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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탐욕과 희소성을 넘어서 (녹색평론40호)

by 마리산인1324 2010. 1. 6.

<녹색평론> 제40호 1998년 5-6월호    

http://www.greenreview.co.kr/

 

 

 

탐욕과 희소성을 넘어서

 

베르나르 리에테르

 

 

  당신은 어째서 대안적 통화에 그렇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가?

  돈이란 우리의 코를 꿰고 있는 쇠고리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고, 그래서 오히려 이제는 그것이 우리를 멋대로 끌고다니고 있다. 내 생각에 지금은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 제대로 궁리하지 않으면 안될 때인데 ― 나는 그 방향이 지속가능한 삶과 공동체를 향해야 한다는 의견이지만 ― 거기로 가기 위해서 새로운 통화체제를 설계해야 한다.

 

  그러니까 돈을 어떻게 설계하는가 하는 것은 사회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많은 일을 근원적으로 결정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사람들과 기업들이 시장과 자원을 위해 경쟁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돈을 위해 경쟁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통화체제를 설계한다는 것은 사람의 많은 노력의 방향을 결정하는 목표를 다시 설정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탐욕과 경쟁은 어떤 불변의 인간성의 결과라고 믿지 않는다. 탐욕이나 ‘희소성’에 대한 두려움은 실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돈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증폭되어왔다는 결론에 나는 다다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먹여살리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고, 또 이 세계에는 누구에게나 충분한 일거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일에 대한 대가로 지불해야 할 돈이 충분치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까 ‘희소성’은 우리의 국가적 통화체제에 기인하는 것이다. 실제로 중앙은행의 임무는 통화의 ‘희소성’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살아남기 위하여 서로서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돈은 은행들이 그것을 누군가에게 빌려줌으로써 창조된다. 한 은행이 당신에게 10만달러를 제공할 때, 당신은 그 원금을 소비하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경제속에서 순환하게 된다. 거기에 대해 은행은 다음 20년 동안에 당신이 20만달러를 갚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은행이 나머지 10만달러 ― 이자에 해당하는 ― 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은행은 당신을 험난한 세상으로 내보내어 그 나머지 10만달러를 벌도록 다른 사람들과 피나는 투쟁을 하도록 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딴 사람이 이기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반드시 져야 한다는 것인가? 딴 사람들이 그 이자를 갚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려면 어떤 사람들은 채무불이행 상태로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바로 그렇다. 돈을 빌려줄 때 은행들이 하는 것은 모두 같다. 그래서 미국의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와 같은 중앙은행들이 내리는 결정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고금리에 따르는 비용은 자동적으로 파산의 비율을 높이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은행이 당신의 ‘신용상태’를 확인할 때, 그것은 결국 당신이 다른 주자(走者)들과 경쟁하여 승리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검증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만일 게임에서 진다면 당신은 집이나 그밖의 당신이 내놓은 담보물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또 실업률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물론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문제가 있다. 오늘날 정보기술은 갈수록 고용증대를 동반하지 않는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미국에서 지금은 고용과 성장이 함께하는 마지막 시기의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제레미 리프킨이《노동의 종말》에서 말하고 있듯이, 앞으로 기본적으로 일자리는 이제 더이상 ― 심지어 ‘좋은 시절’이라 할지라도 ―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제네바에 있는〈국제금속노동자연맹〉의 한 연구에 따르면, 앞으로 30년내에 세계인구의 2-3퍼센트가 이 지구상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생산해낼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한다. 10의 계수만큼 그 추정치가 빗나간다 하더라도 여전히 나머지 80퍼센트의 인구가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내 예견으로는, 다른 문제는 젖혀두고 고용문제 하나 때문에도 ‘지역통화’는 21세기의 사회적 설계에 주요 도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역통화가 국가적 통화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것이라거나 대체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역통화는 ‘보완적’ 통화이다. 경쟁을 촉발시키는 국가통화는 경쟁적 세계시장에서 여전히 어떤 구실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완적 지역통화가 협동적인 지역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훨씬 더 적합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지역경제는 소멸의 위협이 없는 고용형태를 제공할 것인가?

