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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신학> 1997년 봄

 

 

 

생태여성신학의 주요 관점들

 

구 미 정

이대 박사과정/기독교윤리 전공

 

 

 

지구의 나이를 ‘하루’로 잡을 때 인류 문명이 나타난 것은 23시 59분 58초 이후라고 한다. 인간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임을 자부하면서 목청 높여 ‘유구한’ 문명사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호모 사피엔스로서의 인류의 출현이란 지구 자체의 연륜에 비하면 고작해야 ‘2초’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2초’도 채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는 머지않아 21세기를 맞이하게 되고, 바야흐로 세 번째 천년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새 시대를 준비하는 이즈음, 지구상에 제일 늦게 정착한 손님이면서, ‘낙타가 천막 빼앗는 격’으로 지구 전체를 송두리째 집어삼키려고 부단히 획책해 온 인류에게 과연 또다시 찬란한 천년의 시간이 보장되어 있는가를 심각히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생명 공학, 원자물리학, 핵무기, 인터넷, 사이버 스페이스 등 살벌한 단어들 틈새에서 나무와 숲과 강물을 이야기하고, 여자와 지구의 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족쇄 풀린 프로메테우스”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지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라는 등불을 켜 들고 길을 떠난 사람들이다.

 

생태여성주의는 근래에 대두된 사상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 삶을 지탱해 온 모든 것 - 의식, 가치관, 세계관, 사회구조와 체계, 삶의 방식 등에 있어서 총체적인 변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상으로서의 생태여성주의란 무엇이며, 또 그 사상에 동조하여 나온 생태여성신학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의 컨텍스트, 곧 제 3세계적, 아시아적, 한국적 상황에서 생태여성신학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 ‘발견적인’ 대답을 모색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1. 생태여성주의란 무엇인가?

 

1) 생태여성주의의 출현과 전개

 

넓은 의미에서 생태여성주의란 생태학(ecology)과 여성주의(feminism)가 만나 생겨난 말이다. 1960년대 말 여성 운동의 출현과 함께 페미니스트들은 역사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정당화시키는데 이용되어온 ‘생물학적 결정주의’를 제거하려고 노력하였다. 여성을 “제 2의 성”, “타자”(the other)로 규정한 사회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러한 질서들이 다름 아닌 남성의 특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을 밝혀 내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무르익어 가면서 여성 운동은 점차 자연에까지 그 지평을 넓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여성억압이(sexism) 다른 종류의 억압들, 곧 자연 억압(naturism), 인종 억압(racism), 계급 억압(classism) 등과 무관하지 않고, 서로 구조적으로 얽혀 있다는 각성에 기인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생태여성주의의 기반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통찰들이 있다. ①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은 깊이 연관되어 있다. ② 이들 “쌍둥이 억압”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이러한 연관성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③여성주의 이론과 실천은 생태학적 관점을 요구한다. ④ 생태학적 문제들은 오로지 여성주의적 관점을 포함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생태여성주의라는 단어는 “지구상에서 인간의 생존을 보장해 줄 생태학적 혁명을 일으킬 만한 여성의 잠재적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1974년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듀봉(Francoise d'Eaubonne)에 의해서 고안되었다. 급진주의 생태여성주의자 스프레트낙(Charlene Spretnak)에 따르면 이 운동에는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는 정치 이론과 문화사 연구를 통해 생태여성주의 운동을 펼치는 것이고, 둘째는 여성적인 것을 숭배하며 초월보다 내재를 강조하는 자연 중심의 종교, 이른바 여신 종교에 참여하는 것이고, 셋째는 녹색 정치와 같은 환경 보호 운동에 투신하는 것이다.

 

