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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에서> 2009-08-11 1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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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적 위기와 에코페미니즘 신학의 영성    


                                                                                                                                                             전현식 교수 Ph.D.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

I. 들어가는 말

 

올해 2007년 1월 24-28일간 스위스 휴양도시 다보스에서 세계 경제포럼(WEF) 연차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은 “지구촌 힘의 균형을 바꾸는 요인”을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고, 마지막 날 최종 설문조사를 통해 닷새간 토론의 결론에 도달했다. 설문조사의 질문과 응답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참석자들에게 향후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요인들에 대해 물었는데, 이 질문에 참석자들의 38%가 기후변화, 32.9%가 신흥시장이라고 응답했다. 둘째 이로 인한 세계변화에 대비해 가장 준비 안 된 요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참석자들의 55.1%가 기후변화, 12.2%가 심화하는 불평등이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올해 세계경제포럼은 현재 세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이면서도 가장 준비 안 된 요소로 첫 번째 기후변화, 두 번째로 신흥시장으로 인한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꼽았다. 여기서 기후변화는 지구 온난화로 대표되는 환경문제를 말하며, 신흥시장으로 인한 불평등의 문제는 기업세계화(Corporate Globalization)로 집약되는 사회문제를 의미한다.


예들 들어, 제임스 러브록은 “가이아의 보복”(the Revenge of Gaia)이라는 최근의 저서에서 지구 온난화 현상을 살아있는 생명체인 지구의 열병으로 비유하며, 지구가 그 열병으로 인해 온도 조절능력을 상실하여 결국 인류문명의 종언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하루 빨리 인간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하여, 인류의 일차적 관심을 지구의 열병을 치유하는데 집중시켜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또한 로즈마리 류터는 세계화를 신자유주의 경제이데올로기와 군사력에 의해 유지 강화되는 “중앙집권적 하향식 세계화”인 기업 세계화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이런 세계경제지배체제가 환경파괴를 가속화하고, 참된 민주주의, 문화적 다양성, 사회적 통합을 와해시켜 지구적 가난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현재인류가 직면한 문제는 환경문제와 사회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인간과 자연의 총체적 위기임을 말해준다. 이런 지구적 위기는 사회적 경제적 지배체제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런 지배착취 체제를 정당화하는 종교 문화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다. 필자는 본 글에서 지구적 위기의 정신적 뿌리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결정짓는 인간의식, 가치, 신념 및 세계관에 초점을 맞춰, 생명공동체의 실제적 종말을 예고하는 지구적 위기 앞에서 에코페미니즘 신학이 어떤 역할과 비전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본다.

II. 에코페미니즘의 기원, 형성 및 정의

1960년대 초 생태학적 의식을 일깨워준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의 기념비적 저서인 『침묵의 봄(Silent Spring)』을 시작으로 여러 학문분야 (철학, 신학및 사회분석)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여성의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1980년대에 에코페미니즘 이론 및 운동이 꽃을 피우게 된다. 특히 신학분야에서 세계적인 생태여성신학자인 로즈마리 류터(Rosemary Ruether)는 1972년 에코페미니즘 신학의 최초의 저작인 "새 여성 새 지구(New Women New Earth)"를 시작으로 사회문제(여성억압)와 환경문제(자연파괴)의 깊은 연관성을 통찰하고 신학분야에서 에코페미니즘의 영역을 선구적으로 발전시켜왔다. 에코페미니즘이란 용어는 1972년 프랑소아즈 드본느가 “자연파괴는 남성권력에 내재되어 있는 이윤동기에 기인한다,”고 강조하면서 “페미니즘이냐 죽음이냐”이냐 라는 그녀의 책에서 여성이 생태학적 혁명의 중심에 서야 됨을 역설하면서 최초로 사용했다. 에코페미니즘은 생태여성학 혹은 생태여성주의라고 번역되는데, 이 용어에서 드러나듯이,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이란 생태학(Ecology)과 여성학(feminism)이 결합된 비판이론 및 실천운동이다. 여기서 에코페미니즘의 형성에 공헌한 생태학과 여성학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생태학이란 용어는 1866년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이 처음 사용했다. Ecology란 가족 내지는 가구(household)를 의미하는 희랍어인 오이코스(oikos)로부터 온 말로 가족개념을 지구적으로 확장시켜 지구가족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창조세계 안에 살아가는 모든 피조물을 한 가족으로 보면서 이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관계, 즉 유기체와 환경사이의 관계, 균형 그리고 사이클에 대해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생태학은 유기체와 환경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할 수 있다. 생태학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간섭이 어떻게 생태계 균형을 파괴하는지를 연구하면서 인간의 간섭 및 착취로부터 자연을 해방시켜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추구하는데 그 목표를 둔다.  