  그렇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지금 300개의 지역교환 네트워크 ― ‘그랭 드 셀’, 즉 문자 그대로 ‘소금 알갱이’라고 불리는 ― 가 있다. 이 시스템은 ― 정확히 실업수준이 대략 12퍼센트에 달할 무렵에 생겨났는데 ― 임대료 지불에서 유기농산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환에 이바지하고 있지만, 그밖에 다른 일도 한다. 프랑스 서남쪽 아리제(Ariege)에서는 보름마다 큰 파티가 열린다. 사람들은 보통 장날처럼 치즈, 과일, 과자 따위를 사고 팔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연관공에 관계된 일이나 이발을 하거나 영어공부를 하기 위하여 거기로 온다. 그리고 거기서는 지역통화만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역통화는 일을 창조한다. 나는 일과 직업을 구별하고 싶다. 직업은 생계를 벌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일은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나는 직업은 갈수록 폐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일은 거의 무한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사람들은 기타 교습을 제공하고, 독일어 교습을 요청한다. 그러나 어느 쪽도 프랑스 국가화폐인 프랑으로 지불하지 않는다. 지역통화의 매력적인 점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돈을 창조할 때 그들이 ‘희소성’을 전제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이웃사람과 거래를 하는 수단을 갖기 위하여 자기 지역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온 통화를 확보할 필요가 없다.

  에드가 칸의 ‘타임 달러’는 고전적인 예가 된다. 두 사람 사이에 ‘타임 달러’를 사용하기로 약속이 맺어지는 순간 그 과정에서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필요한 ‘돈’을 창조한 것이다. 돈의 ‘희소성’이란 있을 수 없다. 물론 지역통화라고 해서 돈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50만시간(hours)을 줄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최고한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희소성’은 없다. 이 시스템은 사람들을 상호간 싸우게 하는 게 아니라 상호협력하도록 돕는 게 틀림없다.

 

  그러니까 당신의 생각에는, ‘희소성’이 우리의 경제시스템의 지도원칙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한된 자원의 세계에서 ‘희소성’이란 경제학에서 근원적인 개념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한 나의 분석은 칼 융(Carl Jung)의 저술에 기초하고 있다. 융의 저술은 집단적 심리에 대한 이론적 틀을 갖고 있는 유일한 저술이며, 돈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집단적 심리현상이다.

  융이 사용하는 핵심개념의 하나는 ‘원형(原型)’이다. 이것은 사람을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여 가게 하는 하나의 정서적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어떤 특정한 원형이 억압되면 그때마다 두가지 유형의 그림자가 나타나는데, 그것들은 양극적인 관계에 있다.

  예를 들어, 나의 고등 자아 ― 왕이나 여왕의 원형에 대응하는 ― 가 억압받으면 나는 폭군이나 약골처럼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두개의 그림자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폭군이 폭군적으로 되는 것은 그가 약하게 보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약골은 폭군적으로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들 두 그림자가 갖고 있는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아니한 사람만이 왕의 원형을 체현할 수가 있다.

  이러한 틀을 가지고 잘 알려진 현상 ― 즉, ‘위대한 어머니’ 원형이 억압받게 된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자. ‘위대한 어머니’ 원형은 오늘날의 많은 전통적 문화에 있어서처럼 서양세계에 있어서도 선사시대의 여명기부터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그러나 이 원형은 적어도 5000년 동안 서양에서는 폭력적으로 억압되어왔다. 인도-유럽어족의 침략에서 시작하여 유태-기독교의 반여신(反女神)적 견해로 강화되고, 3세기에 걸친 마녀사냥이 절정에 달하여 빅토리아 시대로 이어져온 것이다.

  하나의 원형이 이와 같은 규모와 시간에 걸쳐 억압되어왔다면 그 그림자는 사회에 강력한 방식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5000년 후 사람들은 그 그림자 행동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묻는 것은 단순한 물음이다. ‘위대한 어머니’ 원형의 그림자는 무엇인가? 나는 그 그림자가 ‘희소성’에 대한 두려움과 탐욕이라고 생각한다. 빅토리아조 시대에 ― ‘위대한 어머니’에 대한 억압이 절정에 달하였던 ― 아담 스미스라는 이름을 가진 한 스코틀랜드인 교사(敎師)가 자기 주변에서 엄청난 탐욕과 궁핍상태를 목격하고, 그것을 모든 ‘문명’사회가 작용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다시피 스미스는 근대경제학을 창시하였고, 근대경제학이란 희소한 자원을 개인적 탐욕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배분하는 방법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만일, 탐욕과 ‘희소성’이 그 그림자라면, ‘위대한 어머니’라는 원형은 경제학적 견지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우선 ‘여신(女神)’과 ‘위대한 어머니’를 구별해야 한다. ‘여신’은 ‘신성한 것’의 모든 국면을 대변하였다. 그리고 ‘위대한 어머니’는 행성 지구, 즉 다산성(多産性), 자연, 삶의 모든 국면에서의 풍요로움을 상징한다. ‘위대한 어머니’의 원형을 받아들인 사람은 우주의 풍요로움을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결핍될 때 우리는 거액의 은행계좌를 원하는 것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여 물건을 잔뜩 쌓아두기 시작한 최초의 작자는 다른 모든 사람의 질투심과 욕구에 맞서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일 어떤 사회가 ‘희소성’을 두려워하면 거기서는 당연히 ‘희소성’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예언이 스스로를 실현시켜나가는 셈이다.