2) 생태여성주의가 보는 생태계 위기의 뿌리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오늘날 생태계 위기가 가부장적 문화의 모든 표현들, 즉 위계 체제적 이원론, 군국주의, 기계론적 세계관, 이윤추구적 자본주의에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이 가부장제야말로 지구 파괴의 주범이라고 보는 점에서 생태여성주의는 현대의 급진적 환경 운동으로 일컬어지는 심층 생태학과 차이가 있다. 사실상 심층 생태주의자들도 원자주의(atomism)나 이원론, 추상적 합리성과 자율성 개념에 비판적이라는 점에서 생태여성주의와 공통되지만, 심층 생태학을 하는 이들이 거의 대부분 남성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이론과 실천 역시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적 편견을 드러낸다는 것이 생태여성주의자들의 지적이다. 마이클 짐머만(Michael E. Zimmerman)의 분석대로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인간 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맹점을 비판하지만, 생태여성주의자들은 남성 중심주의(andropocentrism)의 맹점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생태여성주의가 가부장제를 공격하는 그 내용은 무엇인가? 우선 가부장제의 첫 번째 문화적 표현인 위계 체제적 이원론을 보면, 이것은 통전적인 하나를 대립적인 둘로 나누고, 여기에 우월과 열등이라는 가치를 주입한 후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옭아 묶는, 전형적인 ‘분할-지배’의 양상을 띠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희랍철학에, 종교적으로는 유대-기독교에, 문화적으로는 전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이 이원론은 영/육, 남/녀, 문화/자연, 이성/감성, 신/세계, 인간/비인간을 나누고 전자가 후자를 힘으로써 통제하는 ‘질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남성은 영혼, 문화, 이성, 신, 인간을 대변하는 존재로 동일시되며, 여성은 육체, 자연, 감성, 세계, 비인간에 가까운 존재로 상정된다. 보봐르의 지적처럼 전자는 ‘초월’의 영역이고, 후자는 ‘타자’ 혹은 ‘내재’의 영역이다. 이네스트라 킹(Ynestra King)에 의하면, 여성 혐오 문화 속에서 길러진 남자들이 타자들을 이용하고 지배할 수 있도록 ‘초월’이 가능한 것은 ‘망각’에 기인한다. 자신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그리고 자신이 나온 뿌리인 여성/자연의 보금자리를 애써 망각하는 것이야말로 초월로 향하는 지름길인데, 이것이 문화적 관습으로 표출된 것을 남성의 “성년식”에서 볼 수 있다. 성년식은 이제껏 여성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던 남성을 송두리째 뽑아 내어 남성 공동체의 역할과 기능에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남성은 여성적인 것을 열등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남성적인 폭력 문화에 길들여지게 된다. 이 폭력 문화야말로 여성에 대한 강간과 자연에 대한 강간을 가능케 하는 동근원인 셈이다. 독일 녹색당의 창시자 패트라 켈리(Petra Kelly)는 “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지구가 생태적인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그 구조란 “누르는 힘”(power-over)에 의한 폭력으로서, 가부장적 위계 체제적 이원론에 의해 뒷받침된 억압과 착취의 기제인 것이다.

 

남성적 힘의 논리는 ‘정복과 확장’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군국주의와 상통한다. 미 국방성의 정책에 대항해 여성 단체가 외친 구호는 “가부장제의 무장을 해제하라” 는 것이었는데, 이는 가부장제와 군국주의가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간파한 말이다. 군국주의의 특징은 우리가 늘 들어온 말로 “적화 야욕”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을 무조건 “적”으로 규정하려는 욕구, 즉 상대방에 대해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타자”의 상태를 넘어,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상정함으로써 공격하고 정복하려는 공포심과 분노가 군국주의의 배후에 놓여 있다. 스프레트낙은 가부장적 표현들이 사실상 여성/자연의 힘에 대한 공포심과 분노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러한 공포심과 분노는 여성/자연에 대한 억압과 폭력, 강간, 살해로 나타난다. 피카소가 1951년에 그린 “한국전쟁의 대학살”은 가부장제와 군국주의의 연결을 시각적으로 명시한 작품이다. 이 그림에 보면 로봇같은 남성들이 여성, 특히 생명과 생산을 상징하는 임부와 소녀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전쟁은 주로 남성이 일으키지만, 그 대가는 대개 여성이 치른다. 파괴와 정복이 남성의 ‘일’이라면, ‘살림’이야말로 여성의 일이다. 군사 문화 속에서는 산림 자원이 훼손되고 땅이 짓밟히고 여성이 강간당하는 일쯤은 너무나 흔해 빠진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국주의와 환경 파괴와 성차별주의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고 분석한 페트라 켈리의 관찰은 옳은 것이다.

