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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의 왜곡과 '무늬만' 아나키스트
도끼 2003.11.16
출처 : 아나클랜 / http://myhome.naver.com/anar/
세상을 살다보면 더럽고 아니꼬운 일을 많이 겪는다. 그 중에서 가장 아니꼽고 더럽게 느껴지는 일이 호박씨 까는 짓이다. 뒷구녕으로 온갖 못된 짓을 다하면서 겉으론 선한 듯 행세한다면, 게다가 그런 선한 표정을 하고 슬며시 자기 잇속까지 채운다면, 한마디로 ‘왕재수’다.
● 너희가 아나키즘을 아느냐?
신문은 객관적이지 않다. 신문의 건조한 어조는 사실이 드러나는 사회적 맥락을 감추고 전혀 다르게 뒤바꿀 수 있다. 최근의 사실을 보자. 조선일보는 노동자대회를 다룬 기사 제목을 “쇠파이프…화염병…되살아난 격렬시위!”로 뽑았다. 이 제목에서는 쇠파이프와 화염병이 다시 등장하게 된 그 절실한 이유, 직권중재와 가압류에 짓눌린 노동자들의 고통이 드러나지 않는다. 마르쿠제Herbert Marcuse는 이런 태도가“분노해야 할 때 침착하고 사실 자체가 죄상을 나타낼 때 그것을 고발하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인류애와 진리를 파괴한다”고 얘기했다.
조선일보는 극우반공주의, 안보이데올로기를 팔아서 기득권 세력과 결탁했고 자신들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폭도나 홍위병으로 몰아세워 왔다.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희생시켜 자신들의 배를 채웠지만 그것이 들통나자 언론의 자유를 부르짖는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 반공이라는 약이 잘 듣지 않고 극우보수의 실체가 드러나자 조선일보는 진보적인 척 가장하면서 좌파를 비판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찾는다. 그게 바로 아나키즘이다.
조선일보의 김기철은 아나키즘 관련 기사와「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자유인 루쉰」, 「한국의 아나키즘」을 다룬 조선일보의 아나키즘 전문가(?)이다. 그리고 유석재는 「가네코 후미코」, 「카뮈를 위한 변명」, 「아나키즘의 역사」에 대한 서평을 쓴 차세대 전문가이다.
김기철은 “아나키즘은 공존의 철학을 담고 있고",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강조하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제시하는 아나키즘이 시민운동과 이념적 친화성을 갖는다"며 긍정했다. 그리고 유석재는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근대 일본 전체에 대한 비판과 대결”이라며 칭송한다. 겉으로 보면 조선일보는 아나키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진보적인’ 신문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전혀 다르다.
2003년 3월 18일자에서 김기철은 “진보적 지식인들 ‘권력과 거리두기’ 나서”라는 선정적인(?) 제목으로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는 손호철, 박홍규를 인용한다. 그리고 2003년 5월 17일자에서도 김기철은 <당대비평> 특집을 빌어 “일부 진보성향 지식인들, 노무현 정부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윤평중, 박홍규, 박형준의 글을 소개한다. 조선일보가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도구’로 아나키즘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특히 김기철은 박홍규의 「자유인 루쉰」에 대한 서평에서 루쉰을 교묘하게 왜곡한다. 알다시피 루쉰은 중국의 기득권층에 맞서는데 열정을 바친 투사였다. 하지만 그의 글은 이 얘기를 빼고 다른 얘기를 살짝 삽입한다. 루쉰은 “1920년대 이래 중국을 휩쓴 민중주의에 대해서도 칼끝을 겨눈다.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반드시 다수로써 소수를 억압하면서 대중정치라는 구실을 붙이는데, 그 압제는 오히려 폭군보다 더욱 심하다’” 김기철이 얘기하는 민중주의는 누구를 겨냥한 것일까? 김기철은 조선일보가 잃어버린 권력과 조선일보에 도전하는 운동을 비판하는 도구로 아나키즘을 왜곡한다. 조선일보가 소개한 바 있는 러시아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말을 그에게 전한다. “자신의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대중을 섬기기 위해서 올 사람들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유석재는 한 술 더 뜬다. 2003년 10월 14일에서 유석재는 김영일 씨가 번역한 한국전쟁을 다룬 앤서니 파라-호커리의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이라는 책을 소개한다. 제목이 멋있다. “요즘 젊은이들 전쟁의 참모습 바로 알아야.” 예전에 MBC PD수첩이 한국의 극우를 다룰 때 많이 나왔던 발언 아닌가. 그리고 2003년 10월 23일자에서 유석재는 식민지권력에 맞섰던 義士 김상옥을 소개하면서 별로 관계없는 조선일보 얘기를 늘어놓는다. “김상옥 의거는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끈질긴 보도를 통해 조선 민중에게 소상히 알려졌다.…박성수 총장은 “당시 일제 감시하에서의 위험을 무릅쓴 보도는 독자들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상세히 알리면서 애국심을 고취한 항일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조선일보가 친일행각을 벌였다는 건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제 하이라이트이다. 10월 29일자에서 유석재는 박정희가 16살에 쓴 동요를 발견했다며 흥분한다. 반공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역사를 왜곡하고 독재자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나키스트를 칭송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는 아나키즘이 ‘자유를 향한 끝없는 열망’이라는 장 프레포지에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걸까? 자유를 향한 그의 열망은 박정희와 반공에 대한 ‘향수’일 뿐이다.