  또한,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희소성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믿음속에서 살아왔다. 그것이 일부의 물질적 영역에서는 타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결코 타당한 것이 될 수 없는 딴 영역에까지 확장시킨다. 예를 들어, 우리가 정보를 자유롭게 배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 정보의 한계비용은 실제로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보라는 것을 희소한 것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저작권이나 특허권 따위를 발명해내놓고 있다.

 

  그러니까 희소성에 대한 두려움이 탐욕과 축적행위를 만들고, 또 그것이 실제로 두려운 희소성의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당신의 얘기이다. 그 반면에 ‘위대한 어머니’를 육화하고 있는 문화는 전부 풍요로움과 너그러움에 토대를 두고 있다. 바로 그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공동체의 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아이디어가 아닌가?

  실은 그것은 내가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이미 공동체라는 말의 본래 뜻에 들어있다. 공동체(community)라는 단어의 기원은 ‘선물’을 뜻하는 라틴어 뮤누스(munus)라는 낱말과 ‘함께’, ‘더불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쿰(cum)이라는 낱말의 결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공동체라는 낱말은 문자 그대로 서로서로에게 무엇인가를 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공동체라는 것은 우리가 서로서로의 선물을 감사하게 주고받고, 또 누구든 당연히 선물을 받기를 기대할 수 있는 인간집단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지역통화는 선물교환을 용이하게 할 수 있겠다.

  내가 알고 있는 지역통화들은 대부분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하였지만, 그러나 점차로 많은 그룹에서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지역통화를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골짜기에 사는 내 이웃사람에게 “내가 보니 당신 집에 배나무가 많군요. 그 과일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라고 말하면 어딘가 좀 우습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보답으로 무엇인가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달러를 사용하려 한다면 차라리 내가 슈퍼마켓으로 가는 게 나을 것이다. 만일 내가 지역통화를 가지고 있다면 교환수단이 결핍되어 있지 않고, 따라서 과일을 산다는 행위는 내 이웃과의 상호관계를 위한 구실이 되는 것이다.

  메리랜드의 타코마 파크에서 올라프 에지버그는 자신의 지역공동체 안에서 이런 종류의 교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지역통화시스템을 시작하였다.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교환관계와 사귐이야말로 정확히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지역통화가 식품이나 주거와 같은 기본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도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이런 부분은 경쟁적 경제의 일부로 남아있을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텃밭을 가꾸는 일을 좋아하지만, 경쟁사회에서 그 텃밭일로부터 생계를 벌 수 없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텃밭일을 하는 사람이 실업자이고, 나도 실업자라면, 이른바 정상적 경제에서는 우리는 굶주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완적 통화가 통용되는 상황에서는, 나는 제 3자에게 어떤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얻은 지역통화를 가지고 텃밭일을 하는 사람에게 그가 기른 샐러드의 값을 지불할 수 있다.

  이사카에서는 ‘아워’(뉴욕주 이사카 지역의 지역통화 ― 역주)가 농민시장에서 통용되고 있다. 농민들은 수확일이나 어떤 수리일을 하는 데 누군가를 고용할때 지역통화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일부 집주인들은 임대료로 ‘아워’를 기꺼이 받는다.