 

가부장제의 또다른 표현인 서구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Rene Descartes)가 주/객 도식을 자연 지배의 원리로 설정한 이래,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뉴톤(Isaac Newton), 정치 분야에서는 존 로크(John Locke), 경제 분야에서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 의해 급격히 전파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자연은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더욱이 자연이 여성과 동일시될 때 그것은 남성의 탐구 영역이고, 눈요깃감이 된다. 우리에게 낯익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자의 사명이 “자연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가 자연이 그녀(자연)의 은밀한 곳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자연과 여성에 대한 기계론적 관점을 잘 나타내 준다. 데카르트는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를 통해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이며, 그밖에 모든 ‘연장적 존재’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기계론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정부와 사회를 이해한 로크의 경우, “자연에 남겨진 이용되지 않는 땅은 낭비”라고 봄으로써 정부의 자연 정복 의지를 부추겼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경제학을 통해 모든 인간이 각자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경제활동을 해도 기계론적으로 사회질서가 유지되리라 기대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낙관론은 오늘날 제 발등을 찍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무한 이윤추구적 가치관과 생존 경쟁의 원리 및 공리주의에 기반한 사회적 다윈주의를 낳음으로써 마침내 ‘공존’보다는 지배와 정복의 세계관을 창출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 정부의 “세계화” 플랜이 국가 경쟁력과 무한 경쟁을 구호로 내세우면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여성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의 낙오자로 판명되는 남성 노동자까지도 서슴없이 도태시키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진화론적, 기계론적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극대 생산, 극대 소비로 일관하고 있는 자본주의 정신이 합세할 때 생태계 위기는 벼랑 끝에 서게 된다.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고갈시키고,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방출함으로써 생태계의 죽음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후기 산업 사회의 소비주의는 “소비만이 미덕”이라고 선전한다. 어디에서도 자신의 ‘주체됨’을 확인할 수 없는 여성, 특히 주부들을 포섭하여 ‘소비의 주체’라고 추켜세우면서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존재론에 굴복하도록 만든다. 소비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보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가장 의미 있는 일”이며, 폴 틸리히가 말한 “궁극적 관심”이 된다. 소비주의는 인간적인 친밀성과 인격적인 관계에 대한 모든 욕구가 상품에 대한 욕구로 전도된 사회의 ‘종교’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가 생명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는 상호의존감에 정면으로 위배된 교리를 낳는다. 게다가 과잉 소비로 말미암은 쓰레기 문제와 생활의 편리성 추구로 인한 일회용품 등을 양산하면서 환경 파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와 같이 가부장제의 다양한 국면들, 곧 위계 체제적 이원론, 군국주의, 기계론적 세계관, 소비주의적 자본주의 등에 의해 억압당하고 파괴된 자연과 여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뭉친 이들이 바로 생태여성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생태여성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지고 또 하나의 문화, 전혀 다른 세상의 비전을 펼쳐 나간다. 그 비전은 가부장적 범주 속에서 형성된 현재의 반(反) 생태적, 여성 억압적 의식과 구조를 총체적으로 뒤엎을 만한 세계관, 신화, 상징, 관념, 이미지를 창조하고 발굴함으로써 근본적인 삶의 변혁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성의 몸을 긍정하고, 자연의 순환을 경축하며, 살아 있는 지구 ‘가이아’를 존중하는, 우주적인 상호연결감에 근거한 생태 집(Eco-home)을 만들려는 자신들의 꿈을 위하여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안으로부터 샘솟는 힘”(power from within), 다른 존재들과 함께 “나누는 힘”(power with)을 키운다. 이 힘은 권력 지향적인 파괴력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고 유지시키는 힘이다. 이러한 점에서 생태여성주의는 그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다. 단순히 생태학과 여성주의의 합성어가 아니라, 지구 자체와 다음 세대 인류 및 다른 피조물들의 삶을 지속시킬 생명해방적인 이론과 실천을 지칭하는 대안 운동이 바로 생태여성주의인 것이다.

 

3. 생태여성신학이란 무엇인가?

 

1) 생태신학의 다양성과 그 맹점

 