노르웨이 철학자인 아느 네스(Arne Naess)는 생태학을 표층생태학과 심층생태학으로 구분하면서 자연에 대한 담론을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생태중심적 관점으로 전환시키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표층생태학 (Shallow Ecology)은 인간중심적 생태학으로 인간을 자연의 중심에 위치시켜 인간과 자연을 중심과 주변으로 구분함으로써, 중심에 있는 인간이 주변에 있는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이며, 모든 가치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자연은 인간의 이익과 목적을 위한 도구 및 수단으로 평가절하 된다. 인간중심적 생태학은 세계를 실용주의적,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대의 세계관 및 가치관에 잘 드러나 있다. 이런 인간중심적 관점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 및 착취를 쉽게 정당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어 왔다.  


반면에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은 만물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하여 세계를 고립되고 분리된 개체들의 단순한 총합으로 보지 않고 모든 생명들이 근본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상호의존적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망으로 본다. 인간을 자연의 중심이 아니라, 생명의 망인 창조세계의 한 구성원으로 본다. 심층생태학은 자기중심주의(narcissism)를 벗어나 이기적인 고립된 자아(ego)를 자연으로 까지 확대시키는 확장된 자아(the extended self)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생명의 망의 한 구성원들인 모든 생명들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존재하므로 모든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가치(intrinsic value)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내재적 가치를 갖는 모든 생명들은 원칙적으로 동일한 살 권리가 있다는 생물권 평등주의(Biocentric equality)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자연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은 무한한 경쟁을 통한 착취와 억압의 능력이 아니라 공존과 협력의 능력을 의미한다는 다양성과 공생의 원리를 강조한다. 그래서 심층생태학은 자연의 원리를 적자생존 내지는 약육강식으로 소개한 사회 다윈주의의 견해를 비판한다. 즉 자연의 원리는 협동과 공생의 큰 원리 안에서 부분적으로 경쟁의 현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최고 원리 및 가치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과 공생임을 강조한다. 심층생태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관계를 사랑과 정의의 상생의 관계로 회복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생태학적 문화와 영성을 추구한다. 성서는 심층생태학의 이런 가치 및 영성을 강하게 지지한다.


지금까지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목표로 하는 생태학에 대해 알아봤다면, 이제 남성과 여성의 평등한 삶을 추구하는 여성학에 대해 알아본다. 여성학 혹은 여성주의라고 부르는 feminism은 “여성의 특성”을 의미하는 라틴어의 femina에서 온 것으로 1890년대 남녀평등이론 및 여성권리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여성학은 남녀평등의 신념에 기초하여 남성과 동등한 여성권리를 주장하는 이론 및 운동을 의미한다. 우리는 페미니즘의 기초인 남녀평등의 신념을 창세기 1:27절(“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주의 이론 및 운동은 분명한 성서적 근거가 있다는 말이다.  


