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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NAM과 지역통화운동-가라타니 코진과의 대담 (녹색평론65호)

by 마리산인1324 2010. 1. 6.

<녹색평론> 제65호 2002년 7-8월호    

http://www.greenreview.co.kr/

 

 

NAM과 지역통화운동

가라타니 코진과의 대담

 

  대담자 - 박유하

 

 

  편집자의 말

《녹색평론》은〈공동체의 돈 만들기〉라는 글을 통해서 ‘지역통화운동’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풀뿌리 자치 · 자립 운동의 한 형태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1996년 3-4월호 이후 계속해서 지역통화 및 그 대표적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LETS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소개 · 게재해왔다. 우리가 이렇게 지역통화운동에 주목해온 것은, 1980년대 이후 영미권 일부에서 시도되기 시작한 이 운동이 90년대를 경과하면서 세계전역에 걸쳐 ‘들꽃’처럼 확산되어왔을 뿐만 아니라, 지구환경과 세계 각처의 지역경제와 지역문화를 뿌리로부터 손상시킴으로써 이 시대의 크나큰 재앙이 되고 있는 ‘경제의 세계화’에 맞서서 싸울 중요한 투쟁의 도구로서 지역통화에 주목해온 세계적인 활동가 · 사상가들의 견해에 공감하기 때문이었다.

 

《녹색평론》이나 또다른 경로를 통해서 국내에서도 근년에 이르러 지역통화운동에 대한 관심은 증가되어왔고, 일부 지역이나 시민운동 조직내에서 이미 여러 형태의 지역통화운동이 실제로 시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국내에서는 아직 LETS를 비롯한 지역통화운동은 그것이 당연히 받아야 할 만큼의 큰 주목은 받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실제로 이 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도 계속하여 활발하게 운용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현재 한국의 경제나 지역의 사정이 지역통화운동이 튼튼하게 뿌리내리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토양인지 아닌지 검토해야 할 필요는 있겠지만, 이미 이 운동은 북미와 호주, 유럽국가의 경계를 넘어, 남미와 동남아시아, 일본에서도 활발하게 실현되고 있거나, 적어도 사회이론가들 사이에서 비중있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 우리는 지역통화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벨기에의 금융이론가 베르나르 리에테르의 새로운 책《돈의 미래》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지역통화운동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의외에도, 일본의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코진(柄谷行人)이 NAM(New Associationist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지역통화를 핵심적인 도구로 활용한 새로운 윤리-경제운동을 제창하고, 실제로 시작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라타니 코진은 이미 한국에도《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유로서의 건축》《윤리21》등의 저서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일본의 긴기(近畿)대학과 뉴욕의 콜럼비아대학 교수이기도 한 다망(多忙)한 비평가이다. 그러한 그가, 왜, 어떻게 지역통화운동에 주목하고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경로도 흥미롭지만,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90년대 내내 거의 절망속에서 살고 있던” 그에게 “희망의 불빛”을 준 것이 바로 지역통화운동이었다는 진술이다.

 

  그리하여, 가라타니 교수는 이러한 자신의 논리의 발전과정을 담은《트랜스크리틱》《가능한 코뮤니즘》《NAM 생성》《NAM 원리》등 일련의 저서를 단독 혹은 동료들과의 공저 형태로 지난 몇년간 계속적으로 출판해왔다.

 

《NAM 원리》와 인터넷 홈페이지(www.nam21.org)에 실려있는 이 운동의 목적과 취지는 “자본-국민-국가”라는 삼위일체의 지배구조를 근본적으로 넘어가기[揚棄] 위한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출적”인 대항운동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아래에 게재된 가라타니 교수와의 대담기록은 원래〈교수신문〉2002년 5월 6일자에 게재된 것인데, 우리가 이 기록을 재수록하는 것은 최근의 가라타니 교수와 그가 중심이 된 NAM운동의 윤곽이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재수록을 허락해주신 교수신문사와, 대담자이자 이 재수록 건에 대해 가라타니 교수에게 연락을 취해주신 세종대학 일문과의 박유하 교수께 감사드린다.

 


  냉전이 끝나고 10년 이상 지났지만 9 · 11 테러가 상징하는 것처럼 세계는 오히려 더욱더 혼미한 상태로 빠져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냉전의 ‘끝’은 새로운 대립의 ‘시작’이기도 했던 셈인데, 좀처럼 해결의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 만큼 ‘현실’을 바꿀 만한 힘을 가진 ‘말’(비평)이 지금이야말로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교수신문〉이 이번 인터뷰를 기획한 배경에는 최근 한국에서 지식인의 역할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한 논의를 다시 생각할 때, 최근의 저서《트랜스크리틱》과 선생님에 의한 ‘NAM’의 제창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NAM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십시오.