“지구의 날”이 최초로 선포된 1970년을 전후하여 새삼 환경 문제에 대한 각성이 불길처럼 일어나면서 제반 학문 분야의 토론의 장을 뜨겁게 달구었는데, 특별히 신학계에 그 도화선이 된 것은 역사학자 린 화이트(Lynn White, Jr.)의 문제 제기 덕분이었다. 일명 “화이트 논제”(the Lynn White thesis)로 알려진 그의 유명한 작품, “우리 시대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al Crisis)에서 화이트는 오늘날 생태계 위기에 대해 기독교가 커다란 죄짐을 져야 한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화이트의 도전은 환경 문제의 해결이 과학 기술적 처방에 있지 않고 종교적 세계관의 변혁에 있다는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기독교계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물론 화이트 이전이나 이후에도 기독교에 대한 생태학적 비판들은 많이 있어 왔지만, 그의 논문만큼 대중화된 것은 없었기에 환경 문헌의 ‘고전’ 혹은 ‘복음’으로 불려진다. 화이트에 의하면 “유대-기독교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인간 중심적인 종교”라는 것이다. 그는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창조 신앙이 받아들여진 곳에서 자연에 대한 무제한 약탈과 훼손이 자행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오늘날 자연과학과 과학기술도 자연에 대한 기독교의 “오만”으로 가득차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을 효과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창조주 신앙이 이를테면 불교나 힌두교, 또는 성 프란시스의 세계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이러한 화이트의 주장에 대해 기독교 쪽의 반응은 크게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어 다양한 ‘생태신학’이 전개되었다. 먼저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기독교 문명 밖의 세계, 이를테면 불교가 지배적인 나라에서도 사찰 건축을 위해 대대적인 삼림 벌채가 행해진 사실을 들어, 기독교만이 환경 파괴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 프란시스나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 같은 ‘희귀한 예외’를 들어 기독교야말로 환경 친화적인 종교라고 옹호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변증론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할 시급한 상황에서 사태의 심각성조차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어리석고 ‘오만’한 반(反)시대적 도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기독교의 책임을 인정하는 신학자들은 주로 “청지기 신학”에 집중하는데,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연에 대한 소유권이나 처분권이 없고, 자연은 오직 하느님의 것이므로, 인간은 다만 청지기로서 자연 자원의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표면상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입장도 자연을 ‘자원’으로 파악하는 한, 그리고 자연을 ‘관리’하는 이유가 ‘후세대의 존속을 위해서’라는 인간중심주의에 머물러 있는 한 생태 문제의 해결에 미흡할 뿐더러, 역시 변증 신학의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는 달리, 화이트의 고발을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학자들은 서구 신학 전통이 생태학적으로 ‘파산’에 이르렀음을 심각히 인정하면서, “생태대”(the Ecozoic era)를 위한 신학적 재구성의 과제를 기꺼이 떠맡고 있다. 이들은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자연신학,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에게서 영향받은 과정신학, 해방신학 등에 기대어 새로운 생태신학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매튜 폭스(Matthew Fox), 존 캅(John Cobb), 데이비드 그리핀(David Griffin) 등이 있다. 이들의 작업은 기존의 규범적 신학 전통을 해체하고, 하느님과 세계, 그리고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규명하며, 구속사의 지평을 자연의 영역에까지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들의 비판은 인간중심주의에 머물고 있어서, 미처 신학의 뿌리 깊은 여성 혐오증을 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우리는 이미 심층 생태주의자들에게서도 눈치챘었다.

 

남성 중심 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생태신학을 굳이 ‘생태남성신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왜 생태여성신학의 비판의 대상이 되는지 한 예를 들어보자. 생트마이어(H. Paul Santmire)는 ?자연의 산고(産苦)?(The Travail of Nature)라는 책에서 서구 신학 전통에 주요 영향을 끼친 굵직굵직한 인물들을 뽑아, 그들의 신학 동기가 영적인지, 아니면 생태적인지를 평가하고 있다. 그는 서구 신학이 두 가지 동기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데, 하나는 땅엣 것을 멀리하고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로 올라가려는 “영적 동기”(spiritual motif)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의 선함을 긍정하면서 약속된 땅으로 내려가려는 “생태적 동기”(ecological motif)이다. 여기서 생태적 동기가 가장 두드러진 성 프란시스를 빼고, 다음으로 높은 점수를 받은 이는 어거스틴(Augustine)인데, 어거스틴이야말로 여성의 눈으로 볼 때 결정적인 여성 혐오 주의자인 것이다. 그는 희랍철학의 이원론적 인간학에 기초하여 여성을 육체적 본성에 한정시키고, 여성의 존재 의미를 오로지 ‘자궁’으로만 축소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남성은 혼자서도 하느님의 ‘완전한’ 형상을 지니지만, 여성은 혼자서는 결코 그 형상을 지니지 못한다고 보아, ‘남성의 머리는 그리스도’, ‘여성의 머리는 남성’이라는 구태의연한 바울적 공식을 낳게 하였다. 더욱이 그는 성(sex)에 대해서도 오직 ‘출산으로서의 성’만 인정하고 그 밖의 모든 성성(sexuality)의 표현들을 억압함으로써, 이후 기독교가 성애 공포증(erotophobia)에 시달리도록 만든 장본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자연에 대해 긍정적인 신학일망정 그것이 여성 억압의 가면을 쓰고 있다면 불완전한 생태신학이라는 통찰이 바로 생태여성신학의 가장 강력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여성신학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자연을 악하고 열등한 대상으로 간주하여 착취와 정복의 길을 터준 인식론적 토대가 ‘여성과 자연의 동일시’에 있음을 간파하고, 여성 문제의 해결 없이는 생태 문제도 해결될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자연 지배”라는 개념이 남/녀간의 기본 관계인 ‘지배/종속’ 개념에 기초해 있다는 자각에서 생태여성신학은 인종, 계급, 성에 기반한 모든 사회적 지배 구조를 무너뜨릴 수 있는 생태학적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신학은 여성신학의 ‘한’ 분야를 넘어, 보다 통전적이고 총체적인 생명신학에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2) 생태여성신학의 주요 관점들

