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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초기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 연구 /안상헌

by 마리산인1324 2010. 10. 6.

<안상헌교수 홈피>

http://web.chungbuk.ac.kr/~ahnsah/tnboard/main.cgi?board=open_board

 

 

이 논문은 1996년 충북대 인문학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인문학지]에 실린 논문으로,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을 '실천적 사회인식론'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글입니다. 기존의 초기 마르크스 해석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이러한 마르크스 해석은 마르크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으로 왜곡된 해석을 바로 잡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필자의 학위논문 ' 초기마르크스의 <실천적 유뮬론>의 형성과정'(서울대)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보충한 것입니다. 마르크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원하시는 분들께 다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안상헌

 

 

 

 

 

초기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 연구(I)

 

 

安 相 憲 (충북대 철학과 교수)

 

 

1. 들어가는 말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와 함께 그 사상적 시원인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는 불가피한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재해석과 재평가를 통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서구의 일반적 연구경향은 마르크스 사상의 본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새로운 마르크스의 해석이 범람하고 있다. 헤겔이 죽은 후 헤겔 철학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 형해화되어 ‘죽은 개’ 취급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마르크스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헤겔 학도들의) 비판은 그들의 전반적인 철학적 전제도 검토해 본 적도 없이 특정한 철학체계의 하나인 헤겔 철학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헤겔 철학에의 의존으로 말미암아 제각기 헤겔 철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헤겔 철학에 대한 전체적인 비판을 시도하지 못했다. 이들의 헤겔 논쟁은 헤겔 체계의 한 측면을 끌어내 다른 측면을 끌어낸 체계와 투쟁하는데 한정되어 있었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 그가 개탄한 이러한 경향이 마르크스 자신에게도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의 사상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한 의미에서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할 만큼 사상적 오해와 왜곡에 끊임없이 시달림을 받아 온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마르크스 사상의 전면적 사멸이 기정사실이 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마르크스 사상의 진정한 복권과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논거는 학자에 따라 다르다. 데리다는 그의 「마르크스의 유령」이라는 저서에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억압하고 굶주리게 하고 학살한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모순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전개할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창설하기 위해서라도 마르크스의 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정치적 논거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른 철학적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19세기의 낡은 사상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사상 혹은 미래의 철학으로 재평가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지난 100여 년 동안 주로 정치적 담론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것도 주로 이데올로기적 담론으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에 따라 마르크스의 사상이 지닌 철학적 탁월성은 상대적으로 왜곡되거나 무시되어 왔다. 마르크스 사상의 철학적 탁월성은 그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대의 철학적 인식론은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쯔로 대표되는 합리론적 인식론과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적 인식론, 그리고 칸트로 대변되는 비판적 인식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의 인식론은 근대 인식론의 난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즉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관계 설정에 있어 존재론적 전제인 유심론적 관점과 유물론적 관점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인식주체 우위론과 인식대상 우위론의 인식론적 난점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현대 인식론은 주관과 대상의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인식의 문제를 언어의 문제로 환원하여 해결하려 하지만, 인식론적 상대주의와 주관주의의 한계는 물론 주관적 관념론과 객관적 실재론으로 대별되는 칸트의 구성설과 로크의 모사설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근대 이후의 인식론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토대 위에서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하며, 양자의 이원론을 극복해야 한다.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은 현대 인식론의 출발점이 되는 존재론적 전제나 선험적인 원리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활동과 활동의 산물로서의 구체적 현실’을 유일한 전제로 삼고 있다. 그는 이러한 현실적 전제로부터 인간의 인식활동을 인식주관의 인식대상에 대한 관조적 관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활동, 즉 세계에 대한 인간의 실천적 관계의 한 유형으로 파악하며, 인식의 산물인 지식체계 또한 구체적인 삶의 역사적 산물로 파악한다.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은 바로 이러한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며, 변증법과 유물론은 이러한 담론의 방법적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2.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의 대전제 : 현실

 

마르크스의 사회인식론은 매우 상식적이고 평이한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사회의 현실적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왜냐 하면, 현실에서 제기되는 사회적 문제는 신비로 가득한 별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태를 탐구하면서 사람들은 상황의 객관적 본질을 간과하고 행위자의 의지로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경향에 너무 쉽게 빠져든다. 사적 개인의 행위와 정부의 행위를 규정하는 (객관적) 상황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은 호흡방법과 마찬가지로 행위자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처음부터 이러한 객관적 입장을 취한다면, 어느 한 쪽을 편들면서 선의지니 악의지니 하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도 단번에 사람들의 활동이 나타나는 상황의 결과를 알 수 있게 된다. 그 사태가 상황에 의해 필연적으로 야기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만 하면 그러한 사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는 마치 화학자들이 어떤 외부적 조건하에서 친화적 물질이 화합물을 형성하는지를 아는 것과 같은 확실성을 지니고 있다.(라인신문,1843)

 

