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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공동체 공산주의'를 위하여 /구승회

by 마리산인1324 2010. 10. 7.

성균관대학교 <성균> 제67집(1996년)에 게재됨

 

이 글은 http://blog.daum.net/gangseo/6456477 에서 퍼왔습니다

 

 

'공동체 공산주의'를 위하여

구승회 (동국대 교수)

 

 

1  카페 [라만다]의 추억

 

압구정동 카페 [라만다]에는 마릴린 먼로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고, 오스트리아 참나무처럼 보이도록 콘크리트 기둥에 플라스틱을 덧씌운 가짜 나무 기둥이 서 있다. 처녀들은 티롤지방(독일어를 쓰는 북부 이탈리아 지방)의 민속 의상인 알록달록한 색상의 치마를 입고 물컵을 나르고 시중을 들고 있다. 음식 메뉴는 거의 대부분이 이탈리아식인데 비해 커피만은 카푸치노에서 카페오레에 이르기까지 글로벌하다. 미국산 락뮤직이 흐르고, 한 구석엔 축소된 미로의 비너스 상이 손때를 묻힌 채 서 있다. 세계화된 한국의 한 청년이 상실한 전통의 허공으로 말보로 담배연기를 내뿜는다.

 

바깥 세상은 온통 소음과 먼지로 뒤범벅이지만, 공기청정기와 정수기로 무장한 채 [라만다]의 청년은 따뜻한 난로 불이 피워져 있는 2층 서재의 안락한 소파에 앉아, 가느다란 손가락과 마우스 하나로 디비(데이터베이스)와 인터넷이 제공하는 통계와 수치와 지표들을 검색한다. 아무런 실존적인 고민도 없이, "군사독재=자본주의=민주주의=선진국=일등세계시민"을 확인하고는 엔터! 늦은 시각 빅 브라더(big brother)의 근엄한 목소리는 "내가 세계일류면 나라가 세계일류!"라고 가르친다.

 

이제 우리는 잘 살게 되었다. 군사독재 정권 덕분에 ...... 독재자는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자본주의를 신봉한다. 피노체트도, 마르코스도, 리콴유도. 자본주의는 많든 적든 중산층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 중산층의 자녀들이 지금 [라만다]에서 말보로 담배 연기로 불확실한 존재의 지평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중산층이 생겨나면 그들은 곧바로 자유와 민주를 요구할 것이다. 경제발전은 민주주의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군사독재가 민주주의를 낳는다!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그것을 좋은 것이며, 미국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실현되어 가는 하나의 전형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7~8o년대 우리나라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투쟁은 그런 행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라만다]의 청년은 데모 노래의 가사 중에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구절을 좋아했다. 그는 한 때 불평하는 자유주의자의 정신을 소중하게 여겼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불평 없는 '양순한 민주시민'으로 되었다. 잘 살게 되었기 때문에. [라만다]의 청년은 자신이 거들고 있는 '시민연대운동'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안락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또 하나의 혁명운동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가 노래하던 민주주의는 독재자의 총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오늘의 문명적인 위기는 일시에 해소될 것이라고 말하는 경제주의자들이 있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 전체가 각기 승용차로 출퇴근해 본 후에 자연스럽게 '자전거 타기 운동'이 벌어질 것이며,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어 본 후에 '채식주의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그들의 설교를 나는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공격적이고 흉포해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가진 후에 자비롭게 되기를 기대하지 말자.

 

명망 있는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환경.생태 위기를 진단하고 나서 이런 처방을 한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ESSD)'이 가능하다고. OECD의 국가 등 선진국에서는 분명히 그런 양상을 보인다. 소위 '환경전환점 가설'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류 세계시민인 우리가 모두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하고, 주당 35시간 노동을 하고, 퇴근 후엔 잘 정돈된 정원과 평화로운 산책로가 구비된 안락한 주거환경을 보장받으려면, 그리고 역설적이긴 하지만 주말이면 근사한 오페라 극장에서 열리는 제3세계의 굶는 어린이를 위한 자선음악회에 참석할 수 있으려면, 세계 인구의 ⅔는 여전히 문맹인 채로, 수세식 화장실도 없고, 수돗물도 없이 살아야 하며, 활동에 필요한 충분한 칼로리를 섭취해서는 안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르네상스'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인 사회질서와 도덕.윤리적인 가치의 몰락 위에서만 가능했다. 그런 의미에서 1848년의 맑스의 불평은 서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부르주아가 권력을 장악한 곳에서는 어디에서건 봉건적.가부장적.전원적 관계는 파괴된다. 아랫사람, 윗사람의 봉건적 관계는 파괴되고, 이제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냉정한 이해관계만 남는다."