여성학은 가부장체제 하에서 여성억압의 원인과 규모를 분석하면서 남성지배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통하여 지배당하는 여성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남성, 즉 여성과 남성 모두의 온전한 인간성(the full humanity)의 회복에 목표를 둔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과 다른 종이 아니라 동일한 인간에 속한다는 소박하고 분명한 주장이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주장이 실현될 때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인식의 근본적 변화는 물론 가부장체제의 변혁을 수반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남성과 여성 모두는 억압당하는 여성뿐만 아니라 지배하는 남성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충만한 삶(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삶과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따라서 성차별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체제 안에서 부당한 혜택을 누리는 남성의 지배의식과 삶의 변화의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학의 목표는 남성지배로부터 여성의 해방뿐만 아니라, 지배의식으로부터 남성을 해방시켜 여성과 남성 모두의 온전한 구원의 삶이라는 통전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여성학은 그 추구하는 목표(남녀 모두의 온전한 인간성의 회복)는 같지만 여성종속의 근원에 대한 분석이 다르고 이에 따라 해결책을 다르게 제시하므로 여성학에는 다양한 유형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만 간략히 알아본다. 첫째, 자유주의 여성학(Liberal Feminism)은 성불균형의 원인을 기회의 불균등으로 보기 때문에 정치, 경제, 교육 및 법의 영역에서 남녀의 기회균등을 통해 남성과 동일한 여성의 권리(시민권)를 확보하여 양성평등을 추구한다. 둘째, 사회주의 여성학(Socialist Feminism)은 여성종속의 근원을 자본주의 가부장제(Capitalist Patriarchy)로 보고 성 평등의 가능성을 여성이 필연적으로 계급모순(공적노동과 사적노동의 구분과 이중노동)에 직면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생산과 재생산 수단)의 철저한 변혁을 통해 여성의 경제적 독립(자율)을 확보함으로써 양성평등을 추구한다. 셋째, 급진주의 여성학(Radical Feminism)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여성학의 남성 중심적 편견을 비판하면서 가부장사회 안에서 남성 지배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문화와 의식의 패턴을 검토하면서 여성영역과 여성문화를 배양한다.


지금까지 에코페미니즘의 형성에 영향을 준 생태학과 여성학의 종류에 대해 알아보았다. 에코페미니즘은 다양한 생태학과 여성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심층생태학과 급진주의 여성학으로부터 많은 통찰력을 이어받아 환경문제와 사회문제의 상호연관성(즉 생태정의)을 인식하고 지구적 위기의 근원을 자연파괴와 여성억압의 상호연관성 안에서 찾아내는 비판담론이며 동시에 이런 지배패턴으로부터 여성, 인간 및 자연을 해방시켜 궁극적으로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정의롭고 조화로운 관계를 추구하는 구원담론이다.  

III. 에코페미니즘의 영성

1. 현대문명의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담론

에코페미니즘은 여러 형태의 억압(이원론)들, 즉 성차별, 계층차별, 인간중심주의(종차별), 인종차별, 식민지주의, 유전자차별, 기업세계화(경제지배체제), 군사주의 등 다양한 지배관계들의 상호연관성을 깨달으면서 이런 지배관계(이원론)들의 사회적 문화적 뿌리를 찾아내는 비판 담론이다. 더 구체적으로 생태여성학은 다양한 억압형태, 특히 자연파괴(종차별)와 여성억압(성차별)의 상호연결을 검토하는 비판담론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일반 환경 이론 및 운동들이 환경문제와 사회문제, 특히 자연파괴와 여성억압의 상호연결을 보지 못하는 남성 중심적 편견을 지적하면서 이런 쌍둥이 차별(종차별과 성차별)에 대한 문화적 사회적 분석 및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예들 들어, 에코페미니즘은 심층생태학과 사회생태학보다 생태계 위기의 근원을 더 깊게 추적한다. 위의 세 가지 생태학적 운동은 지배관계로부터 상호관계성으로 회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지만 생태계 위기의 근원에 대한 이해가 다르므로 해결책도 다르게 제시한다. 심층생태학이 주장하듯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인간이며, 사회생태학이 주장하듯이 사회경제지배체제 안에 존재하는 위계적 사회제도(socio-economic hierarchy), 즉 인간사이의 지배관계가 자연지배로 확장된다는 주장에 에코페미니즘도 동의하지만, 이 둘은 가부장체제 안에서 문화와 권력을 독점하는 남성이 자연을 더 많이 파괴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에코페미니즘은 생태계 위기의 근원을 인간중심주의에서 남성중심주의로, 사회경제지배체제에서 가부장지배체제(즉 가부장지배체제가 사회경제지배체제의 원형이라고 봄)로 그 근원을 더 깊게 추적한다.


