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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생태환경

경제순환과 지역화폐

마리산인1324 2010. 1. 6. 12:49

<녹색평론> 제30호 1996년 9-10월호    

http://www.greenreview.co.kr/

 

 

경제순환과 지역화폐

 

   마루야마 마코토

 

 

  1. 지역통화와 현대화폐

 

  지역화폐의 선례들

  시장이 인간생활의 구석구석에 침투하기 이전에는 갖가지 화폐가 각기 다른 사용목적과 사용범위 위에서 복잡하게 얽히면서 유통되었다.

 

  예를 들면, 18세기 서부 아프리카의 다호메이 왕국에서는 노예무역과 같은 대외적 거래에 ‘무역온스’라는 특별 화폐단위가 사용되고, 무역차액의 결제에는 ‘금온스’라는 별도의 단위를 가진 금(金)이 쓰여졌다. 다른 한편으로, 왕국 내부의 지역시장에서는 조개껍질(子安貝)이 구매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배상금을 지불할 때 소가 가치척도가 되고, 실제로는 별도의 단위에 따른 은화(銀貨)로써 지불을 행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에도(江戶)시대의 일본에서도 금화, 은화, 동화(銅貨)가 각기 독립적인 단위를 가진 기본통화로서 병용되었다. 금화는 주로 에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 일본에서 거액의 거래에, 은화는 주로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일본의 상인들 사이의 거래에, 그리고 동화는 전국적으로 소액의 거래에 사용되는 등 제각기 특징있는 용도로 쓰여졌다. 더욱이, 많은 번(藩)과 사사령(寺社領)에서는 번찰(藩札), 사찰(私札) 등 갖가지 지폐가 지역 통화로서 사용되었다. 오늘날에도 미크로네시아의 얏푸섬에서처럼, 시장의 거래에서는 달러지폐를 쓰지만, 전통적인 행사(혼례 때의 선물 등)에서는 석화(石貨)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지역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국민국가에 의한 시장의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에서는 어떤 하나의 화폐가 모든 화폐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상이한 화폐가 제각기 별개의 기능을 떠맡고 있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므로, 화폐의 재료를 볼 때, 물품화폐나, 금속화폐,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폐가 병립 · 병존하는 것이 드물지 않다.

 

  이것은 현대화폐의 관행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는 기이한 현상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목적에 따라서 그때마다 다른 화폐를 쓴다는 것은 불편하지 않을까. 더구나 다른 종류의 화폐끼리 교환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한층더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신용카드가 있으면 상이한 통화권(通貨圈)에서도 손쉽게 물건을 살 수 있다. 특정화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특정지역에서 물건을 살 수 없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타고 넘어서야 할 장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래에서 상세히 보게 되겠지만, 고유한 지역화폐가 존재한다는 것은 지역경제의 자립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고, 물질순환의 기초위에 경제순환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도 그 적극적인 활용이 고려된다. 현대인이 불편하다고 해서 무시해온 지역통화를 여기에서 다시 한번 제대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추상적인 시장원리에 종속된 현대화폐

  오늘의 시장사회에서 화폐의 유통은 기본적으로는 갖가지 금용기관을 통한 자금유통에 의해 매개되고 있다. 예를 들면, 지역에서 사업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이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서 이것을 가지고 상거래를 시작한다고 하자. 그는 빌린 자금을 사용하여 토지를 빌리고, 점포를 열고, 노동자를 고용하며, 도매시장에서 상품을 사들일 것이다. 이때 화폐는 지대(地代)로, 임금으로, 구매금으로 각기 지주, 노동자, 도매업자의 손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폐를 받은 사람은 그 일부를 지역시장에서 소비재를 구입하는 데 쓸 것이다.

 

  이렇게 하여 화폐는 지역내에서 순환을 시작한다. 이윽고, 그 일부는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 사업을 시작한 업자에게 판매대금으로서 되돌아가고, 그 업자는 그 일부를 은행부채를 갚는 데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화폐는 다시 같은 지역내의 대출에 쓰여지든가, 아니면 다른 지역에서의 대출을 위해 돌려질 것이다.

 

  여기서, 일반 도시은행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특정지역에서 화폐순환이 활발하게 행해지는가 어떤가는 아무래도 좋다. 어떤 지역의 경제활동이 정체하여, 대출자금의 환류(還流)가 둔해지면 은행은 다른 지역으로 중점을 옮겨서 자금운용을 유리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도시은행의 지점이 어떻게 형성?폐쇄되는가를 되풀이하여 보면 이것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또, 은행점포 각각의 예금잔고에 대한 대출잔고의 비율, 즉 예대율(預貸率)을 보더라도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에서는 예대율이 올라가고 활발치 못한 지역에서는 내려가는 경향이 보인다. 경제활동이 활발치 못한 지역에서 은행에 맡겨진 화폐는 은행 망(網)을 통하여 경제활동이 활발한 지역으로 유출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시은행에 매개된 자금의 유통범위는 지역의 경제순환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물질순환과는 더더욱 일치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은행은 투자기회가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만 지역경제의 순환을 이용하며, 어떤 지역이 과잉개발되어 마침내 환경파괴를 일으키더라도 직접 책임을 지는 법이 없다.