 

생태여성신학은 자연 억압과 여성 억압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성격 면에서는 기존의 “자연신학”이나 앞서 언급한 “생태남성신학”과 다르고, 방법론에 있어서는 소위 ‘정통신학’과 구별된다. 이를테면 생태여성신학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위로부터의 방법론’에 만족하지 않고, 상처받은 지구와 여성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새로운 하느님 상을 모색하면서 ‘아래로부터의 방법론’을 사용한다. 이와 같이 생태여성신학은 자연 억압적인 남성 위주의 기존 신학 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과 함께 새로운 신학적 재구성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전위적인 신학임에 틀림없고, 기계론적ㆍ분석적ㆍ개인주의적ㆍ남성적 세계관이 아니라, 유기체적ㆍ종합적ㆍ직관적ㆍ여성적 세계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닐 수 없다. 생태여성신학이 수행하는 신학적 재구성 작업은 특히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이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 하느님 이해: ‘전적 타자’에서 ‘어머니ㆍ애인ㆍ친구’로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고백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 아버지 하느님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하늘 저편에 앉아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ㆍ군주ㆍ통치자ㆍ심판관 등의 이미지로 묘사되어 왔다. 인간과는 격이 다른 하느님, 그래서 인간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하느님이라는 표상은 특히 바르트(Karl Barth)에 이르러 “전적 타자”로 자리매김되면서 확고부동해졌다. 서구 신학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을 그가 창조한 세상으로부터 추방시키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죌레(Dorothee Solle)에 의하면, 하느님의 전적 타자성에 대한 신학적 표상은 세 가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고립이다.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초월적이라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유비도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상호작용도 있을 수 없으며, 고로 하느님은 우리와 ‘무관한’ 하느님, 더이상 필요치 않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느님이 전적 타자라면 자연 세계는 무신적인 과학자의 손에 넘어가고, 이로써 땅은 단순히 이용 가능한 객체로 전락하여 자연 제국주의가 성립된다. 셋째로 절대초월적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을 자연과 구별되는 존재로 격상시켜 인간의 자연 지배를 가능케 할뿐만 아니라, 만물의 결속감을 빼앗고 인간을 지구에서 외톨이로 만들어 버린다. 결국 하느님을 세상 ‘안’에 임재하지 않은 하느님으로 몰아가는 정통신학의 반(反)범신론적 경향은 유색인종과 가난한 사람들, 여성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를 강화시킨다는 것이 죌레의 분석이다. 세상 밖에서 우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막강한 권력자 하느님은 독재자요 폭군이나 다름없다. 성차별이나 인종분리와 같이 불의한 세상 질서는 언제나 그러한 ‘하느님의 뜻’으로 정당화되어 왔던 것이다.

 

