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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아나키즘과 조선인
- 해방 전을 중심으로-
金明燮 <江南大·한국근대사>
<차 례>
Ⅰ. 머리말
Ⅱ. 일본 아나키즘의 태동과 조선인
1. 幸德秋水와 大杉榮
2. 朴烈과 '大逆事件'
Ⅲ. 일본 아나키즘운동의 발전과 조선인 항일운동
1. 純正아나키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즘
2. 黑友會와 黑友聯盟
3. 조선인의 노동운동
Ⅳ. 일본 아나키즘운동의 쇠퇴와 항일운동의 변화
1. 아나키즘운동의 쇠퇴와 無政府共産黨
2. 조선인의 비밀결사와 建達會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최근 우리사회에 불고 있는 아나키즘에 대한 지적열풍은 가히 괄목할 만하다. 언론과 출판, 내셔날 트러스트운동을 비롯한 환경운동과 자유학교운동, 생태마을 등에서 이 사상은 '자유공동체운동'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진면목을 나타낸 바, 냉전과 군사정권을 넘어서 21세기 한국의 대안이념으로 부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풍요로운 환경'에 비해, 우리 땅에 뿌리내린 아나키즘운동의 역사, 한국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연구풍토는 여전히 가뭄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다행이 지난해 12월 탄신 120주년을 기념한 신채호 선생과 올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단주 유림선생, 이회영 선생에 대한 연구가 한줄기 소나기를 뿌렸다. 우리 선배투사들에 대한 평가와 반성의 기회가 적은 실정에서, 자칫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는 20세기 전반의 경우처럼 '한때의 유행병'으로 치부될까 염려된다.
한국에서 아나키즘사상은 일제침략에 대항한 항일독립투쟁의 일환으로, 또 지배와 권력 없는 신사회 건설의 이념으로 수용되었다. 중국에서의 의열단과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朴烈의 천황폭살 미수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 글은 일본의 아나키즘사상과 운동의 흐름을 통해 그 궤를 함께 한 한인들의 수용과정 및 투쟁활동을 소개하려 한다. 이를 통해 한국아나키즘운동의 전통과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일조하고자 한다.
Ⅱ. 일본 아나키즘의 태동과 조선인
1. 幸德秋水와 大杉榮
일본의 아나키즘은 1902년 당시 東京帝國大學에 재학 중이던 煙山專太郞이 『近代無政府主義』를 출간하면서 처음 소개되었다. 이어 1906년 久津見厥村는 공자·석가에서 무소유적 아나키즘을 발견하고 서구 아나키즘, 특히 푸르동과 스튀르너, 그리고 크로포트킨과 마르크스의 사상을 소개하기 위해 『無政府主義』를 간행했다. 목사출신인 이시카와 산시로(石川三四郞)도 《西洋社會思想史》에서 독일과 프랑스, 영국의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소개하였다.
현실개혁운동으로서의 아나키즘은 1906년 코토쿠 슈스이(幸德秋水)와 오스기 사가에(大杉榮)에 의해 출발하였다. 코토쿠는 미국 아나키즘운동에 큰 영향을 받고, 개인주의 또는 기독교적 아나키즘을 비판하면서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을 적극 소개했다. 그는 일본과 같은 전제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직접행동과 총파업 외에는 혁명의 길이 없다고 보고, 의회정치를 거부하였다.
1907년 11월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미국에서 조직된 일본 社會革命黨은 공개장에서 "천황이 정복자·착취자이기 때문에 자유를 찾으려는 인민의 혁명이 필연적이다"라며 국제 테러리즘을 표방했다. 이에 놀란 일본정부는 1908년 6월 집회장소에서 붉은 혁명기가 등장했다는 '赤旗사건'을 구실로 大杉榮 등 사회주의자를 대량 구속시켰다. 또 경찰은 그들과 무관한 幸德秋水를 '大逆事件'의 혐의로 체포했다. 사건 당시 고향에서 크로포트킨의 저서 『빵의 약취』를 번역하고 있던 幸德秋水는 암흑재판 속에 11명과 함께 1911년 사형을 집행 당했다.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은 '생디칼리즘연구회'를 운영하면서 중국·조선 유학생들에게 구미 사회운동을 선전하였다. 그는 1912년 문예평론잡지《近代思想》과 월간 《平民新聞》을 창간해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했다. 1919년 그는 월간《勞?運動》을 통해 노동조합에 의한 생산자독재의 혁명과 동맹파업 등 민중의 직접행동을 주장하였다. 大杉榮은 1920년 12월 모스크바 極東民族大會에 참석하여 볼셰비키정권의 아나키스트 탄압사실을 파악한 후, 공동전선의 한계를 실감하고 결별하였다.
