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제65호 2002년 7-8월호
지역통화 LETS에 대하여
니시베 마코토
LETS는,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지만, ‘로컬 엑스체인지 트레이딩 시스템(Local Exchange Trading System)’의 줄인 말로서, 번역하면 ‘지역교환거래체계’가 됩니다. 지역통화에는 LETS 이외에 여러가지가 있고, 전세계에 2,000 또는 3,000 이상의 종류가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꽤 많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지역통화는 ‘공동체의 돈’이라고도 말해지는데, 그것이 ‘통화’라든가 ‘돈’이라고 불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LETS는 우선은 경제적인 미디어, 경제적인 조직원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이상의 것, 즉 윤리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역통화는, 경제적으로 보면, 지역경제의 활성화, 순환형 경제의 확립, 신용창조와 자본축적의 저지와 같은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윤리적으로 보면, 호혜적 교환을 통해서 상호부조적으로 공동적인 관계나 윤리를 재건한다는 목적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역통화에는 경제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이 분리하기 어렵게 결합해 있다는 것이 비상히 흥미롭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대략 30 이상의 지역통화가 실천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이와 같은 두 측면이 대립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룹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지역통화는 통상의 시장에서 거래되지 않고 있거나, 불충분하게 시행되고 있는 복지 서비스나 자원봉사 등을 활발히 하는 데 이용하고, 시장에서 충분히 거래되고 있는 재화나 서비스에 대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합니다. 즉, 경제적 측면보다도 윤리적 측면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역통화를 일반 재화와 서비스에 적용하면 통상의 화폐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과의 사이에 경쟁이 발생하고, 그것이 현재의 시장경제를 교란시키며, 호혜적인 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역통화에 의한 자동차 태워주기 서비스는 택시업계와의 마찰이나 경쟁을 불러일으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역통화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는 것이 됩니다. 지역통화가 이들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를 그 내부로부터 변화시킬 수 있는 ‘대항 암’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해두고 싶은 것은, 지역통화라는 것은 예를 들어 옛 일본의 ‘유이(結)’나 ‘코우(講)’ 같은 상호부조 조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역통화에 관한 설명을 조금 듣고는 “과거에 일본의 공동체에도 같은 것이 있지 않았는가, 지역통화라는 건 그런 것과 같은 것이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이’라는 것은 촌락공동체에서 사람들이 밭일 등을 공동으로 하던 관습입니다. 또 ‘코우’는 사람들이 매년 일정액을 갹출해서 그 돈을 모두 합친 것을 차례대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호조(互助)적 금융조직이었습니다. 이들은 호혜나 상호부조라는 점에서 지역통화에 연결되지만, 폐쇄된 공동체 내부에서 반강제적으로 행해지고 있던 전근대적인 관습이란 점에서는 지역통화와는 다른 것입니다.
지역통화는 근대사회 가운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일단 통과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역통화는 개인의 자율성이나 개인의 윤리성을 핵으로 하여 가능해진 것인데, 서양에서 이러한 것이 발전해온 것의 배경에는 근대 부르주아적인 사상원리가 확고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역통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그것이 단순히 공동체 원리라든가 상호부조의 원리라고 말하면 이해는 쉽게 되지만, 그렇게 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지역통화는 얼른 보면 단순한 것으로 쉽게 이해되지만, 그것이 주목되고 있는 배경이나 그것이 갖는 의의는 그렇게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지역통화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지역통화는 1990년대에 들어서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배경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이라는 흐름이 있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90년대에 들어 돌연히 나온 것은 아닙니다. LETS만 하더라도 1983년에 캐나다의 마이클 린턴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것입니다. 더욱이, 지역통화의 역사는 훨씬더 오래되고, 과거에 많은 사례가 존재합니다.
