전통문화를 포함하는 ― 에 대한 나의 장기간에 걸친 관찰에 근거하고 있다.

 

  내가 처음 라다크로 갔을 때 서구경제는 아직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았고, 지역경제가 여전히 자신의 토양에 뿌리박고 있었다. 생산자들과 소비자들은 공동체속에서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다크에서 이루어진 지난 20년간의 개발로 인하여 이제 라다크 사람들은 수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으로부터 오는 식량과 에너지에 의존하게 되었다.

 

  세계화로 나아가는 길은 끊임없는 정부 투자에 의존한다. 그것은 도로, 대중매체시설, 에너지설비, 전문화된 교육을 위한 학교를 포함하는 대규모의 산업 하부구조의 건설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무거운 정부 보조금으로 건설된 하부구조는 대규모로 생산되어 장거리로 수송되는 상품들이 인위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많은 경우에 지역에서 생산된 상품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팔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라다크에서, 인도정부는 도로와 학교와 에너지 설비를 위한 비용을 지불할 뿐만 아니라 인도의 곡창지대인 푼자브로부터 식량을 들여오는 데 보조금을 지불한다. 그리하여 지난 2000년 동안 충분히 식량을 자급하여 왔던 라다크의 지역경제는 지금 히말라야 저편에 위치한 산업농장으로부터 오는 생산물에 의하여 침략을 당하고 있다. 톤 단위로 화물차에 실려오는 식량은 집에서 걸어서 오분쯤 떨어진 곳에서 자라는 식품보다도 더 싼값에 지역시장에서 거래된다. 많은 라다크 사람들에게 있어서 농사를 계속한다는 것은 이제 더는 보람있는 일이 못된다.

 

  이러한 과정은 의복에서 살림도구와 건축재료에 이르는 모든 물품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조금을 받는 상품의 장거리 수송이라고 하는 이 모든 일의 최종 결과는 라다크의 지역경제가 와해되고, 그와 더불어 한때 상호의존의 유대로 결합되어 있던 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아이들은 친척과 이웃사람들로부터 농사짓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서구식 학교에 보내져서 산업경제속의 전문화된 일자리를 위한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일자리들은 매우 드물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떨어져 나옴에 따라 이러한 드문 일자리를 놓고 상호경쟁하는 라다크의 실업자 수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한때 지역자치적으로 통제되던 경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시장과 익명의 관료에 의하여 갈수록 크게 지배되고 있다. 그 결과로 한때 안정을 누리며 협동적으로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불안과 경쟁이 커가고 있다. 서로 관련된 문제들, 예컨대 범죄와 가정의 붕괴와 집없는 처지와 같은 문제들이 거의 하룻밤 사이에 나타났다. 그리고 라다크 사람들이 땅으로부터 더 많이 유리됨에 따라 그들의 자원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고 있다. 오염은 나날이 증가하고, 인구는 지탱불가능한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다.

 

  일반경제학자들은 이러한 부정적인 영향들을 무시해버리고 말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경제개발의 목표인 금전적 거래에 쉽게 수량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식량생산에 있어서 푼자브와 같은 지역이 라다크에 비해〈비교우위〉를 누리고 있으므로, 푼자브지방은 식량생산을 전문으로 하고 라다크는 다른 어떤 생산품을 전문으로 하여 서로 교역을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고 경제학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원거리에서 생산된 상품에 많은 보조금이 ― 흔히 감추어진 방법으로 ― 주어질 때, 비교우위 운운은 넌센스이며, 마찬가지로〈자유시장〉이니〈가격결정에 있어서의 공개적 경쟁〉이니 또는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변화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삼는 어떤 다른 원칙을 들먹인다는 것도 넌센스이다. 실은 그 반대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대규모의 중앙집중화된 생산을 향해 겨냥된 하부구조 ― 크게 보조금을 받고 이루어진 ― 덕분에 산업생산자들이 누리는〈불공정한〉우위에 대해서일 것이다.

 

  히말라야의 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일어난 변화는 서구에서 훨씬 더 긴 세월에 걸쳐, 훨씬 더 멀리 진전되어온 것과 같은 과정의 일부이다. 그것은 유럽에서 여러 해에 걸쳐〈공동시장〉의 팽창과 함께 내가 목격해왔고,〈보다 큰 것〉이 오랫동안〈보다 좋은 것〉으로 여겨져온 미국에서 내가 목격해왔던 경향이다. 산업화된 세계 전체를 통해서 장거리 수송을 위한 초고속도로와 통신시설과 같은 하부구조를 만드는 데 수조 달러가 쓰여졌다. 그보다 더 많은 돈이 산업기술 ― 위성통신에서 화학 및 에너지집약적 농업에 이르는 ― 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시키는 고도로 전문화된 교육에 쓰여지고 있다. 지난 십년 동안 납세자들로부터의 방대한 돈이 생명기술을 위한 연구에 쓰여졌다. 그 목적은 지금보다 더 장거리에 걸친 식량수송을 가능하게 하고, 지금보다 더 많은 살충제의 사용에서도 식량이 견딜 수 있게 하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농민이라는 성가신 존재의 필요없이 식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려는 것이다. 막대한 보조금에 의하여 대규모 생산자들과 상인들이 누리게 되는 이러한〈불공정한 우위〉는 가족농이 산업적 농기업과 경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고, 소규모 상점주인이 엄청나게 큰 슈퍼마켓과 경쟁하거나 토착생산자가 기업들과 경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대규모 회사 기업들은 나아가〈자유무역〉을 촉진하는 정책에 의하여 또다시 우위를 차지한다. 마스트리히트나 가트와 나프타(북미자유무역협정)와 같은 무역협정의 근간에 있는 기본명제는 만일 우리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계속하여 증대시킨다면 우리 모두에게 더 이로울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로 스페인의 시장에서 덴마크 버터를 팔고, 덴마크의 상점에서 프랑스에서 생산된 버터를 판다. 그런가 하면 영국은 자신이 수입하는 밀과 거의 같은 양의 밀을 수출하고, 미국인의 식품은 평균적으로 1200마일을 여행하고 나서야 부엌 식탁에 오르게 된 것들이다.