한편, 1921년 12월 발족한 기로친社는 러시아 虛無黨의 영향을 크게 받은 극좌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단체는 영국 황태자를 암살할 목적으로 反逆者그룹을 결성하여 일본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여러 회사를 위협하는가 하면, 은행 파출소를 습격해 은행원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테러리즘의 탄생은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2. 朴烈과 '大逆事件'
당시 인삼행상을 하며 고학하던 朴烈은 岩佐作太郞의 집에 자주 출입하면서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그는 1920년 11월경 15∼16명으로 鐵拳團을 조직한 이후 이듬해 血拳團으로 개칭하였다. 이 단체들은 친일파 인사들이나 조선인을 모욕하는 일본인을 응징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인들의 모임이었다.
1921년 11월 유학생들에 의해 결성된 黑濤會는 아나키즘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최초의 사상단체이다. 黑濤會는 각종 강연회를 비롯한 행사참여, 기관지 발간, 노동자 인권옹호 등에 높은 의욕을 보였다. 박렬의 주도로 발간된 기관지 《黑濤》는 주로 反日독립사상을 비롯해 스튀르너의 개인적 아나키즘과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바쿠닌의 직접혁명론 등의 사상을 담고 있다. 일본의 '아나-보르 논쟁'을 계기로 흑도회는 1922년 10월경 해체되기 시작하여 아나키즘계열의 黑友會와 공산주의계열의 北星會로 분화되었다.
朴朴烈과 崔圭悰·鄭太成·韓晛相 등 아나키스트들은 黑友會를 결성하였다. 黑友會는 결성 이후 주로 언론출판사업과 일본단체와의 연대활동에 주력하였다. 朴烈과 그의 처 金子文子는 기관지 《太い鮮人》과 《現社會》,《民衆運動》등을 발행했다.
한편, 朴烈은 흑우회와 별도로 비합법 비밀결사를 만들기 위해 1923년 4월 不逞社를 조직했다. 그는 또 일본 천황에 대한 폭탄테러를 감행하기 위해 1921년 말부터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의열단으로부터의 폭탄구입에 실패한 그는 1923년 가을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폭탄구입과 투척계획을 세웠다. 즉 우편배달부 시험에 합격해 궁성에 출입하는가 하면, 집배원을 가장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돌연 9월 1일 東京 시내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때 일본정부와 군부는 일본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이 혼란을 틈타 무장봉기를 꾸민다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대량학살을 자행했다. 군대와 경찰, 自警團의 조직적인 학살로 희생된 조선인은 약 6천 여명에 이르렀고, 보호를 명분으로 6천여 명 가량 검속되었다. 이때 일본 헌병에 의해 大杉榮과 그의 처, 어린 조카가 학살되었고, 朴烈도 '임시보호'로 9월 3일 경찰에 검속되고 말았다.
일본경찰은 처음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을 들어, 不逞社 회원 16명을 기소했다. 검찰의 취조 도중 폭탄 구입사실이 알려지자, 검찰은 朴烈과 金子文子·金重漢 세 사람을 폭발물취제 위반으로 추가 기소했다. 이때부터 不逞社를 폭동과 천황암살을 꾀한 조직사건, 즉 '大逆事件'으로 비화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조선인학살의 명분으로 삼으려던 일본 정부와 검찰의 의도는 朴烈·金子文子의 당당한 법정투쟁과 불령사의 무혐의 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Ⅲ. 일본아나키즘의 발전과 조선인 항일운동
1. 純正아나키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즘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본의 아나키즘운동 진영에서는 純正아나키즘과 아나르코 생디칼리즘간의 이념적 분화가 발생했다. 純正아나키즘은 아나키즘에 반하는 불순요소를 제거하는 철저한 부정의 논리로서, 맑스주의뿐만 아니라 생디칼리즘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은 자치와 자유연합을 통해 가능한 개량주의적 조합을 혁명적 조합으로 개혁해 나가자는 주장이다. 전자의 대변자는 岩佐作太郞과 八太舟三이며, 후자는 石川三四郞과 近藤憲二가 대표하였다.