지역통화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1832년에 런던에서 오웬이 실시한 노동증권입니다. 재화를 생산하는 평균적 노동시간이 표시된 노동증권을 매개로 생산물을 거래한 것인데, 평균적 노동시간의 산정이 자의적으로 되어 불평등을 초래한 데다가, 거기에 상인이 개입하여 투기가 발생하는 등의 이유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역통화는 1930년대에 독일, 오스트리아, 미국에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실천되었습니다. 당시는 대공황 후의 불황 속에서, 실업자가 급증하고 큰 금융기관이 무너지고, 중소기업도 대량 도산하고 있었습니다. 지역통화는 그러한 경제상황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나왔던 것입니다. 1990년대는 30년대의 경제상황과 닮았기 때문에 지난 10년 동안 지역통화의 보급은 60년을 격한 리바이벌 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먼저, 1930년대에 행해진 지역통화 실험이 어떠한 것이었던가를 봅시다. 오스트리아의 뵈르글(Worgl)의 지역통화는 일종의 노동증권이었는데, 아르헨티나의 사업가 실비오 게젤의 이론에 근거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스탬프 화폐라는 것으로서, 매월 1%씩, 예를 들어, 10,000엔이라면 100엔의 스탬프[印紙]를 화폐의 뒷면에 붙이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게 고안된 화폐였습니다. 즉 화폐를 사용하는 데 일정한 수수료를 물리는 셈이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이것은 화폐가치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감소되게 하는 것으로, 마이너스의 이자가 붙는 화폐였습니다. 뵈르글에서는 이러한 화폐가치가 감소하는 화폐를 지역통화로 채택한 것입니다. 뵈르글의 시장은 은행에서 받은 차입금을 담보로 ‘노동증명서’를 발행하여, 이것을 도로정비 등 실업자 대책을 위한 공공사업의 임금으로 지불하였고, 이 화폐를 받는 상점도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가 상점에서 일용품 등을 구입하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그것을 받은 상점도 그것으로 세금을 납부하고, 다른 상품을 사는 데 사용하였기 때문에 스탬프 화폐는 이 도시에서 급속히 순환하게 되었습니다.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폐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누구라도 가능한 한 빨리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유통속도는 일반 화폐인 오스트리아 실링의 14배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스탬프 화폐의 성공에 따라 도시의 경제는 부흥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견학자가 왔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중앙은행이 화폐발행의 독점권을 침해한다고 하여 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에 이 시도는 결과적으로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에서도 1930년대 초에는 많은 지역이나 상공인의 모임이 지역통화를 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가 뉴딜정책을 제창하여 국가가 대규모 공공사업을 추진하게 되었기 때문에 지역통화는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경우에나 국가에 의한 화폐관리 또는 경제통제로 말미암아 지역통화의 가능성의 싹이 잘려버린 셈입니다.
1990년대 전반이 30년대 전반과 다른 것은 국가에 의한 경제의 계획화 · 통제화의 시대가 아니라 시장의 보편화 · 자유화가 진전되는 세계화의 시대라는 점일 것입니다. 소련형 사회주의의 중앙집중적 계획이나 케인즈형의 거시적 수요관리와 같은 계획사상이 후퇴하고, 시장경제가 지구전체를 덮고 말았습니다. 국내에서는 규제완화와 행재정(行財政) 정책, 국제적으로는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가 추구되고 있습니다.
요 몇해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부활하고 있지만, 시장이 확대 심화하는 이 경향은 아마도 다음 세기까지 계속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전반에 걸쳐서 생각한 것은, 이 세계화는 철저하게 진전될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자본주의 경제는, 특히 일본의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세계화는 자유주의나 개인주의를 어떤 범위에서 보편화하는 까닭에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화가 이대로 계속 진전된다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연히 자본주의 경제가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할 것인가. 그렇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금 문제로 삼아야 할 것은, 세계화로 향하는 세계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20세기는 자본주의 경제를 외부로부터 폭력적으로 변혁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역사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세기에는 두가지의 반(反)자본주의적인 통제경제가 시도되었습니다. 하나는 집권적 계획경제, 또하나는 전체주의입니다. 이들은 화폐나 자본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하여, 화폐를 어떻게 없앨 것인가, 그리고 화폐를 없앤 다음 어떻게 경제 전체를 계획 · 통제할 것인가를 목표로 삼았지만 모두 다 실패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화폐를 폐기하여 생산을 계획적으로 조직하고, 설계주의에 의해 무정부성을 제거한다는 방향에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1997년부터 98년에 걸쳐 일어난 아시아, 남아메리카, 러시아 등의 통화위기나 국내의 금융위기에서는 세계화 시대의 화폐나 신용의 문제가 부각되었습니다. 단기 국제자본의 유입이나 은행의 신용확대는 거품경제의 팽창을 낳고 실물경제도 일시적으로 성장시켰지만, 자본의 도피나 신용의 붕괴는 실물경제에도 심각한 손상을 끼쳤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화나 신용창조의 문제도 또한 명백해졌습니다. 우리들은 화폐를 파기할 수도, 그것을 현재처럼 멋대로 방치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남아있는 것은, 화폐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내적인 변혁을 꾀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화폐의 본질을 미묘하게 변화시킴으로써 시장(유통)의 마크로적 특성을 다시 짜는 지역통화의 방향성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화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장의 외연적 확대’입니다. 이것은 시장이 공간적, 영역적으로 넓어져간다는 데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에코노미스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있듯이, 유럽연합(EU)이라든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권역별 경제통합이 진전되고, 인터넷 등 정보통신의 발달로 지구가 하나의 세계시장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금융시장의 세계화는 현저하게 눈에 뜨입니다.