맥훼이그(Sallie McFague)는 생태계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는 오늘날 그처럼 군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인 하느님상은 적합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유해하다고 지적한다. 지금 핵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 군주로서의 하느님 모델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상호 의존성을 긍정하는 “유기적이고 생태적인 모델”(organic ecological model)이다. 그러한 모델을 추구하기 위해 맥훼이그는 구약성서에 광범위하게 들어 있으나 기독교 전통 속에서 배제되어 온 하느님의 여성적 이미지에 주목한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바느질도 하고(창 3:21), 젖먹이를 못 잊어 애타하며(사 49:15), 자녀가 태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품에 안아 주고(사 46:3-4),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허리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는(호 11:3) 어머니 하느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어머니 하느님이 세계를 자궁으로부터 낳아 지속적으로 돌보면서 ‘아가페’ 사랑을 베풀고 있다면, 연인으로서의 하느님은 지배와 복종의 수직적 상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수평적 상호관계 속에서 ‘에로스’ 사랑으로 만물을 껴안는다. 그리고 어머니 하느님이 생명의 시초와 양육과 완성을 이끌어 간다면, 연인 하느님은 상처받고 찢어진 세계의 고통을 책임지면서 함께 고난 당하고 치유하는 구원의 사역을 담당한다. 끝으로 맥훼이그가 ‘위에 계신’ 하느님에 대항해 ‘곁에 계신’ 하느님으로 제시한 이미지는 친구로서의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친구 하느님은 예수의 삶에서 나타난 대로 우리와 함께 하는 하느님의 ‘필리아’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예수는 사회에서 소외된 자, 버림받은 자, 세리와 창녀들과 한 상에서 먹고 마시며 우정을 나누었다. 그 우정은 단순한 사적 우정이 아니라 연대적 우정으로서, 친구 하느님이 세계를 지속적으로 보전하는 사랑 속에서 증거된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적 방식의 은유로 표현된 “어머니ㆍ연인ㆍ친구”로서의 하느님 표상은 상처받고 억압된 모든 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을 요구함과 동시에, 그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불어넣어 준다.

 

② 세계 이해: ‘저급한 죽은 물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몸’으로

 

해박한 종교문화사적 지식으로 생태여성신학을 펼치고 있는 로즈마리 류터는 기독교가 고전적 신플라톤주의와 종말론적 유대주의의 상속자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기독교는 하늘에서 오실 메시야적 왕의 비전에 초월적인 로고스 사상을 융합시켜, 하느님과 세계를 서로로부터 소외시킨 세계관을 발전시켰다. 특별히 초기 기독교는 당시의 시대정신 혹은 개념적 틀이었던 신플라톤주의의 “존재의 위대한 사슬”(The Great Chain of Being)이론을 받아들여, 위계체제적이고 이원론적인 존재론을 마련하였다. 이 존재론에 의하면, 맨 꼭대기에는 ‘일자’, 곧 하느님이 있고, 그 밑으로 영적인 것에서 물질적인 것의 순서로 천사-인간-동물-식물-물질 등이 줄줄이 사탕처럼 등급별로 내려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순수 정신’ 혹은 ‘순수 형상’으로서 세상을 초월하여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선 그 자체’(the Good),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인 반면, 자연 세계는 물질의 혼돈으로 뒤덮인 사악한 땅이라는 이원론이 도출된다. 이것이 종말론적 유대주의와 결합하여, 이 세상/저 세상, 지나갈 세상/다가올 세상, 간이역/종착역의 이원론으로 고착되었고, 중세를 거쳐 금욕주의와 조우하면서 더욱 더 이 세상을 미워하는 풍조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그러나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틀에 만족하지 못한 16세기 근대 철학자들은 이신론(理神論, deism)에 입각해 하느님의 이미지를 ‘시계공’(Clark-maker)으로 그려보게 되었다. 시계공 하느님은 세계를 시계처럼 자동으로 돌아가게 설계해 놓고, 자신은 하늘 저편에 앉아 시계 태엽만 돌려놓은 채 나 몰라라 방치하는 하느님이다. 여기에는 희랍철학에서 볼 수 있었던, 자연 세계에 대한 부당한 평가절하가 개입되지 않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시계공의 모델로 설명한 것이 당시의 과학 혁명의 영향인 점을 감안하면, 이로써 세계가 하느님의 손에서 벗어나 과학자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셈이다. 결국 기독교는 세계를 ‘과학기술 만능 주의’라는 신흥종교에 넘겨주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것의 진보와 번영을 축복한 대가로, 오늘날 지구 전체를 생존의 위기로 몰아넣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생태여성신학자들은 더 이상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를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고 상처받은 지구를 치유하기에 적합한 표상으로 “재신화화”(remythologiz-ing)할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맥훼이그는 세계가 진정 “하느님의 몸”이라는 표상을 제안하고 있다. 이 세계는 저급한 물질들로 가득차 있는 혼돈의 땅도 아니고, 인간을 무질서 속으로 끌어내리는 사악한 땅도 아니며, 도리어 하느님의 분신이요, 하느님이 임재해 계신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다. 이 내재적ㆍ유기적 모델은 근대 과학의 기계론적 모델과 달리, 세계 밖으로 소외된 하나님을 다시 세계 안에 편재해 계신 하느님으로 초청하고 땅의 “성례전적 가치”를 회복시킨다. 우리가 세계를 하느님의 자궁에서 나온 분신으로 본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역사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닌 "사랑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amor)로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랑’ 이외의 목적에서 출생한 아이가 불행한 것처럼, 하느님이 사랑으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다면 창조에 대한 모든 개념은 무의미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세계를 하느님의 몸으로 보는 모델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보게 하면서 하느님의 우주적 아픔에 동참하도록 초대한다. 늙고 병들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는 지구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사랑과 노동’인 것이다.