우선 岩佐作太郞은 미국에 건너가 아나키즘을 수용한 이후, 大杉榮과 달리 생디칼리즘을 부인하였다. 八太舟三도 그동안의 노동운동사를 실패의 역사라고 단정하고, 노동운동으로는 사회혁명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지배자나 자본가와 타협하거나, 독재정치로 용인하는 (강권적)혁명운동이 된다고 보고, 노동조합운동을 경시하였다.
純正아나키즘을 표방한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은 1926년 1월 30일 黑色靑年聯盟을 발족시켰다. 전국 17개 사상단체와 7개 노동운동단체로 구성된 이 연맹은 각계 대표 7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연맹은 대회 후 과격시위를 벌인 銀座사건으로 유명하며 기관지로 월간《黑色靑年》지를 발행하였다.
純正아나키스트들은 이어 5월 24일 全國勞動組合自由連合會(이하 '全國自連'으로 약칭)를 결성했다. 이들은 1928년 3월에 열린 제 2회 속행대회에서 강령에 '계급투쟁'의 삭제를 주장하여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과 대립하였다. 결국 이를 '强權盲者'라고 반발한 세력들은 연합회를 탈퇴하고 말았다. 全國自連은 이후 계급투쟁의 부인과 생디칼리즘의 배격을 내세우며, 기관지 《自由聯合》(후에 《自由聯合新聞》으로 개칭)의 발간을 통해 사상운동의 순수성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아나르코 생디칼리즘의 石川三四郞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각종의 노동조합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개량적 조합을 혁명적 조합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아나키즘과 생디칼리즘은 다같이 자치와 자유연합을 第一義로 하고, 강권을 부정하기 때문에 서로 협동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1928년 3월 全國自連에서 탈퇴한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들은 그해 7월 별도로 협의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勞?者新聞》을 발간하였다. 이들은 각종 쟁의를 지원하는 한편, 소비조합을 조직해 1930년 11월 日本勞動組合自由聯合協議會(이하 '日本自協'으로 약칭)을 결성하였다. 또 이들의 이론지로 1932년《黑旗 아래에》가 발간되었는데, 주로 石川三四郞과 近藤憲二가 이론을 담당했다.
2. 黑友會와 黑友聯盟
朴烈의 '大逆事件'으로 괴멸된 아나키스트들은 1926년 초에 이르러서야 黑友會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본 黑色靑年聯盟(岩佐作太郞)과 自我人社(栗原一夫)·野蠻人聯盟(八太舟三)과의 유대를 긴밀히 갖고, 조직을 개편했다. 불령사 멤버였던 崔圭悰과 張祥重·鄭泰成 등은 1926년 2월 흑우회를 재건한 이후 곧 일본의 黑色靑年聯盟에 가입하였다. 崔圭悰과 李弘根은 각종 강연회와 대회에 참석해 불온한 언동을 하여 검속된 바 있다.
1927년 이후 아나키즘진영의 분위기는 보다 강력한 反日·反共 조직으로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즉 黑風會의 元心昌·張祥重·韓何然·李時雨 등이 1928년 1월 15일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黑友聯盟을 결성한 것이다. 黑友聯盟은 친일단체인 相愛會나 공산주의 계열의 단체에 대해서는 매우 강경한 입장을 취했지만, 이념 선전과 한인들의 권익보호에는 적극적이었다.
黑友聯盟은 독자적인 항일운동과 사상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선전활동을 적극 전개했다. 연맹은 東興勞動同盟과 自由靑年聯盟과의 협력으로 《黑色新聞》을 발간하였다. 《黑色新聞》은 1930년 8월 창간호를 발간한 이후, 崔學柱·吳佑泳·梁一東 등에 의해 편집되었다. 신문은 매월 2면씩 발행되어 일본과 국내소식은 물론 중국과 서구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을 알렸다. 그러나 이 신문은 일본당국의 탄압과 편집자들의 잦은 구속, 그리고 발간자금의 부족 등으로 37호를 끝으로 1936년 5월 6일 폐간되고 말았다.
또한 흑우연맹은 1927년 12월 朝鮮人團體協議會를 탈퇴한 이후 다른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계열과의 연대활동을 포기한 채, 독자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이른바 4대 민족투쟁(3월 3.1운동 기념투쟁, 5월 메이데이투쟁, 8월 국치일투쟁, 9월 관동대학살 기념투쟁)을 일본 아나키즘 단체와 연대하여 주관하였다.