또하나는, 이쪽이 나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시장의 확대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매매되지 않았던 재화나 서비스의 상품화가 진전되어 시장에서 갖는 자유의 의미가 고도화하고 있는 점입니다. 이것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유전자 등 정보의 상품화, 또는 성(性)이나 장기, 가사노동의 상품화 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금융시장이나 투자시장의 세계화에 동반하여, 소비의 자유뿐만 아니라 투자의 자유가 전면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WTO나 IMF에서 무역의 자유화뿐만 아니라 투자의 자유를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시장의 내포적 심화’로 부르고 있습니다. 시장은 먼저 공동체의 외부에서 발생하여, 공동체의 내부로 침투하여 공동체를 해체하고, 그 결과로 우리들을 상품을 팔거나 사는 자, 또는 화폐나 상품의 소유자라고 하는 개체로 환원해버립니다. 이것은 국가, 지역사회, 학교, 가족의 위축 · 붕괴라는 맥락에서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노동자가 어떻게 변화해왔는가가 중요합니다. 일찍이 노동자는 기업내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주체이며, 임금으로 구매한 생활수단을 가족내에서 소비하여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주체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진국에서는 노동자는 화폐를 가지고 상품을 자유로이 살 수 있는 소비자로서의 측면을 강하게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라타니 씨도 말하고 있는 것으로, 그 점에 근거하여 ‘소비자로서의 노동운동’을 제창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한편에서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는 소비자만이 아니라 투자가도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노동자 자신도 상당한 금융자산을 소유하고 있고, 자본가적인 의식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일본의 개인 금융자산은 1997년 말에 1,230조엔입니다. 1세대당 1,360만엔, 1인당 976만엔, 1인당 금융자산은 독일이나 영국을 능가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입니다. 게다가 일본인 1인당 실물자산을 보면, 토지로서 1,209만엔, 건물로서 213만엔으로 되어있는데, 이들을 합하면 일본인은 세계 제일의 자산가가 됩니다. 주식이나 토지의 거품이 붕괴된 뒤인 90년대 후반에도 그러합니다.
금융자산의 증대는 최근 30년 사이에 급속히 진전하였습니다. 일본의 개인 금융자산의 증가를 시기별로 보면, 1965년 말에 31조엔, 70년 말에 72조엔, 75년 말에 179조엔, 80년 말에 344조엔, 85년 말에 572조엔, 90년 말에 925조엔, 95년에 1,182조엔입니다. 65년부터 32년 동안 40배 가까이 증가하였습니다. 65년의 1인당 금융자산은 31.5만엔이었는데 97년까지 약 32배가 되었습니다. 1인당 GDP는 같은 기간에 12배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소비자 물가가 약 400% 상승하였으니까, 이것을 감안하면 1인당 실질 금융자산은 8배, GDP는 3배가 된 셈입니다. 거품 붕괴 이후에도 7년 동안 30% 성장하였지만, 이것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주목할 것은 개인 금융자산이 65년부터 90년까지 25년 동안 30배, 실질로도 8배나 되었다는 점입니다. 인구증가분을 빼더라도 1인당 6.4배입니다. 일본은 거품이 절정이었던 90년까지 급속한 부유화가 진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97년 말의 개인 금융자산의 내역을 보면, 예금 · 현금이 796조엔으로 64.7%, 보험 · 연금이 315조엔으로 25.6%, 주식이나 채권 등 유가증권이 119조엔으로 9.7%입니다. 즉, 보험 · 연금, 유가증권의 합계인 약 35%분의 434조엔은 본인이 직접적으로, 또는 보험이나 연금과 같이 펀드 매니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투자되고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는 보험 · 연금, 유가증권 등이 전체의 85%, 영국에서는 80%에 달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아직 정기예금의 비율이 비상히 높지만, 영미형에 가까운 경향이 드러납니다. 이와 같이 노동자를 포함하여 개인들이 적지않게 투자가가 되고 있는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강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80년대 후반의 거품기에는 소득이나 자산이 전체적으로 성장하는 다른 한편으로, 소득격차나 자산격차가 급속히 벌어졌습니다. 거품 붕괴 이후 90년대에는 지가(地價)나 주가가 크게 하락하는 바람에 자산격차는 어느 정도 약해졌지만, 실업이나 구조조정에 의한 소득격차는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시장의 내포적 심화는 투자의 자유를 보편화하면서, 경제적인 불평등을 확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자가 갈수록 부유해지고, 상대적으로 빈곤한 자가 갈수록 빈곤해진다는 양극분해 경향은 일본에 한정되지 않은, 세계적인 경향입니다.