청년헤겔학파는 사태의 객관적 상황을 간과하고 주로 행위자의 의지와 의식에 의존함으로써 모든 사회적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려 했으며, 그리하여 현실적 문제의 해결방식에 있어서도 주관적 의지와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의식의 혁명을 통한 현실개혁을 주장했다. 이는 마치 의지와는 독립된 호흡방식이나 객관적인 자연현상을 주관적 의지와 의식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현실인식에 있어 객관적 사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의 강조는 인간의 주관적 의지와 의식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에게 있어 인간의 주관적 의식과 의지 또한 구체적인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한 객관적인 현실의 범주에 속하며 이는 객관적인 현실에서 출발하여 분석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마르크스의 사회인식론의 대전제인 ‘현실((Wirklichkeit)’ 개념의 철학적 단초는 헤겔의 변증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 ‘현실’은 변화의 주체인 정신(Geist)의 변증법적 실현으로서의 객관정신(objektive Geist)인데 반해, 마르크스에 있어 ‘현실’은 사람들이 역사적 과정을 통해 실제로 만들어 가는 삶의 산물로 이해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있어 ‘현실’이란 단지 외적으로 ‘주어진 어떤 것(Gegebene)’이 아니라 인간들의 구체적인 활동의 산물(Produkts)이기 때문에, ‘현실’은 단순히 인식대상으로서의 관조적 대상이나 경험론적 대상도 아니며, 칸트철학에서의 이성의 구성물도 아니다. 그런 만큼 마르크스에 있어 ‘현실’이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현실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신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의 구체적인 삶의 역사적 산물인 ‘현실’은 언제나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즉 특정 시대의 사람들에게 있어 ‘현실’은 이미 그 이전 단계의 역사적 과정의 산물로서 주어진 것이면서, 동시에 그들이 만들어 가는 실천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현실은 사람들이 임의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며, 또한 주어진 상태로 감수해야 하는 어떤 외적인 조건도 아니다. 달리 말하면, 현실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조건인 동시에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하는 우리의 삶의 내용이자 형식이다.

 

인식과 실천이 분리되는 전통적 인식론에 있어서는 인식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인식의 대상일 뿐, 인식하는 삶의 주체의 실천적 대상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 주체의 측면에서의 인식 주체와 실천적 삶의 주체의 분리는, 필연적으로 인식 대상과 실천 대상의 분리를 가져온다. 예를 들면, 근대 인식론의 통합자이자 완성자인 칸트는 인식주관과 실천주관을 엄격하게 분리한다. 그에 따라 인식대상과 실천대상이 분리된다. 즉 인식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을 가능케 하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오성)은 인식대상의 존재 조건인 감성형식의 제약을 받으며, 뿐만 아니라 실천 이성의 능력과 완전히 분리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실천이성의 능력은 순수이성의 인식대상과는 무관한 독립적인 근거와 원리에서 성립된다. 즉 칸트에 있어 대상에 대한 인식은 인간적 삶의 실천과는 무관한 과학적 지식일 뿐이며, 실천적 능력은 선천적 도덕법칙에 따른 의무와 격율에 따르는 능력일 뿐이다. 그러므로 칸트에 있어 인간의 실제적인 삶의 행위는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의 말대로 ‘저 하늘의 별빛의 아름다움과 마찬가지로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샘솟는 선의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칸트의 이러한 인식과 실천의 이원론은 사실의 문제와 실천의 문제를 완전히 분리하는 서양의 근대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즉 앎과 삶의 이원론적 분리는 과학적 지식의 중립성 주장과 함께 근대과학의 발전을 추동하는 철학적 이념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의 구분 이전의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출발하며,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는 삶의 주체인 인간의 인식내용과 삶은 처음부터 통일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인간의 인식과 그 결과인 지식은 실천적 삶의 필요에 의해 역사적으로 발전한 역사적 산물의 한 형태로 파악된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의 세계에 대한 인식은 삶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왜냐 하면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는 현실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삶의 현실에서 제기되는 현실적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필수적인 요건이다. 왜냐 하면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이는 현실에서의 올바른 실천적 삶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현실관은 “삶과 무관한 추상적 진리에만 몰두하는 것은 청년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짓(김나지움 논술,1835)”이라는 주장이나, “피히테와 칸트를 비교하여 획득한 관념론으로부터 현실 안에서 이념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는 그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으며, 자신의 학문적 이념이 ‘구체적인 현실’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3. 현실 인식의 명료화 과정

 

마르크스의 실천적 인식론은 그의 종교, 법, 철학, 정치, 역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통해 점차 명료화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종교, 법, 철학, 정치, 역사 등은 구체적인 현실의 한 형태이며, 따라서 일반적 원리로서의 종교, 법, 철학, 정치, 역사에 대한 추상적 이해는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즉 마르크스의 현실인식론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실천적 인식론으로서, 이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자 실천적 이해의 방식이다.

 

1) 종교에 대한 현실적 이해

 

마르크스가 구체적 현실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먼저 주목한 것은 청년헤겔학도들이 주력하고 있었던 종교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그의 동료이자 청년헤겔학파의 리더였던 부르노 바우어와 함께 종교의 원리에 대한 무신론적 저술을 통해 당시의 현실 종교를 비판함으로써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이 계획은 곧 포기되었다. 왜냐 하면, 종교에 대한 원리적 비판을 통해서는 현실종교에 대한 비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종교 이해에 대한 가장 큰 오해와 왜곡은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표상이며, 생기를 잃은 상황의 정신이자, 냉혹한 세계의 심장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 대한 잘못된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마르크스의 종교 이해의 방식은 청년헤겔학파의 종교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통해 명료화되었다. 포이엘바하의 종교 이해에서 보여지듯이, 청년헤겔학파의 종교비판은 모두 종교에 대한 원리적 비판에 집중되었다. 그들은 종교의 일반 원리를 세속의 일반 원리로 환원하여 해명함으로서 종교 일반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비판했다. 이들의 종교 비판의 가장 큰 결점은 구체적 현실에 존재하는 특정한 종교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교의 보편적 원리를 특정종교의 구체적 내용 및 형태와 분리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에 어긋난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는 그 고유한 특성으로 인해 다른 종교와 구별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종교를 진정한 종교로 만드는 것은 그 종교의 특수성에 있다.(검열조례에 대한 검토,1842)