 

  화폐유통이 자금유통과 떼어놓을 수 없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은 생활인 각자의 일상활동에도 갖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생활인은 모두 상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생활인에게 열려있는 자본시장은 생활인에게 싫든 좋든 투자가가 될 것을 강요한다. 투자에는 보통 위험이 따른다. 기업의 경우는 사업에 실패하여 파산하면 사업을 중단하지만, 생활인은 투자로 인해 생활자금을 잃어버려도 생활을 중단할 수는 없다. 특히 연금 생활자와 같이 달리 소득의 가능성이 없는 경우는 비참하다.

 

  이와 같이 현대화폐는 국제적인 외환거래에서 증권시장, 지역금융, 개인투자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화폐상품으로 취급된다. 거기에 공통한 것은, 원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화폐가 추상적인 시장원리에 종속되었다는 사실이다.

 

  허구로서의 화폐상품

  현대인은 자동판매기에서 콜라를 사는 것과 같이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화폐상품의 구매), 전화 한통으로 금융상품을 획득한다. 시장사회에서는 화폐도 일반상품과 같이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더욱이 그런 경우에 화폐는 은행을 통해 발행되고, 자금화된다. 즉, 일본은행과 같은 중앙은행은 은행권을 발행함으로써, 그리고 시중은행은 수표와 같은 예금통화를 발행함으로써 화폐를 창조하는 것이다.

 

  외환시장을 포함한 오늘의 금융시장에서는 이렇게 창조된 화폐가 실체가 있는 상품거래의 뒷받침도 없이 무제한으로 증식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화폐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침투하여, 사람들이 일해서 축적한 부를 금융시장으로 들여놓는 기능도 맡는다. 거품경제의 붕괴는 이러한 금융시장의 의제적(擬制的) 성질을 드러내고, 우리의 노동의 성과인 부를 의제(擬制)상품의 구입에 쓰는 일의 위험성을 명확히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화폐의 상품화는 신용거래를 활성화하고 부의 생산을 촉진하기 때문에 시장경제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로 형성된 화폐시장, 자본시장에서는 투기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시장개방 및 경제자유화는 부의 생산과 투기놀음 사이의 구별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화폐와 금융시장에서 매매되는 화폐 사이를 어떻게 구별하고, 후자에 수반되는 위험으로부터 전자를 보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이것은 결코 개인적인 모럴의 문제로 처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장사회에서는 우리가 손에 넣는 화폐는 우리의 손을 떠나면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딘가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2. 경제적 자립과 지역통화

 

  지역시장과 지역화폐

  여기서 새삼스럽지만, 시장경제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사회에서 화폐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시장경제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경제의 큰 부분이 시장 이외의 제도적 틀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앞에서 언급한 18세기의 다호메이 왕국은 노예무역으로 유명하였다. 그것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다호메이 왕국이 차지하던 특수한 위치에 말미암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침입의 기회를 엿보던 주변국과 노예를 찾아 교역지를 섭렵하던 서구국가들과의 대항관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다호메이 왕국은 자기 나라의 자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서 노예무역을 선택하였지만, 그것은 대외교역을 가능한 한 자국의 경제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려는 기본노선에 따른 것이다.

 

  다호메이 왕국은 기본적으로 농업국으로서, 많은 인구가 농업에 종사하고 농사일은 공동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소비에 필요한 물자는 대개 스스로 만들어 썼으며, 농기구 등 자가조달이 불가능한 것은 지역시장에서 구해들였다. 시장은 자급이 곤란한 재화와 용역을 교환하는 장소로 기능하면서 경제 전체속에서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는 것에 불과했다. 또, 시장에서 매매되는 것은 도구류 이외에 주로 식료품인데, 그것은 토목공사와 같은 공공사업에 홀몸으로 종사하는 노동자나 여행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도구류나 식료품이나 모두 지역에 거주하는 장인(匠人)이나 농민이 직접 시장에 내다팔거나 소매인에게 판매를 위탁하는데, 거기에는 중앙 도매시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중매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시장은 계층을 이루어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자립적인 유통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개껍질화폐(子安貝)는 다호메이 왕국이 발행한 것인데, 외국인 방문자에게는 증여품으로, 공공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임금으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국민에게는 큰 잔치 때의 하사품으로 건네졌다. 본래 조개껍질은 다호메이 왕국에서는 구할 수가 없는 것이어서 대외교역을 통하여 조달할 수밖에 없었지만, 왕국은 대외교역에 사용가능한 금속화폐를 끌어들이지 않고 국내통화로서는 조개껍질을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대외교역과 국내의 시장거래는 제도적으로 분리되고, 국내의 시장은 지역경제의 부속물로 기능하도록 보증되었다.