이와 같이 세계화에는 시장의 ‘외연적 확대’와 ‘내포적 심화’라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세계화라는 것은 이 둘이 동시에 진행되는 복합현상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세계화의 목적지는 재화와 서비스를 위한 시장이 자유화되고, 세계가 단일한 자유무역시장이 되고, 경제가 효율적으로 되며, 사람들이 한결같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도달점은 필경 자유무역주의를 넘어선 자유투자주의인 것입니다. 그것은 확실히 전체적으로 경제적 자산은 증대하겠지만, 경제가 효율적으로 된다든가, 사람들이 모두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든가 하는 것은 불가능한 세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유로이 투자가 행해질 수 있는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 투자주의가 공동체를 외부로부터 침식 · 해체한다는 앞서 말한 문제가 부각됩니다. 자유투자주의와의 관련에서 중요한 것은, ‘인적자본화’입니다. 인적자본 이론이란 학교에서 하는 교육이나 훈련을 일종의 투자로 보는 관점에 기초해 있습니다. 이것은 슐츠나 베커와 같은 경제학자들이 1960년대에 전개한 이론인데, 당시는 래디칼한 경제학자들이 “노동력을 자본과 동일시하는 비인간적인 이론이며, 자본 변호론이다”라고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이러한 생각이 경제학의 이론 가운데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교육은, 그것이 지식이나 기능의 획득을 통해서든, 단순히 학력이라는 자격의 획득을 통해서든, 자신의 노동력의 자본가치를 높여 평생 동안 소득을 증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투자라고 대다수 학생 · 부모들이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런 사고방식은 오늘날 교사나 교육관료들이 교육문제를 생각할 때 기본적인 전제로 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맑스는 자본주의 경제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은 ‘노동력 상품’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서 노동자는 스스로의 노동력을 파는 자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중(二重)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주체라고 상정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노동력이 존재한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하게 함으로써 이윤을 버는 것이 가능합니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노동력 상품이란 자본가가 이윤을 위해 공장내에서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상품’이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족내에서 생산하는 ‘단순상품’이라는 것입니다. 폴라니는 토지, 화폐, 노동력은 본래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을 의사(擬似)상품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는 이윤목적으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동력 상품이 특수한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 속의 유일한 ‘단순상품’, 즉 재생산은 되지만 이윤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닌 상품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기회비용’이라는 생각이 가족내에까지 침투하면, 가사노동도 외부의 임금노동과 같이 가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가사노동은 가족 바깥에서 노동을 했을 때 얻게 될 임금획득 기회를 희생시킨 것이기 때문에, 그 임금이 바로 가사노동의 비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업에서 1시간 노동하면 1,000엔의 임금을 받게 된다면, 1시간의 가사노동은 적어도 1,000엔에 값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가족내에서 화폐로 평가되지 않았던 가사노동도 외부에서의 임금노동과 비교됨으로써 화폐로 평가되게 됩니다. 다른 한편, 인적자본화라는 것은 노동력이 지닌 단순상품이라는 특수성이 제거되고, 일반 상품과 같이 이윤을 목적으로 생산되는 ‘자본주의적 상품’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노동력은 변함없이 가족내에서 생산되게 마련이지만, 기회비용과 인적자본 투자라는 생각은, 가족 내부에까지도 ‘비용과 편익’이라는 사고방식을 침투시킵니다. 이 때문에 가족은 더이상 종전과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노동력을 이윤 목적으로 생산하는, 산업자본이나 기업과 비슷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야말로 앞에서 말한 자유투자주의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자유로운 투자 주체로서의 개체로 환원시킵니다. 이 투자가의 자유란, 비경제적인 요인들, 예컨대, 공동체의 전통, 관습, 규범, 문화로부터 전혀 제약을 받지 않고, 갖가지 투자 메뉴 속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다고 예상되는 것을 자기 책임하에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러한 메뉴 이외의 것을 선택한다거나, 경제적 수익 이외의 요인을 고려하는 것과 같은 자유는 아닙니다. 시장의 확대와 심화는 이와 같이 공동체에 의한 비경제적 구속으로부터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반면에, 자유를 “~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인 것에, 더욱이 그것도 경제적인 영역에 한정시킵니다. 그리고 전통이나 관습, 규범이나 문화를 기르는 장소인 공동체나 사회를 해체시켜 버립니다.
지역통화는 세계화의 진전으로 파괴된 공동체나 그 내부의 커뮤니케이션을 새로운 형태로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결코 전근대적인 폐쇄적 공동체를 부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20세기의 구사회주의 국가들의 경험으로부터, 화폐를 폐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들은 닫혀진 공동체의 내부에서 아무런 매개 없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리지만, 이 목적을 위해서 언어를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언어는 자기와 타자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불가결한 매체, 미디어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시에 이제, 화폐를 경제적 커뮤니케이션, 또는 맑스가 말하는 ‘교통’을 위한 불가결한 미디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화폐를 통해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개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폐로 인해 가능한 자유라는 것은 소비자 또는 투자가로서 경제적 의사결정을 행하기 위한 자유일 뿐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유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측면과 함께 윤리적인 측면까지도 포함하는 화폐가 불가결한 것입니다. 이러한 화폐가 바로 지역통화입니다.
현존 지역통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사카아워’ ‘타임달러’ ‘LETS’ ‘WIR’ 등 네 종류로 나누어 봅니다. ‘이사카아워’는 1991년에 미국 뉴욕주 이사카에서 폴 글로버가 시작한 지폐형의 지역통화입니다. 1이사카아워는 노동 1시간, 10달러에 상당합니다. ‘타임달러’는 1986년에 에드가 칸이 고안하여, 미국 전역의 200단체, 5만명이 참가하고 있는 시간예탁제도로서, 서비스 시간을 참가자 사이에 교환하는 시스템입니다. ‘LETS’의 원형인 LETSystem은 캐나다 밴쿠버 섬의 코목스 밸리에서 마이클 린턴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 그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영국에서 여러개의 변종이 보급되었는데, 일괄해서 LETS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것과 거의 같은 시스템으로서, 독일이나 덴마크, 북유럽에는 ‘교환링크’, 프랑스에는 ‘SEL’이 있습니다. LETS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2,000개 이상의 지역에서 실행중에 있습니다. 현존하는 지역통화로서 가장 오래된 WIR는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1934년에 바나 찌먼과 폴 엔츠에 의해 협동조합으로서 설립되었습니다. WIR는 1936년에는 스위스 은행법에 근거하여 WIR은행으로 개조되었지만, 동시에 LETS와 같은 식의 거래도 어느 시기까지 주변적으로 행해졌습니다. 현재는 참가자가 8만명, 연간거래가 20억달러입니다. 수표형의 지역통화가 중소기업 상대 거래에 이용되고 있고, WIR은행은 저리(低利)의 융자도 하고 있습니다.