 

15세기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이스.로마의 노예들의 삶을 생각하며 '인문주의'를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빌라에 모여 밤새워 춤을 추고, 현학적인 취미와 고상한 유희를 즐길 줄 아는 그리이스.로마 귀족의 삶의 모델을 따랐듯이 한국 르네상스 역시 어둡고 쓰라린 과거, 춥고 배고픈 자들의 피와 땀과 눈물을 외면하고, 낯선 문화와 낯선 힘에 의지하여 성취한 것이다. 멀지 않은 과거에 식민지 지배가 있었고, 그 후에는 3o년이 넘도록 군사독재 정권이 등장하여 나라를 파국으로까지 몰고 갔던 부끄러운 과거는 '과거가 될 수 없는 과거'로 놓아 둔 채, 철저하게 힘없는 자의 등을 밟고 승천하는 네 마리의 작은 용 가운데 한 마리 용은 저런 실증적 지표로만 말할 뿐이다.

 

산업사회에서 이미 충분히 '개별화된 욕구의 주체'로 자리잡아 온 개인은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더욱 파편화되고, 다양화되어 개인과 개인을 결속하는 도덕 규범이 작용하기 어려운 '탈도덕적 사적 개인'으로 된다. 친족, 이웃, 마을의 공동체적 유대관계는 물론이고, 사회적 계층이나 직업집단 간의 연대도 더욱 어려워진다. 개인 상호간의 도덕적 연대가 불가능한 사회, 이는 인간의 사회적 성격의 몰락을 의미하는 바, 거기서 권력은 더욱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권력은 '정보조작'을 통해 개인과 개인을 낯설게 만든다. 정보사회에서의 사회운동은 공동체적 연대를 통한 정보의 인간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정보사회에서 권력은 독점적 정보에서 나온다. 소위 많은 정보를 확보한 카페 [라만다]의 청년은 자신의 정보를 고의로 누설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한다. 청년은 이제 더 이상 이성의 태양이 내리쬐는 대낮에 자신의 사회성을 작동시키지 않는다. 음산한 밤이 오면 그들은 한 마리 정보벌레가 되어 정보사냥에 나서고, 밤을 새워 가며 노획한 정보를 사적(私的)으로 왜곡한다. 마치 "사소한 한 마리의 밤 나방이 어둠이 접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사인(私人)의 사소한 호롱불을 찾아 날아들듯이(Karl Marx)."

 

2 . 정치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공동체 공산주의

 

2-1. 사적 개인과 사회적 개인

 

공동체 공산주의는 모든 종류의 환원주의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개인과 사회를 상호 환원 가능한 것으로 보는 대의정치와 의회제도를 거부한다. 대의정치란 자유사회와는 어울리지 않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적합한 정부형태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동체이론들은 대의제도가 왜 나쁜지 자세히 이론적으로 논증하고, 국가 대신에 공동체가 얼마나 인간적인 형식인지 자세하게 그려내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공동체주의는 막연한 유토피아요, 극단적인 허무주의라는 오해를 받아 왔다.

 

나는 이 자리에서 공동체 정치경제학의 대강을 드러내고자 한다. 아울러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지향점을 암암리에 전제하고 있는 현대의 환경론을 넘어서는 공동체의 이론적 기초를 그려보고자 한다. 나는 이를 "생태공동체 공산주의(줄여서 '공동체 공산주의')"라고 이름 붙이고자 한다.