더 나아가 로즈마리 류터는 다양한 지배관계들의 정신적 뿌리를 남성의 초월의식, 즉 초월적 이원론으로 본다. 즉 남성은 초월적 영역(신, 영, 정신 및 문화의 자유의 영역)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여성을 통제되고 지배 되어야 하는 유한성의 영역(지구, 물질, 몸과 자연의 영역)과 동일시하여, 남성의 자유의 영역을 여성의 유한성의 영역보다 더 우월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함으로써 여성과 자연에 대한 남성 지배를 정당화한다. 그녀는 이런 초월적 이원론의 여러 형태(특히, 계급지배, 남성지배, 자연지배)들이 문화교차적인 보편적 현상이 아니라 각 문화의 시기마다 복합적이며 모호하게 발생해 왔다고 지적한다. 또한 로즈마리 류터는 성차별(sexism)을 원죄의 일차적 표현으로 본다. 그녀는 남성의 초월의식(특히 정신/몸의 이원론)은 바로 남성과 여성의 이원론, 즉 남성지배를 전제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성지배(sexism)를 모든 지배형태들의 일차적인 정신적 모델, 즉 원죄(죄의 조건)의 일차적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남성적 초월의식은 죽음과 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다. 또한 죽음과 몸에 대한 남성의 두려움은 남성의 재생산 능력의 결여로부터 기인한다. 남성은 몸을 벗어난 영원한 삶을 획득하는 한 수단으로 오히려 여성, 자연, 몸 그리고 타자의 영역을 부정하여 폭력과 죽음을 조장시키는 가부장 지배체제 및 문화와 영성의 뿌리가 된다. 이런 남성의 초월의식 안에서 여성, 몸 및 자연을 악으로 보면서 이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초월적 남성 신화가 고대 근동문명으로부터 서구 근대서구 문화 안에서 종교적으로 혹은 세속적으로 강화되어 왔다.  

2. 구원담론으로서 에코페미니즘의 성서적 기독교적 영성      

이상에서 우리는 생태여성학이 여성과 자연에 대한 남성지배의 사회적 문화적 뿌리를 추적하는 비판담론임을 알아보았다. 동시에 에코페미니즘은 이런 지배관계를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 상호관계로 치유하기 위하여 지구 공동체의 생명의 비전을 제시하는 구원담론이다.  이제 자연, 여성 및 타자에 대한 남성지배의 에코페미니즘적 비판담론을 통해 검토한 현실모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기초로 지구생명공동체의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에코페미니즘의 구원담론에 대해 알아본다. 에코페미니즘의 구원담론의 빛에서 성서와 기독교 전통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태여성학적 영성 및 비전을 알아본다.