  지역통화를 사용하다 보면 무엇이 지역적이며, 무엇이 지역의 경계를 넘는 것인지 금방 분명해진다. K마트는 달러만을 받는다. K마트의 물품공급자들은 홍콩이나 싱가포르 또는 캔사스시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사카의 지역 슈퍼마켓은 달러뿐만 아니라 ‘아워’도 받는다. 사람들은 지역통화를 사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지역경제를 창조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지역통화는 또한 세계경제의 부침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완충장치가 되기도 한다. 당신은 그동안 세계금융체제의 설계를 돕고, 그 체제를 감시하는 일에 종사해왔다. 당신은 어째서 지역공동체들이 세계경제로부터 절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공식적 통화제도는 실질경제와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가지 사실을 말한다면, 1995년의 통계는 세계수준으로 교환되고 있는 통화량이 하루에 1조3천억달러가 된다고 한다. 이것은 선진공업국들(OECD) 전부의 일일 국내총생산(GDP)보다 30배가 더 되는 돈이다. 미국의 연간 GDP가 사흘마다 시장에 들어오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막대한 통화량 중에서 오직 2 내지 3퍼센트만이 실물무역이나 투자에 관계하고 있다. 그 나머지는 세계적 규모의 투기적 사이버-카지노 경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실질경제는 투기경제라는 케이크를 장식하는 프로스팅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20년 전의 상황과 정확히 정반대이다.

 

  그것이 함축하는 것은 무엇인가? 국경을 가로지르는 거래를 하지 않는 우리들에게 그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첫째로, 그것은 권력이 정부로부터 금융시장으로 옮겨가고 있음을 뜻한다. 어떤 정부가 시장의 입맛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 예컨대 91년의 영국, 94년의 프랑스, 또는 95년의 멕시코처럼 ― 아무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렇게 해서는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나라의 통화에 금방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껏해야 몇백명의 사람들이 ― 누군가에 의하여 선출된 바도 없고, 어떤 종류든 집단적 책임도 지지 않는 ― 예컨대 우리의 연금기금의 가치를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당신은 이 시스템의 붕괴 가능성에 관해 발언해왔는데…

  그렇다. 나는 앞으로 5년 내지 10년에 걸쳐 그것이 50 대 50의 붕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많은 사람들은 그 가능성이 100퍼센트이며, 그것도 더욱 단기간내에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죠지 소로스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통화에 대한 투기를 삶의 일부로 삼아온 사람이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안정성이 누적되고 있고, 그 결과로 거침없이 떠돌아다니는 교환체제가 마침내 붕괴할 것은 거의 틀림없다.”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의 전(前) 편집자 조엘 커츠만은 자신의 최신 저서의 제목을 ‘통화의 종말(The Death of Money)’이라고 붙이고, 광란적 투기로 인한 임박한 붕괴를 예견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모든 선진 공업국들(OECD)의 중앙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합치면 대략 640억달러가 된다. 그러니까 위기상황에서, 만일 그 모든 중앙은행들이 협력하기로(그들이 그렇게 하는 법은 없지만)하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전부 사용하기로 합의한다 하더라도(이런 일도 결코 일어나지 않지만), 그들이 통제할 수 있는 기금은 정상적인 일일 거래량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위기가 닥치면 그 통화량은 쉽사리 두배 내지 세배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선진국 중앙은행의 보유고 전부는 두세시간밖에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급작스럽게 달라진 세계에 있게 될 것이다. 1929년에는 증권시장이 붕괴했지만 금본위제도는 살아있었다. 즉, 통화제도가 살아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은 좀더 근원적인 어떤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선례는 로마제국의 붕괴이다. 로마제국의 붕괴는 로마의 통화의 종말을 의미하였다. 물론 로마의 붕괴는 한 세기 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단 몇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니까 지역통화는 그러한 국제적 통화제도의 붕괴에서도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어떤 보호막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게 아닌가? 당신은 지역통화가 지속가능한 삶을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 연관성은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자율의 문제를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당신은 지금 100달러를 원하는가, 아니면 앞으로 일년 후 100달러를 원하는가”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지금 그 돈을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돈을 은행에 안전하게 저축해놓으면 일년 후 110달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해보자. 만일 내가 당신에게 일년 후에 100달러를 제공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당신에게 90달러를 제공하는 것과 거의 같은 금액이 된다. 이렇게 미래를 할인하는 것이 ‘할인된 현금 흐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현대의 시스템 밑에서는 숲을 베어버리고, 돈을 은행에 넣어두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이 된다는 것이다. 은행에 넣어둔 돈은 나무보다도 더 빨리 자라는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방한(防寒)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건물을 짓는 것이 돈을 ‘절약’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그 집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드는 여분의 에너지비용 ― 할인된 비용 ― 은 방한처리에 드는 비용보다 저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반대되는 통화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다. ‘할증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장기적인 고려가 가능한 시스템을 실제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할증료(demurrage charge)는 한세기 전쯤에 실비오 게젤(Silvio Gesell, 독일의 화폐이론가 ― 역주)에 의해서 개발된 개념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돈이란 하나의 공공재 ― 전화나 버스교통과 같은 ― 이며, 따라서 우리는 돈을 사용할 때 소액의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여, 플러스의 이자율이 아니라 마이너스의 이자율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만일 당신에게 100달러 지폐를 주면서, 그 돈의 효력을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 지금부터 한달 후 당신이 1달러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 나는 그 돈을 어딘가 다른 곳에 투자하려고 할 것이다.