 

  가라타니 NAM은 ‘뉴 어소시에이셔니스트 무브먼트’의 약자입니다. 저는 이것을 과거 2세기 동안의 사회주의운동을 논리적으로 통합하는 것으로서 구상했습니다. 어소시에이셔니즘은 프루동 등의 아나키스트가 제창했던 사고입니다. 그에 대해서 다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맑스와 프루동은 전면적으로 대립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맑스 사후에 성립한 ‘맑스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상황입니다. 물론 맑스는 프루동을 비판하고 있지만, 실은 그는 매우 많은 영향을 받은 사상가 이외에는 비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건 그가 아담 스미스나 리카르도를 집요하게 ‘비판’하면서 독일의 속세적 경제학자를 완전히 무시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맑스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은 젊었을 때 프루동에 의해 제공됐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국가를 양기(揚棄)한다고 하는, 즉 보존하면서 동시에 폐기하는 사고입니다. 예를 들면 말년의 맑스는 파리 코뮨에서 실현된 것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산소비협동조합과 같은 어소시에이션이 국가를 대체한다는 사실에서 ‘실현 가능한 코뮤니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코뮤니즘은 엥겔스나 레닌이 생각한 국가 통제적인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오히려 프루동이 말하는 아나키즘입니다. 실제로 파리 코뮨은 주로 프루동파에 의해서 실현됐으니까요. 맑스주의자도 아나키스트도 서로 비난하기만 할 뿐 이러한 관계를 보려 하지 않습니다.

 

  1989년 국가주의적인 맑스주의운동이 파산된 이후로 아나키즘이 부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실제로도 근년의 세계화에 대한 대항운동의 주체는 주로 아나키스트들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아나키즘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일까요? 맑스주의에 대해서 역사적인 반성을 한다면 동시에 아나키즘에 대한 반성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특히 NAM은 아나키즘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트랜스크리틱》에도《NAM의 원리》에도 되풀이 쓴 바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코뮤니즘이나 아나키즘 대신에 ‘새로운 어소시에이셔니즘’이란 말을 골랐습니다. 코뮤니즘이라고 하면, 아직 소련 · 중국 · 북한 등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나키즘에 관해서도 다른 나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 “아니, 사실은 코뮤니즘은 그런 게 아니다, 아나키즘은 그런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번거롭고 무의미합니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셔니즘이라고 하면, “그건 뭡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때는 아나키즘이나 맑스주의를 포함하는 사회주의운동의 역사를 설명하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에게 이론(비평)과 현실에 대한 개입은 어떤 상관관계를 갖고 있습니까? 저는 자신의 글쓰기가 ‘현실에의 개입’이 될 수 있음을 늘 의식하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그건 어디까지나 ‘글쓰기’에 의한 현실 개입일 뿐 실제 ‘운동’에 나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언젠가 필요한 때가 오면 하고 싶은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비상사태에 가까운 시기일 것입니다. 그래도 그때 저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제 나름대로의 ‘이론’일 테니 ‘이론’과 ‘실천’이 다른 차원의 것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정치)운동에 나서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을까요?

 

  “실현 가능한 코뮤니즘, 분명 존재한다”

  가라타니 제가 시작한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활동이겠지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정치활동은 아닙니다. 제 생각에 NAM은 ‘윤리적 · 경제적 운동’이라고 불러야 하는 운동입니다. 방금 당신은 언젠가 비상사태 같은 때가 오면 참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참여에 관해서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NAM의 운동은 비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극히 일상적입니다. 특히 목숨을 거는 식의 용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제활동을 중심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종래 생각돼 왔던 운동과는 다릅니다.

 

