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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7-07-27 오후 5:02:04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070727163427§ion=03

 

 

"미성숙한 인간이 성숙한 인간을 지배하는 기이한 세상"

[화제의 책] <김신명숙의 선택>

 

 

"규항 씨, 한대숩니다." "예, 잘 지내시지요?" "아이고, 죽겠어요."


"양호 때문에요?" "예, 24시간 울어대니 잠을 못자 미치겠어요."


"그래도 한국 남자들 다 여자한테 떠맡기고 자는데 훌륭하시네요."


"우리 마누라는 서양식이라 국물도 없어요. 그런데 애가 언제까지 이렇게 잠을 안 자요?" "넉넉잡아 앞으로 한 달만 고생하면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나나 옥사나나 나이만 많았지 엄마, 아빠는 초보라 뭘 알아야지. 그런데 애가 이렇게 우는 게 괜찮은 건가. 정상이에요?" "애가 안 울면 걱정이지만 우는 건 괜찮습니다."


"그럼 안심이네. 하여튼 잠을 못자니 아무것도 못하겠어. 음악이고 예술이고 잠을 자야 하지, 하하하."

예순에 첫딸을 얻은 한대수와 유쾌하게 통화하고는 나도 모르게 씁쓸해졌다. 처녀 때는 물론 결혼을 하고도 남자들에게 뭐하나 빠질 것 없이 살다가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하면서부터 서서히 거꾸러지던, 제 삶의 주인 자리를 아이와 남편에게 내주기 시작하면서 허탈감에 순간순간 공황 상태를 보이던 여자 후배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남편들은 "잠을 못 자 죽겠다, 미치겠다"고 호소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들의 남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딱히 비난도 원망도 할 수 없는, 그러나 멀쩡한 한 여자를 서서히 거꾸러지게 하는 거대한 시스템, 바로 그게 페미니즘의 적 가부장제일 것이다.

왜 페미니스트는 대중에게 다가가지 못했는가?

"악명 높은" 페미니스트 김신명숙이 쓴 <김신명숙의 선택>(이프 펴냄. 이하 <선택>)은 그런 보통 여자들의 일상에서 출발한다. <선택>은 페미니즘 이론서도 아니고 그가 8년 전에 냈던 <미스코리아 대회장을 폭파하라>처럼 제목부터 격렬한 책도 아니다. <선택>은 사랑, 성, 외모, 결혼, 육아 같은 여성들의 고민들을 조용한 목소리로 상담하는 책이다. 모든 꼭지는 "사랑하는 언니가"라는 말로 끝난다.

▲ <김신명숙의 선택> (김신명숙 지음, 이프 펴냄) ⓒ프레시안


이 책은 김형경을 필두로 하나의 붐을 이루고 있는 '내적 치유를 위한 상담서'의 하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여느 상담서와 다른 건 매우 정치적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의 고민과 고통이 매우 개인적인 문제로 여겨지지만 실은 매우 정치적인 맥락을 갖는다는 걸 차근차근 설명한다. 이 책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다면 어떤 독자는 위로와 평온함을 얻겠지만 또 다른 많은 독자는 생전 처음 칼을 갖게 될 것이다. 김신명숙은 이런 책을 쓰게 된 연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건 이런 열악한 상황에 대처하는 여성들의 태도였다. 그녀들은 대개 분노보다 체념 혹은 합리화 쪽을 택했으며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저항보다는 순응이 주는 당장의 편안함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들 내부의 힘이 약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여자들이 자존감이 약했고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었으며 내상(內傷)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그 상처를 어떻게 해석하고 극복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그제야 나는 왜 나를 비롯한 <이프> 페미니스트들의 '급진적인' 주장들, 불공평하고 불합리한 현실을 고발하며 비웃고 공격했던 발언이나 행동들이 소수의 마니아층을 넘어 여성 대중에게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당장 그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투쟁을 독려하는 분노의 목소리가 아니라 움츠러든 자아를 다독이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믿어라. 당신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격려의 다독임이었다. 이 책의 글쓰기 방식은 이런 깨달음의 결과다."

 

모든 억압의 출발은 피억압자의 '각성'

<이프>는 페미니즘의 개념을 떠들썩하고 발랄한 방식으로 대중에게 유포하려는 잡지였다. 그런데 그 방식은 김신명숙의 말대로 여성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주지 못했다. <이프>는 2006년 4월 '완간'했다. 김신명숙은 <이프>가 그런 한계를 가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아프게 성찰하고 반성한다. <선택>은 그런 성찰과 반성의 산물이다.