 

  그리하여 왕국의 독자적인 통화제도를 통해서, 다호메이 왕국은 대외교역으로부터 국내의 경제활동을 단절시켜, 후자에 대폭적인 자유를 부여할 수 있었다. 다호메이 왕국은 그 특수한 대외관계와 함께 국가 수준의 통제·관리로 유명하지만, 지역의 일상적인 경제활동에는 국가가 함부로 간섭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비시장 영역에서의 지역통화

  현대인은 화폐라고 하면 반드시 시장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교육받았다. 즉, 화폐는 물물교환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간접적 교환의 수단으로서 발명되어 시장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시장사회의 화폐에는 시장을 전제로 하지 않고 공동체의 지불수단으로 쓰여지는 것이 많다.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혼례나 장의(葬儀)때 축의금이나 향대(香代)로 현금을 봉투에 넣어 건네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친척이나 지인(知人)에게 아이가 태어날 때 또는 아이가 취학하게 될 때, 출산이나 입학을 축하하여 현금을 증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 증여를 받은 사람은 만찬이나 답례품으로써 상대방을 대접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증여와 답례의 응수(?酬)를 보통의 상품교환과는 일단 구별하여 생각한다. 설사 거의 형해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종류의 화폐사용은 공동체내에서의 책무의 수행과 마찬가지로 시장거래와는 다른 모습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쟈바섬의 석화(石貨)는 바로 비시장영역에 한정되어 사용된 화폐로서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도너츠처럼 둥근 모양으로 직경 수십센티미터에서 수미터까지 다양한 크기로 되어 있다. 이들 석화는 일찍이 파라오 군도(群島)에서 잘라내 만든 것인데, 쟈바섬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들의 섬으로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그 일부는 외국인에 의해 섬바깥으로 유출되기도 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외부유출은 일절 금지되어, 섬의 석화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상태이다.

 

  석화는 각종 의례에서 증여물로 사용되는 것 이외에 분쟁의 화해에, 관습을 위반했을 때 속죄의 표시로, 기도, 의료, 매장, 카누 또는 집짓기 등 각종 서비스 행위에 대한 보수로, 그리고 부수적으로 섬안에서 생산되는 생산물을 사들이는 구매수단으로도 사용되어왔다. 석화는 그 크기 때문에 실제로 그것을 소지한 사람이 바뀌더라도 공간적으로는 원래 그것이 위치하고 있던 장소에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형 석화는 그렇다. 마을마다 석화를 모아두는 광장이나 길이 있고, 거기에 놓여진 커다란 석화는 소유자의 변화에 관계없이 같은 위치를 계속 차지하고 있다. 석화가 마을사람들의 눈에 띄기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한개 한개의 석화가 누구의 것인지가 일목요연하게 파악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석화에 의해 매개되는 쟈바섬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활동이 섬 내부에서 완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석화의 사용으로 지탱되는 경제순환은 쟈바섬의 물질순환을 보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자면, 석화의 사용이 쇠퇴하면 경제순환이 섬안에서 완결되지 않고, 물질순환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현재의 쟈바섬에서는 전통적인 경제영역이 축소되고, 달러화폐 사용이 확대되었으며, 생산자원에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수입이 증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관광개발이 극심한 이웃의 파라오 군도에 비교하면, 쟈바섬의 경제개발의 속도는 완만하고, 그만큼 물질순환의 파괴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국민적 화폐와 지역통화

  지역경제가 비시장적인 제도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경우에는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지역 고유의 통화가 사용가능하다. 실제로 목적에 따라 갖가지 지역통화가 사용되어왔다. 즉, 어떤 통화는 지역내 시장에서, 또 다른 통화는 비시장적인 거래에서 사용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근대국가의 형성과 함께 국민적 시장이 발달하여 지역시장과 외부시장 사이의 제도적 구별이 없어지면 지역내의 거래는 외부와의 거래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그 결과, 지역간 교역이나 지방과 중앙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역의 수단으로서 국민적인 화폐가 널리 유통되게 된다. 사회적 관습을 통하여 행해져온 지역의 생산물이나 서비스의 호혜적 거래나 재분배는 이제 시장을 통한 상품교환으로 대체되고, 지역통화는 지역사회의 외부에서 도입된 국민적 화폐로 대체된다.

 

  우리는 근대의 탄생과 더불어 ‘공유지’(commons)에 울타리가 둘러져 사유재산이 된 사실을 알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유지’와 함께 존재했던 지역통화는 국민적 화폐로 둘러싸여 흡수되어버린 것이다.

 

  3. 지역경제와 자금순환

 

  지역경제의 순환

  우리는 원시사회나 에도시대의 일본사회에서 보는 것과 같은 통화가 통일되어 있지 않은 상황을 불편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직장에서 임금을 받고, 생활에 필요한 물자나 서비스를 시장에서 사들이고, 주택자금을 은행에서 빌리고, 유휴자금을 주식투자에 돌리는 것과 같은 생활스타일에 비추어보면, 금화나 지폐나 석화를 각각의 목적에 따라 달리 사용하는 생활은 불편한 것으로 생각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은 상대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경제적으로 자립한 지역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그때의 경제순환은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우선, 지역내에서 조달가능한 재화 및 서비스는 가급적 지역내에서 생산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지역내에서 소비되고 폐기된다. 이렇게 되면 경제순환은 물질순환을 포함하여 지역내에서 완결된다. 그리고 이 지역내 순환에 있어서는 지역내에서만 통용되는 지역통화를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지역에서 생산된 재화 및 서비스 가운데 지역에서 소비될 수 없는 잉여부분은 지역밖으로 유출된다. 판매대금을 외화(外貨)로 받으면, 그것은 지역내에서 자급할 수 없는 재화 및 서비스를 지역 외부로부터 들여올 때의 구매자금으로 축적된다. 이때, 지역간 교역의 방법으로서 아래에서 언급될 레츠(LETS)를 응용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 경우에는 교역의 기본은 확대된 물물교환이라 할 수 있고, 외화에 의존할 필요가 약해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국민경제의 틀을 지역경제 수준으로 이동시키는 것을 뜻하지만, 규모가 작아짐으로써 경제의 틀 자체의 의미도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지역자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만일 지역경제가 현재 일본의 국민경제와 같이 가공무역형 경제구조를 선택한다면 입지조건의 제약을 받아 성공하는 지역과 실패하는 지역의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른바 과소(過疎)지역은 지역자원의 유출 및 고갈이라는 사태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개 지역이 지역경제의 순환을 높이는 방향으로 지역자원의 활용을 도모한다면 다른 지역의 추종을 허용하지 않는 독자적인 경제를 구축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지역 고유의 특산품도 만들어낼 것이다.

