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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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것으로서 ‘있는’ 사유의 샛길은 어디로 나 있을까 | ||||||
[이택광의 세계사상지도 읽기] <2> 프랑스철학과 내재성의 탐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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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철학의 영향으로 프랑스는 이제 ‘철학의 나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보기와 달리 프랑스에서 프랑스산 철학이 반드시 환영을 받는 건 아니다. 현실의 프랑스인들을 만나서 듣는 이야기들에 따르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프랑스를 보수주의 쪽에 가깝게 위치시켜야할 것 같다. 한국처럼 프랑스에서도 지식인에 대한 ‘단죄’는 여지없이 일어난다. 마치 친일파 문제처럼 프랑스를 지배하는 정서는 상당히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있는데, 발리바르가 슈미트를 복권시킨 뒤에 친나치적인 철학자로 비난을 감수해야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런 프랑스사회의 보수주의를 이해해야 프랑스산 이론들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고찰해야할 이론적 지형도의 한 구석에 사르트르가 위치해야할 이유는 명확하다. 실존주의보다도 삶의 방식으로 프랑스사회를 뒤흔들었던 이방인의 이미지에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많은 사유들이 출발했다. 사르트르는 고향집에 남겨놓고 온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들뢰즈도, 바디우도 젊은 시절에 모두 ‘사르트리언’이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빼먹을 수 없는 이론가로 라캉이 있다. 들뢰즈가 사르트르와 결별했던 결정적 이유는 바로 ‘휴머니즘’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라고 선언하며 ‘역사의 쓰레기통’에서 이 낡은 시계를 다시 찾아냈을 때, 들뢰즈는 분노에 차서 비판을 가했다.
라캉과 사르트르의 ‘주체의 해체’ 라캉이 말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는 통찰은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생각할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판본과 거울상을 이룬다. 물론 사르트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생각’ 이외의 존재방식 즉 감정, 상상력, 감각, 꿈같은 것이다.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코기토 없는 주체’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르트르는 휴머니스트처럼 보이지만 라캉과 공모하고 있는 것이다. 라캉은 니체가 쇼펜하우어에 빗대어 말했던 놀랄만한 반휴머니즘의 ‘교육자’였고, 레비스트로스나 푸코와 마찬가지로 현대철학사상의 창시자들 중 하나로 간주됐다. 라캉의 세례는 강렬해서 1960년대 반휴머니즘의 논리를 정교하게 만들고 강화시킨 계기들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르가 라캉의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다. 물론 완전히 라캉에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나 푸코가 마침내 ‘주어진 시대의 순간에 생산되는 주체’로 관심을 돌렸을 때, 하나의 결정적 문제를 사르트르와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대적 진보와 실천, 그리고 사건의 결과로 주체를 정의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투에서 사르트르를 읽어내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푸코의 발언은 앞으로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주체화’에 대한 하나의 출구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주체가 아니라 주체화(sujectivation)라는 명제는 ‘나의 세분화’라는 사르트르의 기획에서 핵심적인 범주였고, 이 또한 철학에 대한 라캉의 공헌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모든 이론들이 사르트르와 라캉으로부터 출발했다는 말을 지금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두 거인의 영향력을 빼놓고 이론의 지형도를 그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한다.
들뢰즈와 모든 사유의 출발점, 생명
사르트르와 라캉이 제시한 것들은 공고한 환상으로 존재했던 주체의 해체였다. 들뢰즈는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보다 훨씬 많이 나아간 이론가였다. 사르트르를 일컬어 외부라고 한 것은 데카르트, 후설, 사르트르, 그리고 레비나스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지형도에 비견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와 달리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메를로 퐁티로 흘러내리는 계류에 발을 담그고 있다. 퐁티는 들뢰즈와 같은 지세에서 무기적 사물과 융합돼 있는 생명에 대해 고민했다. 이들에게 주체는 특권을 부여받을 수 없는 허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고정점을 만들어낸 주체라기보다 주체화였다. 그러나 이들에게 더 시급했던 것은 주체라기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재성에 대한 탐구였다고 볼 수 있겠다. 내재성은 생각보다 그렇게 ‘내재’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모든 사유를 출발시키는 하나의 차원, 바로 생명 자체이다. 메를로 퐁티에게나 들뢰즈에게 생명은 유기체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생명은 무기체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주체화를 사물의 융합과 섞어버린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은 주체화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이들에게 주체화는 ‘~인양 굴기’이다. 그래서 들뢰즈에게 ‘사유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면, 사르트르와 라캉에게 중요한 것은 ‘거기 사유가 있다’라는 사실이다. 주어진 것(es gibt)으로서 ‘있는’ 사유,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하이데거로 돌아가는 샛길을 발견한다.
이택광 /경희대·영미문화이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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