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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08-10-25 오전 9:29:38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81025035719&Section=04

 

 

 

"'아나키'는 과연 힘이 셀까?"

[철학자의 서재]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

 

 

<프레시안>은 창간 7주년을 맞아 특별한 연재를 선보인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공동으로 진행할 이 연재는 바로 '철학자의 서재'이다.  
  매주 금요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한다. 이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책 고르는 안목이 더욱 깊고 넓어지리라 기대한다. <편집자>

  
  
아나코-코뮤니즘의 의미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은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이 쓴 <상호부조론>을 소개하면서 지은이 나름대로 아나키즘을 한국 상황에 재접목하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은 'anarcho-communism'이다.
  
  지은이는 이를 아나코-코뮨주의(또는 아나코-코뮤니즘)로 부른다. 이때 아나키즘의 약자인 아나코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일상생활 전체를 변화시키자는 대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개인의 대립'이라는 좁은 해석을 의미하는 무정부주의는 적절한 번역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코뮤니즘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원리를 담고 있는 '코뮨'(commune)이라는 공동체를 건설, 확산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크로포트킨은 '아나키즘적 코뮨 간의 연대'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고 지은이 역시 이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간다'는 원리는 마르크스가 <고타강령 비판>에서 공산주의를 규정할 때 말한 것인데, 이 책에는 그런 언급이 따로 없다. 어쨌든 1910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아나키즘 항목을 직접 집필한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아나코-코뮤니즘은 문명사회에서 수용될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형태의 공산주의이다. 따라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은 서로를 완성시켜주는 사회의 진화 방식을 지칭하는 두 가지 용어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로 대변되는 공산주의와 아나코-코뮨주의로 대변되는 아나키즘은 확실히 닮았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마르크스주의자(특히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는 상당 부분 서로 다른 길을 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 아나키스트의 쇠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기존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아나키즘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지은이는 생각하는 것 같다. 새로운 사회의 윤리이자 조직 원리로서의 상호부조, 그리고 그러한 대의를 전파할 수단인 '실행을 통한 선전'(테러리즘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런 과정을 거쳐서 도달할 새로운 사회인 코뮨, 이것이 아나코-코뮤니즘의 원리이자 목표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코뮨주의는 이진경의 코뮨주의(commune-ism)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진경은 '대중의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당(조직)' 그리고 '아곤'(agon)이라는 '적대적이지 않은 경쟁'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진경의 코뮨주의는 국가 장치와 자본 축적을 연관시켜 파악하고 그 힘에 포획되지 않는 유목, 국가에 대항하는 전쟁기계, 소수자들의 투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아나키즘과 유사하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아나키즘 개념과 아나키스트의 실천
  

▲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하승우 지음, 그린비 펴냄) ⓒ프레시안
 

  '사실'은 '선택'되는 것이고 선택되는 이유는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념화의 어려움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정치 조직·권력·사회적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 및 운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별로 시사해주는 바가 없다. 문제는 아나키스트들이 아나키즘을 어떻게 실천했고, 또 그들의 실천에 동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나키스트들은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다. 하지만 다음날 볼셰비키가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라는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자 당황하기 시작했고, 1918년 봄에는 볼셰비키와 갈라설 것을 결의했다. 이후 혁명을 되돌리려는 백군과의 내전 때문에 양자는 일시 휴전하기도 했지만 아나키스트의 몰락은 예견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은이는 아나키스트를 향한 볼셰비키의 잔혹성과 기만을 고발한다. 그러나 권력을 부정하는 아나키즘의 자유주의적 본성은 혁명을 지켜내고 완수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볼셰비키의 판단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나키스트들은 '권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가 보기에 그것은 정치 조직이었고, 권력을 지향하는 볼셰비키에게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사람들로 보였을 것이다. 볼셰비키는 인간이 비정치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아나키스트들을 혁명의 걸림돌로 생각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지도자들의 권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조직 여부는 아나키즘과 마르크스주의를 구별하는 기준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그 조직이 권위주의를 내포하고 있는가, 아닌가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나키스트 사전>(1935)을 인용하는데, 그에 따르면 "모든 아나키스트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회조직에서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이를 토대로 설립된 제도의 모든 규제를 증오한다는 것. 따라서 권위를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나키스트이다." 하지만 아나키스트가 이런 실천을 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크로포트킨은 바쿠닌의 동지 기욤이 이끌던 쥐라연합을 만나면서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그러나 바쿠닌이 죽고 기욤이 은퇴하자 아나키스트 운동이 급속히 구심점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1921년 2월 크로포트킨이 사망하자 러시아 아나키즘도 서서히 종말을 고했다는 점 등은 그 지도자들의 권위와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주는 것이며 권위를 거부하는 아나키즘 운동이 사실은 상당 부분 권위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인지 지은이가 소개하는 아나키즘 개념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아나키즘의 어원이 되는 단어인 그리스어 아나르코스(anarchos)는 '지도자가 없는', '선장이 없는 배의 선원들'을 뜻했다. 이것은 흔히 생각되듯이 무질서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도자나 선장이 없다는 없음(無)의 실재보다 누구라도 지도자나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有)의 여백이 바로 아나키의 질서이다. 고정된 질서를 억지로 강요하면 곧바로 생명을 잃어버리는 순수한 혼돈, 그것이 곧 아나키즘이다."
  
