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10월 23일 마리선녀 씀 -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보고
동막골, 순수의 힘
2년 전 시골로 귀농할 때, 가끔 일상을 떠나 잠시라도 나를 위한 삶을 살자며 스스로 약속 했으나 시골 생활은 생각처럼 그리 여유롭지 않다. 비 오는 날, 농부라는 직업을 빙자하여 바쁜 일손을 접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찾았다. 선입견을 버리고 봐야지 했지만 이미 700만을 돌파한 영향일까 영화에 대한 기대감에 상영 시작 전부터 가슴이 뛰고 설렌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6.25전쟁의 치열하고 처절한 상황 속에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순수한 사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역사적 산물인 이념과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순수한 본성 앞에서 어떻게 소멸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또한 6.25 전쟁이라는 한 국가의 역사적 진실 규명의 차원을 넘어 전 인류의 근원적 문제인 인간성 회복의 문제를 동막골 사람들의 순수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특이한 것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정하고 판타지적 요소를 가미하여 전쟁 중이라는 긴장된 분위기를 완화시켜주면서도 한편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웰컴 투 동막골>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막골 속으로
동막골은 강원도 깊은 산속의 한적한 마을로 설정된다. 사랑만 아는 지고지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원시 공동체를 선보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인형극이나 전래동화에서 봄직한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평화로운 마을 모습이다. 그런데 영화의 시대 상황은 사뭇 치열하기만 하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중무장한 두 집단이 날카롭게 대립된 한국전쟁의 와중에, 동막골이라는 ‘안’과 동막골을 벗어난 ‘바깥’, 두 공간에 이야기는 놓여진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설정은 등장인물들의 의식세계 역시 깊은 골짜기 속에 있다는 것으로 드러내려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어떠한가. 두말할 것도 없이 여기에서는 동막골 ‘바깥’으로 설정된다. <웰컴 투 동막골>에서의 한국전쟁이 백성들의 삶과 의식을 피폐하게 한 것처럼, 현실의 우리 일상도 끝이 보이지 않는 경쟁으로 말미암아 지쳐가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게 들려오는 죽음과 파괴의 실상은 인간의 존엄성이 극렬하게 상실되어 감을 말하고 있으며, 이념과 종교적 대립은 같은 동족끼리의 갈등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나아가 세계적으로는 무기전쟁을 넘어 경제적 이익다툼으로 말미암아 총성 없는 무역전쟁으로까지 확대되어 가고 있다.
지난 1990년대에 동서 냉전이 종식된 이후로 국제정세는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작금의 정세는 미국의 패권주의가 공고해지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도 우리는 미국의 태도에 주목하게 된다. 남한의 도우미 역할을 자처하며 한국전쟁의 실질적 주도권을 장악한 미국은 영화에서도 동막골의 순수한 민간인까지 작전에 저해가 된다는 이유로 학살하려 한다. 실제로도 미국은 전 세계 각지의 분쟁에 당사자로서 또는 그 조정자로서의 지위를 자처하며 모든 국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근래에는 경제적인 면에서도 미국 자신을 중심으로 국제질서를 재편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고 있으며, 세계 강대국들과 함께 국제 시장의 지배에 더욱 관심을 높이고 있다. 제국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면서 전 인류를 긴장과 갈등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동막골에서도 볼 수 있다. 강원도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동막골에서 적으로 만난 여섯 군인들은 주민들을 사이에 두고 서로 총부리를 겨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지만 그들의 대치는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가면서 동막골 사람들의 순수함을 깨닫게 된다. 피로에 지쳐서 서로의 대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야 자신들의 목숨 건 투쟁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저 정치가들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어디에도 마음먹고 갈 곳이 없는 입장에서 차라리 순수한 공동체인 동막골에 남아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상황을 새롭게 반전시키니, 대치상태의 현실상황을 종결짓기 위한 판타지가 등장한다. 남북한 병사들의 몸싸움으로 수류탄이 곳간으로 날아들고, 그 순간 그 곳에 쌓여 있던 옥수수 창고가 폭발하면서 하늘 높이 팝콘 꽃이 흩날리며 나비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동막골로 다시 변화시킨다. 이후 멧돼지 사냥을 함께 하고 서로를 위해주는 것으로 남북 분단의 대치상황은 와해되기 시작한다.