 

  지역에는 지역에 고유한 풍토가 있고, 입지조건이 있다. 모든 지역이 동일한 경제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지역에서는 쌀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공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른 지역에서는 어패류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지역의 자립을 저해하는 요인은 아니다. 각기의 풍토에 맞는 생활양식을 중점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지역의 자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예를 들면, 오끼나와에 가면 기타가 아니라 사미센(三線)이 즐겁고, 아오모리에 가면 콜라가 아니라 사과쥬스가 맛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지역경제라는 것은 지역에 고유한 생활문화를 물질적으로 지탱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며, 결코 추상적인 국민경제의 축소판일 수는 없다.

 

  지역간 교역에 관한 사고방식도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국제경제의 교과서에서는 자유무역이 전제되면, 지역(대개는 국민국가를 가리킨다)은 ‘비교우위’ 부문에 대한 특화를 통해 경제발전을 꾀하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지역 고유의 문화에 연관된 산물과 ‘비교우위’ 부문의 산물이 늘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역의 자원을 살리는 산업의 형성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과 뗄 수 없이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이른바 외자의 도입도 이러한 산업형성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경우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이러한 지역쪽의 요구는 반드시 일반기업이나 투자가를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공적 자금을 도입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게 된다. 다만, 공적 보조금에 붙는 조건이 지역의 개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위험이 따르는 경우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역금융과 그 실태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한정된 지역을 영업범위로 하는 지역금융기관의 존재이다. 원래 지역금융기관은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도시은행과는 대조적으로, 지역의 자금수요에 섬세하게 대응하기 위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정책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법률에 따라 영업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지역의 영세한 금융은 지역금융기관이 맡고, 도시은행은 비교적 큰 도시의 금융을 취급함으로써 양자의 역할은 제도적으로 구분되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지역금융기관은 지역내의 자금순환을 중시하고, 그 바탕위에 잉여자금을 증권시장에서 운용함으로써 조직의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금융자유화는 본래 이러한 잉여자금의 운용에 유연성을 줌으로써 지역금융기관의 체질강화를 돕고, 지역내 자금순환을 활발하게 만들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역금융기관이 상업은행으로 전환하고, 상업은행에 의한 지역금융기관의 흡수 · 합병이 진행중이다. 지역금융시장은 갈수록 전국적인, 그리고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금융시장과의 연결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이런 점에서는 그 중점을 지역농업의 육성으로부터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자금운용으로 옮기고 있는 농협의 계통금융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지역의 자금을 국가의 재정투융자로 돌리고 있는 우편저금에서도 지역분산화 및 민영화의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는다. 요컨대, 사적 금융, 공적 금융을 불문하고 자금순환은 지역적인 소순환이 축소되고 지구 규모의 대순환속으로 통합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업과 시민은행

  이러한 금융자유화의 경향속에서, 다시 한번, 지역사회에 있어서의 인간적인 규모의 경제순환을 꾀하여 자금의 흐름을 지역으로 향하게 하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있다. 그 하나가 시민사업이며, 시민사업을 융자로써 지원하는 시민은행이다. 시민사업이라는 것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한 일반 기업활동과 자원봉사에 기초한 비영리활동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사업의 계속에 필요한 경제성을 충족시키면서 시민의 필요에 응하려는 사회적 활동이다.

 

  시민사업은 그 성격상 개인경영 또는 소규모 공동경영이 기본이며, 소비자에 대한 섬세한 서비스를 통하여 시민생활에 밀착된 시장으로 들어오려고 한다. 예를 들면, 생활협동조합과 제휴하면서 폐유를 회수하여 비누를 제조 · 판매하는 비누공장, 행정의 협력하에 행하는 노인급식사업 등 재활용운동이나 자원봉사활동에 가까운 것으로부터, 자연식 레스토랑, 손으로 만든 빵의 제조 · 판매, 제3세계 국가로부터의 수공예품의 수입 · 판매 등 통상적인 소규모 기업경영에 좀더 가까운 것까지, 그 사업은 다양하다.

 

  어떠한 시민사업에나 공통한 것은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의 필요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시민으로서의 자기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재화나 서비스의 창조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시민산업에는 반드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고, 생업으로서의 사업을 유지하려고 하는 성향이 보인다. 그래서 일반은행은 이러한 사업에 대한 융자에 소극적이다. 더욱이 시민사업의 많은 담당자는 여성인데, 이들은 새로이 사업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담보가 될 자산을 갖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본에서 시민사업활동은 1986년에 도쿄에서 설립된〈프레스 올터너티브〉에 의해 촉진되었다.〈프레스 올터너티브〉는 종래에 자원봉사활동으로 행해져왔던 재활용운동이나 복지활동, 그리고 제3세계에 대한 원조 등을 사업화하기 위하여 월간지 발행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시민사업학교를 개최하여 시민사업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실무지식을 제공하고 있다. 또, 제3세계로부터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커피나 수공예품을 직수입하는 점포 등 몇개의 사업부문도 가지고 있다.