 

개인을 대리하는 대표자로 구성된 정부형태인 대의정치는 개인적 환원주의에 적합한 형태이고, 개인의 본성을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사적 개인'으로 보는 그런 견해에 적합하다. 민주주의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떤 특정한 공인(대표자, 대리인)의 선택 수단이 어느 정도 공정하고 평등한가, 그렇지 않은가 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몇몇의 선택된 '개인'에게 자신의 권위와 권리를 양도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대의정치라는 대안은 진정한 '사회적인' 조직 및 의사결정 방법이 아니며, 나아가서 '평등한 사회적 개인'을 보증해 주지 못한다. 사회적 의사결정의 진정한 방법은 사람들이 '그들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도 보다 큰 사회적 권력에 자유로이 자신의 권력을 결합시킴으로써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국가나 대의체의 의사결정은 대리인에게, 그리고 결국에는 정부에 권력을 양도할 것을 요구한다. 이 두 가지 사회조직원리는 전적으로 개인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즉 개인을 "사회적 개인"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적 개인"으로 보느냐의 차이이다.

 

대의정치는 사람들에게 자율을 허용하는 듯이 생각되지만, 주인을 자유선거에 의해 선출했다고 해서 주인과 노예가 폐지되는 것은 아니듯이, 대의정치는 사회적 개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이해관계, 물질적 필요와 안녕의 상호의존과 상호연관을 인식시켜주는 "자주관리"라는 사회적 방법을 포기한다. 대신에 오로지 타인을 관리하는 역할만 하는 개인, 즉 '공적 개인'이라는 특수한 계급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공인으로서의 삶'은 사적, 개인적인 삶에 비해 고상하고 특별한 것으로 간주된다.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공인으로서의 삶은 다양한 하층계급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해관계의 대립을 조정.조화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대리인을 선출하는 원자화된 사적 개인들의 그야 말로 사적으로 되고, 개별화된 다수와 한 개인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제시되는 "대의제"는 원자화되고 사적인 이해관계의 다양성을 보여줄 뿐, 사회적으로 연대하고, 결속하고, 사회조직 내에서 상호의존적인 이해관계나 안녕을 실현하는 사회적 역량은 아니다. 대의제의 계층구조는 상호 결합된 '사회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개별화되고 사적으로 된 독립적인 원자모델을 가정한다.

 

대의제는 '사회적인' 조직과 의사결정을 이끌어 내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통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의 규제와 통제이며, 나아가서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에로 향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자유로운 동의를 통하여, 그리고 생산과 소비가 결합된 연방형태를 통한 자유로운 조직"이다. 이런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연대와 참여'라는 대 원칙이 필요하다. 공동체 내에서 개인은 비로소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의 직접적인 참여를 극대화"할 수 있으며, 오직 공동체에서는 대리인과 대표가 필요없다. 필요할 경우 특정한 임무와 한시적으로만 대표를 세우게 된다. 또한 조직적 활동은 대표들이 계속 행정가로서가 아니라, 보수없이 활동함으로써 대표자들이 직업적으로 되는 것을 막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율적 조직은 우연적인 선택을 통해 수행되는 간접적이고, 사적인 통제에 비해 정치적 의사결정에 대한 보다 강력하고 직접적인 통제를 가능케 해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권력이란 필요한 최소한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리인에게 양도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여기서는 ① 개인은 직접적인 통제에 참여할 수 있고, ② 경제조직은 물론이고, 삶의 다른 영역들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직접적인 통제가 가능하며, ③ 권력 불평등의 근원 및 위로부터의 강제를 제거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함으로써 사람들은 위로부터 강요되는 견해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선택하거나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개방적이고 실질적인 토론이다. 이 토론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은 어떤 견해를 제안할 동등한 기회를 가지며, 타인의 견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견해를 공식화하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동등한 기회를 갖는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생산수단에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고, 경제적 생활의 통제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생산의 조직이 필수적이다.

 

이런 삶의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가능성은 자본주의적 조직의 물리적인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탈중심적인 사회가 전제된다. 공동체가 소멸한 곳에서 번창하는 중앙집중적인 거대체제는 공동체의 적(敵)이다. 공동체 공산주의의 대안적 모델은 극단적으로 오늘날 대의정치에 식상한 사람들에게 "참여 민주주의"라는 신선한 모델을 제공한다.]

