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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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 둘러싼 지적 고민과 이론의 콜로세움 | ||||||||||||
[이택광 교수의 세계사상지도 읽기] <1> 탈정초주의의 등장과 흐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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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창간18주년을 맞아 ‘동시대 사유의 주목할만한 경향을 짚어내고, 논쟁점을 확장하기 위한 학술기획’으로 ‘이택광 교수의 세계사상지도 읽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문화이론을 전공한 젊은 연구자로, 『무례한 복음』, 『세계를 뒤흔든 미래주의 선언』,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 등의 저서를 상재한 바 있습니다. ‘이택광 교수의 세계사상지도 읽기’가 우리시대의 다양한 思惟의 흐름과 경향을 읽어가면서 지식의 최전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폴 리쾨르가 1957년 『정치적 역설』을 집필했을 때만 해도 오늘날처럼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는 버릇은 존재하지 않았다. 리쾨르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 책을 썼는데, 주장의 요지는 “권력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권력의 역사만이 되풀이될 뿐이라는 이런 비관적 전망은 ‘선한 권력’이라고 유럽의 지식인들이 믿었던 소련이 자신의 적과 동일한 방식으로 혁명을 진압하는 현실에 대한 성찰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발생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권력에 대한 급진적인 사유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겉으로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는 정치가 실제로 반동적인 역할을 수행할 때, 이를 어떻게 봐야할 건지에 대한 의문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정치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발상은 궁핍한 진보주의의 현실을 보완하기 위한 요청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의 합리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가치전도는 더욱 심화한다는 것이 이런 생각에 깔려 있는 전제였다.
프랑스 철학자들보다 빨리 슈미트의 문제의식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철학자는 발터 벤야민이었다. 철학과 철학하기를 구분했던 벤야민의 생각은 슈미트의 분법을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철학사에서 이 사실은 썩 유쾌한 에피소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나치로 인해 목숨을 잃은 벤야민과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했던 슈미트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과 별도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방식이 슈미트로부터 내려온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분리에서 논의 출발 정치적인 것을 정치로부터 분리해내는 ‘개념적 전환’은 이론적으로 중요한 계기들을 만들었다. 이후 전개된 정치철학에서 제기한 중요한 논제들은 대개 여기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이론가들은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을 하나의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최근 한국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는 랑시에르, 르포르, 라클라우 등도 정치와 정치적인 것의 분리라는 전제에서 자신의 논의들을 출발시키고 있다.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이들을 큰 범위에서 ‘탈정초주의’(post-foundationalism)라고 부르는 명명법이 주목 받고 있다. 이른바 미국에서 과잉 생산된 포스트담론에 대한 하나의 교정으로서 이 용어가 등장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탈정초주의(또는 포스트정초주의)라는 정의 또한 포스트구조주의나 포스트모더니즘처럼, 본인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특정 이론가들에게 모자를 씌우는 역할을 할 수가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한다. 우리에게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유행으로 다가왔던 60년대 이후 프랑스 철학들은 생각보다 복잡한 변별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그룹에 속한다고 거론되는 본인들이 한 번도 자신을 ‘포스트이론가’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마치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그렇듯,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용어도 남용의 여지가 다분하다. 기본적으로 이런 이론들은 구조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들을 고민했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공유한다. 탈정초주의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론들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포스트구조주의가 물질적 차원의 ‘토대’를 부정하는 것이라면(과연 그런가?), 탈정초주의는 이 토대를 긍정한다는 것이 중론인데, 물론 탈정초주의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기에서 이들이 지칭하는 그 토대는 수미일관하거나 인과적인 성질을 갖고 있지 않다.
하이데거주의와 이론 계보의 발생론적 탐색 실제로 포스트구조주의가 시학을 진리의 표준지표로 삼은 까닭은 하이데거의 영향 때문이었다. 바디우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철학의 임무를 시학에 기탁함으로써 위기의 국면을 해소하고자 했다. 바디우의 주장을 좀 더 확장한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이런 하이데거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포스트구조주의를 비판하는 탈정초주의가 하이데거주의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하이데거주의를 좀 더 급진적으로 변형한다고 볼 수 있다.
새롭지 않은 것을 가지고 새롭다고 생각하는 착각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실로 재난적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를 가장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는 이론가는 바디우인 것 같다. 탈정초주의의 문제점을 적절하게 인식하고 있는 까닭에 바디우는 정치철학에 반대하는 이론가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바디우는 정치라는 범주로서 모든 진리의 척도를 세우려는 경향에 대해 비판적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빌려와서 그가 내세운 공가능성이라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상당히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디우는 정치뿐만 아니라 예술, 과학, 사랑에서도 진리가 생산될 수 있고, 이렇게 생산의 절차는 다르지만, 이를 통해 만들어진 진리는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이런 바디우의 생각은 현명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정치철학으로 대체할 경우, 또 다른 봉합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바디우가 봉합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하나의 진리표준을 내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주의의 봉합이 바로 시학이었다고 한다면, 하이데거주의를 좌파적으로 전유하는 정치철학은 정치학으로 철학을 봉합하는 것이다. 바디우에게 철학은 그 자체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진리를 판독하는 역할을 갖는다. 바디우의 입장에서 오늘날 인기를 누리고 있는 정치철학은 존재론을 정치학으로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적인 것이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의 다른 이름이라는 말이다. 정치철학을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일까. 낯설지만 흥미진진한 이론의 콜로세움으로 우리는 이제 막 들어섰다.
정초주의 철학의 콜로세움을 구축한 사상가들. 왼쪽부터 폴 피쾨르,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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