  바로 핵심을 맞추었다. “돈은 퇴비 같은 것이어서, 뿌려주어야 쓸모있다”라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게젤이 구상한 시스템에서는, 사람들은 돈을 오로지 교환수단으로 사용할 뿐이지 가치를 증식시키는 비축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돈은 순환을 자극함으로써 일을 창조해 낼 것이다. 그것은 단기적인 인센티브 시스템을 역전시킬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넣어두기 위하여 숲을 베어내는 대신에 자신들이 가진 돈을 살아있는 숲에 투자하거나 집의 방한시설에 투자하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일찍이 시도된 적이 있는가?

  내가 알기로는 오직 세번 있었다. 고대 이집트, 유럽 중세기 동안의 약3세기, 그리고 1930년대의 몇년간에 그런 시스템이 행해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람들이 곡물을 창고에 쌓아둘 때에 그들은 증표를 하나씩 받곤 하였는데, 그 증표는 교환 가능한 일종의 화폐가 되었다. 그런데 일년 후 그런 증표 열개를 가지고 다시 돌아오면 그 사람은 아홉개의 증표에 해당하는 곡물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일년 동안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동안 쥐들이 갉아먹거나 부패하거나 하여 원래의 곡물량은 줄어들어 있고, 또 창고시설을 지키는 창고지기들에게 급료를 지불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공제된 액수는 ‘할증료’에 해당되었다.

  이집트는 고대 세계에서 곡창이었다. 그것은 나일강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된 것은 돈 그 자체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생산적 자산에 ― 예컨대 토지개량이나 관개시스템과 같은 영구히 지속가능한 ― 투자를 하였기 때문이다.

  통화시스템이 이러한 부(富)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는 로마인들이 로마식 통화시스템 ― 즉, 플러스의 이자율을 수반하는 ― 으로써 이집트인들의 ‘곡물기준’ 통화를 대체하자마자 이 모든 것이 급작스레 종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후, 이집트는 더이상 곡창이 아니었고, 오늘날 ‘개발도상국’의 하나로 되어버렸다.

  중세 유럽 ― 10세기에서 13세기 동안의 ― 에서 지역통화는 지역 영주들에 의해 발행되었다. 그리고 그 통화들은 세금징수 과정에 정기적으로 회수되고 재발행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돈을 축적한다는 것을 별 의미가 없게 만드는 일종의 ‘할증’이었다. 그 결과는 문화적 개화(開花)와 광범위한 복지였다. 이것은 정확히 이러한 지역통화들이 사용되던 시기와 일치하였다.

  실제로 모든 대성당은 이 시기에 세워졌다. 작은 소도시 하나가 대성당을 세우는 데 얼마나 큰 투자가 필요한가를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대성당을 짓는 데는 여러 세대가 걸리기 때문에?