말하자면 <이프>는 '이게 페미니즘이다'라고 떠들썩하고 발랄하게 말하는 책이었다면 <선택>은 고민과 고통으로 얼룩진 사람에게 조용히 다가가선 스스로 '이게 페미니즘이로구나' 깨닫게 만드는 책이다. 김신명숙의 변화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개인적 변화를 넘어서 이런저런 전통적인 선동 방식이 더 이상 대중들에게 호감과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시절에 어떻게 운동해야 할 것인가, 라는 고민에 빠진 전체 진보 운동에 소중한 참고가 될 만하다.

그런 방식이 갖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는 사회적 억압 체제에서 피억압자는 억압체제의 일부를 맡는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운동이 절대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성찰에서 출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억압은 늘 억압자의 일방적인 행위처럼 묘사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조선 인민들'이니 '군사파시즘에 신음하던 국민들'이니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절에 신음하던 사람들이 몇이나 되었던가?

마치 지금은 모든 조선인과 국민들이 일본제국주의와 군사파시즘에 대한 분노에 떨며 독립과 민주화를 여망했던 것처럼 말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였을 뿐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제 식구 건사하며 알뜰살뜰 한 세월을 보냈을 뿐이다.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을 지지하거나 존경하기는커녕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비웃기까지 했던 것이다. 바로 그게 일본제국주의가 36년 동안 조선을 강점할 수 있었던 힘이고 군사파시즘이 30여 년 동안 남한을 다스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힘이다.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싸우는 오늘 운동도 마찬가지다. 억압에 순응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억압은 존재한다. "어차피 자본주의 세상인데" "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이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억압을 지탱한다는 사실은 억압과 싸우는 운동에서 대개 생략되곤 한다. 억압자의 비인간성과 사악함을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을 은폐한다기보다는 사실의 절반만 말하는 것이다. 결국 억압 체제의 본질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방적인 한풀이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결국 모든 운동의 출발은 피억압자의 각성이다. <선택>은 조용하고 다정하게 그러나 매우 집요하게 '당신이 억압체제의 일부를 맡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피억압자는 악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리석다. <선택>은 그런 어리석음을 일깨운다. 그런 어리석음을 질책하거나 훈계하는 게 아니라 그런 어리석음 또한 매우 정치적인 맥락에 의한 것이라는 위로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경우 결혼이 '거래'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입니다. 늙은 갑부와 젊은 미녀의 결혼이 상징하듯 능력(돈)과 외모(몸)가 교환되는 것인데 이때 여자들은 종종 적극적인 주체로 이 게임에 참여합니다. '조건 좋은 남자를 낚느라 혈안이 되는' 것이지요. 성업 중인 결혼정보업체들이 증명해주고 있듯이요. (…) 그러나 이런 비도덕적 현상의 배후에는 여자들이 경제적 심리적 주체로 자립할 수 없게 만드는 불평등한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결혼이 여자들에게 가장 가능성 있는 신분상승의 수단으로 남아있는 한 결혼은 '순수하게' 이뤄질 수 없습니다."

가부장제의 진실은 이렇다

나는 아이들이 보는 잡지를 만들고 있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을 보면 남자가 여자보다 쳐진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본다든가 조용조용 섬세한 대화를 한다든가 하는 건 대개의 남자 아이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강의 같은 데서 생각없이 까불대며 몰려다니는 남자 아이들을 떠올리며 종종 "사람이라기보다는 원숭이 새끼들에 가깝다"고 농담하곤 한다.

나도 웃고 청중도 웃지만 사실 그렇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흔히 남자 아이들은 여자 아이보다 늦되다, 고 말들 한다. 그렇다면 중학이나 고등학생 나이를 지나면서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보다 나아진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없다. 남자 아이들의 특성은 그대로 유지된다. 나 역시 한 남자지만 어른이 되지 않는 경향이야말로 남성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인간적으로 어른이 되지 않지만 정치적으로 여자보다 훨씬 빨리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남자는 어릴 적부터 세상을 지배하는 훈련을 한다. 요즘 남자 아이들에게 유행하는 '유희왕' 카드는 자본주의 시장을 연습하는 것이고 '비비탄총'을 들고 몰려다니는 건 폭력과 지배를 연습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여자 아이들은 매우 돌봄과 보살핌에 관한 인간적이고 섬세한 놀이를 한다. 남자 아이들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고 여자 아이들은 인간적으로 성장한다. 결국 초등학교 시절처럼 정치적 위계가 덜 작동하는 시기엔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를 압도하지만 중학교 고등학교를 경유하면서는 어느덧 남자가 여자를 압도하게 된다.