 

2-2. 국가에서 공동체로

 

사람들은 '공동체이론은 국가에 대해 적대적이며, 국가를 최소화하거나 폐지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이론 본래의 의도는 국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환원론'을 거부하고 다원적 가치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노직(R. Nozick)에 의하면 재산(富)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생산물(개인의 사적인 노동의 산물)이며, 부는 완전히 자족적인 방식으로 생산된다. 나아가서 이기적인 각자의 수입이므로 국가나 사회가 간섭할 아무런 권리도 없으며, 개인은 이를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노직은 이른바 개인의 '사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국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적 개인과 사적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주장되는 노직의 최소국가 개념은 공동체이론의 다원적 구조와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직의 주장은 개인과 사회는 '사적 개인'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환원론에 근거한 그의 이론은 국가의 사회적 기능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유주의도 아나키즘도 아니다. 굿이 말하자면 그것은 '자유방임 자본주의'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국가의 사회적 기능(폭력을 독점하는 지배구조, 행정부, 조세 징수제도가 아니라, 순수한 공공써비스 기능을 갖춘 영사국가)을 거부하지 않는다. 사회적 개인 및 집단이 자유로운 조직을 통해 국가가 진정으로 효과적인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만인이 동등하게 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있고, 사회생활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에 동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참여하며, 동등한 권리를 갖는 사회를 원했던 것이지 그런 사회를 포기하거나, 폐지하자는 주장은 아니었다. '국가주의'는 사회에 대한 부정성의 원리에 기초하지만, 진정한 공동체주의는 사회의 긍정성의 원리에 기초한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을 사회로 환원하지도 않고(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거꾸로 사회성의 원리를 전부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자본주의 사회체계)하지도 않는다. 공동체주의는 이자, 이윤, 지대를 제거한 새로운 교환관계를 도입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개인간의 호혜적인 교환경제체제로 대체하고자 한다.

 

공동체주의는 개인을 사회적인 것으로 보고, 공동체나 연대에 의한 협동을 사회성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예를 든 입장으로서는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19세기의 공동체 공산주의의 주창자 크로포트킨은 "사적 개인에게 생산수단에 대한 모든 통제력을 주는 것과 전체주의적 중앙계획에 따라 생산을 통제하는 것 양자를 모두 거부하는 하나의 새로운 경제체제"를 제안했다. 그 핵심은 모든 상품을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소유하며, 화폐를 폐지하고,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공동창고에서 공동생산물을 나누어 갖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주관리-협동생산체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모든 개인이 모든 생산과 분배가 공동체적, 공공성을 띤다면, 그래서 공동체만이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다면 개인은 어쩌면 아주 불건전한 의존성을 지니게 될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마찬가지의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개인은 공동체에 의해 받아들여질 때만, 그리고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는 집단이나 공동체를 조직할 때만 비로소 사회성을 가지며, 사회적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에, '자유로운 조직'과 '자율적 연대'라는 공동체 본래의 정신이 훼손될 수 있으며, 공동체는 유연성을 상실하여 자칫 국가나 정부처럼 경직되어 버릴 소지도 있다. 그러나 집단과 개인간의 불가피한 갈등을 폭력이나 권위(관료주의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개인이 자유로이 움직이고, 집단이 자유로이 조직, 해체, 분리, 재구성될 수 있는 유연성이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등장한다. 공동체 구성의 자연적인 유동성, 유연성이 매우 중요하다. 정태적(靜態的)인 공동체에서는 갈등, 폭력, 권위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시금 강제적이 되기 쉽다. 다원적 공동체주의는 개인의 활력과 개인과 집단간의 목적, 욕구의 다양성을 인정한다.

 

3. 공동체를 위한 경제

 

분배가 필요없는 사회라면 공동체는 모든 성원이 서로 얼굴을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가족이 먹기 위해 야채를 기르는 것은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시키지 않지만, 가능한 한 규모를 크게 할 경우 자본주의의 그것만큼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중앙집중화, 중심화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쓰레기나, 폐기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에너지생산을 최소화하며, 지역 환경문제를 지역 사람들에 의해 통제하는 등, 많은 환경적인 잇점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환경을 생각한다면 가능한 한 소규모의 공동체가 바람직할 것이다.