 

종교의 보편적 원리를 특정종교의 구체적 내용과 분리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적 통일로 이해된다. 이는 단지 변증법의 일반 원리를 종교이해의 방법에 적용함으로써 도출한 결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종교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즉 현실의 종교는 종교적 원리나 교리로만 존재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종교의 실제이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종교들은 종교 자체의 교리나 원리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적 성격을 파악함으로써 이들 종교가 왜 생기고 번성하는지를 해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한 때 문제가 되었던 사이비 종교를 예로 들어보자. 사이비 종교가 기성 종교와는 달리 문제시되는 것은 그 종교적 교리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사이비 종교의 특수한 존재방식 때문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지와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유인하며 그들로부터 재산을 헌납하게 하고 때로는 현실 도피적인 집단적 자살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들에 있어 종교적 교리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며, 현실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하면 교리로서의 생명력을 잃는다. 기성 종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기성 종교가 현실에서 일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교리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가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고 점차 고립되어 가는 사람들을 일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귀속감을 갖게 하며, 사회적 봉사활동을 통해 현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현실 종교로서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기성 종교의 경우도 이러한 종교의 현실적 기능을 포기하고 사이비 종교와 마찬가지의 기능을 하게 되면 비판과 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어떤 종교이든 그것이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인 한, 종교 자체의 교리보다는 현실의 논리를 따르게 되고 그러한 한에서만 종교적 현존이 가능하다.

 

마르크스에 있어 ‘종교가 아편’인 까닭은 엄격히 말해 종교의 원리 또는 교리 자체가 아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원리와 교리에 근거하고 있는 현실의 특수한 종교가 아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인민의 환상적인 행복인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곧 인민의 현실적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현존세계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곧 환상을 필요로 하는 현존상태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비판은 고통스러운 현실(종교는 이 현실의 후광이다)에 대한 비판이다.(서문)

 

19세기 프로이센에 있어서의 기독교는 현실적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인민들에게 현실의 고통을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환상적인 행복을 가지게 함으로써 현실에서의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모종의 결핍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러한 결핍의 근원은 오직 국가 자체의 성격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종교는 더 이상 현실세계의 결핍을 구제할 능력이 없으며 다만 가상적인 힘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환원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신학적인 문제를 세속적인 문제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역사는 너무나 오랫동안 신비화로 문제를 해소시켜 왔기 때문에 이제는 신비적인 것을 역사 안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현실에서 종교가 더 이상 현실세계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결핍을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세계에서의 결핍을 환상적인 방식으로 가중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현실의 어떤 종교가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결핍 문제를 환상적인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해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러한 비판은 없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종교 이해의 방식은 그의 유대교에 대한 인식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마르크스는 바우어의 유대인 문제에 논설에 대한 비판에서, 유대인의 문제를 유대교의 문제로 환원하여 이를 종교적 문제로 파악하려는 것은 유대인의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의 유대교의 문제를 분석해 보면, 유대교의 세속적 토대는 시민사회의 이기주의이고, 유대인의 세속적 숭배대상은 최대의 사적이익이며 그들의 세속적인 신은 ‘돈’이다.(유대인 문제,1843)

 

독일의 유대인 문제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문제가 되었던 유대인 문제는 유대교라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경제적인 현실의 문제이며, 따라서 유대인 문제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파악되고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유럽에서 유대인 문제는 조국을 잃고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가장 확실한 현실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며, 그 결과 유대인들은 유럽의 경제적 부를 상당한 정도로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종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현실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경제이 문제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청년헤겔학도인 바우어는 유대인의 문제를 종교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이를 기독교의 교리와 대립시키고 나아가서는 교리에 대한 원리적 부정을 통해 양자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에 대한 원리적 비판을 통해 사회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청년헤겔학파의 종교비판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다.

 

2) 철학에 대한 현실적 이해

 

마르크스의 철학에 대한 이해 또한 구체적인 현실에 현존하는 철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한 형태이다. 그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당시의 청년헤겔학도들의 실천철학에 집중되어 있다. 청년헤겔학파의 실천철학은 헤겔 철학의 기본 원리로부터 출발하고 있으며, 현실에 대한 실천적 개혁의 성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적 경향성은 이론과 실천과의 관계를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채 다양한 실천이론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들의 철학적 경향의 결정적 결함은 “철학의 실천 그 자체가 이론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무매개적인 철학의 실현은 본질적으로 모순에 봉착하게 되며, 본질적인 모순은 철학에 현상으로 드러나며 각인 된다.”(41)

 

청년헤겔학도들의 철학의 무매개적인 실현은, 헤겔 철학의 원리에서 단편적으로 끌어낸 그들의 철학적 이념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적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당시 청년헤겔학도들의 강한 실천적 의욕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에서의 그들의 이념의 실현이 자기모순에 봉착하게 되는지를 비판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기존의 많은 실천적 철학 이념들은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출발해 도달한 결과라기보다는 철학자들의 머리에서 구상된 철학이론이기 때문에 철학의 실현은 본질적으로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순은 그들의 철학적 이념 자체의 모순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철학관은 기존의 전통 철학과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모든 진정한 철학은 그 시대의 지적 정수이기 때문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현실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시대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철학은 상이한 철학에만 관계하는 특정체계가 아니라 현실세계와 관계를 가지는 철학, 즉 현존하는 세계의 철학이 된다.