한편, 1925년 대구에서 결성된 眞友聯盟은 일본 아나키즘단체와의 연계활동을 잘 보여준다. 이 단체의 주도인물 方漢相은 옥중의 朴烈과 金子文子를 면회하고, 일본 黑色靑年聯盟에 가입했다. 黑友會의 金正根은 眞友聯盟에 가입한 후, 통신문을 전달하면서 재일 단체와의 연락관계를 맡았다.
검찰은 일본 아나키즘단체와의 교류상황에 크게 긴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활동가들은 곧 東京에서 모두 구속되었을 뿐 아니라, 중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검찰의 강압수사에 대해 당시 변호사인 布施辰治는 검찰 논고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일본 黑色靑年聯盟도 항의서를 제출해 "단지 무정부주의자를 품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 근거가 박약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관련자들의 전원석방을 촉구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정근은 옥중단식 투쟁 도중 1927년 7월 옥사하였고, 栗原一男 등은 3년동안 투옥되었다.
3. 조선인의 노동운동
東京지역에는 흑우연맹을 비롯해 자유노동자와 일반노동자에 의한 노동조합이 주류를 이루었고, 신문배달인에 의한 조합도 생겨났다. 黑風會의 張祥重과 吳宇泳 등은 1927년 2월 22일 朝鮮自由勞動者組合(이하 '朝鮮自由'로 약칭)을 결성하였다. 朝鮮自由는 결성 선언문을 통해 중앙집권주의와 정치운동의 배척, 자유연합주의 고창을 담은 4개항의 강령을 채택했다. 朝鮮自由는 江東部와 山手部로 나뉘었는데, 12월경 각각 160명과 140명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1927년 4월에 연합회 대회에 참가해 '朝·日 노동자공동전선의 건'을 제안하여 이를 통과시켰다.
또한 조선 아나키스트들은 당시 최대규모의 노동단체였던 朝鮮東興勞動同盟(이하 '東興勞動'으로 약칭)을 우의협력단체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즉 1924년 9월 경 창립된 이 단체는 1927년 9월 18일 열린 제 3회 정기총회에서 아나키스트들의 노력으로 종래의 주의주장 대신 자유연합주의를 채택하였던 것이다. 주요 간부는 梁一東을 비롯해 丁贊鎭·梁相基·陳哲·金今順 등으로, 1934년 1월 3,040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東京 이외에도 大阪지역에도 高順欽을 비롯해 崔善鳴, 金泰燁에 의해 아나키즘운동이 전개되었다. 大阪에는 朝鮮人無産者社會聯盟과 女工保護會, 朝鮮人新進會 등이 활동했다. 이 단체들은 東京과 달리, 거주권을 비롯한 생존권옹호와 지역 노동조합운동과 협동조합활동 등을 전개했다. 특히 고순흠은 제주도 출신 여공을 위한 보호운동과 제주도-오사카 직항로 개설을 위한 자주운항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이 외에도 李允熙는 大阪에서 敎化運動社와 黑色朝鮮人社를 조직한 이후, 일본아나키스트청년연맹에 참가하였다. 또한 신흥 공업지대였던 兵庫縣과 愛知縣에도 朝鮮同友會와 中部黑色一般勞動組合 등이 결성되어 일본인 노동자와의 연대활동을 펼쳤다. 사상활동에 치우쳤던 東京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는 친일파 박멸운동과 거주권 확보투쟁, 생활조합운동 등에 주력하였음을 주목할 수 있다.
Ⅳ. 일본 아나키즘운동의 쇠퇴와 항일운동의 변화
1. 아나키즘운동의 쇠퇴와 無政府共産黨
일본 아나키즘 노동운동단체의 이념대립과 분열은 운동의 침체를 가속시켰다. 이에 1932년 여름부터 운동진영의 통합노력이 일기 시작했다. 우선 全國自連은 일상투쟁의 폐기를 쇠퇴의 원인으로 파악하고, 그 관념적 편향을 시정하기 위해 경제투쟁의 중요성을 채택하였다. 全國自連은 1933년 4월 대회에서 노동자의 생활권 옹호의 입장에서 여하한 사상경향을 일소하는 신방침을 세웠다.