 

공동생산을 함에 있어서 익명에 의한 생산이 아니라, 아는 사람에 의해 생산되어야 한다. 누가 기른 배추인지, 돼지인지, 혹은 어느 집 과수원에서 자란 사과인지를 알고 먹는 수준의 공동체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대로 공동체 성원의 욕구가 자동차이거나, 지하철일 경우, 이 역시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 권위적인 규제없이 자유로운 공공체계(행정기능)의 운용은 가능한 한 소규모여야 할 것이다.

 

생산과 분배의 규모가 커지면 익명의 결핍 또한 커진다. 다른 말로 하면 진정한 결핍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는 의사결핍(Pseudo-Not)의 규모가 그만큼 커진다. 소비자는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소비에 대해 관심과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되고, 자본주의라는 거대창고(수퍼마켓)에서는 무책임한 소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바로 이런 소비체계 하에서 상품생산에 투여한 노동의 가치는 익명의 심연으로 소멸해 버린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대규모 중심화된 자유분배체계는 시장과 중심화된 권위주의적 분배체계에서 나타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괴리를 영속화시킨다. 자본주의의 시장 수요.공급체계를 통한 생산의 통제와 전체론적인 중심화된 계획에 의한 권위주의적 통제하에서는 필요에 부합하는 생산을 조절할 수 있는 체계로 발전하기 어렵다.

 

3-1. 교환방식

 

이윤이 없고, 이익, 차용, 지대가 없는 진정한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교환이론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공동체에 필요한 적절한 분배이론은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핵심인 사적 개인을 사회적 개인으로 대체함으로써 가능하다. 우리는 다음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공동체-경제이론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① 교환이란 무엇이며, 누구에 의한 교환인가? ② 교환을 지배하는 원칙들은 무엇인가? 그리고 ③ 생산물은 어떻게 필요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가? 반환원주의 원칙에 입각한 공동체주의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에 비해 새로운 대안적 지평을 열어 줄 것이다.

 

공동체 경제에서 교환구조에서는 지금까지 자본주의에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교환가능한 것들이 '교환금지'된다. 공동체 경제체제에서는 충분하지 않은 모든 것은 경제적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최소한의 제한조건만 만족시키면 무한정 교환될 수 있다는 자본주의의 가설을 정면으로 부인한다. 예를 들면 반환원주의에서는 토지는 교환대상이 아니다. 그 외에 어떤 생산수단도 교환될 수 없다. 지하자원, 공기, 물, 바다, 강, 삼림 등 모든 자연자원은 교환될 수 없다. 교환될 수 없으므로 값이 매겨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다. 부족할 경우에는 '사회적' 동의를 얻어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교환을 위해 사회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공동체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땅은 한번 소유하게 되면 그것의 공공적 성격이 소멸하여 전적으로 사적인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인 실체, 즉 '비사회적인 실체'로 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토지, 지하자원, 자연조건으로부터 돈을 벌거나 이득을 취할 수 없다. 취해서는 안된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값으로 매기는 다른 생산요소는 공동체에서는 더 이상 가치매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산수단으로서의 '노동'은 노동자의 급료 이상으로 팔리는 상품을 생산하는 개인 기업가에 의해 고용되어 이용될 수 없으며, 당연한 귀결로써 노동이 임금이라는 형식으로 팔리지 않으면 소위 '자본'이라는 것도 없어진다. 자본축적이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자본도 이제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개인적으로 '교환가능'하고, 공익(Gemeinwohl)으로 취급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개인적인 노동이 그것이다. 그리고 개인이 이전에 종사하던 분야에서의 '개인적인 생산'에 대하여 개인과 집단은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으며, 자유로이 결정된 교환이 개인에게 있어서나 사회 전체에서나 공히 이루어질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노동을 사회적 공익으로 취급하는 것은 개인적인 노동을 '사회적 생산'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적인 소유는 물론이고, 개인과 그 노동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부정하게 되고, 결국 전체론과 아주 유사한 가정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은 공공의 사회적 유산을 근거로 해서 순전히 자신의 노동을 투여해서 생산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생산물을 사적인 용도에는 물론이고, 그것을 교환에 이용할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최초로 교환되는 것은 생산물 자체가 아니라, 생산물을 산출하는데 투여된 노동이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교환되는 것은 생산물에 투여되어 표현되는 '노동', 그리고 그 노동의 결과로 나타나는 상품은 이차적이거나, 다양한 다른 형태로 소유되거나 교환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노동은 교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것은 공적인 것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이것만이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소유되거나 교환될 수 있다.