  그에 대해 말하기 전에 제가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운동’에 참가하기 시작한 시기에 대해서 말해둬야 할 것 같습니다. 훨씬 예전의 학생운동 때를 별개로 한다면 그것은 1991년 걸프전쟁 때입니다. 그것은 소련의 붕괴, 냉전구조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사건이었습니다. 냉전구조, 즉 미소의 이원구조가 있던 시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편했습니다. 그 쌍방을 비판하고 상대화하는 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됐기 때문입니다. 그때까지 저는 종래의 맑스주의적 정당이나 국가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 비판은 그들이 굳건하게 존재해나갈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그저 부정적이기만 하면 뭔가 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1989년에 이르기까지 저는 미래에 대한 이념을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자본과 국가에 대한 투쟁은 미래에 대한 이념 없이도 가능하고 현실에 발생하는 모순에 대해 끝없이 투쟁하는 일 외에는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련 등이 반영구적으로 존속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붕괴되었을 때 저는 나 자신이 역설적으로 그들에게 의존해왔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내용의 무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것을 생각하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그것이《트랜스크리틱》이라는 작업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결시킨 지점(2000년)에서 NAM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정치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걸프전부터입니다. 그것은 걸프전의 결과로 일본의 정치체제, 군사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는 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0년대에 들어 저는 그때까지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한일문제에 관해서도 저는 네번의 ‘한일작가회의’에 참가했고 그외 많은 강연활동을 했습니다. 아사다 아키라 씨와 함께 편집하고 있는《비평공간》에서도 현실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또 저는 현실의 의회정당에 꽤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99년에 자민당정권은 걸프전 이래 목표 삼아온 일들을 전부 실현시켰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좌파는 완전히 패배 · 붕괴됐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어 더욱 비참한 상황입니다. 저는 자신의 작업이 패배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NAM을 시작한 계기는 정치적인 패배에 있었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비판에 있었습니다. NAM이 정치적 활동이 아니라 윤리적 · 경제적 활동이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좀더 말하자면 NAM을 특징 짓고 있는 것은 단순히 소비 · 생산협동조합 같은 것을 추진하는 일뿐 아니라 마이클 린턴이 고안한 LETS(지역교환거래체계,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라는 지역통화를 핵심으로 한 경제권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지역통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통산성이나 시 · 군 · 구의 행정지도에 의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에 의해 발행돼 국가적 화폐(엔)의 자본주의 경제를 보완하는 것일 뿐입니다. LETS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는 각 개인이 화폐를 발행하는 주권자이고 또한 전원의 적자와 흑자의 총액이 0이 되기 때문에 이윤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말을 바꾸면 LETS에 의한 교역에 있어서는 자본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NAM에서는 LETS를 개량해 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것은 ‘Q’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円보다 球(큐)”라고 하는, 일본어 농담을 원용한 말입니다. 더이상 지역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지역통화 대신 시민통화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NAM에서는 시민통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9 · 11 테러는 미국이라는 이름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형태로 표면화됐지만 자본에 대항하는 주체가 ‘국가 · 민족’이었다는 사실에 처음부터 모순이 내포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와 자본에 대한 동시적 대항을 제창하는 선생님의 전략은 이런 모순을 타개하려는 것으로도 보였습니다.

 

  가라타니 통상 맑스주의에서는 경제적인 하부구조가 있고 그 위에 국가나 민족이라는 상부구조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경제적 결정론이 부정되고 상부구조의 독자적 위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부구조가 이데올로기적이고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했을 때, 경제는 그렇지 않은 굳건한 하부구조일 수 있을까요. 자본제 화폐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신용에 의해 뒷받침된 환상시스템이고 언제 붕괴될지 모른다는 점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맑스는《자본론》이라는 책에 몇십년 동안이나 매달렸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하부구조라는 인식으로만 끝낼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젊은 맑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화폐경제는 종교적 세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국가나 민족은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시장경제에 있어서의 교환과는 다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교환을 그 근본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는 모든 것을 ‘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알고 있는 교환의 형태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공동체나 가족 안에서의 교환처럼 호혜적인 것. 이것은 상호부조적이지만 동시에 구속적입니다. 다음에 봉건적 영주와 같이 조세를 계속 얻기 위해 그것을 어느 정도 재분배하는 것. 여기서는 사람들은 구속되어 착취당하고 있지만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또 하나가 화폐에 의한 시장경제입니다. 앞의 둘과는 달리 여기서의 교환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합의와 계약에 의해서만 성립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화폐를 가지는 자가 유리하고 잉여가치의 착취, 계급분해가 발생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네이션=스테이트가 본래는 이질적인 네이션과 스테이트의 ‘결혼’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지적이지만 그 이전에 역시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두 존재의 ‘결혼’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국가 · 자본 · 네이션은 봉건시대에는 명확하게 구분됐습니다. 즉, 봉건국가(영주 · 왕 · 황제), 도시 그리고 농업공동체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교환’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의 원리에 기초합니다. 둘째, 그러한 국가기구에 의해 지배당하고 서로 고립된 농업공동체는 그 내부에 있어서는 자율적이고 상호부조적, 호혜적 교환을 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 시장, 즉 도시가 성립합니다. 그것은 상호 합의에 의한 화폐적 교환입니다. 봉건적 체제를 붕괴시킨 것은 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침투입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절대주의적 왕권국가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상인계급과 결탁해 다수의 봉건국가(귀족)를 쓰러뜨림으로써 폭력을 독점하고 봉건적 지배(경제 외적 지배)를 폐기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국가와 자본의 ‘결혼’입니다. 상인자본(부르주아)은 이 절대주의적 왕권국가 속에서 성장해 통일적인 시장형성을 위해 국민의 동일성을 형성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셔널리즘의 감정적 기반이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네이션의 기반에 시장경제의 침투와 함께, 도시적인 계몽주의와 함께 해체된 농업공동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자율적이고 자급자족적이던 각 농업공동체는 화폐경제의 침투에 의해 해체되는 것과 동시에 그 공동성(상호부조나 호혜성)을 네이션(민족) 속에 상상적으로 회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정말로 ‘결혼’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서입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자유 · 평등 · 우애라는 삼위일체가 제창된 것처럼 자본 · 국가 · 네이션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으로서 통합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근대국가를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를 보완하고 보강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행동해 그 상황이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국민의 상호부조적인 감정에 의해 넘어서서 국가로 하여금 규제시키고 부를 재분배하는 식인 것이지요. 그 경우 자본주의만을 타도하려고 하면 국가적인 관리를 강화시키는 일이 되거나 혹은 네이션적 감정에 굴복당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는 전자가 스탈린주의이고 후자가 파시즘입니다.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라는 삼위일체의 구조는 극히 강력합니다. 어떠한 사유도 이 틀을 넘어서기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넘어서기는커녕 그것이 존속하기 위한 유일한 마지막 형식입니다. 저는 사회민주주의에 아무런 희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90년대에 저는 다른 형태에 가능성이 없는 이상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이 세가지 형태 이외의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소시에이션’입니다. 그것은 상호부조적이지만 공동체와는 달리 자유롭게 참가하고 또 나갈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은 모르는 사람들끼리 교환하는 ‘시장’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재분배에 의해 부의 불평등을 보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윤리적 · 경제적인 어소시에이션은 일정한 종류의 화폐에 의해서만 실현 가능합니다.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시민통화입니다.