(1) 선한창조, 피조물의 내재적 가치, 하나님과 창조의 계약관계    


기독교 창조신앙은 선한 창조(good creation), 즉 창조세계의 선성을 확인한다. 창세기 1장은 “창조세계는 좋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매일의 창조 작업이 완성될 때 마다 창조자 하나님은 피조물을 선한 것으로 7번 씩 이나 축복하신다. 그리고 육일 째 되는 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라고 기뻐하신다.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다양하게 상호 의존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시고 축복하셨다. “창조세계가 좋다”는 창조세계의 선성의 확인은 모든 피조물의 가치, 존중 및 감탄의 근거를 제공해 준다. 이런 기독교 신앙이 바로 축제의 영성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에 가치를 부여한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신 모든 피조물은 인간의 이익과 목적에 관계없이 가치를 지닌다. 즉 모든 만물은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만물의 내재적 가치의 인정은 자연에 대한 도구적 가치 및 공리주의적 견해(유용성 및 인간이익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견해)의 한계를 잘 지적해 준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사역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창1:1-31), 동시에 창조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즐거움에 응답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약 안에 인간뿐만 아니라 창조세계 전체가 포함되어 있음을 강하게 증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역 안에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물 전체가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의 계약관계는 창조와 구원, 자연과 역사의 서구적 이원론 (자연을 구원과 역사의 영역에서 배제하여 인간구원의 배경 및 도구로 보는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들 들어, 시편29편의 폭풍 속에 임재 하는 하나님과 시편 65편의 소나기 속에서 이 땅에 임재 하여 땅에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라. 폭풍우 속에서 인간의 교만을 꾸짖으시며 욥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욥 38장), 야생동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욥 39장)은 자연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증거한다. 또한 시편 96편은 만물(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밭에 있는 모든 것이 즐거워하는)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잘 증거하고 있다.  


(2)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거부
  

위에서 살펴본 선한 창조의 기독교 신앙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부정한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창조 세계 중 어떤 부분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어떤 부분은 악하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 인간과 자연, 남성과 여성, 부자와 가난한 자, 백인과 흑인을 구분하여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거나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모든 형태의 지배관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중심주의, 엘리트중심주의, 백인중심주의, 제1세계중심주의와 같은 편협한 논리를 거부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중의 한 종인 인간(인간중심주의), 특히 백인(백인중심주의), 남성(남성중심주의)만을 사랑하신다는 주장은 선한창조와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계약관계에 대한 기독교 창조신앙을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창조의 기독교 신앙은 잘못된 지배형태에 도전하는 저항의 영성을 요구하게 된다. 물론 우리의 삶은 살아있음의 기쁨, 감사를 누리는 축제(celebration)의 영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런 축제의 영성(하나님에 경배와 찬양)만이 아니라, 많은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들이 파괴되는 생태계 위기 (특히 지구온난화와 세계화의 위기)에 직면하여 이런 지배와 착취의 체제에 도전해서 이를 변혁시키는 저항의 영성(Spirituality of Resistance)을 강하게 요구한다.


(3) 인간중심주의 및 남성중심주의의 한계
  

성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으며 청지기적 책임을 요구한다. 여러 학자(Linn White가 대표적)들은 생태계 위기의 성서적 근원을 창1:28절에서 발견하고 있다. 우리가 이 구절에 근거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지배를 정당화해 온 것은 편협한 인간중심적 해석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인간중심주의는 성서 안에 있기 보다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인간중심적 해석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예들 들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dominion)개념은 자연에 대한 소유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청지기적 책임(stewardship), 즉 대리권 내지는 사용권을 의미한다. 이런 사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동산지기로 부르시는 창2:8절과 창 2:15 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창조세계를 관리하고 돌보고 보존하라는 청지기적 책임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특권은 지배하는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허락하신 위임된 청지기적 책임을 의미한다. 자연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청지기직의 남용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게 된다. 이런 진노와 심판은 상징적인 것만이 아니다. 인간의 청지기적 남용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실제적 예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지구온난화현상이다. 창조세계가 인간의 청지기적 책임 하에 있다하더라도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예들 들어, 성서는 폭풍과 가뭄과 같은 난폭한 자연을 인간의 죄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다(이사야 25장 4절 이하).  


