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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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일율, 모순율, 배중율
먼저, 형식논리학의 핵심 규칙 3가지입니다. 동일률, 모순율, 배중율이 바로 그것이지요.
동일률은 A가 다른 상황 하에서도 항상 동일하고, 또 동일하다는 인정을 받았을 때 A는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의 A=A를 동일성의 성립이라고 하지요. A=A로 표시되는 동일률(同一律)이란, 여하한 개념도 일련의 사고과정에서는 엄밀한 의미로 동의일 것을 요구하는 논리학적 원리를 뜻하지요. 즉, 어떤 판단에서 사용되었던 개념적 표상이 불변의 의의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일성은 좁은 뜻으로는 사물이 자기 자신과 같아야 한다는 것(자기동일성)을 말하며, 복수의 사물 간에는 유사성 및 상등성이 성립될 뿐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현실에서는 사물은 변하니깐 자기동일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되겠지요. 플라톤은 한 순간도 자기동일하게 있을 수 없는 사물적 존재에 대하여, 순수한 하나의 형상, 즉 자기동일을 유지하는 항상불변의 진정한 실재로서 이데아(idea)를 정립/요청했다고 할 수 있겠죠?
모순율은 A를 하나의 명제로 할 때 “A는 A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며, A의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그 말은 항상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A는 A가 아니다’일 수는 없다”라는 문장은 항상 옮은 명제, 즉 논리적 진리의 하나가 됩니다. 이 진리를 모순율이라고 한다. 또, “모순이 있는 것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라는 금칙(禁則)의 의미로서 모순율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죠.
배중율은 “A는 B도 아니고, 또 B가 아닌 것도 아니라는 것은 없다.”라는 원리를 말합니다. 다른 말로는 제3자 배척의 원리라고도 하지요. 형식논리학 용어로서 어느 것에 대해서 긍정과 부정이 있는 경우, 하나가 참(眞)이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고, 다른 하나가 참이면 하나는 거짓이라는 경우처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적 제3자는 인정되지 않는 논리법칙을 말합니다. 고전논리학에서는 배중률이 동일률(同一律) ·모순율(矛盾律)과 함께 논리학의 근본원리로 되어 있으나, 현대 기호논리학은 이를 공리(公理)로 인정하지 않고 공리에서 도출되는 하나의 정리(定理)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2. 중명사 부주연의 오류
지난 시간에 <중명사 부주연의 오류>에 대해서도 제가 헷갈려했지요? 이제 다시 정리해서 올려보겠습니다.
아래는 바른 삼단논법의 예입니다.
1) 인간은 죽는다.
2)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3)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위의 경우에서 '인간'이 중명사이고 1)의 문장과 3)의 문장을 연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중명사 부주연의 오류는 바로 1)과 3)을 매개하는 중명사가 잘못 사용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상한 종차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아래를 읽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해보세요?
1) 모든 천주교도들은 천주교리를 읽었다.
2) 정약용은 천주교리를 읽었다.
3) 따라서 정약용은 천주교도이다.
파악하셨나요?
위 삼단논법의 경우는 잘못 사용된 것이지요. 위의 논리는 정약용을 죽여야 한다고 항소한 이들의 주장인데 이들은 포함관계를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조선일보도 이런 식의 실수를 자주 범하지요.. 나쁜 자식들!)
1)의 경우, 천주교도들은 천주교리를 읽었다는 것은 필연적일 수 있지만, 천주교리를 읽었다면 천주교도라는 역은 필연적이지 않습니다. 역은 성립하지 않지요. 그런데 위의 논리를 전개한 이들은 천주교도(A)가 중명사임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리를 읽은 것을(B) 중명사로 잘못 사용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천주교도='천주교리를 읽은 자'로 착각했단 말이지요.
아래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1) 개는 포유류다
2) 고양이도 포유류다.
3) 따라서 고양이는 개다.
위의 것 역시 개가 중명사로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포유류를 중명사로 잘못 사용해 <중명사 부주연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리스텔레스 철학에서 <중명사> 개념이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중명사>가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어떤 건지 한번 고민해보세요..
3. 범주표(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
- 아리스토텔레스
양 - 장소 - 소유
질 - 시간 - 능동
관계 - 상태 - 수동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 범주들은 정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정신의 외부에, 사물들 '내부'에 실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물이 양을 가지고 있고, 양이 있다면 질이 있고, 그것들이 맺는 관계가 있으며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며 어떤 양태를 가진다고 본 것 같아요. 그는 대상이 갖는 이러한 범주에 따라 우리의 논리학도 구성되어야 한다고 보았지요. 반면에 칸트는 정신이 범주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a priori 하게(선험적으로) 정신 내에 범주가 이미 있고 그것으로 대상을 '판단'하게 된다고 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가 '대상'의 것이라면, 칸트의 범주는 인식하는 '주체'의 것이지요. 이 같은 대담한 주장을 한 것은 당시 지적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근대철학에 가서 많이 다루게 되겠지만 칸트는 이 같은 주장으로 경험론의 극단인 상대주의, 이성론의 극단인 신비주의를 보편적 이성으로 넘어서려는 기획을 이루게 됩니다.
- 칸트
단일성-실재성-실체성-가능성
다수성-부정성-인과성-현실성
전체성-무한성-상호작용성-필연성
칸트는 위의 12범주에 따라 인간이 대상을 판단한다고 봅니다. 이 12범주 외에 다른 것은 없는 거에요. 아리스토텔레스와의 가장 큰 차이는 시간/공간이 안보인다는 거죠.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이 모든 범주를 뛰어넘는 초월적 감성형식이라고 합니다. 시공간이 없으면 아예 애초부터 대상을 파악할 수가 없지요.
모든 인간이 이 범주를 공유하고 있기에 과학이 성립하지요. 범주가 대상이 아니라 인간에게 귀속된 것은 '물자체'에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대상' 그것을 그 자체로 마주할 수 없고 다만 우리의 판단에 의거해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칸트에게서 모든 과학적 활동은 '현상'인데,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분명한 토대를 확보하고 있는만큼 '현상존재론'으로 성립되게 됩니다. 좀 어렵죠? 어렵기 보다는 사실 생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술어들(범주들)은 항상 주어들(실체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하면서 술어들이 사물에 본유되어 있다고 할 때는 다양한 9개의 범주 중의 어떤 것들이 주어(실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일 칸트라면 그 역을 이야기했겠지요.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술어들은 주어에 대해서 <우연적>이겠지만 칸트에게서 <술어>들은 주어가 아니라 판단하는 주체에 의해서 임의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지요. 이 점을 이해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과 <우연성>에 대한 개념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또 다른 중요한 기여 중의 하나는 바로 '양상modal 논리학'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가 이미 선취하고 있다는 것에 있죠. 양상 논리학은 '필연성'의 문제는 '가능성'을 고려할 때만 생길 수 있다는 현대 논리학의 거두인 Saul Kripke의 생각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그의 논리학 많은 부분에서 그같은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후에 가능태-현실태를 구분하는 형이상학적 논의에서 등장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실태로서의 필연성은 가능태의 고려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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