 

  되풀이 말하자면 시민통화는 가족이나 공동체에 의한 호혜적 교환도, 시장경제의 비즈니스적 교환도 아니지만 동시에 양쪽 모두이기도 합니다. 바꿔 말하면 이 둘을 ‘양기(揚棄)’하고 있습니다. 즉, 보존하면서 폐기합니다. 예를 들면 일반적으로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생각과 긍정하는 생각, 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 시장경제를 양기한다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시장을 양기한다”는 것은 시장의 폐지도 부정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민통화 Q 안에서 시장경제는 보존됩니다. 예를 들면 Q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계약하고 교환하니까요.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주의적인 이윤추구는 폐기됩니다. 또 한편 Q에서는 공동체의 호혜적 교환이 보존됩니다. 증여나 보답과 같은 교환관계가 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Q에서는 가족이나 공동체 같은 폐쇄적 · 배타적 구속은 없습니다. 애정이라는 이름하의 무상노동이나 심리적 빚도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시장경제처럼 사업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동체는 폐기되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금방 달성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몇 세기는 걸릴 일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 미래변혁의 길이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모순이 있는 이상 투쟁이나 대항운동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사회민주주의, 또는 의회정치에 흡수돼 버립니다. 왜냐하면 장래에 대한 논리적 전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민통화 Q가 윤리 · 경제적 관계 만들어

  20세기는 아이덴티티 중에서도 ‘민족’ 아이덴티티만이 강조된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상황이 그때까지 이상의 대규모적 전쟁과 살육을 유발시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민족’ 아이덴티티의 강조는 그 속에 있는 성이나 계층의 대립을 은폐시킵니다. 그런데 이른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 · 경제적 식민지화에 대한 저항의 언어로서 유용해 보이지만 동시에 또다른 패권주의적 정치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차이’를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차이 따위는 없다고 인식하는, 즉 아이덴티티는 다양한 것이지만 동시적일 뿐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대해 더욱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경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러한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경계’를 넘어서는 만남(세계시민으로서의 연대)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할 것입니다.