성서는 또한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여성이 남성의 갈빗대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창2:22절이 남성과 여성의 가부장적 관계를 정당화해 온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성 중심적인 잘못된 해석이다. 예들 들어, 창세기 1:27절은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동일하게 창조된 평등한 인간임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성서 곳곳에서 많은 여성, 특히 가장 소외된 여성들을 직접 만나 주신다. 창세기 16장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방인 여성인 하갈이 사라의 학대를 피해 광야로 피신했을 때, 그녀를 광야에서 직접 만나주신다. 이 이야기는 여성(가장 소외받은 약자)을 직접 만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또한 예수님은 마리아를 통해 다른 남자 제자들과 동일한 배울 권리를 인정하시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말씀 선포를 하실 때에도 잃어버린 양을 찾는 남자 목자와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을 동일하게 비유하는 것처럼 남녀를 차별 없이 대하신다.  

(4) 피조물의 상호의존 및 공동창조자


성서는 모든 피조물의 상호연결 및 상호의존이라는 생태학적 영성을 확인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지막 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it was very good)라고 기뻐하시며 축복하신 것은 모든 피조물이 서로 연결되고 의존되어 살아가는 공존의 모습이 창조세계의 생명의 본성이며 질서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인간이 생명 공동체 안에서 다른 피조물들과 상호 관계적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인간이 또한 유한한 존재임을 일깨워 준다. 창2:7절은 인간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한다. 부, 명예, 권력의 지나친 확장을 통하여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자기중심성은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비성서적인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런 자기중심성을, 자기교만 즉 신앙적인 죄로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다른 생명의 부정과 착취에 의해 이기적 자아(ego)를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다른 모든 존재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자신의 유한성을 겸손히 인정함으로써 진정한 자아의 가치를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의 공동창조자의 위치와 책임을 망각하고, 인간의 자기의식과 반성의식(인간만의 이성적 능력)을 다른 생명을 지배하고 착취할 수 있다는 지배적 특권으로 잘못 사용해 왔다. 도덕적 존재로서 인간은 이런 이성적 능력이 다른 생명을 돌보고 관리하라는 인간의 청지기적 책임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인간의식이 지배의 특권이 아니라 청지기적 책임임을 깨달을 때(인간의 의식을 자연으로 통합함의 의미),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불러서 하나님의 창조적 과정에 우리를 참여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지구 생명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과학적 기술과 힘이 있음을 상기할 때, 자연을 양육하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인간의 청지지적 책임의 역할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IV. 축제와 저항의 지구 생명공동체를 향하여  
        