 

3-2. 노동교환이론


 

노동은 노동이라는 현물로 교환되어야 한다. 시장가격으로 교환되어서는 안된다. 노동 교환조건은 순수 노동이나 숙련 기술의 교환이어야 하며, 그래서 원칙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모든 것은 교환가격을 결정함에 있어서 유일한 가격 결정요인으로 만드는, 다시 말해서 "노동교환이론(Theorie der Arbeits-austausch)"으로 만드는 그런 교환체계를 필요로 한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교환을 지배하는 이론적 근거는 '노동교환이론'이지 고전경제학, 특히 고전적인 맑스 경제학에서 주장되어 온 '노동가치이론'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노동은 '가격'을 결정(그것은 당연히 등가교환이다) 할 뿐, 결코 '가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노동에는 많은 자연물, 생태계, 그리고 땅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고, 노동교환체계 내에서 이는 고유한 높은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자연생태계, 자연물, 토지는 그 자체로서는 인간의 노동을 전혀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그 가치는 인간의 노동이나, 활용에 의해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라는 고전적인 구분은 여기서 제시하는 가격과 가치의 구분과는 다르다. 가치란 인간의 활용 여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격이란 사실상 "시장의 메타퍼(Metaphor des Markets)"에 다름 아니다.

 

가격과 교환의 단순한 구분은 환경적인 이유에서도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 노동교환이론은 맑스의 이론의 가정(자연물은 무가치하다거나 자연물의 가치는 전적으로 인간의 노동, 혹은 이용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는 맑스의 주장을 상기하라)을 전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심각한 환경문제를 야기시켰던 맑스의 이런 전제는 노동교환이론에 포함되어 있는 전제와는 차원이 다른 전혀 별개의 전제조건이다. 노동교환이론은 노동가치이론에 늘 따라 다니는 불필요한 문제를 피할 수 있다. 개인이 상품 생산에 투여한 노동의 크기를 공정하게 계측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상호의존적인 이해관계와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적인 동의"에 근거해서 수행되는 공동체적 체계에 적절한 방식일 것이다. 필요를 평가하는 공정하고도 평등한 척도가 있으며, 이에 따라 분배하는 것, 혹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동체 차원에서 자유로운 분배를 위한 계획이나 체제에 구성원들이 동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신고전파의 논증은 결핍이 만인에게 평등한 결핍이라고 전제하고, 그렇기 때문에 교환가능한 것으로 보는 오류이다. 우연적이고 변경가능한 사회 조직을 마치 필연적이고, 변경불가능한 자연적 요소로 제시한다.

 

우리가 결론내리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 경제에서 교환가능한 것은 오로지 상품에 표현되어 있는 노동일 뿐이라는 점, 그리고 현실사회주의(공산주의)와는 달리 교환은 사회적 전체와 마찬가지로 개인이든 집단이든 그러한 노동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의 이기적인 관심의 극대화와 경제적 거래에서의 이윤과 이득의 극대화는 만약 그 사람의 관심이 타인의 관심과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일 경우, 더 이상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이기적인 관심을 극대화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광범위한 상호의존적인 이해관계와 상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적 개인이 타인의 이해관계를 희생시키고, 무시하여 자신의 관심사와 이익증진을 추구하는 것은 불합리이다. 고전 경제학에서 주장하듯이 자신이 만들어 낸 상품의 가격의 극대화가 합리적이라고 표현되는 이기적인 이해타산의 극대화는 사회적 개인에게 있어서는 불합리이다. 이기적인 이해타산을 가진 사적 개인을 전제할 때만 가격의 극대화는 합리적인 것이 된다.