 

  시민은행은 그러한 부분의 하나로서, 유럽의 생태은행(에코뱅크)을 참고로 하여 1989년에 영대(永代)신용조합과 제휴하여 발족하였다. 그것은 시민사업에 대하여 사업의 목적과 사업주의 열의를 신중히 심사하여 무담보로 저리융자를 행하는 조직이다. 시민은행은 그 자체 금융기관은 아니고, 신용조합으로부터의 융자를 매개하는 형식을 취한 대금업의 일종이다. 다만, 어떠한 사업에 융자할 것인가를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시민사업의 적극적인 육성에 이바지하고 있다. 1993년 현재 시민은행의 융자건수는 40몇건으로 그 가운데 도시쪽의 융자가 40건 정도 된다. 문의해오는 건수는 발족후 연간 1,000건이나 되며, 그중 90퍼센트가 여성이라고 한다.

 

  시민은행의 시도는 실험단계에 있다. 그러나 금융자유화의 흐름속에서 그 존재의의가 의심스러워지는 지역금융기관을 다시금 지역에 붙들어 매두고, 지역내 자금순환을 활발하게 하는 담당자로서 그 활동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다.

 

  4. 지역통화의 창조

 

  현금을 사용하지 않는 교환

  지역의 경제순환을 활발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지역내 자금순환의 활성화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지역통화의 창조이다. 현대인은 전통사회나 원시사회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지역통화를 다시 도입하는 것은 시대착오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래에 소개하는 것은 그러한 현대인의 상식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캐나다를 비롯하여,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세계의 영어권에서〈지역교환교역시스템, Local Exchange and Trading System〉(이하, ‘레츠’로 줄여 표기함)이라고 하는, 지역통화를 사용한 재화 및 서비스의 교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레츠’는 1983년에 캐나다의 태평양쪽에 있는 뱅쿠버섬의 코목스라는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코목스 지역은 농림수산업과 광업이 중심으로, 전형적인 자원유출형 경제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경기변동의 영향을 정면으로 받는 때가 많아 80년대초 불황시에는 실업률이 10-20퍼센트까지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레츠’의 기본적 구상은, 현금을 사용하지 않고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교환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직접 당사자끼리 교환할 필요가 없이 참가하고 있는 회원속에서 교환이 연쇄적으로 넓혀지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A가 B에게서 손으로 짠 스웨터를 받았다면, 이때 A는 스웨터의 가치만큼의 채무를 지지만 B에 대해서 직접 그 등가물을 건넬 필요가 없다. 오히려, C의 요구에 응하여 집을 수리해줌으로써 채무를 변제할 수 있다.

 

  그리되면, 이번에는 C가 D에 대해서 장작을 제공함으로써 자기의 채무를 갚으려고 할 것이다. 다음에는 D가 E의 치아를 치료해줌으로써 다시 채무를 갚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산물이나 서비스 거래망(網)이 회원 사이에서 점차로 넓혀진다. 처음에 A에게 스웨터를 제공한 B도 또한 회원중의 누군가로부터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건네받음으로써 A와의 거래로 인하여 발생했던 채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장의 상품교환에서는 물물교환시의 상품소유자끼리의 ‘욕망의 이중의 일치’(감자의 소유자가 물고기를 원하고, 물고기의 소유자가 감자를 원함으로써 비로소 감자와 물고기의 교환이 성립하는)를 회피하는 수단으로서 화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화폐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거래당사자는 미리 상품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고, 그 상품을 시장에서 팔아야 한다. 자본이 없는 노동자의 경우는 스스로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필수품을 시장에서 사들인다.

 

  시장거래에서는 또, 금융업자에게서 자금을 빌려 신용거래를 통하여 상품을 입수하는 것이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채무자는 화폐를 가지고 채무를 변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레츠’시스템에서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화폐는 필요하지 않다. 회원은 손에 자금이 있든 없든 필요한 때에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형식적으로 ‘레츠’에 대한 채무가 되지만, 채무자는 화폐로써 채무를 변제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레츠’의 회원이라면 누구라도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회원들에게서 제공받을 수 있고 현시점에서의 채무는 미래에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변제되는 것이다. 자신의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제공할 의사가 없는 사람은 처음부터 참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계산화폐로서의 지역통화 ― 녹색달러

  그런데, ‘레츠’에는 화폐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레츠’는 정기적으로 회보를 발행하는데, 거기에서 누가 어떤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를 일람표로 만들어 회원에게 알린다. 각 회원은 이 정보에 따라 서로 연락을 취하고 거래를 행한다. 이때 녹색달러라고 하는 독자적인 계산화폐를 쓴다. 녹색달러를 통한 거래가격이 결정되고, 실제로 거래가 행해지면, 그 결과는 ‘레츠’사무소에 보고되고, 각 회원의 계정에 기록된다.