이 네 종류의 지역통화를 비교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3개 있습니다. 첫째, 그 통화가 무엇을 단위로 하고 있는가, 둘째, 어떠한 발행방식을 취하고 있는가, 셋째, 이자 · 가격을 어떻게 결정하는가 등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시간 관계로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할 수 없어서,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단위에 대해서는, 노동시간을 취하든가, 국민통화에 링크하든가, 그 양쪽을 병용하든가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경제적 가치가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는가 어떤가, 즉 이른바 ‘노동가치설’이 현실의 설명원리가 아니라, 규범원리로서 유효한가 어떤가라는 문제에 관련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격결정 방식과 동시에 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가격을 관리위원회와 같은 중앙기관이 노동시간에 근거해서 지정하는, 어떤 종류의 관리가격 방식은 현재의 지역통화에서는 채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각 지역통화는 국민통화인가, 노동시간인가, 어느 쪽을 단위로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거래 주체가 상대방과 함께 자유로이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유지되어야 하며, 노동시간 단위의 지역통화도, 그렇지 않은 것도, 동시에 존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이자에 대해서는, WIR를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지역통화가 제로 또는 마이너스의 이자를 설정하고 있는데, 그 대강은 미리 지역통화의 창설자나 관리위원회가 결정합니다. 마지막으로, 발행방식에 관해서는, 중앙의 관리위원회가 지폐 발행을 택하든가, 장부방식을 택해서 각 개인이 그 장부상의 계좌에서 적자 · 흑자를 내면서 거래하든가 하고 있습니다. 이 발행방식이 지역통화를 분류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일 것입니다.
LETS는 장부방식인데, 나는 이러한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이사카아워처럼 중앙위원회가 지폐를 발행하는 지역통화는 실제로 지폐가 물건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손에 쥐고 직접 볼 수도 있고, 거기에 지역독자의 그림이나 표어를 인쇄할 수도 있어서 매우 상징적으로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힘도 있습니다. 또, 현금처럼 거래가 간편하게, 익명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폐가 물건이라는 착각을 낳게 하고, 위조 문제도 따릅니다. 또, 지폐로서 소유자의 손을 따라 유통되기 때문에, 그 유통범위도 실제로는 한정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화폐 발행자인 관리위원회는 작은 중앙은행과 같은 권한을 행사하는 존재가 됩니다. 물론 위원회는 신규가입자 수에 따라서 통화를 발행한다는 규칙이 있지만, 대출이나 기부라는 형태로 통화발행을 어느정도 할 것인지에 대한 규칙은 별로 명확하지 않게, 재량에 따라 결정할 여지를 남기고 있는 탓에 중앙에 발행 권한이 집중될 위험이 있습니다. 대출이나 기부가 공정하게 되는가, 과잉발행에 따른 인플레의 가능성은 없는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문제가 있어도, 많은 이점이 있기 때문에 현금형을 일거에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한편, LETS는 계좌기록의 번잡함이나 거래의 비익명성이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익명성은 오히려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고, 계좌기록의 번잡함은 IC카드나 인터넷 등을 이용하는 기술적 해결이 가능합니다.
LETS는 각 개인이 무엇인가를 살 때에 자기 계좌에 적자를, 상대방 계좌에 흑자를 기록하는 것인데, 이러한 계좌상의 기록이 동시에 화폐발행이 되는 것입니다. LETS는 참가자가 자신의 자율적 판단으로 분산적으로 발행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여기에 A, B, C, 세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LETS를 통해서 세사람이 거래를 행하는 경우의 일례인데, 네모 속에 각자 거래 전과 거래 후의 LETS의 잔고상황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어져 행해지는데, 예를 들면, 우선 A가 C에게 잔디깎기 서비스를 제공하고, 다음에 C는 B에게 꽃을 제공하며, 마지막으로 B는 A에게 맥주를 제공한다라는 방식입니다.