 

③ 인간 이해: ‘만물의 영장’에서 ‘관계적 존재’로

전통적인 창조신학은 인간을 창조의 정점에 세워 놓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배하라”는 전적 위임권을 부여한 것처럼 설명해 왔다. 특히 창세기에서 아담이 다른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행위야말로 ‘소유권’과 ‘통치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왔다. 히브리 창조설화는 익히 알려진 대로 바벨론의 창조설화와 대결하면서 성립되었다. 죌레는 바벨론의 창조설화가 제의적 수단을 통해 서민 대중이 왕, 사제, 지휘관을 섬기게끔 “사회적 불평등을 위한 각본”으로 짜여진 반면, 구약성서의 창조설화는 어떠한 인간 지배도 전제하지 않으면서 인간을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존재로 보기 때문에, 바로 그런 점에서 해방적 성격을 지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창조신학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점차로 하느님/세계, 정신/육체, 영혼/물질을 분열시키고 전자에 의한 후자의 정복과 지배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만듦으로써 억압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한 억압성을 극복하기 위해 죌레는 “몸의 신학”을 제안한다. 이것은 인간(Adam)이 흙에서(from a adamah) 나왔음을 인정하고, 땅이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땅에 속한 사실을 받아들이며, 결국 땅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것”(시 24:1)임을 고백하는 신학이다. 몸의 신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육체성을 긍정하게 함으로써 인간과 땅의 연관성을 부각시키는 관계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류터는 창조신학의 억압성을 성적 이원론(sexual dualism)에서 찾는다. 그녀에 따르면 창조설화 자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 분열이나 주종 관계를 함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느님과 아담에 대해 ‘남성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남성만이 하느님의 대변자로 적합하다는 뜻이 된다. 남성이 하느님과 더 가까운 존재라는 관념은 희랍철학의 ‘존재 사슬’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부정적 가치 평가에서도 드러난다. 기독교의 하느님을 태초로 영원까지 불변하시는 하느님, 동일하신 하느님으로 믿는 신앙은 인간의 죽을 운명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영생의 교리를 낳게 했으며, 변화무쌍한 자연의 순환을 ‘악’과 동일시하여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이어졌다. 특히 월경과 임신, 출산 등으로 변화가 심한 여성의 몸은 남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가부장제 사회는 이와 관련된 각종 금기를 만들어 여성을 제의에서 배제시키고, 남성만이 성직을 독점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온 우주가 하느님의 몸으로서 어느 것 하나 분리됨없이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그러한 연관성을 부인하고 홀로 ‘만물의 면류관’임을 자처하는 인간(특히 남성)중심적 태도는 나르시즘과 다름 아니다. 건강하지 못한 나르시즘은 결국 자멸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인간관은 만물이 “관계의 그물망”으로 서로 얽혀 있다는 인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한 인간관은 죽음의 순간에도 ‘태양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며 바람과 물과 땅을 형제로 맞아들인 성 프란시스에게서나, 조상의 땅을 개척자들에게 넘겨주며 자연에 대한 깊은 결속감을 당부한 인디언 추장 시애틀에게서 볼 수 있고, 또한 엘리스 워커(Alice Walker)의 소설 ?자주 빛깔?에 나오는 셔그(Shug)의 고백, “만약 내가 나무를 자른다면 내 팔에서도 피가 날 것”같은 느낌에서 엿볼 수 있다. 인간을 하느님에 대하여, 땅과 세계에 대하여, 몸에 대하여, 서로 서로에 대하여 ‘관계적 존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위계체제적ㆍ이원론적 인간 이해가 극복되고, 생태학적 책임 의식을 깨닫게 되며, 인간의 몸과 성성을 새롭게 긍정하는 에로틱한 윤리가 구현될 것이다.