 

  구체적으로는 생산물이나 서비스 제공자가 ‘레츠’사무소에 거래결과를 보고하면 그 자료가 사무소의 컴퓨터에 입력됨으로써 해당회원의 계정이 그때마다 변동된다. 그리고 회원들에게는 정기적으로 대차대조표가 통지된다.

 

  예를 들면, 지난달 말의 A의 ‘레츠’ 계정이 200녹색달러이고 B의 계정이 마이너스 150녹색달러라고 하자. 지금, A가 B에게서 스웨터를 50녹색달러에 사들이고, 이로써 이번 달의 A와 B의 거래가 모두 종료되었다면, A와 B의 이번 달 말의 계정은 각기 150녹색달러와 마이너스 100녹색달러가 된다. 이와 같이 녹색달러는 ‘레츠’의 회원간의 교역을 매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녹색달러의 특징을 좀더 상세히 보자. 녹색달러는 ‘레츠’의 계정속에서만 존재할 뿐, 결코 현금화될 수 없다. 따라서 녹색달러의 잔고는 ‘레츠’ 전체에서는 원칙적으로 늘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이다. 즉, 시스템 전체로서 화폐적 부는 축적되는 것이 아니다. 녹색달러는 각 회원의 계정을 표시하고, 시스템 전체의 거래의 규모를 표시하는 수단이지만, 부의 축적수단도, 가치증식의 수단도 아닌 것이다.

 

  ‘레츠’의 회원은 정기적으로 보내져 오는 대차대조표를 참고하면서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어떤 정도로 주고 받을 것인가를 판단한다. 개인 계정에서 잔고가 플러스가 되고, 그것이 어느 만큼 증가하더라도 ‘레츠’속에서 교역을 계속하는 것밖에 녹색달러를 달리 사용할 길은 없다. 거꾸로, 잔고가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채무를 변제해야 할 의무는 없다. ‘레츠’속에서 교역을 계속함으로써 수지의 균형을 회복하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녹색달러는 실제로 생산물이나 서비스가 거래되는 것과 함께 발행되고 환류한다.

 

  시장경제와의 관계와 ‘레츠’의 과제

  그런데, ‘레츠’를 통한 거래가 비상업적인 목적에 그치는 한, 녹색달러의 사용이 기존 경제제도에 저촉될 가능성은 적다. 원래 ‘가라지 세일’과 같은 소규모 매매에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하여 영업활동의 일부로 편입되면 공식적인 경제행위로 간주되어 과세대상이 된다. 예를 들면, 치과의사가 ‘레츠’의 회원에게 치료를 행하고, 그 대가의 절반을 녹색달러로 받는다면 그 부분의 수입도 과세대상이 된다.

 

  ‘레츠’는 오히려 이러한 제약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합법적으로 공식경제의 영역으로 활동범위를 넓히는 것도 가능하다. 치과의사의 예에서 보듯이 통상적인 거래속에 녹색달러를 섞어넣을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황으로 일반환자의 수가 반으로 줄어들면, 치과의사의 수입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여기서 ‘레츠’의 회원에 대하여 치료비의 반을 녹색달러로 지불하게 함으로써 환자수가 상승하면, 현금수입은 반감된 채로 녹색달러 수입이 새로이 덧붙여질 것이다. 이때 치과의사는 현금을 세금과 설비투자에 충당하고, 녹색달러로 생활필수품을 회원에게서 구입한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공식경제영역에서 ‘레츠’가 차지하는 의미는, 불황으로 인한 실업상태를 회피하는 활동이라고 해도 좋다. 호황기에도 지역격차의 확대로 발전이 뒤처진 지역에서는 그와 같은 효과가 기대될 수 있다. 다만, 호경기의 경우에 ‘레츠’의 필요성이 약화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현금수입의 증가는 일반 상품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뿐 아니라 예금이나 증권투자 등 금융시장에 대한 의존도도 높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역경제의 순환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레츠’와 지역금융과의 상호협력 관계가 필요해진다. ‘레츠’를 통하여 맺어진 회원들끼리의 거래망이 자금융통의 분야에서도 태어난다면 경기순환의 모든 국면에 걸쳐 경제의 지역순환구조의 유지도 가능해질 것이다.

 

  끝으로, 녹색달러에 의한 가치평가의 문제점을 들어보자. 녹색달러는 원리적으로는 현금달러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즉, 스웨터 한벌이 50달러라고 한다면 현금이든 녹색달러든 어느 것으로 거래하더라도 50달러라는 것은 변함이 없고, 현금과 녹색달러를 어떻게 섞어서 거래하더라도 총액은 늘 50달러가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녹색달러에 의한 가치표시는 현금가격보다도 높게 매겨지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는, 재화나 서비스를 받는 쪽에 이른바 예산제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통상적인 시장보다도 큰 수요가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또, 공급쪽으로서는 시장에서 부당하게 내려가는 가격을 납득할 만한 수준까지 올린다고 생각할 경우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레츠’에 있어서도 재화나 서비스의 수급에 불균형이 생겨 수요과다가 되면 인플레이션 현상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 많은 회원의 계정은 마이너스로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원은 그의 계정에 녹색달러가 증가하는 반면에 그것을 사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시장경제와 달리 녹색달러를 자금으로 운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레츠’거래는 정체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레츠’를 안정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참가 회원 각자가 적극적으로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할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 각지의 ‘레츠’운용과 회원들의 의식

  ‘레츠’실험이 시작된 이래 벌써 12년이 경과하였다. 여기서 현재 ‘레츠’가 어떻게 전개되어왔는가를 살펴보자.