  그뿐만은 아니다.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역할을 떠나서 ― 그것을 내가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 우리는 대성당이 매우 중요한 경제적 기능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대성당이 있는 곳에는 순례자들이 찾아들었다. 순례자들은 비지니스의 견지에서 볼 때 오늘날의 관광객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성당은 영구적으로 존속하도록 지어졌고, 따라서 그 공동체로서는 장기적으로 현금이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13세기에 걸쳐 당신과 당신의 후손들을 위해 부를 창조하는 방법이었다! 그 증거는 그것이 오늘날에도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샤르뜨르에서는 그 도시의 중심적 사업이 완공된 지 800년이 지난 대성당을 보러오는 관광객들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14세기에 와서 화약기술의 도입으로 왕들이 권력을 중앙집중화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왕들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통화시스템의 독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더이상 대성당이 세워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14세기나 15세기에도 여전히 경건한 기독교도들이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집단적 투자에 필요한 경제적 인센티브가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나는 대성당을 단지 하나의 예로서 들었을 뿐이다. 12세기의 영지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방앗간이나 그밖의 생산적인 자산들은 낡아버리기 전에 부품들이 대체되는 등 비상히 높은 질적 수준으로 보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유럽에 있어서 평범한 노동자가 누렸던 삶의 질은 12세기에서 13세기 동안에 가장 ― 아마도 오늘날보다도 더 ―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은 돈의 형태로 저축을 할 수 없을 때 장래에 가치를 생산해낼 어떤 것에 투자를 한다. 그래서 이런 형태의 돈이 비상한 활기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시기는 유럽에서 기독교가 절대적인 시기였고, 따라서 ‘위대한 어머니’ 원형이 여전히 억압받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종교적 상징이 이 시기에 널리 퍼져있었다. 유명한 ‘검은 마돈나’의 상징 말이다. 이러한 상(像)이 10세기에서 13세기 동안 수백개나 있었다. 그것들은 실제로 이시스(Isis ― 고대 이집트의 풍요의 여신)가 무릎 위에 자신의 아이 호루스(Horus ― 고대 이집트의 태양신)를 앉히고 있는 조상(彫像)들인데, 이것은 제1차 십자군 원정기에 이집트로부터 바로 수입되어온 것이다. 여신 이시스가 앉아있는 수직의 의자는 ‘카세드라’라고 일컬어졌는데 (거기서 카세드랄〔성당〕이라는 낱말이 유래한다) 흥미롭게도 이 의자는 고대 이집트에서 이시스를 나타내는 바로 그 상징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검은 마돈나’ 상(像)들은 또한 ‘알마마터’(‘인자한 어머니’라는 뜻으로 미국에서는 아직도 모교를 가리킬 때 이 표현을 사용한다)라고 말해졌다.

  ‘검은 마돈나’는 고대 세계에 있어서의 ‘위대한 어머니’가 직접적으로 계승된 것이다. 그것은 탄생과 다산성(多産性), 땅의 풍요로움을 상징하였다. 그것은 가부장중심 사회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기 이전에 물질속에 육화되어 있는 정신을 상징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자연발생적으로 할증료라는 개념에 기초한 통화시스템을 창조하여 일반 민중을 위하여 비상한 수준의 풍요를 창조해주었던 두개의 문명 ― 고대 이집트와 10-13세기 동안의 유럽 ― 이 ‘원형’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는 것이다. 그 두 문명에 있어서의 통화시스템은 ‘위대한 어머니’ 원형을 섬기는 일과 정확히 대응하고 있다.

 

  정말 흥미로운 얘기다. 당신이 보기에 이러한 ‘위대한 어머니’ 원형 ― 즉 풍요와 너그러움의 원형 ― 을 오늘날의 우리의 경제시스템속으로 가져오는 데 지역통화가 어떤 잠재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믿기에,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지속가능성과 불평등의 문제,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이다. 이런 문제로 인하여 폭력과 전쟁을 일으키는 긴장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들을 같은 도구, 즉 공동체와 지속가능성을 고양시켜주는 통화시스템을 의도적으로 창조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지난 몇십년 동안 여성적 원형이 다시 깨어나는 것을 우리가 보아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 이것은 여성운동이나 극적으로 증가해온 생태학적 인식, 또는 정신과 물질의 재통합을 시도하는 새로운 인식론에서뿐만 아니라 위계적 관계를 네트워크(예컨대 인터넷 같은)로써 대체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기술에서도 반영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에 덧붙여서, 인간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미증유의 풍요를 창조할 수 있는 생산기술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 모든 것의 수렴으로 풍요의 기술이라는 하드웨어와 ‘원형’의 전이라는 소프트웨어가 결합될 수 있는 놀랄 만한 결과가 가능할지 모른다.

  일찍이 그러한 결합의 가능성이 이만한 규모 또는 이만한 속도로 주어진 적이 없었다. 지금은 우리가 돈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에게 종속되도록 하기 위한 새로운 설계를 의식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지역적 수준과 세계적 수준에서 지속가능성과 공동체의 회복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통화시스템의 개발을 선택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이러한 목표는 한세대 안에 우리가 충분히 해낼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실현시키는가 못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돈을 의식적으로 다시 창조해내는 데 서로서로 협력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을 것이다.

 


  베르나르 리에테르(Bernard Lietaer) ― 벨기에 사람으로 여러해 동안 벨기에 중앙은행에서 일하였고, 루벵 대학의 국제금융학 교수를 지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버클리 캠퍼스에 있는 Center for Sustainable Resources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지속가능한 사회와 공동체에 적합한 새로운 통화체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책을 준비중에 있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미국 잡지 YES! : A Journal of Positive Futures 제2호(1997년 봄호)에서 이 잡지의 편집자와 나눈 대담기록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