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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사색

전혜린의 일기에서 (1)

by 마리산인1324 2010. 9. 28.

- 2007년 4월 28일 마리선녀 씀 -

 

 

전혜린의 일기에서 (1)

 

 

1월 15일(큰 눈)

아침,
잠이 깨어 덧문을 걷어 올렸을 때 눈앞에 나는 동화의 세계를 발견했다.
세계는 온통 사치스레 풍성한 눈으로 깊이 덮여 있다.
눈은 그치지 않고 자꾸자꾸 퍼붓는다.
올 겨울 들어 가장 큰 눈이다.
음을한 회색의 앙상하고 가난한 풍경은 반짝이고 흰색의 꿈이 가득찬 동화의
무대로 바뀌었다. 모든 평범한 것, 사소한 것, 게으른 것, 목적 없는 것, 무기력한것,
비굴한 것을 나는 증오한다! 자기 성장에 대해 아무 사고도 지출하지 않는 나무를
나는 증오한다. 경멸한다.
모든것은 유동하지 않는 것, 정지한 것은 퇴폐다.
저열한 충동으로만 살고 거기에도 만족하지 않는 여자를 나는 증오한다.
나무는 하늘 높이 높이, 치솟고자 발돋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별에까지 닿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것이 허락되지 않더라도…….
동경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에로스- 닿을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의 추구-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고 그저 좀 교활한 동물일 뿐이다.

오늘은 열심히 번역을 하였다. 약 8시간 동안.
죽고 싶게 피곤하다.
번역이라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역이다. 그것은 많은 신경의 소모와
육체적인 지속성을 요구한다. 매일 약 4시간만 일을 해도 되고 휴식 속에서
모든 것을 깊이 생각 해 볼 수 있다면! 그러나 매일 매일 내게는 똑같은 열(熱)이
찾아올 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처럼 과도한 요구를 받고 혹사당한다면
어떻게 훌륭히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유감, 또 유감이다.
나에게도 결국 그 책을 사 볼 독자들에게도…….

오늘 파스테르나크의 멋진 시를 발견했다.
 
모든 일에서
극단에까지 가고 싶다.
일에서나, 길에서나,
마음의 혼란에서나.

재빠른 나날의 핵심에까지
그것들의 원인과
근원과 뿌리
본질에까지.

운명과 우연의 끈을 항상 잡고서
살고,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발견하고 싶다.

아, 만약 부분적으로라도
나에게 그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여덟 줄의 시를 쓰겠네.
정열의 본질에 대해서
오만과 원죄에 대해서
도주나 박해,
사업상의 우연과
척골과 손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법칙을 나는 찾아내겠네.
그 본질과
이니셜을
나는 다시금 반복하겠네.
                    
B.파스테르나크, 1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