  1985년 코목스 지역의 ‘레츠’는 회원수 550명, 탄생 후 3년간의 거래실적이 총액 32만5천녹색달러였다. 단순계산으로는, 1인당 연 200녹색달러가 채 못되는 거래를 한 셈이다. 실제로는 일상적으로 ‘레츠’를 이용하는 회원은 전체의 1할 정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러한 회원에 한정한다면 1인당 약 2,000녹색달러의 거래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의 연간 지출총액을 4만달러라고 한다면, 그중 5퍼센트를 ‘레츠’를 통해 행한 것이 된다. 코목스의 ‘레츠’는 그후 1988년 회원 600명에 이르렀다가 경기호전에 따라 한때 휴면상태에 빠졌지만 현재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레츠’ 창시자인 마이클 린턴은 ‘레츠’를 세계 각처에 널리 펼치기 위한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그 결과 1994년 현재 활동이 확인된 ‘레츠’는 세계 전체에서 500조직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가 힘을 들인 곳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이다. 94년 현재 이 세나라에는 각각 200, 170, 70개 정도의 ‘레츠’가 만들어져 있다. 캐나다에는 15개 정도가 있고, 미국에서도 수십개 조직이 활동하고 있다.

 

  여기서 ‘레츠’의 회원들이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활동에 참가하고 있는지 보자. 캐나다의 온타리오주의 토론토에 있는〈레츠-토론토〉(94년 현재 회원수 500명)가 93년 12월에 행한 앙케이트 조사(유효 회답수 33)에 따르면, 가입동기에 관한 회답중에는 ‘레츠’의 이념에 찬동한 것이 16, 실용적 동기로 가입한 사람 3, 양쪽 모두가 18, 그밖이 9로 되어 있다. 따라서 회답을 보내온 사람 가운데는 순수히 실용적 효과를 기대한 사람은 소수이며, 다수가 이념을 중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레츠’가 더 힘을 기울여야 할 분야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개인적 영역을 든 사람이 23, 사회적 영역은 20, 경제적 영역은 21명이었다. 그리고, ‘레츠’가 자기의 기대에 부응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충분하다가 5, 상당하다가 6, 어느 정도는 15명이었다. 완전히는 아니라고 해도, ‘레츠’의 실제활동과 회원의 기대 사이에 큰 간격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모범적인 공동체로서 ‘레츠’가 유효한 이념이 될 수 있는가 어떤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31명이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사람은 1사람에 그쳤다. 그리고 그 경우 ‘레츠’센터가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행정창구기능을 든 사람이 28, 사회-커뮤니티센터를 든 사람 21, 점포기능을 든 사람 29, 공동취사센터를 든 사람 24, 주거기능을 든 사람이 1명이었다(복수회답). 나아가 그러한 공동체의 추진에 시간과 에너지를 바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가능하다는 답이 9명, 불가능하다는 답이 13명이었다.

 

  ‘레츠-토론토’에는 치과의사, 정신과의사, 마사지 요법사, 카이로프락터 등 개업의를 비롯하여 갖가지 자유업, 자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참가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다음에서 살펴보는〈생활클럽 생활협동조합-가나가와〉교환망의 실험과는 꽤 사정이 다르다.

 

  일본에서의 ‘레츠’실험

  일본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레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91년 12월부터 5월에 걸쳐〈생활클럽생협-가나가와〉가 행한 실험에서는 조합원 가운데 175명이 ‘레츠’거래에 참가하였다.〈생활클럽생협-가나가와〉의 실험은 일본의 풍토에서 ‘레츠’가 뿌리내리는 데 검토해야 할 과제를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가나가와 네트워크는 생협조합원을 회원으로 하여, 반(班)당번과 같은 생협활동에 수반되는 여러가지 일을 ‘교환티켓’을 매개로 하여 떠맡는 것을 비롯하여, 자동차 태워주기, 아이돌보기 등의 상호부조적인 활동이나 개인적 기능의 교환에 이르기까지 ‘레츠’를 넓히는 것을 의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환티켓’은 녹색달러와는 달리 한시간 노동에 대하여 6단위라는 일종의 노동전표가 되었다.

 

  이것은 실험기간이 4개월이라는 단기간으로 충분히 정착되기 전에 종료되었기 때문에 꼭 기대된 성과가 얻어졌다고 말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러나〈생활클럽생협-가나가와〉가 1991년 10월에 종합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실험기간중 175명의 회원 사이에 220건의 거래가 있었고, 단위 총수는 828에 이르렀다. 실제로 거래에 참가한 회원수는 74명이었기 때문에 1인당 거래평균은 3건, 1건당 실제 노동시간은 40분이 조금 못되었다.

 

  이러한 거래건수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반(班)활동으로 72건, 다음으로 재활용이나 수제품 바자와 같은 행사에서 이루어진 거래가 66건, 자동차를 태워주거나 아이돌보기가 31건이었다. 그리고, 캐나다의 ‘레츠’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개인적 기능의 교환은 등록건수는 104건이었지만, 실제로는 기능교환 및 강습 11건, 워드프로세스 등 사무 보조 6건, 정보제공 및 조사 2건으로 적은 수에 그쳤다.