  분명하고(clear) 정확한(distinct)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곤란한 개념이다. 선장의 필요성 여부가 모호하게(obscure) 처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장 없이도 선원들이 지혜를 발휘하여 배를 잘 이끌고 나갈 수 있다면 선장은 없어도 된다. 아마도 이것은 아나키스트의 이상일 것이다. '누구라도 선장이 될 수 있다는 있음의 여백'은 선장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아나키즘 개념이 후자라면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 왜 그를 잇는 지도자가 바로 등장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나 선장이 될 수 없는 구조, 권위에 의존했던 실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전자가 아나키즘 개념이라면 그것은 실천된 바가 없고 실천할 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이 전쟁을 부르주아 권력 간의 식민지 시장 쟁탈전이라고 정확히 규정했음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총을 들었다.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전쟁에 뛰어든 것은 크로포트킨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의 아나키스트 운동에서도 오판의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신간회와의 대립이 그것이고, 해방 후에는 당을 결성하고 선거에 나선 것이 또 하나의 사례이다. 선장이 있었든 없었든 아나키스트 배는 산으로 갔다.
  
  지은이는 아나키즘의 쇠퇴 이유를 각국 정부의 극심한 탄압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본다. 그렇지만 어디 아나키스트만 극심한 탄압을 받았겠는가. 아나키스트 스스로 자초한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나키즘을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남 탓'보다 '내 탓'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상호부조론>과 진화론 그리고 유전자론
  
  지은이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서 다윈의 진화론을 새롭게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도킨스류의 유전자 중심론이 가질 수 있는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 하는 것은 증명하기 어려운 가설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장이 갖는 사회정치적 의미일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인간이 서로 돕는 존재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생존에도 유리하니, '코뮨'을 건설하고 코뮨끼리 연대하여 아나코-코뮤니즘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아나키즘이 필요한 이유는 '선장의 폭력과 독선' 때문이다.
  
  <상호부조론>의 1차적인 목표는 다윈이 주장한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호부조론>에서 주목할 것은 다윈이 알고 있었지만 발전시키지 않았던 면이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개체들 간의 생존 경쟁만이 아니라 협동과 도움이 최상의 생존조건을 확보하게 해 준다고 봤지만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많이 제시하지 않았고 추가적인 책을 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윈의 추종자들은 이론의 폭을 축소시켜 생존경쟁만을 강조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헉슬리이다.
  
  헉슬리는 다른 국가와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물을 더 좋게 만들어야 하는데, 노동비용은 생산비의 큰 요소이므로 임금 수준을 일정 정도 제한해야 한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 역시 자연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생존 경쟁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헉슬리의 주장은 다른 인종을 착취하는 백인이나,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때문에 크로포트킨으로서는 그와 논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은이가 이 책에서 공헌한 것은 <상호부조론>과 유전자 중심론의 관계를 보여주고 유전자 중심론이 갖는 사회정치적 의미를 밝힌 것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따르면 크로포트킨이 관찰한 자연계의 상호부조는 유전자가 생존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이기적인 행위의 일종일 뿐이다. 유전자에게서 발견되는 이타성은 본성이 아니라 어떤 보답을 고려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복지국가는 이기적 유전자가 지배하는 자연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적자생존을 통한 자연도태를 막으며, 더구나 바로 그 이타성 때문에 이기적인 개체들에 의해서 악용되고 남용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는 도킨스의 논의를 확장시킨 것이다. 그에 따르면 협동적인 인간은 이타적인 인간이 아니라 단기적인 이익보다 장기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다. 이타심이란 이기심을 전제로 할 때에만 가능한 '미덕'이며, 사적 소유권을 명확하게 하면 할수록 그것을 잘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이기심을 억누르고 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도킨스나 리들리의 논의는 복지국가의 활동 범위를 축소하자는 신자유주의적인 논리에 기여할 위험이 있기도 하다.
  
  아나키즘과 접속 가능성이 있는 운동들
  
  지은이에 따르면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아나키스트들이 보여준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는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자본의 세계화'를 거부하는 운동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운동은 반(反)세계화운동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이라는 것이다. 세계화 그 자체에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연대' 때문일 것이다.
  
  지은이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이 아나코-코뮨주의와 일정 정도 친화성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조정환의 <아우또노미아>(2003)를 인용하면서 자율주의운동과 아나키즘은 여러 면에서 아나키즘과 접속가능성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을 토대로 국가에 맞서 코뮨을 부활시키려는 이진경의 코뮨주의도 아나키즘과 접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접속 가능성이 아나키즘 개념의 모호성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오늘날의 운동은 확실히 엘리트에 의한 지도나 전위를 거부하고 대중들의 자율과 자기 결정을 존중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습 속에는 대중들을 자율적 주체로 호명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가 있을지도 모른다. 대중들이 자신을 주체로 판단하면 운동 지도부는 '지도하지 않는 지도부'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

 


/이순웅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3부장·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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