최초의 거래에서는 잔디깎기 1시간의 서비스를 10그린달러(G$)로 하여 A가 C에게 제공합니다. 이 거래의 종료시점에서 C의 계좌는 마이너스 10그린달러, A의 계좌는 플러스 10그린달러가 됩니다. 이어서 꽃 10송이를 20그린달러로 하여 C는 B에게 제공하고, 최후에 맥주 1다스를 15그린달러로 하여 B가 A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거래가 진행됩니다. 이 3건의 거래 결과 A의 계좌는 마이너스 5그린달러, C의 계좌는 플러스 10그린달러, B의 계좌는 마이너스 5그린달러가 되는 셈입니다. 실제로는 다른 순서로 거래가 행해질 수도 있지만, 결과는 같습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C의 흑자 플러스 10그린달러가 A의 적자 마이너스 5그린달러와 B의 적자 마이너스 5그린달러의 합계와 같아진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두 사람간의 다양한 거래의 결과로서 흑자를 기록하는 사람과 적자를 기록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나 어떤 거래든 뒤에는 흑자의 합계액과 적자의 합계액은 언제나 같고, 계좌의 흑자 · 적자의 합계는 늘 제로가 됩니다. 이러한 ‘계좌 집계 상쇄원리’가 LETS형의 지역통화의 특징인데, 이 점을 나는 퍽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각자가 갖고 있는 흑자나 적자는 특정 개인이 특정 개인에 대해 갖는 채권이나 채무가 아니라, LETS 참가자 전체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대한 신뢰나 관여(커미트먼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LETS의 주체는 공동체에 대한 신뢰 때문에 거기에 참가하였고, 팔거나 사는 사람의 경제적 신용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신뢰에 기초하여 흑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적자라는 것도 특정 개인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굳이 말한다면, 공동체에 대한 ‘부채’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나, ‘부채’는 법률상 변제의무를 갖는 개인이나 법인 등 법적 주체간의 관계이지만, LETS의 적자는 그것과 다릅니다. 그렇게 구별되기 때문에 ‘커미트먼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커미트먼트’는 법적 강제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갚아야 한다는 윤리에 기초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하게도, 여기서 적자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갚지 못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지 않느냐는 도덕적 문제가 우려되지만, 그에 대해서는, 하나는 ‘평판’이라는 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계좌 잔고는 공개되고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적자를 기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팔지 않는다, 혹은 그러한 사람에게 파는 사람도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한다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적자를 누적시키는 사람은 자연히 살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는, 적자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방법으로 미리 거래를 제한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LETS는 시장경제에서 보는 것과 같은 화폐의 임차관계, 즉 신용관계나 채권채무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공동체에 대한 신뢰와 커미트먼트라는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화폐입니다. 경제적 미디어인 화폐 속에서 이미 윤리적 요소가 깊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이라는, LETS의 이중성이 생겨나는 셈입니다.
여기서, 지역통화의 특징을 LETS를 예로 들어서 종합해봅시다.
우선, 계좌등록제도를 취하는 LETS에서는 참가하는 사람이 누구인가하는 게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유통권도 명확히 한정됩니다. LETS가 회원제로 되어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공공재에 대한 자유로운 권리를 이야기할 때, 흔히 경제학에서는 ‘공유지(commons)의 비극’을 예로 듭니다. 자유로운 권리라는 것은 스스로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자신만 이익을 얻으려고 ‘무임승차’하는 사람입니다. 공유 목초지를 무제한으로 개방하면, 가능한 한 자기가 기르는 양들에게 많이 먹이려고 하는 이기적인 양치기가 나오는데, 다른 양치기들도 이를 뒤쫓아 같은 행동을 하게 되면, 모든 목초가 양들의 먹이로 바닥이 나고, 그 결과 목초지는 황폐화합니다. ‘공유지’는 이러한 이기적 행동 때문에 반드시 쇠퇴하고 맙니다. 이런 경우 하나는, 사유제를 도입하여 사적 비용과 사적 편익을 일치시키면 이 문제는 해결됩니다. 또하나는 회원제를 도입하여, 협동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를 배제함으로써 지나치게 이기적인 동기를 억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많은 공유지는 그 주변의 주민들만이 참가하는, 공유지를 계속 보전하면서 적절하게 이용하는 회원제였던 것이지만, 사유제의 확립과 화폐경제의 침투로 말미암아 공유지는 쇠퇴하였습니다. LETS는 회원제를 채택함으로써 무제한적인 접근에 대처하고, ‘공유지’를 해체해온 화폐 그 자체를 ‘공유지’로 삼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 LETS는 이자가 발생하지 않는 무이자 화폐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것도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화폐의 대차(貸借), 즉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신용(信用)행위에는 반드시 이자가 붙습니다. 부모형제나 친구 사이에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은행에서 돈을 빌리면 반드시 이자를 붙여서 갚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에 대해서, LETS는 무이자이기 때문에 흑자도 적자도 시간과 더불어 증가하지 않습니다. 마이너스 이자를 채택하고 있는 지역통화의 경우에는 이 통화를 가지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치가 감소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능한 한 재화나 서비스를 위해 빨리 지출하려고 합니다. 또, 그러한 통화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면 되돌아올 때는 가치가 떨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결과 화폐의 유통속도가 상승하고, 거래가 활발하게 된다는 것은 핏셔나 케인즈 등 경제학자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제로 또는 마이너스 이자는 화폐 축적을 억제하고, 그 사용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이미 설명하였지만, LETS의 경우에는 참가자가 화폐를 자발적으로 발행한다는 특징을 들 수 있습니다. 현금형 지역통화의 경우는 집중적인 발행 · 관리가 됩니다.
