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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계

‘100년만의 의보개혁’ 민심 향배는 (한겨레21 제804호)

by 마리산인1324 2010. 4. 6.

 

한겨레21 2010.04.02 제804호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7039.html

 

 

‘100년만의 의보개혁’ 민심 향배는
법안 하원 통과 불구 공화당 발목잡기 한창…
11월 중간선거에서 의회 권력 탈환 노리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

 

 

“한 세기 가까이 끊임없는 노력이 이어졌다. 1년이 넘게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이제 모든 절차를 마치고, 마침내 의료보험 개혁법안이 미 합중국의 공식 법률이 됐다.”

 

지난 3월23일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감회에 젖어들었다. 미 하원이 3월21일 늦은 밤 통과시킨 ‘환자 보호와 적정가격 의료보장 법안’(HR-3590) 최종안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정치전문 인터넷 매체 <폴리티코>는 오바마 대통령이 “계절은 봄으로 향해 가고 있고, 미국도 이제 새로운 계절로 접어들었다”며 “의회가 역사적인 의료보험 개혁법안을 통과시킨 시점이 정말 시의적절하다”고 웃었다고 전했다.

 

» ‘한 세기의 기다림, 1년의 토론, 그리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3월23일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민주당 지도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의료보험 개혁법안에 서명하고 있다. REUTERS/ JASON REED

1960년대 존 케네디, 린든 존슨 행정부를 거치며 제 꼴을 갖춘 이후 미국의 현행 사회보장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채 반세기가 흘렀다. 이번 의료보험 개혁법안을 두고 미 언론들이 “반세기 만의 변화”라고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의료보험제도만 놓고 보면 변화를 기다려온 세월은 더 길어진다. 1912년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를 구호로 내걸고 3선에 도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까지는 아니어도, 미국의 의료보험제도가 이 정도로 폭넓게 바뀐 것은 거의 한 세기 만의 일이다. 변화,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구호였다.

 

3200만 명 의보 편입 등 단계적 시행

의보개혁법의 핵심 조항 상당수는 2014년까지 단계적으로 시행에 들어간다. 하지만 일부 ‘조기 배달’ 조항들도 있다. 주정부가 재정적자를 이유로 공공의료보장 예산을 삭감할 수 없도록 한 조항이 바로 시행된다. 노동자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해주는 중소기업에는 올해부터 각종 세제 혜택이 주어진다. 각종 질환을 이유로 의료보험 신규 가입을 하지 못하던 이들도 보험 가입이 가능해졌고, 부모의 의료보험에 편입될 수 있는 자녀의 나이 제한도 기존 19살 미만에서 26살까지 높아졌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이유로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됐던 3200만 명의 미가입자도 의료보험에 가입할 수 있게 됐다. 또 향후 5년간 100억달러를 투자해 지역보건센터를 확대하는 등 공공의료 서비스도 대폭 강화된다. 공공의료보험(퍼블릭옵션) 도입이 좌절됐고 보험료 인상폭 제한 조치를 비롯한 보험사 규제 조항이 ‘순화’되긴 했지만, 분명 작지 않은 성과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해를 넘겨 이어져온 의보개혁을 둘러싼 논쟁도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는가?

 