 

  세계 전체에 걸쳐 정부들은 예외없이 이러한 경향을 가속적으로 촉진하고 있다. 정부들은 경제의 세계화에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들의 병들어 가는 경제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러한 정책들은 지역 및 공동체의 경제를 망쳐놓을 뿐만 아니라 그 정책을 열심으로 추진하는 국민국가 자신의 경제를 망쳐놓는다. 오늘날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뜻하는 것은 한때 국가나 지역이 누렸던 비교우위를 이제는 초국적 기업들이 독점적으로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대안적인 길이 있다. 지배적인 경향에 맞서는 하나의 괄목할 만한 경향이 계속하여 꽃피어나고 있다. 세계 전역을 통하여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지역경제를 지원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항적인 흐름속에서 농민들과 소비자들을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가장 뜻깊은 일이다.〈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은 지금 세계를 ― 그것이 25년전에 시작된 스위스에서 그러한 운동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본에 이르기까지 ― 휩쓸고 있다.

 

  인구의 2퍼센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미 땅에서 떨어져 나간 미국에서〈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장〉의 수효는 1986년에 오직 둘밖에 없었지만 1992년에는 200개로 증가하고 지금은 거의 600개에 이르렀다. 주목할 것은 소규모 농민들이 매년 압도적인 비율로 파산을 계속해온 나라에서〈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장〉이 경제적인 이유로 단 하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은 굉장히 많은 긍정적인 함축을 가진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결속을 통하여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를 재건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공동체는 사람들 사이의 긴밀한 관계와 상호간의 의존성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다. 우리 모두가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마을의 작은 가게에 들를 때 사람들은 서로서로를 알아보고 얘기를 나눈다. 가까이 사는 농민은 자신의 생산물을 살 사람이 누군가를 알 때 농작물에 유독성 화학물질을 사용하기 어렵게 되며, 신선하고 몸에 좋은 식품이 아닌 것을 배달하기 어렵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먹는 식품을 기르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들은, 예컨대 켄터키주의〈공동체 지원농업〉그룹이 서리가 내리기 전에 수확을 할 수 있도록 자기들의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듯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농민들을 돕고자 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좀더 짧은 고리로부터 나오는 보다 강한 공동체 감각은 심리적으로도 중요한 혜택을 준다. 서구에서의 연구뿐만 아니라 라다크에서의 나 자신의 경험을 보더라도 범죄와 폭력과 우울증, 그리고 심지어 이혼이 증가하는 것도 상당한 정도로 공동체가 와해된 결과임이 분명하다. 지상에서 자신들의 삶터와 자기들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가지고 성장하는 아이들은 ― 다시 말하여 공동체속에 뿌리박고 자라는 아이들은 ― 보다 강한 자기긍정과 보다 건강한 자기정체감을 가지고 성장한다.

 

  환경적으로 볼 때도〈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이 주는 혜택은 막대하다. 농민들에게 단일작물 재배를 시행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산업체제속의 힘이 역전되는 것이다.〈공동체 지원 농업〉은 단일 작물의 방대한 공급을 요구하는 대규모 식량분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대단히 다양한 생산물을 기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여,〈공동체 지원 농업〉은 생물다양성의 증대를 조장한다. 그리고 식량을 생산하는 농민들과 직접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는 거의 모든 소비자들은 자기네의 식품속에 화학물질의 양이 축소되기를 분명하게 희망하는데, 이것은 환경을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의 실천을 촉구하는 또하나의 움직임인 것이다.

 

  야채는 슈퍼마켓이라는 기준에 대한 순응성이나 장거리 수송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지역적 조건에 대한 합당성과 (오이는 완전히 쭉 곧은 것일 필요가 없고, 사과도 완전히 둥근 것일 필요가 없는) 그 맛과 영양적 가치에 따라 선택될 수 있게 된다. 포장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도 세계 전체를 통하여 매일같이 쓰레기장으로 던져지는 다시 사용할 수 없고 썩지 않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가 괄목할 만하게 줄어든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 수송거리의 단축은 화석연료 사용의 축소, 오염의 상대적 약화, 대기속으로 방출되는 온실가스의 축소를 의미한다.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운동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고리를 축소시키는 진정한 풀뿌리 운동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지속적인 진보를 위해서는 정책수준에서도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대규모 생산자와 상인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불공정한 우위는〈공동체 지원 농업〉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창의적인 실천을 계속하여 위협한다. 우리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고리를 적극적으로 축소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한 일은 우리가 지금〈공동체 지원 농업〉이 제공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적 및 환경적 혜택을 널리 알림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신선하고 맛있는 식품을 먹는 일이 세계를 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말할 수 있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Helena Norberg-Hodge) ― 스웨덴 출신 언어학자이자 녹색운동가. 인도북부 히말라야고원에 위치하고 있는 라다크가 외부세계로 개방된 이후 20년에 걸쳐 보여준 변화를 직접 목격자의 처지에서 기록한 책《오래된 미래, Ancient Futures(1992)》의  저자이다. 본지 제18호에 이 책의 일부를 옮겨 실은 바 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의 출전은 Resurgence 1995년 7-8월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