 

문제는 교환 품목에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등가의 노동단위를 측정하는 적절한 원칙, 즉 교환을 지배하는 새로운 원칙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장이라는 기능에 의해 측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시장 말고 다른 어떤 기준을 통한 등가노동의 측정기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등가노동을 재는 한가지 변수로 모든 교환에 공히 포함되어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중요한 '시간'이라는 변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시간을 등가노동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는 사회주의 사상의 오랜 전통이다. 생산물에 투여된 시간은 등가노동의 어떤 기준에도 포함되어 있는 주변수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고, 다른 공동체에서는 등가노동을 재는 또 다른 원칙을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물건을 만드는데 드는 노동 시간에 의한 "등가노동계산"은 순수하게 생산물을 만드는데 소비한 시간이라는 의미로 등가교환이 결정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회에서 사회적 교환을 위한 평등주의적 토대가 확립된다. 물론 평등주의적 원칙, 혹은 그 어떤 노동등가의 원칙으로부터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이건 가치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교환은 상품교환이 아니라, 노동의 교환이기 때문에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동등함이란 '생산물의 동등한 가치'가 아니라, '노동등가'를 재는 것을 목표로 한다.

 

3-3. 공동체 공산주의에서의 생산

 

공동체 공산주의에서 생산은 어떻게 조절될 수 있는가? 사회주의자들은 당연히 중앙집권화된 계획과 통제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고, 반대로 자유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시장의 수요.공급의 매커니즘에 의해서 라고 대답할 것이다. 시장경제 하에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상호 만족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최대로 하기 위해 어떻게 타인의 욕구와 필요를 이용할 것인가 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생산자는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소비자의 욕구를 이용하고, 소비자는 거꾸로 생산자를 이용한다.

 

공동체 경제는 시장의 이런 비사회적, 반사회적 관계를 '협동적 참여'라는 사회적 관계로 대치시킨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서로 협동한다. 거기서 서로의 상호의존적인 관심사를 확인한다. 생산자와 구매자는 이제 익명으로 있지 않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자족적인 개인들의 집합을 공동체 성원들의 상호의존적인 집합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공동체 성원은 생산자, 소비자로 나누어지지 않고, 앨빈 토플러의 말대로 '프로슈머(Prosumer)'로서 생산과 소비의 '책임'을 공유한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의 전통사회에서 많이 통용되던 경제제도이다. 얼굴도 모르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시장이라는 익명의 심연(深淵)에서 만나 한쪽에서는 이윤을 챙기고, 다른 쪽에서는 필요와 욕구를 충족하는 경제구조 하에서 노동가치는 소외되고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책임이라는 원칙을 소멸시켜 생태적.환경적 위기를 재촉하게 되었다.

 

공동체 경제체제에서 생산은 일종의 사전 주문 생산방식이 이상적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가 강화되면 될수록, 노동은 소외되지 않고, 협동적 등가교환이 정착될 것이며,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환경친화적인 단순 경제체제로 이행할 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보이는 경제계획과 시장이라는 이분법이 사라지고, 공동체 성원들 스스로의 관리와 통제만이 있는 자율적이고 탈중심화된 계획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늘 그래왔던 것처럼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국가, 관료주의, 관료주의와 유착된 자본가 등 그 어떤 제3자도 개입하지 못하게 된다. 국가와 관료주의는 시장에 기생하며 이익의 일부를 뜯어 연명하는 기생충과 같다. 협동적 참여의 교환경제 하에서는 그런 기생충의 보금자리를 없애 버린다. 공동체 경제체제에서는 이윤을 노리는 거간꾼들(사업자, 국가, 관료, 자본가 등)이 들어설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므로 생산과 소비의 책임이 생산자와 소비자 자신들의 수중에 있게 되고, 그 결과 통제의 탈중심화가 가속화된다. 이로써 비로소 경제생활의 자주관리가 실현된다.