네번째, LETS를 포함하여 모든 지역통화가 자율분산형 네트워크로서 시장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통상적으로는 2명의 참가자가 가격이나 조건을 자유로이 교섭하여 거래가 개별적으로 성립합니다. 이 점은 일반화폐를 통한 거래와 같은데, 지역통화는 이 점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의지결정의 자율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LETS는 경제적 미디어로서 신용화폐가 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 및 문화적 미디어로서 신뢰화폐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LETS는 경제적 미디어로서, 한정된 유통권, 무이자 화폐, 자발적 발행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특성은 또한 윤리적인 의미도 띠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LETS는 자유와 커미트먼트(관여), 협동, 공유, 정보 공개와 같은 기본이념도 전달 · 공유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지역통화는 화폐라는 경제적 미디어의 의미를 변화시킴으로써 경제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언어적인 커뮤니케이션까지도 되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화폐’의 의미를 변용시키는 것과 동시에 ‘지역’의 의미까지도 변용시키는 것이 됩니다. 지역통화와 공동체 화폐의 ‘지역’이나 ‘공동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구획되는 공간, 예컨대, 시도읍면일 필요는 없습니다. 지역이나 공동체가 어떤 것의 중심으로부터 가까움을 표시하는 위상공간이라면, 그 중심은 물리적인 위치가 아니라 문화적 · 가치적인 위치라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즉, 무엇인가 가치나 관심을 공유하는 가상(virtual)의 지역이나 공동체라도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터넷상의 포럼, 메일링리스트, 전자회의실, 또는 NGO, NPO 등 다양한 네트워크나 활동조직도 포함되고, NAM과 같은 일정한 이념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된 운동조직도 포함됩니다. 이러한 공동체가 독자적인 개성, 메시지, 이념을 제시하는 지역통화를 사용한다면,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환경적 · 문화적 · 윤리적인 가치를 다양한 형태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오늘 여기에 올 때 내가 생각한 것은, 지역통화를 단순히 소개 ·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NAM의 운동 속에서 LETS 또는 지역통화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생각하면, 결국 지역통화의 가능성을 다시 재인식하게 됩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역통화는 단순한 경제적 미디어가 아니라 이념을 공유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라는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이 LETS의 특성이 이미 “새로운 어소시에이션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NAM의 조직원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NAM은 참가자 개인이 ‘관심계’나 ‘지역계’ 등 다양한 분야에 중복 소속하는 것이 가능한 조직원리를 갖고 있는데, 이것은 지역통화의 중요한 특성이기도 합니다. 어떤 물리적인 지역, 오사까면 오사까, 내가 있는 삿뽀로면 삿뽀로라는 물리적인 지역이나 공동체만 아니라, 다양한 관심이나 흥미, 예컨대 ‘협동조합’ ‘노동운동’ ‘LETS’ ‘이론’ ‘환경’ ‘법률’ ‘복지’ ‘교육’ ‘예술’ ‘컴퓨터’ ‘페미니즘 · 레즈비언 · 게이’ ‘마이너리티’ 등이 열거될 수 있지만,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적 · 가치적인 지역 · 공동체라도 지역통화의 기본이념을 공유하는 한, 독자적인 지역통화를 만들 수 있고, 개인은 그러한 복수(複數)의 지역통화의 공동체에 동시에 소속하여, 그것들을 병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역통화는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지역이나 공동체를 폐쇄적인 것으로 고립시키지 않고, 가로지르는 보편적인 어소시에이션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지역통화의 또하나의 중요한 측면은 NAM과 같이 자본과 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을 매개하는 ‘대항 암(癌)’적인 미디어라는 점입니다. ‘대항 암’이라는 것은, 지역통화가 일반화폐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유전자 정보를 가진 탓에 자본주의라는 세포형태인 상품형태, 즉 시장원리를 내부로부터 변질시켜, 자본주의라는 신체를 뛰어넘는[超出] 것을 비유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지역통화 LETS를 어소시에션을 위한 조직원리임과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를 내부로부터 뛰어넘는, 또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부정하기 위한 운동원리이기도 하다고 자리매김합니다. 만약 NAM이 독자의 LETS를 가지고, 회원이 그것을 상호간의 거래에 사용한다면, 그 LETS의 유통공간의 확대는 동시에 NAM의 조직이나 운동의 확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LETS가 NAM의 조직원리나 운동원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LETS의 이념이 NAM의 이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간단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LETS의 이념은 우선 첫째로 자유와 동의입니다. 자유로이 참가하고 자유로이 탈퇴할 수 있으며, 거래는 전부 자유로운 의사와 동의에 의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의사의 결과로서만 커미트먼트가 생겨납니다. 이것은 NAM에도 같습니다. 두번째는 협동 또는 공유입니다. 화폐 자체가 협동적으로 만들어지고, 공유됩니다. 그것은 국가나 특정 기관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공동체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에 대한 신뢰라든가, 그 속에서의 상호부조가 가능한 것입니다. 지역통화의 공유는 사적소유를 법과 권력에 의해 옹호하는 국가에 대한 대항의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는, 무이자라는 것. 이것은 경제적인 것과 동시에 윤리적인 측면을 갖고 있습니다. 이자가 없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자본의 축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그것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우리의 시간관념과 그에 기초한 우리의 윤리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무이자는 자본에 대항하기 위한 필요조건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보공개가 있습니다. 