  NAM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처음부터 ‘트랜스내셔널’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가와 자본을 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의 (전통적) ‘공동체’를 초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 기반해 있겠지요.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익숙해진 것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고 ‘공동체’를 넘으려는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런 움직임에 대한 저항도 강력하고 뿌리깊은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점은 익숙해진 것으로부터 이반할 것을 말하는 담론이 상황에 따라서는 폭력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9 · 11사건으로 무너진 계몽 기획

  가라타니 세계화라고 불리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국가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관여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자본은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로의 형태로만 존재합니다. 시장경제의 세계화가 진행되어도 국가가 해체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도 해체되지 않습니다. 그렇기는커녕 반대로 국가와 민족이 강조됩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상상의 공동체》를 저술한 이래 네이션은 상상물이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단순한 표상이나 가상이 아닙니다. 칸트는 “감각에 의한 오차로부터 생기는 가상이라면 이성에 의해 제거할 수 있지만 어떤 종류의 가상은 오히려 이성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자기’라든지 ‘신’이나 ‘사후의 생명’ 같은 것이죠. 그것들은 가상이라고 하면서 제거시키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그것을 ‘초월론적 가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화폐나 네이션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화폐 같은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합니다. 네이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의 사업적인 관계와 국가에 의한 폭력적인 지배 · 피지배관계 속에서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서로 돕는 동포라고 하는 ‘표상’입니다. 그것이 환상이라 해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현실을 해소하지 않는 이상 배척할 수는 없습니다.

 

  내셔널리즘이 강해질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지식인들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계몽적인 발언을 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더이상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90년대에 저는 그런 일을 계속 해왔지만 ‘패배’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 · 11과 같은 사건 하나만으로 긴 세월에 걸친 계몽도 모두 무화됩니다. 더 말하자면 일본에는 네이션을 초월한 것처럼 말하는 지식인이 적지 않지만 저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일본 안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그들은 네이션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고 초월론적 가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네이션이 상상물이라고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없고 또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그런 일 대신 아무리 작은 규모의 것이라도 네이션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네이션에 대항해 어소시에이션을, 국가의 통화에 대항해 시민통화를 대치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민통화에 기초한 어소시에이션은 네이션이 상상적으로 충족시키고 현실에서는 국가에 의해 (세금의 재분배로서) 실행되는 일을 그 자신이 실현합니다. 저는 ‘트랜스내셔널’이란 말을 ‘인터내셔널’과 구별해 쓰고 있습니다. ‘인터내셔널’이 네이션을 단위로 하는 데 비해 ‘트랜스내셔널’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가 발행하는 것이 아닌 시민통화는 트랜스내셔널한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제적인 관계를 트랜스내셔널적으로 확장시키는 일이 내셔널리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식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경제적 욕망과 권력욕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선생님께서 칸트를 원용하면서 타자를 수단으로 하지 말고 목적으로 하라는 계몽적인 ‘윤리’를 언급하시는 것도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과 같은 식민지 체험을 한 나라에서는 과거에 얻을 수 없었던 ‘주체’화의 욕망은 물론,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렬한 경제적 욕망이 존재합니다. 이런 현재의 한국에서 ‘자유로워져라’는 명제가 어디까지 수용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보편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윤리’는 어떤 조건하에서 가능해질 수 있을까요.?

 

  가라타니 저는《윤리21》에서 이런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따금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서 대하라”고 한 것처럼 언급되지만 실제로 칸트가 말한 것은 “타자를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하라”는 것입니다. 즉, 수단으로서 대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분업과 교환 속에서는 우리들은 타인을 수단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를 단순히 수단화하는 것이기만 하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칸트의 윤리학은 시장경제를 전제로 하고 또한 그것을 비자본주의화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칸트는 경제가 없는 윤리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까 시민통화 Q가 윤리적 · 경제적이라는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 경우 중요한 것은 윤리적 동기가 없더라도, 즉 무엇인가 이윤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Q에 가입해도 상관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Q를 사용하는 한 그 사람은 자연히 윤리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진정한 ‘변혁’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리적인 결단이나 강제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도덕적 설교도 아니고 개인적 의지도 아닙니다. 제 생각으로는 기술적 인식입니다. 예를 들면, 관료제나 권력의 부패를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여러 방안이 논의돼 왔습니다. 현재의 의회제 민주주의도 그 소산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잘 안됩니다. 변함없이 관료가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관료주의적 부패에 대한 비판을 계속 해왔지만 그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교나 모택동 식으로 설교를 해도 안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막는 것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권력이 집중하는 곳에 우연성, 즉 제비뽑기 제도를 도입하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대의 아테네처럼 전부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선거+제비뽑기’입니다. 선거는 필요합니다. 오히려 선거의 기능을 살리기 위해서 최후에 제비뽑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3명을 투표로 골라서 그 중에서 제비뽑기로 결정합니다. 최종적 결정은 제비뽑기에 의해 정해지므로 권력자가 자신의 승계자를 만들 수 없습니다. 파벌을 만들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매수행위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든지 투표할 때 상대적으로 괜찮은 사람을 고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3명은 나름대로 유능한 사람이 선택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누가 결정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제비뽑기로 결정된 사람은 자만할 수 없을 것이고 떨어진 사람도 그렇게 분할 것도 없으니까 협력할 것입니다. NAM에서는 대표를 포함해서 선거와 제비뽑기로 구성원을 결정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나 레닌은 노동자의 정치적 스트라이크와 봉기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을 제창했지만 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없었다고 하는 선생님의 지적에서는 선생님의 문제의식이 어디에 있는지가 명확히 보입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중에서도 특히 제게 흥미로웠던 것은 불매운동 등의 ‘보이콧’이라는 행위의 가능성이었습니다. 저는 내셔널리즘 비판은 최종적으로는 국가전쟁의 보이콧에 연결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다양한 접촉수단이 있고 자신이 속한 국가보다도 다른 국가나 거기에 존재하는 개인 쪽에 훨씬더 큰 관심을 가진 사람들, 특히 젊은층이 늘고 있습니다. 90년대 이후의 인터넷의 등장은 아마도 상상되고 있는 이상의 교류와 소통을 가능케 하고 있을 것으로도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제는 전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두 나라 사이의 국가에서 매스컴을 넘어선 시민 차원에서의 의사소통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이콧’이라는 행위의 가능성에 대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를 조금 더 이야기해 주십시오.