 

모든 진정한 철학은 그 시대의 지적 정수라는 말은 헤겔이 철학을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 철학적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말과 형식적으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철학관은 헤겔의 철학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지점에 서 있다. 즉 헤겔의 철학관은 그의 관념적 철학체계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 반면, 마르크스의 철학관은 구체적인 현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마르크스에 있어 모든 진정한 철학은 서로 다른 원리에 입각한 철학적 이론들 간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세계와의 관계맥락 속에서만 유의미한 철학이다. 그러므로 철학에 대한 비판과 반비판은 이론적 체계와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의 관련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들이 살았던 현실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의미가 파악되고 비판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시대나 지역의 철학과의 관련하에서 해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 시대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파악할 때만 그것이 지닌 의미와 가치는 물론 그것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플라톤의 철학에서의 이데아의 세계의 상정과 철인왕의 이념은 도시국가의 직접민주정의 폐해인 중우정치에 대한 현실적 대안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 이론적 지혜가 실천적 행위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생산계급의 덕목을 강조하는 등은 그 시대의 정치적 위계질서와 낮은 생산력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여성과 노예는 정신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성인 남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 또한 그 시대의 구체적인 사회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당시의 청년헤겔학파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이해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나는 독단적 기치를 내세우기보다는 독단론자들이 스스로의 입장을 명확하게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합니다. 특히 공산주의는 하나의 독단적인 추상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산주의는 상상 속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꺄베, 데자미, 바이틀링 등이 전파하는 현존하는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산주의는 그들이 반대하는 사유제에 감염되어 있는 휴머니즘적 원리의 외양입니다.(루게에게 보낸 편지,1843.9)

 

마르크스가 「독불 연보」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의 원리’가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공산주의’, 즉 꺄베와 데자미의 프랑스의 공산주의와 독일에 처음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던 바이틀링의 공산주의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의 초점은 그들의 공산주의 이념이 현실의 관계맥락으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사유재산제의 원리에 대한 원리적 부정으로서의 공산주의 원리라는데 있다. 현실과의 관계맥락을 떠나 원리와 원리의 관계로 추상된 공산주의는 마치 다른 이론과 관계하는 철학과 마찬가지로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 마르크스가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모든 난제를 해결하려고만 했습니다. 이는 마치 절대정신이라는 통비둘기가 날아들기를 기다리며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꼴입니다. ... 미래를 구상하고 이를 고정시켜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현재 목표는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임이 확실해졌습니다.(루게에게 보낸 편지,1843)

 

마르크스는, 현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따라서 현실의 관계맥락과는 무관한 원리의 구상과 이러한 원리를 영구적인 진리로 고정시키려는 철학적 독단을 통해 현실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마치 통비둘기가 입안으로 날아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므로, 진정한 철학의 과제와 목표는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새로운 철학은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이를 비판적으로 해명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혁론자들 사이에 무정부상태가 만연하고 있는 바, 그들은 미래방향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결여하고 있음을 자인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새로운 방향의 장점은 독단적으로 세계를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세계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루게에게 보낸 편지,1843)

 

구체적인 현실에서 현존하는 철학은 당시 청년헤겔학파를 비롯한 개혁론자들의 개혁론으로, 이들의 개혁론이 미래에 대한 정확한 관념을 결여함으로써 무정부주의적인 혼란에 빠져 있는 까닭은, 구체적인 현실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추상적인 원리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든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독불 연보」에서의 이러한 결론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해명으로서의 새로운 철학의 과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3) 법률과 제도에 대한 현실적 이해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 시절에 이미 법의 원리를 정립하기 위해 법형이상학에 대한 연구에 착수한 적이 있었으나, 법형이상학을 정립하려는 시도가 마치 서랍 속에 모래를 퍼담는 꼴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포기했다. 그 이유는 법형이상학은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어 있어 현실에 존재하는 법률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법률에 대한 현실적 이해는 ‘라인신문’ 시절 구체화되었다. 법률에 대한 현실적 인식의 중요성을 깨달은 직접적인 계기는 프로이센 정부의 ‘산림도벌법’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였다. 개정된 산림도벌법은 그 이전까지는 다른 사람 소유의 산림에서 마른 나뭇가지를 주어다 땔감으로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새로 개정된 산림도벌법에서는 이를 법률로서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사유재산 침해죄로 처벌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법개정의 사유는 명백한 것이었다. 즉 프로이센의 산림소유자들은 자신의 산림에 속해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사적 재산으로 간주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법률로서 인정되기만 하면 마른 나뭇가지를 땔감으로 팔아 수익을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결국 궁핍한 농민들이 땔감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면 산림소유주로부터 땔감을 구입해야 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산림도벌법의 개정 의도를 정확히 간파했으며, 이를 통해 법률의 현실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프로이센의 법률은 부르주아들의 사적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방향으로 개정되기 시작했다. 당장 코앞의 현실로 다가온 농민들의 땔감 문제는 궁핍한 농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매우 중대한 현실 문제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해야 하는가가 라인신문의 편집자인 마르크스의 직접적인 관심사였다. 우선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선의지로서 해결하려 하기 전에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나, 법형이상학이나 법의 원리를 통해서는 이를 결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한 것이었다.

