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97 호 2010년 04월 07일 20:4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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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아 갑니다
서울구치소에서 박래군으로부터
인권활동가 여러분께 드립니다. 그리고 용산투쟁에 함께 하셨던 많은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눈 쌓인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잠시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드리고 떠나온 지 벌써 80일이 넘었습니다. 그 혹독했던 겨울이 지나고 계절은 봄이건만 좀체 봄이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봄볕 화창한 날은 기대할 수 없는가 봅니다. 우중충한 날씨의 연속인데 들려오는 소식도 우울한 얘기들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재판도 재개되어 2주마다 열리게 될 겁니다. 재판정에서 그리운 얼굴들 많이 뵐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런데 어느 분이 얼굴빛이 어두운 게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고 용산범대위 홈페이지에 썼나 봅니다. 그걸 보고 걱정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저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마치 고시원 같은 방안에서 책 잔뜩 쌓아 놓고 질리도록 책을 보고 있습니다. 꼬박꼬박 일기도 쓰고, 편지도 쓰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노트에 부지런히 적고 있습니다. 컴퓨터 자판 두드리며 글 쓰던 습관이 배어서 그런지 손 글씨로는 영 글을 잘 못 쓰겠습니다. 원래 악필도 문제지만, 어깨 아프고 팔이 아파서 많이 못 쓰는 거지요. 20년 동안 저는 펜이 아닌 컴퓨터로 글을 써왔습니다. 감옥에서 집필의 자유를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집필 도구를 글씨와 펜으로 제한하고 있는 것은 집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로막는 것입니다. 21세기, IT강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컴퓨터로 글 쓸 자유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까요? 인터넷이야 못 한다 하더라도 한글 워드로 편지 쓰고, 글 쓰는 것을 못하다니 한심한 일입니다.
또, 왜 감옥에서는 음악을 들을 수 없을까요? 작년에 『책 읽어주는 남자』 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감옥에 있는 여주인공 - 글을 읽을 줄 모르는 - 에게 남자 주인공이 책을 읽어 녹음해서 카세트와 테이프를 보내 줍니다. CD플레이어나 MP3로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이곳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될 테고, 그럼 사고도 많이 감소할 것이며, 그들이 말하는 교정 교화의 목적에도 기여 할 텐데 말입니다. 음악 감상조차 할 수 없는 열악한 현실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이밖에도 고쳐야할 게 아직도 많은 곳이 감옥입니다. 이런 점들을 잘 관찰 했다가 모아서 정리를 해 볼까 생각합니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모든 게 당연 하다는 듯이 그대로 흘러갈 테니까요.
4년 전 평택 미군기지 반대 투쟁 때 짧게 두 번 감옥살이했을 때, 지문을 안 찍겠다고 버티고 사인을 했습니다. 이번에 보니 지문 찍는 관행이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지만, 무인을 강요 하지 않게는 되었더군요. 얘기가 많이 새버렸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독방 생활을 하는데, 독방은 아무나 살 수 없습니다. 수요는 많고 독방은 그만큼 적기 때문입니다. 1.1평의 방과 화장실로 구성되어 있지요. 그래도 방에는 보일러 배관이 깔려 있고, 화장실에는 수세식 양변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주변의 쪽방보다 괜찮은 환경일 수도 있습니다. 밥 주고, 재워주는데 보증금도 없고, 월세도 내지 않습니다. 다만 문은 내 맘대로 여닫지 못하고 늘 감시 속에 살아야 하고,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겨우 10분이 허락되는 면회 때 누가 묻더군요. 나가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나가면 누군가의 감시나 통제를 받지 않고 내 자신의 의지대로 거리를 활보하고 맘껏 돌아다니는 것, 그게 ‘자유’일 겁니다.
그래도 저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행복한 조건에서 사는 것이지요. 지구화 시대에 감옥을 더 이상 ‘재활’, ‘교화’, ‘재교육’을 통해 사회로 복귀시키는 곳이 아니라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을 새겨 보아야 합니다. “감옥의 일부는 다른 수많은 사회 제도처럼 재활용으로부터 쓰레기 처리로 옮겨갔다.” 지구화 시대의 불량품인 전과자들을 영원히 폐기시키는 곳인 감옥 -지그문트 바우만의 설명 이전에라도 대한민국의 감옥에서 교화는 애초부터 없었죠.- 에서 가난한 이들은 면회 오는 사람도 없이 영치금도 없이 이곳에서도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으니까요. 감옥만큼 계급이 명확하게 갈라지는 곳도 없을 것이고, 감옥은 한편으로는 수용자들을 고객으로 삼는 거대한 유통회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80일이 넘는 동안 일요일, 공휴일을 빼고 매일 면회할 수 있었습니다. 먼 이곳까지 면회 와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곳에 있는 저보다 고생하는 건 밖의 활동가들이지요. 전자발찌를 소급·확대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사형집행도 다시 하자고 난리치고, ‘좌빨’을 신나게 읊어대고… 곳곳에서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해대는 통에 열이 뻗쳐서 어찌 살까요. 소통은 기대도 하지 않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게 너무 많으니, 기가 찹니다. 쪼인트 발언, 좌파 스님 발언 등등 망발을 해대던 모습들, 안하무인, 오만 방자한 권력의 핵심들의 모습을 언제까지 봐야 할런지요. ‘천안호 사건’에서는 무능할 뿐만 아니라 병사의 생명보다 군의 기밀을 우선하는 모습은 너무 화가 납니다. 그 사건에 북한을 끌어들이려 안간힘을 쓰는 조중동은 사형집행하자고 열 내던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울하기만 한 세상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운동장 -혼자 뺑뺑이 도는- 담벼락 밑에 봄풀들이 날이 다르게 돋아납니다. 어느 해보다 추웠고, 눈 많았던 겨울을 이기고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 어느새 꽃 피울 준비까지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것처럼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를 막아 나선 정규직 노동자들, 그리고 경주지역 노조원들의 연대 투쟁, 한 대학생의 대자보가 만들어내는 파장과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내는 20대, 미화원 노동자들의 따뜻한 밥 한 끼 캠페인 등등…. 그리고 우리 사회 복합적 비전을 제시하는 무상급식운동과 6. 2 지방선거를 준비하는 풀뿌리 운동과 유권자 운동 등, 정권과 권력의 위기 가운데서 이런 희망을 일구느라 분주하신 분들의 노고를 봅니다. 그 노력에 일손 하나라도 더 하지 못하고 떨어져 있어 죄송합니다.
이제 편지를 줄여야겠습니다. 재판에 최선을 다해 임하겠습니다. 용산 투쟁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자리로 만들겠습니다. 1년간의 투쟁이 정의였음을 당당히 주장하겠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감옥을 나서는 날, 그리운 여러분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겠지요. 지금은 손을 잡지 못하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수 있어 기쁩니다. 모두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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