 

  가라타니 스트라이크와 보이콧의 문제는《자본론》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의 어느 쪽을 중시하는가 하는 해석과 연결됩니다. 제 생각은《자본론》의 해석을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까지 맑스주의나 아나키즘(생디칼리즘)에서는 생산점에서의 노동자의 제너럴 스트라이크가 변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부터 불가능했고 더더욱 불가능해져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시민운동, 즉 소비자의 운동이나 그에 따른 여성이나 마이너리티의 운동이 확장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노동운동 사이에는 교류가 없을 뿐 아니라 대립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시민’이니 순수한 ‘소비자’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소비자란 노동자가 소비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생기는 입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동자가 생산점에서 싸우면 스트라이크이고 소비(유통)점에서 싸우면 보이콧입니다.

 

  자본의 축적운동은 ‘M-C-M’(화폐-상품-화폐)이라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런 경우 산업자본에 있어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결국 그것을 만든 노동자입니다. 즉 잉여가치는 총체적으로 보자면 노동자가 자신들이 만든 것을 다시 살 때 생기는 차액에 있습니다. 그러나 ‘M-C-M’ 운동 안에는 자본이 만나는 두가지 위기적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력 상품을 사는 일과 생산물을 노동자에 파는 일입니다. 만약 이 가운데 어느 한쪽에서 실패한다면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자본일 수가 없는 거지요. 노동자는 이 두가지 점에서 자본에 대항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한 것처럼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노동력을 팔지 말라”(자본제 아래에서 임금노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또 하나는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것처럼 “자본제 생산품을 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노동자가 ‘주체’일 수 있는 장소(포지션)에서 행해집니다. 그러나 노동자=소비자들이 ‘일하지 않는 일’과 ‘사지 않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시에 일하거나 구매할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비자본제적인 생산과 소비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초출(超出)적인 투쟁(생산-소비협동조합이나 LETS)은 자본제 경제에 있어 내재적인 투쟁을 위해 불가결합니다. 반대로 후자(보이콧을 중심으로 하는 내재적 투쟁)는 자본제 기업을 비자본제적 기업형태로 조직을 변환시켜 나가는 일을 포함합니다.

 