구원담론으로서 에코페미니즘은 축제와 저항의 지구 생명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첫째, 에코페미니즘의 신학 및 영성의 실천하는 자들은 예수께서 약속하신 충만한 생명(the fullness of life,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의 약속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둘째, 인간의식은 지배적 특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돌보라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임을 인식할 때 우리가 이런 의식(반성)능력을 자기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다른 생명을 부정하고 착취하는데 사용하느냐 우리가 자연에 의존적인 존재임을 겸손히 인정하고 모든 생명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생태여성학적 영성은 생명공동체의 방관자 및 파괴자가 아니라 헌신적 참여자로 우리를 부른다. 이것은 우리가 직면한 생태계 위기를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인 양자택일의 관점이 아니라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가부장적 지배패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저항의 영성을 요구한다. 이런 저항의 영성은 가부장제 안에서 발생하는 여성억압과 자연착취의 연관성을 검토하는 비판담론 안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기업세계화 안에서 살펴보았듯이, 저항의 영성은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 자연, 몸 그리고 약자를 착취하는 정신구조를 비판한다. 이런 저항의 영성의 기초는 바로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과 관심, 즉 우리가 생명공동체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는데 있다. 우리가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의 공동체의 참여자로 부름을 받을 때 우리는 동시에 축제의 영성, 즉 생명의 신비와 기적의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삶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셋째, 이런 축제적 삶을 실천하는 방법은 Starhawk이 제시하는 세 종류의 힘(power over, power within, power with) 에서 잘 드러난다. Power over는 가부장 사회의 전형적 힘으로 지배와 착취의 논리에 근거해 근본적으로 경쟁적이다. Power within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자의 통제와 자신들에게 투사된 열등성과 무력함에서 벗어나려는 과정 안에 있는 힘으로 자신들의 내재적 힘과 선(goodness)을 확인한다. Power with는 자신을 인정하기 위하여 타인을 부정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재능을 인정하는 힘을 나누는 방법을 발전시킨다. 상호간의 힘을 실어주는(mutual empowerment)관계를 통해 타인의 번영이 바로 나의 번영이 된다. 넷째, 환경정책 전문가인 레스터 브라운에 의하면, 지구온난화의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세계화의 경제체제 하에서 중국, 인도 및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아메리칸드림을 쫒아갈 경우 2031년에 가면 지구자원이 고갈되어 더 이상 서구식 경제개발은 실현될 수 없으며, 결국 인류문명은 쇠퇴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는 서구식 경제개발의 대안으로 지속가능한 경제, 즉 미래세대의 번영과 기회를 박탈하지 아니하고 현재 우리의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체제를 제시한다. 그 예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교통시스템, 자원의 재활용, 지속가능한 농업체제 등을 들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훼손된 창조세계를 회복시키고(930억 달러), 인간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680억 달러)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연간 예산을 1610억 달러로 제시한다. 현재 시급한 지구적 가난과 지구생태계 치유를 위해 필요한 이 비용은 연간 세계국방비(9750억 달러)의 1/6, 미국 국방비(4920억 달러)의 약 1/3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음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과 결단을 촉구한다. 이 사실은 신음하는 창조세계의 치유와 지구적 가난의 해결은 가능한 것이며, 새로운 인류미래의 가능성과 희망은 인간의 의식과 삶의 양식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회개에 있음을 보여준다. 다섯째, 에코페미니즘이 그리는 지구생명공동체의 신학적 실천은 이사야 기자가 약속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서적 비전을 반영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인간들 사이의 평화가 회복되고 심지어 자연의 반목까지도 치유되는 생태정의의 비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V. 나오는 말

    

이상에서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최신의 관점인 에코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지구적 위기의 근원을 검토하면서 그 위기의 본질을 현대문명의 패러다임의 위기로 진단하고 이에 기초하여 지배관계를 사랑과 정의의 상호관계로 치유할 수 있는 신학적 비전 및 실천을 제시해 보았다.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지배형태, 특히 여성억압과 자연착취의 상호연결을 정확히 분석하는 비판담론이며 이런 가부장적 질병의 정확한 진단에 기초해 가부장적 체제와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생명공동체의 대안적 비전을 제시하는 구원담론임을 확인하였다.

에코페미니즘이 제시하는 구원의 비전은 성서적 비전, 즉 이사야서 기자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에 기초해 있다. 인간이 지구 생명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는 충분한 과학적 기술과 힘이 있음을 상기할 때, 창조세계를 양육하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청지기적 책임의 역할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우리를 생태학적 회개 및 비전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부르심에 우리가 책임적으로 응답하느냐 파괴적 삶을 지속하느냐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적 결단에 달려있다. 우리가 직면한 지구 온난화의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가 필요한 것은 창조세계에 대한 파괴적 혹은 방관적 자세나, 비관적 혹은 낙관적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모든 생명에 헌신적 사랑과 참여이다. 환경정책 전문가인 레스터 브라운이 제시하듯이, 가장 시급한 생태계 치유와 지구적 가난을 해결하는데 드는 비용(1610억달러)이 연간 세계국방비(9750억 달러)의 1/6, 미국 국방비(4920억 달러)의 1/3이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는 죽어가는 창조세계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과 희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런 희망을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 안에서 보여주셨다.(이사야 65:17-25) 지구온난화와 기업세계화라는 창조세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 모두가 생태여성학적 영성을 회복하고 헌신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이 땅위에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희망을 실현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회복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충만한 삶(the fullness of life)(요10:10)으로 거듭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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