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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화제의 책] 알랭 바디우·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by 마리산인1324 2010. 10. 12.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0313

 

 

 

비판적 지성들, 새로운 논쟁 위해 調書를 제출하다

[화제의 책] 알랭 바디우·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김상운·양창렬·홍철기 옮김, 난장, 2010)

2010년 05월 03일 (월) 17:01:57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재발명을 요구한다!”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바디우를 비롯한 명성 자자한 저자들은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란 부제를 제시한다. 민주주의는 늘 더 많은 논쟁 속에서 단련된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 말의 이면에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모순과 역설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도 잠복해 있다. 도대체 부고장을 받은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일까. 8명의 사상가들은 이 문제에 각기 다른 진단과 해법을 던지며 그 주장들 사이로 새로운 논쟁의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한다. 원래 책의 원제는 『D′emocratie, dans quel ′etat?』 즉, ‘민주주의, 어떤 상태에?’였지만 번역자들은 더 강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원했다. 세계의 비판적 지성들은 오늘날 민주주의를 어떻게 진단했을까. 그 내용을 발췌·요약한다.

 

조르조 아감벤 베니치아건축대 교수(철학·미학)에 따르면 오늘날 인민주권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 채 행정과 경제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아마도 서구 민주주의가 아무런 조건 없이 수용했던 유산의 대가를 치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통치를 단순한 행정부로 파악하는 것은 서구 정치사의 오랜 오해에서 비롯된 오류 중 하나다. 그 이유는 근대성에 대한 정치적 성찰이 법, 일반의지, 인민주권 같은 텅 빈 추상 개념 뒤에서 방황할 뿐 정작 모든 점에서 볼 때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기 때문이다. 사유가 이 모든 모호한 어법과 씨름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토론은 탁상공론이 될 위험이 있다.

알랭 바디우 파리고등사범학교 명예교수(철학)는 민주주의적 인간은 순수한 현재만을 산다고 주장한다. 오늘 기름진 진미를 먹은 사람이 내일은 부처를 위해 금식한다. 청정수를 마시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 이런 사람은 사업에 뛰어들 게 분명하다. 그들은 점심을 먹으며 정치를 논하다가 흥분해 격양된 채 소비사회를 비난한다. 저녁엔 영화관에서 허접한 블록버스터를 본다. 잠자리에 들 땐 예속된 인민들의 무장해방에 가담하는 꿈을 꾼다. 그 다음날 과음으로 목이 칼칼해져 일터에 나가서는 옆 사무실 비서에게 수작을 걸며 삽질을 해댄다.

 

   
   

다니엘 벤사이드 파리8대학교-뱅센느·생드니 교수(철학)는 민주주의가 스캔들을 일으키는 한에서만 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 민주주의는 살아남으려면 더 멀리 가고, 그것의 제도화된 형태들을 영구히 위반하며, 보편적인 것의 지평을 뒤흔들고 평등을 자유의 시험대 위에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불확실한 나눔을 뒤흔들고 사적 소유로 인한 피해와 공적 공간과 공공재에 대한 국가의 침해에 필사적으로 항의한다. 민주주의는 항구적으로 모든 영역에서 평등과 시민권의 접근을 확장시키려 애쓴다.


웬디 브라운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교수(정치학)의 질문은 끝이 없다. 인민의 지배가 오늘날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좌파에게 민주주의 투쟁이 아닌 새로운 정치형태를 발전시키라고 요청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자기-입법할 수 있도록 공유돼야 할 권력들에 인민이 접근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가 약속한 자유는 인간이 바라는 어떤 것일까. 민주주의에는 어떤 종류의 영토나 경계선이 필요할까. 설령 우리가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전히 가장 어려운 질문 하나는 그대로 남을 것이다. 데모스는 어떻게 권력들을 식별하고 그 권력들을 공통으로 잘 다룰 수 있게 될까.


장-뤽 낭시 스트라스부르대 명예교수(철학)는 우리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즐겨 그렸던 경건한 이미지와 달리 아테네 민주주의 역사는 늘 스스로를 걱정하고 재발명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모든 문제는 민주주의의 무능력에 종지부를 찍을 로고스의 지배를 탐구하며 생겨난 것이다. 사실 이 탐구는 많은 변형을 겪으며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 변형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와 주권을 통해 공법의 확실하고 자율적인 기반을 세우려는 시도다. 태어날 때부터 민주주의는 토대가 없음을 자각했고 이것은 민주주의가 가진 기회이자 약점이다. 우리는 이 기회와 약점이 각각 어디에 걸리는지 따져봐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교-뱅센느·생드니 명예교수(철학)는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생각해보면 민주주의란 단어는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발명됐던 서구에서는 그 단어의 마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한국의 경우 불과 20년 전에야 독재가 무너졌고, 인민의 집단적 힘이 스펙터클한 형태로 거리를 메우기도 했다. 어떤 단어를 버림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어떤 힘으로 무장하고 무장을 벗게 되는지 아는 게 문제라면 민주주의를 대체할 단어는 없다.


크리스틴 로스 뉴욕대 교수(비교문학)는 랭보의 시 ‘염가판매’를 언급한다. 소비재와 서비스가 일상적으로 우리를 맹공격하는 상황 속에서 혁명적 외침과 광고 문구는 서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모든 인종, 사회, 성별, 후손을 따질 수 없고 값을 매길 수 없는 몸을 판매합니다!” 이 시의 동시대적 감수성은 20세기가 랭보의 시대 때부터 시작된 소비주의를 도착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와 동일시해왔던 태도와 관련된다. 이때 민주주의는 구매할 권리로서의 민주주의를 말한다.


슬라보예 지젝 류블라냐대 이론정신분석협회 대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 주체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텅 빈 틀임을 강조하려 했던 게 아니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이 텅 빈 틀에 기입된 계급적 편향을 지적하려던 것이다. ‘규칙 변경’이라는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 기제들만이 아니다. 선거로 집권한 급진 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 등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하고 그에 따라야 한다.

 

정리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