 

  여기서〈레츠-토론토〉와 비교하기 위하여,〈생활클럽생협-가나가와〉가 실시한 앙케이트 조사의 결과를 보자. 유효회답수 80중에서, 참가동기는 “부탁을 받아서”가 19, “필요해서”가 12,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서”가 8, “직무상”이 5였다. 자발적 참가가 기본으로 되어있는 토론토의 경우와는 좀 다른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보고서는 “필요해서” “재미있어서”라는 회답수가 20개였다는 것을 평가하고 있다.

 

  또, 이 교환네트워크의 이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복지 · 상호부조 시스템”이 29, “지역민의 생활범위를 넓힌다”가 28, “금전만능세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답한 것이 9였다. 그리고 복수회답으로, 이러한 네트워크에 적합한 활동분야로서는 “서로 돕는 복지활동” 53, “생활클럽의 반활동” 28, “재활용이나 수제품” 22, “전문적인 기능” 18, “생활의 정보” 16으로 되어있는데, 생활클럽생협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토론토의 ‘레츠’와도 통하는 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교환 네트워크’의 틀 자체에 대한 조사 결과는 “간단하다”가 12, “보통이다”가 29, “어렵다”가 32로 나왔다.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한 네트워크운용이 녹색달러와 같이 부드럽게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 생활클럽생협의 반활동과 ‘교환네트워크’와의 관계에 대하여, 보고서에서는 “일하면서도 반활동에 참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상호관계는 싱거운 것이었다” “돈 비슷한 것이어서 싫은 느낌이 든다”라고 느낀 회원도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확실히, 반내활동을 ‘교환네트워크’를 매개로하여 떠맡는 것만으로는 상대적으로 일을 맡을 기회가 많은 사람과 기회가 적은 사람 사이에 불공평한 느낌이 없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네트워크의 거래 전체속에서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 반활동 이외의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할 기회를 늘리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班)의 회원으로 중심을 이루는 전업주부와 함께 시민사업이나 자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이 네트워크에 참가하도록 호소해야 할 것이다.

 

  5. ‘공유지’로서의 지역화폐

  지역통화의 기본적 발상은 위에서 보았듯이 지역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사이의 경제순환을 활발히하고, 그럼으로써 지역경제의 상대적 자립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수단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되어 지역 바깥으로 함부로 유출되어버리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늘 지역내에 머물면서 지역민들 사이의 재화와 서비스의 주고 받음을 계속하여 매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수단의 채택은 지역과 지역간, 그리고 지역사회와 지구사회를 연결하는 새로운 네트워크의 형성에도 힘을 발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원시사회나 전통사회의 예에서 보았듯이 지역통화를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지역을 폐쇄적인 공동체로 만들어 외부세계로부터 차단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지역공동체가 자신의 제도적 틀을 유지하면서 외부와의 접촉을 활발히하는 획기적인 고안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맑스는《자본론》에서 “상품교환은 공동체가 끝나는 곳에서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그 구성원과 접촉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물건이 일단 대외적 공동생활에서 상품이 되면, 그것은 반작용적으로 내부적 공동생활에서도 상품이 된다”고 썼다. 그리고, “상품교환이 그 국지적인 한계를 타파하고, 그리하여 상품가치가 인간노동 일반의 물질화로 발전해감에 따라서 화폐형태는 일반적 등가물의 사회적 기능에 적합한 상품들로, 귀금속으로 옮겨간다”라고도 썼다.

 

  이것은 시장교환이 공동체의 외부에서 성립하고, 그 다음에는 공동체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외부시장 성립의 ‘반작용’으로서 공동체속에도 시장이 가능하다고 할 경우, 반드시 외부화폐가 공동체속에 그대로 들어와, 외부시장에서 거래한 상인이 공동체속에서 자유롭게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본론》은 외부화폐가 국민적 화폐로서 전개되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기원을 가지고 독자적인 기능을 해온 지역통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맑스경제학뿐만 아니라, 시장경제를 분석하는 경제학에서는 지역통화라는 범주는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세계화폐에 대한 국민적 통화, 또는 유럽공동체와 같은 무역권에서 통용되고 있는 ECU 같은 화폐단위를 가리켜 지역통화라고 부르는 것이 고작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경제학적 시점에서 빠진 지역통화 개념을 다시 거론하고, 또, ‘레츠’와 같은 시도를 지역통화 창조의 실험으로서 자리매김함으로써, 화폐를 좁은 사유재산의 틀에서 해방시켜, 지역사회의 공유재산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현재의 화폐제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병행하여 지역의 공유재산으로서의 지역통화를 창조함으로써 지역내 자금순환의 기반이 구축되고, 지역경제에 상대적인 자립의 방향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지역활성화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비순환적이며 개발의존적인 시장경제를 안으로부터 뒤집어엎고, 순환형경제의 재생에 이바지하는 내발적 발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루야마 마코토(丸山眞人) ― 일본 도쿄대 교수. 이 글은 물리학자와 경제학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일본 엔트로피학회의 창립 10주년 기념 심포지엄의 한 산물인《循環의 經濟學 ― 持續可能한 社會의 條件》(學陽書房, 1995)의 제5장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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