거래 정보나 계좌 정보가 공개되어 있고, 각 참가자는 공개된 정보를 보면서 자율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거래를 행함으로써 자유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지역통화의 현상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역통화는 최근에 텔레비젼이나 신문 등을 통해 자주 보도되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겠지만, ‘에코머니’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역통화와 에코머니는 거의 교환가능한 것으로서, 또는, ‘에코머니’쪽이 보다 쉽게 유통되는 표현으로서 그 용어가 전국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양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그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 통산성(通産省)의 가또(加藤敏春) 씨가 고안하여 명명한 지역통화의 고유명사로서, 일본에서밖에 통용되지 않습니다. 가또 씨 본인은 통산성의 간부로서가 아니라, 한사람의 시민으로서 에코머니의 보급에 힘을 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식이나 의도가 아니라, 그의 언동이 실제로 무엇을 초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에코머니’라는 고유명사는 지역통화나 공동체 화폐와 같은 ‘보통명사’와 같은 것으로서 널리 보급되어 왔습니다. 또, 그의 보급활동의 결과, ‘에코머니’를 보통명사로 여기고, 그 이름으로 지역통화를 실험하는 지방자치체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서 일본의 현실의 특수성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본 이외 구미에서도, 정부나 자치체의 원조를 받아서 실시되고 있는 지역통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통화는 우선은 지역주민의 풀뿌리 차원에서 실천되고, 그 바퀴를 서서히 굴려 넓혀가는 식으로 보급되어온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에는 중앙관료가 이름을 붙이고 매스컴을 통한 증폭효과와 더불어 보급되어 왔습니다. 일본이 얼마나 중앙의존이 심한 나라인가를 나타냅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에코머니’는 비시장적 거래, 특히 서비스, 간호라든가 자원봉사 등에 주로 사용되어, 일반 시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본은행권이나 보조통화에 함께 공서(共棲)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대장성(大藏省)이나 일본은행과 마찰이나 대립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에 찬동할 수 없습니다. 지역통화의 가능성은 시장과 비시장의 경계, 또는 국민통화와 지역통화의 경계 그 자체를 뒤흔들어 버리고, 마침내는 그것을 무효화하는 ‘대항 암’이 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역통화는 시장이나 자본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국가나 권력에도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역통화가 단순한 공동체적인 상호부조나 호혜의 원리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시장 영역의 서비스를 포괄하면서도, 시장영역에서 국가통화와 병존하면서 경쟁하는 방향을 겨냥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대항운동으로서의 지역통화가 광범위하게 보급된다면, 시장과 비시장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 그것이 자본과 지역통화 운동과의 대립이나 융합을 일으킬지 모릅니다. 또, 국민통화와 지역통화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 그것이 국가와 지역통화운동과의 대립이나 융합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한꺼번에 예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역통화가 노리는 방향이란, 자본이나 국가로부터 도피하여 폐쇄적인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이나 국가에 외재적으로 대립, 그것을 폭력적으로 타도하려는 것도 아니라, 오히려 자본과 국가에 내재하면서, 그 원리를 대체함으로써 그것을 뛰어넘는[超出]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부드럽게 자본과 국가를 넘어선다는 것은 아니겠지만.
《NAM의 원리》에서, 운동형태에 ‘내재적’이라는 말과 ‘초출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해야 한다고 가라타니 씨에게 제안한 것은 실은 그러한 두 개의 운동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운동 자체가 그런 양면성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며, 지역통화도 그 양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반화폐는 보통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됩니다. 화폐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될 때, 축적을 자기목적화한 화폐는 자본이 됩니다. 자본에는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종교적인 동기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는데, 축적이 강박적인 것인 한, 그것은 자유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지역통화는 우선 그것으로써 무엇인가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되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단순한 수단을 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역통화는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화폐와 언어의 중간에 위치하는 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이며, 자본과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실현하는 운동과정으로서밖에 실현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개인이 자율적으로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자신이나 타자가 단순한 목적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해서는 자유라는 관념이 아니라, 자유를 현실화하기 위한 경제적 및 윤리적인 미디어가 필요합니다. 지역통화는 그와 같은 것으로서, 자본이나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위한 대항운동의 핵(核)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운동이나 조직은 경제를 근본에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어떻든 돈의 문제, 목적을 위한 수단의 문제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NAM도 물론 예외가 아니며, 그것을 철저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니시베 마코토(西部忠) ― 일본 홋가이도(北海道)대학 경제학 교수. 대표적인 지역통화 LETS에 관한 이 글은 가라타니 코진 편저《NAM 原理》(2000년)에 수록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비평가 가라타니 코진에 의하면, 니시베 마코토 교수는 현재 지역통화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이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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