특히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현실과 환상이 서로 대치하는 부분이다. 미국 공군 스미스를 구하기 위해 동막골에 침투한 미군과 한국군이 등장하면서 그동안 환상과 같은 평화를 누리던 남북 병사들은 다시금 과거의 냉전 상황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현실적 요구를 받게 된다. 갑자기 찬물이 끼얹어지는 느낌이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은 달콤한 꿈속의 세계, 잠시 휴식같은 판타지에 너무 깊이 매몰되었나. 차갑도록 반전되는 이즈음, 영화는 평화로운 공존이 실제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미 힘없는 나라들의 무기력 위에 강자의 군홧발이 무참히도 짓누르며 지나고 있다. 제국주의 미국은 세계 패권을 영화나 현실에서 유감없이 발휘한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냉혹하게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 병사들은 목숨처럼 짊어지고 살아온 이념과 사상을 동막골 주민의 순수 앞에서 스스로 소멸시킨다. 미군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무차별적 폭격 앞에서 그들은 환상의 나라 동막골을 지켜내며 스스로 순수 속으로 죽어간다. 본래의 인간은 이렇듯 참으로 순수하고 아름답다.
동막골의 코믹성
<웰컴 투 동막골>이 취하는 유머 전략은 경직된 이데올로기를 웃음의 대상으로 대치시킨 것 같다. 전쟁이 났다는 말에 쳐들어온 놈들이 왜놈인지 되놈인지를 묻는 동막골 주민의 반응은 무의미한 유머의 모범답안이 아닐까. 무의미는 단순히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미로 충만하다는 뜻이다.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 다시 말해 한국전쟁이라고 입력하면 자동적으로 고정된 답만을 떠올리게 되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는 어디엔가 있을 가려진 진실을 처음부터 배제하는 것으로서 고정된 의미의 무의미, 곧 숨겨진 의미가 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에는 남북 동족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눴다는 역사적 사실을 넘어서, 정권이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체제 이데올로기로 고정시킨 그릇된 관념이 작동한다. <웰컴 투 동막골>의 무의미한 유머는 진실이 숨겨진 무의미인 것이다. 영화는 전쟁과 무관한 순수한 백성들에게는 어떠한 이데올로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동막골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자 설정한 것이다. 남북 군인에게 “니네들 친구가”라고 묻는 여일의 행동은 이러한 무의미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일에게는 남북 대치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개인간의 사소한 다툼처럼 여겨졌고, 총은 막대기로, 수류탄은 팝콘을 튀겨내는 재료일 뿐이었다. <웰컴 투 동막골>의 무의미한 유머는 한국전쟁에 대한 통념과 한국사회의 지병인 레드 콤플렉스의 반공적 이데올로기를 들춰냄으로써 단순히 코믹스런 판타지로 끝나지 않고 역사적의 맥락에 일부를 남기게 됐다.
웰컴 투 동막골
분단 60년을 지났지만 동족간의 깊은 상처는 세월만큼이나 긴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한반도의 허리춤에서 총 칼을 맞대고 이념적 갈등으로 대립하고 있다. 통일을 염원하는 한반도의 입장에서는 통일 독일의 15년 후인 오늘을 평가하는 것에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세월이 흘러간 만큼 달라져 가는 양측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는 참으로 많은 대가를 예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통일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남북한의 실재 삶에 대한 프로그램들을 다양한 영상매체를 통해 서로 자연스레 접하도록 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폭넓은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웰컴 투 동막골> 이 영화로 데뷔하는 박광현 감독은 다가올 통일을 대비하여 남한 사람부터 관용과 수용적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동막골의 순수한 사람들을 내세운 게 아닌가 하는 억지같은 추측도 해본다. 무의미한 것의 의미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려는 이 영화는 자칫 코믹성으로 전락되기 쉬웠으나 동막골 사람들의 무의미한 코믹이 역설적이게도 깊이를 더해줬다. 특히 영화 기획의 처음부터 끝날 전 과정에 이르기까지 국민적 참여를 이끌어낸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남아 있던 레드 콤플렉스를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서 완전히 소멸된 것 같다. 오랜만에 가볍고 즐겁고 진지한 영화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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