日本自協도 노동조합제일주의에 빠진 것을 아나키즘운동의 침체원인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상호 자기비판에 따라 1933년 12월 日本自協은 全國自連으로의 복귀를 확정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이듬해 3월 18일 제 4회 대회에서 해소되었다. 그러나 일본 파쇼체제의 강화와 대량검거, 경찰의 전향공작과 운동현장의 대립양상 등으로 아나키즘진영은 여전히 침체를 거듭하였다. 이에 따라 지도부에서는 운동의 통합과 재기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33년 12월초에 결성된 解放文學聯盟은 문화운동에서의 전국적 조직을 결성하며 큰 자극제가 되었다. 이들은 문화운동 분야에서의 小分派主義를 청산하고 문화단체의 전국적 조직을 위해 기관지 《文化通信》을 발행했다. 문화운동에서의 통합과정에 자극을 받은 일각에서도 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지도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1933년 12월 초경 二見敏雄·相澤尙夫·入江汎 등이 회합을 갖고 日本無政府共産主義者聯盟을 결성했다. 이들은 지금껏 아나키즘운동의 쇠퇴원인이 無조직·無계획의 활동방침, 종파주의적 조직활동에 있다고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 전선을 지도 통제할 중앙집권적 전국조직이 있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때문에 이들은 평상시 아나키즘을 선전 계몽하고 노동자·농민의 경제투쟁을 조직·지도하여 이를 정치투쟁으로 끌어올리고, 사회혁명 시기에는 이 무산대중을 일거에 무장봉기시켜 일시적이나마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전선통일과 연락강화, 무조직·무계획 방침의 검토, 일상투쟁에의 진출 등을 목적으로 이들은 1933년 10월경부터 논의를 거듭하여 12월 조직결성에 이르렀다.
아나키즘운동의 정치운동과 중앙집권주의, 프롤레타리아독재의 인정은 그동안 이를 반대해 왔던 아나키즘사상에 비추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조직운영 상에서 맑스주의의 중앙집권주의와 분명 다르다고 보았다. 즉 中央執行委員會에서의 자유로운 발의와 토론, 만장일치 원칙 및 자유원칙 등으로 아나키즘의 기본정신에는 크게 벗어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선의 강화를 위해 1934년 1월 30일 日本無政府共産黨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어 9월 8일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권력정치와 자본제의 폐지, 완전한 지방자치제의 확립, 사유제의 폐지, 생산수단과 토지의 공유 등 8개조의 강령과 자본제 폐지 외 10개조의 테제, 그리고 약 30개조의 규약을 제정하였다. 또 중앙집행위원회에는 서기국을 비롯해 정치·조직·군사·재정국 등과 특무기관을 두었다.
日本無政府共産黨은 운동자금 확보와 무기구입 등을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또 이들은 조직확대 사업을 위해 1934년 8월말 關東地方委員會와 1935년 2월초 關西地方委員會 준비회를 결성하였다. 또 二見敏雄과 上澤尙夫 등 당원들은 1935년 11월 6일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은행을 습격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일제히 검거됨에 따라 와해되고 말았다.
2. 조선인의 비밀결사와 建達會
日本無政府共産黨은 한인사회 사이에도 조직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들은 朝鮮人部를 설치, 東興勞動과 朝鮮一般·朝鮮合同 등 3개 단체의 전선통일을 꾀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에 따라 일부 한인아나키스트들은 日本無政府共産黨에 입당하였다. 東興勞動同盟의 韓國東과 李東淳, 黑友聯盟의 洪性煥 등이 그들이다. 조직에 대한 원칙적 거부, 정치운동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당운동에의 참여는 한인아나키즘운동의 과정으로 보아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韓國東은 1934년 11월 3일부터 5일까지 東京에서 열린 全國自連대회에 關西地方 대표로 참석하였고, 이때 입당하였다. 이후 그는 關西地方委員會 준비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직확대를 위해 노력하다가, 1935년 11월 검거되었다. 李東淳은 1931년 渡日하여 黑友聯盟과 東興勞動에서 활동하다가 無政府共産黨에 입당했다. 입당 후 그는 동 위원회의 植民地部에 소속되어 東興勞動의 梁一東과 朝鮮一般의 李鍾文 등과 함께 한인 3개 단체의 전선통일을 위해 수차 회합하였다. 또 그는 재일 유학생에 대한 대책, 해외 한인과의 연락 등의 문제를 일본 동지들과 협의하였다.