 

사물의 법적 본성이 법률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법률이 사물의 법적 본성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다.(라인신문,1842)

 

즉 현실에서 제정되는 구체적 법률은 보편적 법원리나 형식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경제적, 정치적 권력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해관계에 있어 이들 집단과 대립하는 다른 집단인 농민들은 이미 법률이 지배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민들은 벌은 보되 죄는 보지 않는다. 죄가 없는 곳에 벌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벌이 있는 곳에서는 죄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적용해서는 안되는 절도의 범주를 적용함으로써, 이 범주가 적용되어야 할 것을 무죄로 만든다.

 

는 것이 마르크스의 결론이다. 지배집단이 자신들의 사유재산권을 강화함으로써 사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리하게 산림도벌법을 만든다면, 절도죄가 성립되는 기준을 수긍하지 않게 됨으로써 결국은 농민들이 타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로 인정하고 있는 절도조차도 죄로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경향성에 의존하는 법률은 시민들을 위한 국법이 아니라 다른 파당에 대립하는 한 파당의 법률일 뿐이며, 따라서 법 앞에서의 평등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법률은 통합을 위한 법률이 아니라 분리를 조장하는 법률이며 법이 아니라 특권일 뿐이다.

 

이는 결국 법체제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법적 질서 자체가 존립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그의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더욱 명료하게 표현되고 있다. 헤겔의 법철학에 있어서 법원리는 절대정신의 실현체이며, 따라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으로부터 정당화되었다. 헤겔의 법철학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적 분석은 헤겔 법철학의 법원리에 대한 분석이라기 보다는, 헤겔 법철학이 현실 안에서 실제로 유지되고 있는 정치적 법적 체제를 파악하는데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를 주로 문제삼는다.

 

헌법은 법률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생성’된 것이다. 따라서 헌법이 국민의지의 현실적 표현이기를 그만두게 되면 환상으로 전락해 버린다.”(43)

 

헤겔의 법철학에 있어 헌법은 이성의 실현체로서 국가의 원리이자 존립 근거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헤겔에 있어 헌법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의하면, 구체적인 현실에서 제정되는 헌법은 법제정의 원리 이전에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의 현실적 삶의 의지를 반영하지 못하게 되면 더 이상 현실적인 헌법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헌법이 국가의 기본 질서로서의 현실적 역할을 상실하게 되면 헌법은 더 이상 현실에서 유효한 법이 아니라 환상으로 전락하게 되며, 현실적으로는 새로운 법률의 제정이 불가피하거나 아니면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을 통해 종교와 법률을 파악하는 방식을 정치제도의 이해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특히 라인신문 시절 현실적 문제로 제기되었던 정치적 제도의 문제 중에서 관료제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삼는 관료제는 정치적 원리로서의 관료제가 아니라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관료제이다.

 

관료제는 사적소유를 그 본성으로 한다. 관료제의 보편정신은 비밀과 신비에 싸여 있으며 안으로는 위계질서로 밖으로는 폐쇄적인 직업단체로 유지된다. 소수관료들의 경우 국가목적이 개인적 목적인 입신출세로 둔갑한다. 관료에 있어 물질적 삶이 현실적 삶으로 간주되고 또한 삶이 관료적 취급대상이 됨으로써 물질적인 것으로 전락한다.(헤겔 법철학 비판, 1843)

 

헤겔에 따르면, 헌법과 마찬가지로 관료제 또한 이성의 실현체이며, 따라서 관료제는 헌법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있어 현존하는 관료제는 이성의 실현체가 아니라 사적 소유자인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기구이다. 관료제의 원리는 이론과 실제의 분리로 말미암아 구체적 현실에 존재하는 관료제를 해명하지 못한다. 실제로 현실에서 존재하는 관료제는 관료제의 법적 원리와는 다른 근거와 방식으로, 즉 안으로는 수직적 위계질서로 체제화되어 있으면서 밖으로는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직업단체로 유지되는 실존하는 관료제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관료들이 국가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공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입신출세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관료들의 관심대상은 국가의 구성원들의 복리보다는 이들의 삶을 물질적인 대상으로 간주하여 규제하고 통제하는 현실의 구체적 사실을 관료제에 대한 원리적 이해를 통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있어 관료제는 원리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러므로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 존재인 관료제에 대한 이해는 현실로부터의 출발이다. 그렇다면 현실적 존재로서의 관료제에 대한 이해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현실로서의 관료제는 그것이 구체적 현실에 존재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변화 발전된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관료제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구체적인 현실에 출발하여 해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료제의 토대가 되는 시민사회의 형성과정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표명한 다음과 같은 결론은 그의 법적 정치적 제도에 대한 이해에 있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나의 연구로부터 국가형태는 물론 법적 관계는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간정신의 보편적 발전에 의해 설명될 수도 없으며, 헤겔에 의해 ‘시민사회’라는 이름으로 요약된 삶의 물질적 조건에 뿌리박고 있다는 결론과, 시민사회의 해부는 정치경제학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정치경제학 비판 서문,1859)