결국 가부장제는 미숙한 인간들이 성숙한 인간들을 지배하는 기이한 체제이다(그러니 무슨 좋은 세상이 만들어지겠는가.) 이런 사실은 거창한 이론이나 분석 없이도 주변의 남자와 여자들을 잘 살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나는 남자 후배들이 제 아내와의 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을 때, 혹은 여자 후배들이 제 남편 문제로 당하는 고민과 고통에 대해 말할 때 절감하곤 한다.

가부장제나 남성우월의식이다, 할 것도 없는 상상하기 힘든 미숙함이 멀쩡해 보이는 남자들에게서 거의 예외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 후배들에겐 자신이 얼마나 엉성한 인간인지 인정하게 만들고 여자 후배들에겐 남자란 어른의 외양을 가진 어린아이들이라는 것, 답답함이나 실망은 현재로선 부질없다는 것부터 말해주곤 한다.

<선택>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

김신명숙의 '악명'이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선택'하는 데 장애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의 악명이나 그에 대한 편견은 대개 정당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스스로 토로한 운동과 소통의 방식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런 악명은 되새겨 볼 여지가 있다. 이를테면 페미니즘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남자도 그의 이름을 아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대개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했다는 군가산점 문제와 관련한 토론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토론에서 그가 보인 한 순간의 태도 때문이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 경박한 대중미디어의 시대엔 말 한마디 표정 하나로 몹쓸 사람으로 매도되기도 하고 별다른 공도 없이 단박에 사회적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경박한 상황으로 인한 피해나 여론의 악화가 억울하겠지만 현실을 부인할 순 없다. 우리는 그런 경박함을 존중할 수 없지만 그런 경박함 속에 사로잡혀 울고 웃는 사람들 속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김신명숙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밝힌 '위로와 격려'에서 말이다. 결국 <선택>은 김신명숙이 자신의 정당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악명을 성찰하는 책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에도 수많은 갈래가 있다. 한국처럼 페미니즘이 본격적이고 공공연한 분화를 시작하기 전인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얼핏 한 동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부를 들여다보면 급진주의, 에코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등 페미니즘의 거의 모든 경향이 다 존재하고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과 흑인 페미니즘의 갈등과 비슷한 계급 지향 차이에 의한 갈등도 있다. 엘리트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분화만 있는 건 아니다. 최근엔 성매매 여성들이 자신들을 성노동자라 선언하고 연대함으로써 그들을 피해자라 보는 페미니즘의 주류적인 태도와 갈등을 빚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런 여성 대중의 역동적인 태도 역시 엘리트 페미니스트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존경에 치명적인 장애를 주었던 이런저런 에피소드들, 이를테면 사회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 정치인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지지한다거나 재산을 둘러싼 집안싸움에 휘말린 여성 자본가를 페미니스트들이 지지 연대한다든가 하는 일은 이젠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경박한 대중미디어의 무대에서 한없이 페미니즘이 매도되는 듯하지만 아랑곳없이 한국의 페미니즘은 진전을 거듭하고 있다.

물론 김신명숙도 한 갈래의 경향을 가진 페미니스트이지만 적어도 이 책에선 그 갈래를 아우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자신의 경향을 기반으로 하는 게 아니라 상담하는 여성의 현실을 기반으로, 사례마다 좀 더 적절한 페미니즘의 경향을 사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여성대중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태도이기도 하고 김신명숙과 그의 동지들이 한결 부드러워졌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택>을 읽으며 앞으론 예의 내 어설픈 상담자 노릇이 한결 수월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문제를 언급하기 위해 구성된 상담 사례들이 아닌가 싶을 만큼 워낙 다양하고 많은 사례가 <선택>에는 담겨 있다. 이혼 문제를 보자면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이혼 못 하는 여자부터 체면 때문에 이혼 못 하는 여자까지 들어있다. 누군가 나에게 상담을 청해온다면 <선택>에서 해당하는 사례를 먼저 읽어보라고 할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의 말미엔 한국인 나혜석과 허난설헌을 포함한 대표적이 페미니스트 32명의 사상과 삶이 실려 있다. 짧지만 매우 재치 있게 요약되어 있어서 죽 읽어보면 작은 페미니즘 이론사를 읽는 듯하다. 일별해보면서 가장 호감이 가는 페미니스트를 골라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아는 사람도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에코페미니스트 마리아 미스가 가장 호감이 가더라.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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