  보이콧은 옛날부터 있었고 지금도 가끔 행해지고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그것이 내셔널리즘을 위해서 행해진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각각의 기업이나 각각의 국가는 그럴 경우 큰 타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국제분쟁을 격화시킵니다. 한편 우리들이 생각해야 하는 보이콧은 자본제에 대한 보이콧이고 동시에 그것이 네이션=스테이트에 대한 보이콧이 되는 보이콧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는 NAM은 보이콧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운동이나 마이너리티를 위한 운동, 혹은 환경운동 같은 운동들은 현재까지는 서로간에 연결코드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NAM운동은 그런 운동들간의 연대를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과거나 현재에 차별과 지배의 구조 속에서 중심이 되었던 존재들, 예컨대 식민지 피해자들과 제국주의 지배자들, 지배당했던 여성들과 지배했던 남성들은 자각적으로 참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삶을 영위하는 이상 누구나 어떤 의미에서건 지배와 착취의 구조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그렇다는 사실에 대하여 자각적이 되어 그러한 구조를 끊으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선생님의 ‘운동’은 성공하겠지요. 운동을 시작한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혹은 그외로부터의 반응과 남은 과제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가라타니 NAM에는 개인이 참가합니다. 모든 개인은 다수의 차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경우 한 레벨에서는 소수자이지만 다른 레벨에서는 다수자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NAM의 조직원리는 ‘개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 개인은 다수의 관심사나 지역에 동시적으로 귀속됩니다. 아직 규모는 작지만 이 개인의 다수소속제에 의해서 많은 관심영역이 교차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이제까지 생각되지 못했던 것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자본제 경제에 대한 저항운동이 생산과정에 대한 것에서 유통과정 쪽으로 그 중점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하자면 스트라이크로부터 보이콧 쪽으로지요. 즉, 소비자로서의 노동자투쟁이 되는 거지요. 이것은 동시에 노동운동은 남성에 의해, 소비자운동은 여성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던 이제까지의 관행을 깨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아까 NAM의 활동은 비일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 운동이 ‘여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데 그것은 일본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적’이고 또한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시민통화 Q의 보급과 함께 여성 참여자의 수가 늘어가고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운동에서는 예전부터 여성의 가사노동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논의해왔습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거지요. 가사노동은 임금을 지불받지 못하니까 비(非)가치생산적이고 일리치가 말하는 ‘그림자 노동’이었습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싶은 나머지 그것을 임금노동 일반과 등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임금이 지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자본주의화되는 사회가 바람직한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거기에는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를 초월할 수 있는 전망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생각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에게 임금을 지불한다면 부부일 필요가 없습니다.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부부의 관계는 단순히 사랑이나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증여와 보답이라는 호혜적 관계 속에 있고 이것은 즉 교환관계이며 넓은 의미에서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부모자식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자본주의적인 교환관계로 환원시킬 수는 없습니다.

 

  모든 관계가 자본주의화되는 사회가 좋을 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밖에서 일하고 부인을 먹여살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가사노동에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화폐적인 교환가치로 그것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곤란은 시민통화를 사용하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에 대하여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돈을 지불하지 않고 시민통화로 지불하면 됩니다. 그밖에도 예컨대 감사하는 마음이나 받은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지만 그것을 돈으로는 돌려주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경우 시민통화를 사용하면 윤리적 · 경제적인 관계가 가능해집니다. 시민통화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제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해결할 열쇠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아까 시민통화나 어소시에이셔니즘은 수세기가 걸릴 운동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 이곳에서 당장 실현할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자본제적인 경제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실제로 비자본제적인 촌락공동체의 경제는 다소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9/10는 엔으로 1/10은 시민통화로 교역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된다면 말하자면 1/10만 코뮤니즘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민통화가 엔과 같은 국가통화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시민통화가 전(全)경제의 1/10을 넘는 시점에서는 경제 전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국가도 자본도 자기 멋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상태를 실현하기 위하여 서두를 필요가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환경오염, 유전자조작식품 등이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본의 자기증식운동, M-C-M의 산물입니다. 개개인이 생각을 바꾼다 해도 이 현상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제적인 시장경제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지와는 별개로 우리들은 이 운동을 서둘러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칸트는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서 대하라”고 말했는데 이 경우 타자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인간입니다. 온난화나 환경오염의 피해를 받는 것은 그들입니다. 즉, 우리는 그들, 타자를 완전히 수단으로만 대하고 있는 셈입니다. 제3세계의 타자라면 항의하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불만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해서 타자를 무시해서는 안되겠지요.

 

   일본은 걸프전 이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나라’를 지향한다는 말에 시민들도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익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이겠지요. ‘전전(戰前)의 사고(思考)’라는 개념을 선생님이 강조하신 것은 다가올 전쟁을 예상해서 한 말이었겠지만 작금의 상황은 선생님의 예상이 예언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9 · 11 테러 이후, 미국 중심의 20세기적 구조가 변하려는 시대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있습니다만, 21세기를 맞아 세계질서가 그 재편성을 향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단계에서 일본이나 미국을 둘러싼 정치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생님의 미국으로의 ‘이동’도 이러한 정치상황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만 그런 점에 관해서도 말씀해주십시오.