 

④ 역사 이해: ‘인간중심적 구속사’에서 ‘우주론적 치유사’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자연은 고작해야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드라마에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신학자들의 관심의 초점은 오로지 인간의 죄와 타락,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와 은혜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에, 자연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시작점과 끝점이 분명한 직선적 역사관 속에서 하느님은 인간 역사 안에서만 계시하시는 역사의 주인으로 각인되었다.

 

유대교 사상가 파켄하임(Emil Fachenheim)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뿌리깊은 “원초적 경험”(root experience)을 ‘출애굽 역사’에서 찾는다. 구약학자인 폰 라트(Gerhard von Rad) 역시 출애굽기가 창세기보다 일찍 편찬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표상은 출애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역사적 해방 행위에 기인한다고 밝혀 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바르트는 창조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계약 역사의 범주 속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라고 본다. 이것은 결국 ‘역사’가 ‘창조’보다도 우선함을 뜻하는 것이다. 창조는 단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었다는 역사적 전제 아래서만 의미가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창조는 스스로 어떠한 신학적 자존성도 갖지 못하고 부차적으로 역사에 종속되어 있다.

 

기독교 여성 윤리학자인 해리슨(Beverly W. Harrison)은 영/육 이원론과 남/녀 이원론에 덧붙여서, 생태학적 위기의 문화적 뿌리를 밝히려면 서구 기독교 전통 속에 뿌리깊은 자연/역사의 이분법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은 남성을 규범적 인간으로 상정하고 역사를 만드는 자로 해석함으로써, 자연과 동일시된 여성을 지배하고 자연을 무제한 착취하도록 용인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태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연/역사를 분리시키기보다는 양자의 상호 의존성을 존중하면서, 인간이 자연적이며 동시에 역사적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한편 류터는 “지구를 치유하는 생태여성신학”(An Ecofeminist Theology of Earth Healing)을 모색하면서, “계약 전통”(covenantal tradition)과 “성례전 전통”(sacramental tradition)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히브리적 계약 전통에서 하느님은 ‘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특히 안식년과 희년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희년사상은 불의한 질서와 관계들을 주기적으로 바로잡는다는 ‘생태정의’(Eco-justice)의 비전을 함축함과 동시에 절대적인 메시야적 미래를 투사하고 있다. 그 미래는 창조의 계약이 종국적인 완성을 이룰 때이고 사람 사이에 평화가 회복되며 자연의 불화가 치유되는 때이다. 이러한 계약 전통과 상호보완적으로 생태신학의 근거가 되고 있는 성례전 전통은 새로운 그리스도 이해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우주적 현시로서,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치유를 담당한다. 류터는 골로새서 1장 15-20절에 표현된 우주적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창조자요 구속자인 그리스도의 화해와 갱신의 사역을 본다. 우주적 그리스도는 우주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주 안에 내재해 있으면서 만물을 지탱하게 하는, 새로운 창조의 힘으로 이해된다.

 

우리가 생태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성서를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자연과 직접 관계를 맺으며 자연을 통해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의 은혜는 자연과 무관한 역사 위로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은혜의 장(場)인 것이다. 하느님은 태초의 창조 사역에서 인간을 향해서만 “좋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빛을 향해서도, 하늘을 향해서도, 땅과 바다를 향해서도, 동물과 식물을 향해서도 “좋다”를 연발하셨다. 하느님은 인간에게만 생육하고 번성할 것을 축복하지 않으시고, 물고기와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에게도 똑같은 축복을 내려 주셨다. 하느님의 가치판단은 결코 인간중심적이지 않으며, 인간을 넘어 우주중심적(cosmocentric)이고 생명중심적(biocentric)으로 뻗어 나간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을 인간만의 하느님, 역사의 하느님으로 축소시키고 자연에서 성례전적 가치를 거두어 낸 결과, ‘자연의 죽음’을 야기하고 말았다. 이제 새롭게 요청되는 창조 신학은 하느님의 구원의 지평을 넓혀 우주적 치유까지 포괄해야 한다. ‘공중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에게서 겸손히 배우려고 했던 예수의 모범을 따라, ‘가이아’(Gaia)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자연을 역사 저편으로 밀어 내버린 죄에 대해 ‘회개’하고, 우주론적 치유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계속적인 창조에서 동역자(partner)로, 공동 창조자(co-creator)로 부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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