 

그러면 이러한 체제가 자본주의로 타락하지 못하도록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공동체 사회이론의 일반적 원리인 "개인이 생산수단이나 타인의 노동을 전면적으로 장악할 방도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은 타인에 대해서 경제적 혹은 여타의 권력을 장악할 어떤 체계나, 계획, 조직도 근본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4. 공동체 공산주의를 위하여

 

공동체 공산주의는 권력분산형, 자유분방형 사회주의를 선호한다. 따라서 공동체 공산주의는 사회적 책임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사회적 책임을 무시하고, 개인의 자유에 집착하는 노직(Nozick)류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거부한다. 공동체 공산주의는 개인의 독자성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상호의존성도 중시한다. 개성의 발전과 충만은 개인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평등한 상호협력관계를 북돋우며 사회의 다양성을 진작시키고, 권위주의적인 위계질서의 출현을 저지하는 각각의 이익단체들과의 '연대'를 강조한다.

 

공동체 공산주의는 현 사회에 대한 자본주의 생산양식 및 기타 다른 경제적 착취 때문에 생기는 불가피한 불평등과 억압적인 계급관계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원칙적으로 맑스주의와 다를 바 없다. 지역적으로 분산된 공동체는 국가에 의존하기 보다는 '연대와 연합'이라는 새로운 삶의 유형을 필요로 한다. 분산된 소규모 공동체는 현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거대도시의 환경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 거대도시에서 이웃은 그 진정한 역할을 상실했으며 사람들은 자족적인 삶을 누릴 수 없도록 조직되어 있다.

 

탈중심화된 공동체 공산주의에서는 가능한 한 규모가 작은 기술을 활용함으로써 환경적 부담을 덜어 준다. 예를 들면 화학비료 공장을 폐쇄하고 유기비료를 씀으로써 대규모 비료공장 플랜트는 필요없게 된다. 화학비료 공장을 가동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도 그 만큼 줄어 들게 된다. 개인 승용차 공장은 사적 개인을 위한 기술이다. 다시 말하면 승용차는 이기적인 운송수단이라는 것이다. 이를 자전거나 최소한의 전기버스로 대체하게 되면 자전거 산업과 버스 및 에너지산업은 사회적 기술로 환원된다. 문제는 자주관리 사회가 사적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수행하느냐이다.

 

생산을 협동적으로 조직하고, 권력을 급진적으로 탈중심화함으로써 자주관리되는 공동체 공산주의에서는 기술의 남용과 오용을 막고, 은밀하게 실험실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이나 소집단의 과학적 탐구를 사회적인 것으로 만듬으로써 자연스럽게 통제할 수 있다. 폭력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가 기술통제에 개입하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국가권력 자체인 것 같지만, 사실상 자본가의 개입에 다름 아니다. 국가자본주의의 개입은 결국 협동적 생산과 참여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노동의 구원에 있을 터이지만, 생태.환경이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기술의 선택은 언제나 자본주의의 논리인 '경제적 이유'로만 설명될 수 없다. 기술의 선택은 생태.환경의 위기 시대에 더욱 신중해져야 하며, 어쩌면 노동의 구원이라는 기술 본래의 목적보다도 우선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개인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물질적 풍요를 이룩해야 된다는 주장은 사회적 개인을 이해하지 못한 사적 개인개념을 기저에 깔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와 맑스-레닌주의는 그런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런데 결핍 때문에 생기는 경쟁과 충돌이 멈추려면 사적 개인들의 이해관계가 더 이상 무의미해 질 때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결핍된 물품을 위한 사적 개인들의 경쟁은 풍족할 때는 일어나지 않게 되고 풍요 위에서 자유로운 여가를 위한 경쟁만이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적 개인이 풍요를 성취하는 그곳에서 그는 사회적 개인이 된다.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지구의 자연자원이 풍족하지 못하고, 산업생산물이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 경쟁은 필연적일 것이며,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인 욕망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고. 이는 잘못된 전제로부터 이끌어낸 인간 개념이다. 간디(Gandhi)가 그랬듯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화는 각자의 소유욕을 채워 주기에는 모자라지만,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자주관리되는 공동체 사회는 생산자와 소비자간의 상호의존과 직접적인 교환관계로 복원함으로써 익명성과 이기적인 시장경제를 해소한다. 그리하여 공동체 공산사회의 개인은 타인은 물론이고, 자연계의 다른 피조물에 대한 배려와 관심, 그리고 책임을 실천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속에 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