 

국가 형태와 법적 관계의 이해는 그 자체의 국가 원리 또는 법 원리를 통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헤겔과 같이 인간정신의 보편적 발전을 통해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리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를 통해 그러한 제도가 형성되는 역사의 구체적 과정, 즉 시민사회의 형성과 시민사회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물질적 토대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통해 해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인간정신의 보편적 발전을 통해 법원리를 정립하려 한 헤겔의 법철학은 처음부터 잘못된 출발점에 서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헤겔이 국가의 토대인 현실에서 출발했더라면 신비적인 방식으로 국가를 주어로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가족과 시민사회는 국가의 현실적 구성요소이며 ... 국가는 자연적 기초인 가족과 인위적 기초인 시민사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헤겔에 있어서는) 조건이 조건지어지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규정되는 것으로 산출하는 것이 산출되는 것으로 정립된다.(헤겔 법철학 비판,1843)

 

헤겔에 있어 가장 큰 문제점은 과학철학적 용어로 설명하자면, 설명항과 피설명항이 전도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명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 설명의 근거가 되는 전도는, 조건짓는 근거가 조건지어진 것으로, 규정되는 것이 규정하는 것으로, 산출된 결과가 산물의 원인으로 전도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4) 역사에 대한 현실적 이해

 

마르크스의 역사인식의 방법은 청년헤겔학파의 현실 인식에 대한 비판적 방법의 명료화 과정을 거쳐 정립된 것으로, 이는 그의 종교, 철학, 법의 현실적 이해의 방법을 종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해의 방법은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 표명되었다. 역사적 사태에 대한 기존의 설명 방법은 주로 역사적 사태의 발생과 번성 및 소멸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적 사태에 대한 이러한 기술적 방법은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는 방법일 수는 있어도 역사의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방법일 수는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역사의 전개과정에 대한 사실의 정리를 넘어서 역사적 사태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의도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역사 설명의 방식은 철학사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과 헤겔의 역사철학에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인 목적론에 입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이론에는 역사성이 배제되어 있으며, 헤겔의 역사철학에는 절대정신의 자기실현이라는 형이상학적 설명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역사이해의 방법과는 출발점에서부터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는 그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명확히 드러난다.

 

고대국가의 멸망과 더불어 그들의 종교도 역시 사라졌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진정한 ‘종교’는 ‘민족성과 국가에 대한 숭배’였기 때문이다. 고대종교의 멸망이 고대국가의 멸망의 원인이 아니라 고대국가의 멸망이 고대종교의 멸망의 원인이다. ... 그러나 이 사설에 따르면 모든 고대세계는 과학적 탐구가 고대종교의 오류를 폭로했기 때문에 멸망한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과학이 종교적 오류에 대해 침묵했다면 고대세계는 멸망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쾰른신문 사설 비판,1842.7)

 

마르크스의 이러한 주장은 종교 이해뿐만 아니라 역사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헤르메스는 「쾰른신문」에 기고한 사설에서, 종교적 의식이 최고로 발전한 나라에서는 민족의 삶이 번창하였으나 종교적 문화가 퇴락한 나라에서는 민족의 위력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당시 성행하였던 언론의 종교에 대한 비판을 저지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종교가 민족성과 국가에 대한 숭배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한, 국가의 멸망이 종교의 멸망의 원인임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종교의 현실적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이해의 관점은 독일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통해 유물론적 역사 이해의 방법으로 구체화된다. 헤르메스와는 달리 종교 비판을 통한 현실변혁을 주장했던 청년헤겔학파 또한 종교에 대한 원리적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헤르메스와 같은 입장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결함은 “그들의 의식이나 천재성의 한계가 아니라 독일현실의 역사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관념과 의식형태는 그것이 출현하게 되는 현실적인 역사적 조건을 통해 해명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마르크스의 이러한 관점에 대해,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었던 막스 슈티르느는 현실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마르크스의 현실인식의 방법에 대해, 무전제의 철학을 제기함으로써 대항하고자 하였다. 마르크스는 아무런 반성도 없이 헤겔 철학의 전제를 그대로 수용하는 청년헤겔학파나 무전제로부터 출발하려는 슈티르느의 무전제의 철학은 모두 독단적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한다.

 

청년헤겔운동의 왜소성과 편협성, 그리고 이들의 실질적인 성과와 이에 대한 환상들의 편차를 독일적 관점이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주요 과제로 설정한 「독일 이데올로기」는, 독일의 현실적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독일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토대를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마르크스는 역사 이해의 전제를 설정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한다. 즉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는 전제는 자의적인 것도 독단도 아니다. 이것은 상상을 통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 전제들이다. 이것은 현실의 개인들과 그들의 활동이며, 또한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그들이 활동을 통해 산출한 것을 포함한 그들의 삶의 물질적 조건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들은 순수히 경험적인 방법으로 확인되는 것들이다” 역사 이해의 출발점으로서의 현실적 전제는 상상을 통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자 경험적으로 확인가능한 전제들이다. 그러므로 현실적 전제는 어떠한 독단이나 자의에 의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역사의 첫째 조건은 살아 있는 현존하는 개인들이다. 그러므로 가장 먼저 확인되어야 할 사실은 이러한 개인들의 신체적 조직과 다른 자연과의 관계이다. 물론 인간의 신체적 성질이나 (지질학적, 지리적, 기후적) 자연조건을 일일이 고려는 필요까지는 없다. 모든 역사기술은 이러한 자연조건을 기초로 해서 인간활동이 이를 변화시켜 나간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현실적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역사 이해의 전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실을 제시하고 있다.