“대통령의 서명으로 모든 작업이 끝난 게 아니다. 정말 어려운 단계는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다.” 존 스프래트 하원 예산위원장(민주당)은 3월23일 <폴리티코>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통과된 법안 내용 중 상당수 조항이 2014년 이후까지 단계적으로 시행되도록 돼 있다”며 “그사이 의료보험 개혁을 둘러싼 논쟁도 계속 불을 뿜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법안 통과를 전후로 한 워싱턴 정가 안팎의 풍경은 스프래트 의원의 전망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지나치게 길고도 소름 끼치는 여정이었다.” <워싱턴포스트>는 3월22일치에서 의보개혁을 둘러싼 지난 15개월여 정치권의 공방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절정은 하원의 최종 표결이 있던 3월21일이었다. 의사당 안에서는 공화당 의원들이 분주히 민주당 의원 자리를 오갔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의석을 잃은 민주당 출신 정치인들의 얼굴이 빼곡히 박힌 ‘유인물’을 뿌리기 위해서다. 1992년 집권 직후부터 의료보험 개혁 작업에 매달린 빌 클린턴 행정부는 공화당의 조직적 반발에 밀려 실패했고, 이후 치러진 1994년 중간선거에서 참패했다. 표결 직전까지 공화당은 ‘그때’를 떠올리고 있었던 게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이 빨갱이들아. 너희는 왜 미국을 증오하느냐.” 의보개혁의 상징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사봉을 손에 쥔 채 동료 민주당 의원들과 함께 의사당으로 향하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에게도 욕설과 비난이 퍼부어졌다. 제임스 클레이번 의원(민주당·사우스캐롤라이나)은 “깜둥이” 소릴 들어야 했다. 그는 3월22일 <뉴욕타임스>와 한 인터뷰에서 “1960년대 남부에서 민권운동을 하던 시절에나 들었던 욕설을 반세기 만에 다시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했다.

 

의사진행 발언이 끝없이 이어지던 의사당의 방청석에선 술 냄새를 풍기는 남성들이 “법안을 폐기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는 3월22일 “경위들이 소란을 피운 남성들을 끌고 나갈 때, 공화당 의원들은 그들을 향해 박수를 쳤다”고 전했다. 의사당 밖에서는 며칠째 시위를 벌이던 보수단체 ‘티파티’ 회원들이 쩌렁쩌렁 구호를 외쳐댔고, 일부 공화당 의원은 표결에 앞서 밖으로 나가 시위대를 부추기기도 했다.

 

“낸시 펠로시, 낸시 펠로시, 빨갱이 여왕. 조지프 스탈린은 성자가 아니다.” 티파티 시위대의 구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표결이 시작됐다. 결과는 찬성 219표, 반대 212표. 공공의보 도입 등을 촉구하며 막판까지 법안에 반대했던 민주당 진보파 의원들이 대거 찬성표로 돌아서지 않았다면 부결됐을 수도 있을 법하다. 공화당 의원 가운데 찬성표를 던진 의원은 단 1명도 없었다. 극한 대립, 법안 통과 이후에도 논쟁이 계속될 것으로 보는 이유다.

 

» 미 하원이 의료보험 개혁법안 최종 표결을 앞두고 있던 지난 3월20일, 워싱턴 중심가 의사당 바깥으로 몰려나온 보수단체 티파티 회원들이 개혁법안 부결을 촉구하는 집회를 벌이고 있다. REUTERS/ JONATHAN ERNST

의회까지 난입한 의보개혁 반대 시위자들

“워싱턴 정가를 벗어나기만 하면, 들끊는 성난 민심을 쉽게 느낄 수 있다. 국민은 의보개혁법 통과를 전혀 반기지 않으며, 이를 폐기하기 위해 표를 던질 것이다.” 지난 2008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3월22일 〈A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설령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 양원에서 과반의석을 확보하더라도 의보개혁법 폐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버티고 있는 한 의회가 폐기 법안을 통과시키더라도 거부권을 행사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력화하려면 의회로 돌아온 법안을 재투표에 부쳐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 공화당이 다가오는 중간선거에서 의석의 ‘3분의 2’를 얻는 압승을 거둘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은 공화당 내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법 자체를 폐기하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그래서다. 의보개혁법 논쟁이 법정 공방으로 번져갈 가능성을 점치는 이가 적지 않다. 법안 통과 직후부터 공화당 쪽은 ‘위헌’ 논란에 불을 지피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3월22일 “이미 유타·버지니아·플로리다 등 10여 개 주에서 ‘수정헌법 10조’를 근거로 위헌소송을 준비 중”이라고 전했다. 미 수정헌법 10조는 △연방정부는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한을 행사할 수 없고 △헌법에 연방정부의 권한으로 명시된 내용을 제외한 권한은 주정부에 귀속된다는 내용을 뼈대로 하고 있다. 연방정부가 개별 주 단위의 의료보험제도까지 규율하는 건 헌법이 부여한 권한 범위를 벗어난다는 게 ‘위헌론’의 핵심이다.