조선일보는 식민지 시대의 아나키스트 박열을 ‘열사’로 칭송한다. 그 이유는 뭘까? 조선일보가 “1910~1920년대 사상계 판도를 재구성한 역작”으로 소개한 이호룡의 「한국의 아나키즘」은 박열이 허무주의 경향을 심하게 띠다 결국 일본천황에게 자비를 구하며 사상전향을 했다고 얘기한다. “우리 조선인은 자신의 존립을 도모하기 위해서도 장차 세계역사의 창조에도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도 속히 內地人과 합체하여 신민족을 형성하고, 빨리 內鮮融合을 완성하여 일한병합의 실을 거할 필요가 있다”(p.250 각주 138). 하지만 조선일보는 “20년의 옥살이를 하고 일본의 패전으로 출감한 박열은 한국거류민단장을 하다가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고만 쓴다. 아마도 조선일보는 ‘전향’보다 ‘납북’이란 사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의회란 국가라는 이름의 대강도단의 소두목 회의”라고 주장한 과격한 아나키스트를 ‘열사’로 칭송하는 이유는 조선일보처럼 ‘배신’의 역사를 가져서가 아닐까?
● 이들이 아나키즘을 얘기할 수 있을까?
호박씨를 까는 건 조선일보만이 아니다. 조선일보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아나키즘 이론가들도 사뭇 의심스럽다. 그들은 조선일보와 묘하게 결탁해 있다.
2001년 2월 한국아나키즘학회가 출범하자 조선일보는 제1대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을 맡은 김성국을 인터뷰한다. “각종 안티(anti) 운동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의도적인 질문(!)에 김성국은 “억압에 대한 거부가 될 수 있지만 또 하나의 파시즘이 될 소지가 있다”는 정답을 얘기한다. 너무 순진한 것일까, 아니면 한국 현대사에 무지하기에 안티조선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학회를 설립하게 된 계기”를 묻자 “98년에 부산 아나키즘 연구세미나에서 첫 제안이 나왔다. 구승회(동국대), 박연규(경기대), 방영준(성신여대)교수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여했다”고 대답한다. 참 모를 일이다. 아나키스트들이 ‘한국’아나키즘학회를 만든 이유는 뭘까? 국가를 거부한다는 사람들이 지역학회의 ‘연합’이 아니라 ‘한국’학회를 만들다니, 어이없는 일이다.
또 1999년에 조선일보는 ‘새 틀 짜는 지식사회’라는 기획 중 하나로 ‘에코 아나키즘’을 소개한다. 이 글에서 에코 아나키스트로 소개된 구승회는 놀랍게도 “그는 녹색외투를 걸친 마르크시스트를 싫어한다. 아나키스트의 자격으로 일정한 정도의 교양과 고상한 도덕을 든다. 이제 감성이 아니라 이성에 호소하는 에코 아나키즘이 돼야한다”는 생각을 얘기한다. 아나키스트에도 ‘자격심사’가 있다니 처음 듣는 말이다.