 

최초의 역사적 행위는 의식주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수단의 창출, 즉 물질적 삶 자체의 생산이다. 이것은 수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금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모든 역사의 기본적인 조건이다. ... 그러므로 모든 역사이해에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근본사실을 그 전체적인 의미와 전반적인 영역에서 고찰하고 이것의 정당한 위치를 부여해야 한다.

 

이 전제조건은 인간이 자연적 존재인 한에 있어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제일 조건으로서, 이는 결코 상상의 산물로 아니며 수천년 전부터 모든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확인한 사실들이다. 삶의 재생산과정에 대한 이러한 자명한 사실로부터 출발하지 않고는 인간 역사는 이해될 수 없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자명한 두 번째 현실적 전제는 삶의 재생산 과정을 통해 인간의 욕구도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재생산된다는 사실이다.

 

역사이해의 두 번째 전제는 최초의 충족된 욕구와 충족활동 그리고 이미 획득한 욕구충족의 수단이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욕구의 산출이 최초의 역사적 행위이다.

 

자연적 존재인 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으로부터 삶에 필요한 생존수단을 얻는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생산활동을 통해 일차적으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충족의 수단인 생산활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구를 창출한다. 이러한 욕구의 재생산 과정은 새로운 생산방식과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 내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 따라서

 

생산방식을 단지 개개인들의 육체적 생존의 재생산의 측면에서만 고찰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생산방식은 이러한 개개인들의 활동방식이고, 그들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며, 따라서 개개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개인들이 삶을 표현하는 방식은 곧 그들의 존재방식이다. 그들이 어떠한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생산, 즉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며, 어떻게 생산하는가 하는 것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개인의 존재는 그들의 물질적 생산조건에 달려 있다.

 

이와는 달리 “사변적 역사이해는 실증적 자료가 고갈되거나 신학, 정치, 문학을 총동원하여도 역사적 사실을 설명할 수 없는 경우,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실증할 수 없는 선사시대로 돌아가 사변을 일삼는다.”

 

 

역사이해의 세 번째 전제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사람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 부부관계, 부모관계, 가족관계 - 도 재생산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유일한 사회적 관계였던 가족은, 욕구의 증가와 더불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낳고 인구증가와 더불어 새로운 관계 속에 편입된다.

 

이러한 사실은 고대 사회와 국가의 형성과정에서 확인되며, 현대 사회에서 창출되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도 경험적 사실로 확인된다.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 과정은 앞의 두 전제를 토대로 이해될 수 있으며, 또한 다음의 사회적 관계, 즉 생산양식과 사회적 관계방식의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역사이해의 네 번째 전제는, 생존을 위한 생산과 노동을 통해서는 자신의 삶을, 생식을 통해서는 다른 생명을 생산하는 이중적 관계가 자연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사회적이라는 것은 생산이 어떠한 조건과 방법과 목적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개인들의 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특정한 생산양식 혹은 산업적 관계들은 항상 특정한 협업양식 또는 사회적 관계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과, 협업양식 자체가 하나의 생산력이며 따라서 인간이 이용가능한 생산력의 정도가 사회적 상태를 규정하기 때문에, 인간역사는 산업 및 교환의 역사와 관련지어 연구되고 개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 이해의 네 가지 전제조건은 상상력에 의한 추상도, 어떤 선험적 원리로부터의 연역도 아니며, 오로지 현실적 전제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적 전제로부터 마르크스는 “의식은 의식된 존재에 지나지 않으며”, “의식이 삶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초기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러므로 사변이 멈추는 곳, 즉 현실적인 삶에서 실재적이고 실증적인 과학, 인간의 실천적 활동 및 실천적 발전과정에 대한 기술이 시작된다. 의식에 대한 공론이 사라지고 실제적인 지식이 이를 대신해야 한다.

 

 

5. 초기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성격

 

1) 유물론적 성격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르크스의 현실인식은 현실적 전제, 즉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사람들의 삶의 활동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인식의 방법은 전통적인 유물론의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유물론적 방법이라 규정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현실인식의 방법을 유물론적인 방법이라고 규정하는 까닭은 어떤 보편적 원리나 이념 또는 인간의 의지 및 의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관념론적 현실인식의 방법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방법은 관념론적 방법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유물론적 사유의 이론적 단초를 정립한 포이엘바하의 유물론과도 명백하게 구분된다.

 

마르크스 자신의 유물론에 대한 정의는 「포이엘바하에 대한 테제」에 가장 잘 나타나 있으며, 구체적인 내용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1부에서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포에엘바하를 포함한) 모든 유물론의 결점은 대상(Gegenstand), 현실(Wirklichkeit), 감성(Sinnlichkeit)을 단지 객체(Objekt) 혹은 직관(Anschauung)의 형태로만 파악하였을 뿐, 감성적인 인간활동(sinnlich menschliche Tätigkeit)과 실천(Praxis), 주체적으로(subjektiv)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앞에서 언급한 ‘현실적 전제’를 ‘대상, 현실, 감성’이란 용어로 요약하고 있다. 이는 모두 우리가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어떠한 원리나 사변도 전제되어 있지 않다. 즉 대상이란 문자 그대로 우리의 일상적인 실제적 삶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대상들을 의미하며, 현실은 이러한 삶의 대상들로 이루어진 구체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감성이란 개념 또한 이러한 전제하에서 이해될 수 있는 현실적 개념이다.