그러던 중 그해 그는 11월 6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 2개월을 언도받았다. 《黑色新聞》을 발간했던 洪性煥도 1935년 4월 자금부족으로 신문발행이 중단되자, 日本無政府共産黨에 가입하였다.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출옥하여 고향으로 강제추방 당했다. 이외에도 李壽龍과 陳錄根·文致万 등은 당원이 되어 조직확대를 위한 선전활동에 전념하다가 검거되었다.
한편, 조선인 아나키즘단체들은 1935년 일제의 대탄압과 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대부분 해체되고 말았다. 이에 일부 활동가들은 해산조치와 전향공작에 반발해 비밀결사 활동을 펼쳤다. 일제 말에 전개된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의 비밀결사 활동은 건달회에서 잘 드러난다.
조선동흥노동동맹 등에서 활동한 바 있는 文成勳·李宗文 등은 1940년 6월 11일 비밀회합을 갖고 회의 명칭을 建達會(建은 아나키즘적 조직의 재건, 達은 목적달성의 뜻)로 정하였다. 건달회 내부는 書記部(문성훈)와 宣傳部(이종문·김석영·정갑진·김동윤), 財政部(李宗植)로 각각 구성하였다.
건달회 회원들은 폭력봉기계획을 수립하고 '자금획득 방침'과 '무기입수 수단', 그리고 '습격목표와 방법' 등을 연구하여 구체적인 활동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봉기계획은 먼저 日本王宮과 참모본부, 육해군 양성과 내무성·경시청, 대장성·일본은행 등을 설정하고 책임부문을 결정했다.
또 폭력봉기의 시기는 1941년 3, 4월경으로 잡고 국내에서의 물자구입과 가두모집 등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기 의한 자금획득과 권총 및 죽창 등 무기입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이들은 일본경찰에 의해 1940년 12월 24일 일제히 검거되고 말았다. 이로서 해방 전까지 일본에서의 한인아나키스트들의 조직과 활동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Ⅳ. 맺음말
지금껏 식민지 치하의 항일운동과 아나키즘운동의 주류는 주로 중국에서 전개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물론 제국주의 심장부인 일본 東京과 大阪 등지에서 국가체제 및 계급의 철폐와 식민지 해방을 위한 운동은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의 아나키즘운동과 항일운동은 反日·反帝·反共産主義적 아나키즘의 선전활동과 노동조합운동, 그리고 비밀테러 활동을 병행하였기 때문에 또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일본 아나키즘 사상과 운동은 크게 (아나르코)생디칼리즘과 純正아나키즘의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1920년 日本社會主義同盟의 분화로부터 黑色靑年聯盟(1926)에 이어진 이들의 운동은 전국노동조합자유연합회(全國自連)과 일본노동조합자유연합협의회(日本自協, 1928)으로 대립하다가 통합되었다. 이후 중앙집권적 정당인 無政府共産黨(1934)을 결성, 통일전선을 강화하려다 검거되어 쇠퇴하고 말았다. 이들은 해방 후인 1949년에 이르러서야 日本아나키스트연맹으로 재기하였다.
일본 아나키즘의 흐름 속에서 조선인 아나키스트들도 성장과 쇠퇴를 함께 해왔다. 즉 최초의 유학생 사상단체인 黑濤會에서 분화한 아나키스트들은 黑友會(1923)에 이어 黑友聯盟(1928∼1936)으로 집결하였다. 또한 東興勞動同盟과 朝鮮自由勞組 등을 통해 노동자 인권옹호와 친일파 박멸, 생활조합운동등을 펼쳤고, 大阪과 兵庫 등지에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부는 日本無政府共産黨에 참여해 항일전선의 통합을 꾀하였고, 비밀결사인 建達會를 통해 무장봉기 계획을 꾀하기도 하였다.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아나키즘운동은 분명 反자본·反제국·反국가주의의 국제적 아나키즘과 궤를 같이 하는 한편, 식민지 해방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 독자적인 운동영역도 함께 차지하고 있다. 한국아나키즘운동의 이러한 특징은 냉전과 분단, 지배와 권력을 넘어서야 할 오늘날의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또한 한국아나키스트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재평가도 현대 자유공동체 운동의 올바른 전통을 수립하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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