그래도 일단 인내심을 발휘해 구승회가 세계일보에 쓴 시론에서 그 자격 요건을 찾아보자. 2002년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승회 교수의 시론은 “촛불시위 이젠 자제를”이다. 그는 미국이 “특별한 우방”이고 “세계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며 자제를 요구한다. “국민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상호 대등한 한미관계를 바라는 국민의 순수한 충정은 이미 노무현 대통령 당선으로 확인되었으며, 몇 차례의 촛불시위로 대외적으로 충분히 각인됐다.” 세상에, 아나키스트의 입에서 “국민의 순수한 충정”이라니. 2003년 6월 24일에는 조선일보의 지면을 빌어 노무현을 비판한다(충정은 어디로 갔을까?). “문제는 대통령 선거라는 대규모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런 명백한 악행인 시기심을 ‘도덕적 의분(義憤)’으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눈엣가시 같은 언론 권력에 맞설 건설적인 승부수가 없기 때문에 권력의 경쟁적 시기심을 정의로운 분노라고 호소한다.” 그는 조선일보와의 싸움을 권력욕과 시기심으로 전락시킨다. 세계일보 2003년 10월 11일자에 쓴 글은 더 가관이다. “불행히도 한국 시민운동은 충분히 합리화되지 못한 시민사회로부터 태어난 미숙아였다. 대화할 것과 행동할 것, 비판할 것과 관용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권위주의의 타도라는 명분으로 모든 전승 가치와 권위를 허물고 있다.…개인들은 처음에는 고향과 출신대학이 어딘지에 따라 친소관계를 정하다가, 언제부턴가 무슨 신문을 보느냐에 따라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서글픈 파쇼’가 돼 ‘적과의 불행한 동거’를 시작한다. 더욱 놀랍고도 안타까운 사실은 대부분 진보적인 시민운동 단체가 이런 경향을 부추기고 편승한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자유주의 정신에서 출발한 한국 시민운동은 모더니티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명백히 반현대의 길, 중세로의 길을 간다.” 그렇다면 기득권층과 야합해서 권력을 유지하려는 조선일보가 근대의 길을 걸어가는 걸까? 구승회, 그는 아나키즘 이론가이지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아나키즘은 그의 시론(屍論, 죽은 논의)에서 열정을 잃고 차갑게 식는다..
조선일보를 보면 안타까운 인물이 있다. 바로 초야에 묻혀 40권이 넘는 책을 쓴 시대의 ‘딸각발이’ 박홍규이다. 선비라서 그런지 그는 앞서 봤듯이 자신의 글이 교묘한 배치를 통해 다른 맥락으로 이용되는 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2000년 1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박홍규는 “우리 사회의 온갖 고질적인 문제가 국가주의에 있”고 “국가의 폭력에 저항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지키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법의 목적이고 정의의 본분이라면, 국가에 대해서 강력하게 안티테제를 거는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선택했다고 얘기한다. 한국사회에서 조선일보는 국가주의를 조장하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아 왔다. 그렇다면 조선일보에도 안티테제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박홍규가 사용하는 ‘자유, 자치, 자연’이라는 틀은 너무 커서 걸러내는 ‘체’가 아니라 ‘그릇’ 같다. 그래서 그 그릇에 담기면 모든 사람들이 아나키스트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그 그릇에 슬며시 발을 들이밀려 한다. 그래서 현실로부터 초연한 것이 악용될 수 있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렇게 얘기한다.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현실을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의미를 갖습니다.…보잘것없다고 생각하여 결국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그런 현실이 점차 쌓이게 되고, 그것 자체가 사회를 일정한 방향으로 밀고 나가게 됩니다.” 조선일보에 일갈(一喝)을 가하는 박홍규의 ‘결단’을 기대한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나키즘이 아니라 아나키스트이다
아나키즘이라는 ‘기호’가 한국를 배회하고 있다. 아나키즘이 꽉 막히고 답답한 사회에 지친 사람들을 매혹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사상은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용당하기 쉽다. 이 거친 한국의 현실에 필요한 것은 추상적인 아나키즘 ‘이론’이 아니라 그것을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아나키스트’들이다.
아나키즘을 부르짖는 지식인들이 진정 아나키스트이고자 한다면 지금이라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기득권층과 조선일보에 맞설 것인가, 아니면 그들과 영합해서 교묘하게 이득을 추구할 것인가? 그 사이의 틈이나 제 3의 대안은 없다. '직접행동', 아나키스트의 구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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