 

공화당, 위헌론 불 지피며 딴죽걸기

어떻게든 법 시행을 늦추기 위한 의회 차원의 ‘발목잡기’가 한창이다. ‘환자 보호와 적정가격 의료보장 법안’을 보완하기 위해 하원이 마련한 ‘의료보장 및 교육 조정법’(HR-4872)의 상원 표결을 앞두고 공화당 지도부가 의회 예산규칙에 위배되는 2개 조항을 찾아낸 게다. 의보개혁 자체와는 관련이 없는 조항이지만, 상원이 재수정안을 만들어 통과시킨 뒤 다시 하원에서 재표결을 거처야 한다. 의보개혁법을 둘러싼 의회의 논쟁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의회 밖에서도 ‘분위기’는 계속 달아오르고 있다. 법안 통과를 주도한 민주당 의원들에 대한 비방과 협박이 난무하고 있다. 표결 당일 의회 주변에서 ‘난동’에 가까운 시위를 벌였던 티파티 쪽은 일부 민주당 의원들의 집 주소를 웹사이트에 올려놓기도 했다. 가브리엘 지포즈 의원(애리조나)을 비롯한 일부 의원의 지역구 사무실에는 누군가 돌을 던져 대형 유리창이 깨졌고, 루이스 슬로터 의원(뉴욕)에게는 “저격수를 보내겠다”는 협박 전화가 걸려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연방수사국(FBI)이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협박 대처법’에 대해 긴급 브리핑을 하는 진풍경이 연출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의보개혁과 관련해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반대였다. 민주당 의원들은 주요 쟁점에서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보수 성향의 의원들은 연방 예산으로 낙태를 지원하게 될 수도 있다며 날을 세웠고, 진보 성향의 의원들은 의료 서비스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77인 모임’까지 꾸리며 백악관을 압박했다. 논쟁이 불을 뿜었다. 반면 공화당은 일치단결해 단일한 대오를 유지했다. 어떻게든 의료보험 개혁을 가로막으려고만 했다. 협상도, 양보도 있을 수 없었다.”

 

저명한 칼럼니스트 아리아나 허핑턴은 3월24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허핑턴은 “공화당은 의보개혁을 좌절시키면 중간선거에서 의회 권력을 탈환할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결국 법안은 통과됐다”며 “민주당은 대세를 잡았고, 공화당은 자승자박을 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실제에서 큰 부작용 없다면 민주당에 유리할 수도

“기존 의료보험 가입자들이 의보개혁안에 반대한 이유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혼란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현상에 만족하고 있는 터에, 제도가 바뀌면 혹여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을 게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게다. 공화당 쪽은 불안감을 부추기고 싶겠지만, (법이 단계적으로 시행되기 때문에) 중간선거 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게다.”

 

앞서 <뉴요커>도 3월23일 인터넷판에서 비슷한 전망을 내놨다. “의보개혁법 시행으로 혜택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선 지지도가 높아질테고, 반대하던 이들의 불안감도 누그러질 것”이라는 게다. 실제 오바마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한 직후 여론조사 전문기관 갤럽이 실시한 설문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절반에 가까운 49%가 의보개혁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부정적이란 응답은 40%에 그쳤다. 하원 통과 이전엔 부정적이란 반응이 과반에 육박했었다. ‘변화’를 바라보는 민심의 향배도 바뀌고 있는 듯싶다. ‘반전’을 노리고 있는 공화당으로선 결코 반길 수 없는 상황일 터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