그런데 대상과 현실 개념과 더불어 감성 개념을 부가한 까닭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현실적 규정을 통해 대상과 현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것이다. 전통적 유물론의 결점은 인간을 감성적 자연존재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활동의 능동성을 제거해 버렸다. 따라서 삶의 활동의 능동성은 관념론에서의 추상적인 이성 활동에 제한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의 실제적인 삶의 활동은 오로지 이성적인 관념적 이성활동이나 오로지 수동적인 육체적 활동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재생산활동들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사람들의 삶의 재생산 활동을 현실적 전제로 하는 현실인식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살펴 본 철학, 종교, 국가와 법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방법이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현실’이해의 방법인 것이다.

 

2) 변증법적 성격

 

헤겔 철학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던 베를린 대학 시절, 마르크스는 “구체적인 표현인 법, 국가, 자연, 철학과 같은 생동하는 사유 세계는 대상 그 자체의 발전 안에서 탐구해야 하며, 대상 자체의 이성적 성격은 그 자체의 모순의 발전이며, 자신 안에서 통일성을 발견해야 한다”는 말을 통해 그의 변증법적 관점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현실인식의 방법은 헤겔 철학의 원리나 사변의 적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실천적 인식의 방법적 산물이며, 그의 변증법적 방법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실천적 인식의 방법과 다른 것이 아니다.

 

현실적 전제에서 출발한 그의 현실 인식은 곧 현실의 내용과 형식, 현상과 본질, 변화의 계기와 총체성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이었으며, 이는 헤겔이 비변증법적인 표상적 인식과는 엄밀하게 구별되는 개념적 인식의 한 형태이다. 그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이 자연존재인 한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일차적 과제이며, 이로부터 인간은 자연과 전면적인 관계를 가지기 시작하며, 언어활동을 포함한 인간의 인식활동은 이러한 의미에서 실천적 삶의 활동의 한 계기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의 활동은 기본적으로 동물적이지만,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생존수단의 생산을 통해 삶을 영위하고 이러한 생산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욕구를 재생산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의 창출이 불가피하며, 이것이 동물과 인간을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최초의 역사적 행위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는 새로운 욕구의 충족을 위한 분업과 협업방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은 협업과 분업을 통한 생산방식의 재생산이며,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따라 생산방식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일련의 발견과정은 변증법적 원리로부터 연역된 사실이 아니라, 모두 구체적인 현실에서의 경험적 사실에 대한 탐구를 통해 얻은 인식의 내용들이다.

 

3) 인식과 실천의 통일

 

마르크스의 역사이해는 역사의 발전과정 자체에 대한 이론적 이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의 산물인 삶의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삶의 활동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있어 인식은 그 자체가 곧 삶의 활동의 한 유형이며, 실천적 활동의 인식적 토대로서만 인식은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실천적 인식론이 20세기의 실용주의적 인식론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의 인식론은 주관적 가치판단이나 개별적 행위 결과의 유용성을 가치기준이나 진리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인식이 참된 것인 한에서만 그에 근거한 실천적 행위가 실천을 통해 검증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마르크스에 있어서의 실천은 그 자체가 진리의 기준이 아니라 진리의 검증기준이라 할 수 있다.

 

6. 마르크스 인식론의 현대적 의미

 

지금까지 살펴본 초기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은 그가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의 한 방편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경제학적인 탐구에 들어가면서 보다 정치한 사회인식론으로 명료화되었다. 즉 「경제철학초고」에서의 ‘소외된 노동’에 대한 분석을 통해 노동의 대상화를 통한 노동의 현실화가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의 탈현실화로 나타나게 되는지를 해명하고, 나아가 청년헤겔학파의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해명하기 위해 유물론적 역사이해의 방법을 명료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회인식론은 보다 엄밀한 과학적 사회인식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회인식론은 그 자체로서 독립적인 인식론의 형태를 취하기보다는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치밀한 비판적 분석과정 속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체적인 분석작업으로부터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을 추상하여 분리해 내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인식의 방법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지금 그가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을 어떻게 파악하고 비판적으로 해명할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마르크스의 실천적 사회인식론의 성격을 구명해 보는 까닭은, 그의 현실인식의 방법적 탁월성이 현실적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사회인식론은 현대의 인식론과는 전혀 다른 토대인 ‘현실적 전제’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전통적 인식론이 지니고 있는 이론적 난점과 상대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특히 ‘현실적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마르크스의 사회인식론이 지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실천적 성격은, 처음부터 실천과는 완전히 독립된 이론적 전제에서 출발하는 기존의 인식론의 한계를 벗어남으로써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상당한 적실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이러한 철학적 담론은 미래의 보편철학으로 정립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과거의 낡은 사상이 아니라 미래의 새로운 철학으로, 21 세기의 철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의 사상이 21세기적 현실에 상응하는 사상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실천적 인식론이 내용적으로 보다 풍부해져야 할 것이며, 이러한 전제하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미래의 사상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