 

  가라타니 실은 9 · 11 테러 직후 곧바로 제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옴진리교 지도자가 제 예언에 대해서 쓴 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옴’은 제가 쓴 것을 예언으로 받아들여서 그에 대비해 움직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제가 한 말은 예언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경기순환(파동)과 일본이 국제적으로 놓여있는 관계구조에 대해 말한 것이고, 그러한 상황이 반복적이라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80년대 일본경제에서 주가가 끝없이 상승해나가고 있을 때 이것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예언이 아닙니다. 예측이라 할 만한 것조차 아니지요. 자본제 시장경제가 잔혹한 경제순환을 통해야만 자기조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앞으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언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음과 같이 명확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자본제=네이션=스테이트 속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은 그것과 다른 어소시에이션을 조금씩 확산시켜 나가는 길뿐이라는 것이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국가도 자본도 필사적으로 방향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분석하고 비판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현재나 수년, 수십년 후의 전망이 아니라 수세기 후를 향한 전망, 바꿔 말하자면 ‘이념’을 갖는 것입니다.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미국에서 활동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하는 말들이 일본보다도 오히려 미국에서 더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NAM 지부를 만들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애초에 NAM에는 해외지부라는 발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도 우리는 NAM을 확산시키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NAM적인’ 것을 확산시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운동은 그 나라의 조건에 따르는 형태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미국에서 일어나는 운동은 다른 이름으로 불릴 것이고 다른 형태를 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NAM적인’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만약 한국에서 ‘NAM적인’ 운동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NAM과 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 선생님을 잠시 ‘일본’의 지식인으로 간주하고 질문하겠습니다. 한일 ‘화해’라는 명제는 ‘전후’를 종식시키고 ‘식민지시대’를 종식시키는 것으로서 20세기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20세기의 불행한 관계를 기반으로 해서 21세기적 · 세계시민적 관계를 쌓는다는 의미에서도 저로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되겠는데 저는 각 개인이 ‘일본’과 ‘한국’의 틀을 넘어서 생각하는, 즉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사고의 틀을 넘어선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해자=책임자’의 구조가 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아 단순히 ‘일본’이라는 국가적 명칭만으로는 ‘가해자’의 실체를 확실히 할 수 없는 만큼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사죄하지 않는다고 한국은 비난하지만, ‘국가’라는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법’ 자체가 타자를 억압하는 것이니 ‘국가’를 넘어서는 사고를 하지 않는 한 ‘사죄’는 할래야 할 수 없는 구조가 되어있다는 생각입니다. 애당초 ‘국가’에 윤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으니까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이 사죄하기 위해서는 ‘국가’이면서도 ‘개인’, 시민의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한 · 일 사이의 화해를 방해하는 것은 일본에도 책임이 있습니다만 피해자로서의 입장이 무조건 ‘옳음’으로 비춰지는 상황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한 · 일 혹은 중 · 일 사이에서 지식인끼리 연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만 ‘아시아’를 특권화하지 않으면서 서구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투박하게 사고하기

  가라타니 되풀이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저는 어소시에이셔니즘만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이외의 방법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나름대로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도 한 · 일 지식인의 연대를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활동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는 이제까지 해왔던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 일 관계는 더이상 간단히 결렬될 수는 없을 만큼 경제적으로 복잡하게 뒤섞인 상태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존재하는 대립이 불거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제가 하는 말은 너무나 작고 너무나 우회적인 것일지도 모릅니다.

 

  ‘동양의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국소적인 증상에 직접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의 밸런스를 점차 바꾸어가는 것으로 서서히 치료해나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의미에서도 시민통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이 그것에 참가하려 할 때 어떤 나라의 ‘국민’일 필요는 없습니다. 각 개인이 직접 통화를 발행하니까요. 따라서 그것은 트랜스내셔널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자본이나 국가와는 다른 윤리 · 경제적인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개개인이 일부러 그런 점을 의식하지 않아도 그렇게 됩니다. 저는 이제 이것 이외에 희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쨌든 거기에는 희망이 있으니까 그나마 낫다고 생각합니다.

 

  칸트는《영구평화론》을 저술했을 때 국제교역이 발달하면 전쟁이 억제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면 외국과 경제적인 교역관계가 깊어지면 전쟁을 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오히려 국제교역에 의한 이해대립으로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그렇다면 칸트가 틀렸을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역(경제관계)이 네이션=스테이트간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교역이 자본주의적인 이윤추구에 바탕한 것이라면 전쟁이 됩니다. 그것이 만약 비자본주의적인 교역이라면 전쟁은 억제됩니다. 즉, 여기서부터 시민통화에 의한, 어소시에이션에 의한 교역이 ‘영구평화’를 가져온다는 발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반전운동, 평화운동만이 아니라,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샌가 비전쟁 효과가 나오는 식의, 일종의 ‘동양의학적’인 평화운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가 만들어내려고 하고 있는 윤리 · 경제적 운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