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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주 유림과 21세기 한국 아나키스트 정치



김 성 국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전 아나키즘학회 회장)



 

목 차

 

 

 

 

Ⅰ. 서언 

Ⅱ. 유림과 한국 아나키즘의 변호(1) 

Ⅲ. 유림과 한국 아나키즘의 변호(2) 

Ⅳ. 유림과 한국 아나키즘의 변호(3) 

Ⅴ. 21세기 한국 아나키스트 정치를 위하여 

Ⅵ. 결어 

 


Ⅰ. 서언

 

단주 유림(이하 ‘유림’으로 호칭)의 아나키즘 사상의 정수는 “아나키스트 정치참여론”에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유림의 독창적인 아나키스트 정치론을 근거로 하여 21세기 한국 아나키스트 정치의 방향을 제시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 운동 혹은 아나키스트 정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에 대응하여, 이미 필자(2001)는 유림의 아나키즘에 관한 연구과정에서 한국 아나키즘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는 이호룡(2000)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그런데 이호룡(2005)은 필자의 비판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재반론을 제시함으로써 아나키즘의 이론적-실천적 내실화를 축적할 뿐 아니라 한국 아나키즘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먼저 유림의 아나키즘에 대한 이호룡(2000)의 1차 비판과 이에 대한 필자(김성국, 2001)의 재 비판을 간략히 소개하고,1) 뒤이어 필자의 비판에 대한 이호룡(2005)의 반론과 필자의 재반론을 제시하겠다. 끝으로 유림의 독립노농당 정치노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21세기 한국 아나키스트정치의 좌표를 설정해 볼 것이다.


Ⅱ. 유림과 한국 아나키즘의 변호(1)

 

유림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의 임정참여를 두고 이호룡(2000: 180-94)은 “아나키즘에서의 일탈”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논란은 이미 스페인혁명에서 아나키스트의 정부참여와 관련하여 제기되었고,2) 최근에는 아나키스트 크럼(Crump, 1996: 46-47, 49)이 한국아나키즘을 “아나키즘의 기본 원칙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무시하였으며, 그 일탈의 빈도나 정도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매우 심각하다"고 비난한다. 특히, 유림에 대해서는 그가 아나키즘을 ”일종의 자유주의적 개념(a liberal concept)"으로 축소시키며, "어떤 형태나 어떤 종류의 정부도 강제적이며 자유의 속박을 초래한다(government in any shape or form is coercive and entails the surrender of freedom)"는 아나키즘의 가장 기본원칙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3)


이호룡(2000: 180)에 의하면, 한국 아나키즘의 일탈화는 재일본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이 1934년 1월 30일에 결성된 일본 무정부공산당의 민중독재론과 중앙집권적 조직론을 수용하면서부터 확산되기 시작한다. 나아가, 1937년 12월 재중국 조선인 아나키스트조직인 조선혁명자연맹의 민족통일전선의 행동강령도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권참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의 투쟁 강령에도 군대창설로 연결되는 민주집권제가 채택되어 자유연합주의를 폐기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국가와 정부에 대한 입장 변화를 이호룡(2000: 193-194)은 “우선 민족혁명을 통해 한국 민족을 해방시킨 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시행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아나키스트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는” 단계혁명론으로 규정한다.


그리하여, 이호룡(2000: 194)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일방적으로 왜곡되게 도출한다:


“그러나 민족혁명을 당면의 목표로 설정하고 그를 위해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와 연합하면서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아나키즘 본령에서의 일탈이었고, 그 일탈은 결국 아나키즘으로 하여금 제3의 사상으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연합전선 속에서 사상적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즉, 민족혁명 그 자체에 매몰되어 버림으로서 민족주의자와의 차별성이 별로 부각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항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조직하였던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차지한 역할이 상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군대나 임시정부 내에서 아나키스트들은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다. 그 결과 아나키스트 세력은 민족주의 진영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이후 아나키스트들이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한 사례는 없으며, 그러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 하였다.”


이호룡은 아나키즘과 한국 아나키즘운동을 매우 편향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아나키즘의 풍요롭고도 유연한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무시하고 있다. 아나키스트운동을 그 어떤 절대적 원칙에 따라서 완벽하게 순수성을 구현해야 할 탈속세적 이념형으로서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순수파적(?) 결벽성을 선호하는 듯한 이호룡의 비판을 일찍이 상해노동대학의 설립과 관련하여 이정규가 정치와의 타협을 가장 경계하고 반대하던 순정(純正) 아나키스트 암좌작태랑(岩佐作太郞)을 설득한 현실적이고도 유연한 논리와 대비시켜 보자. 아나키즘에서 어떤 특별한 교조적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론을 추구하였던 이정규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오치휘, 이석증 등을 노폐니 타락이니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개인적인 행동이요 조직의 결정사항으로 한 행동이 아니다. 또한 그들 자신들도 아나키즘의 신념에 반역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석증은 중국이 나갈 길은 각 성의 완전자치로 연합되는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소위 연성자치(聯省自治)를 주장하고 있는데 그의 연성자치, 분치합작(分治合作)이란 아나키즘의 자유연합과 다를 바 없다.

 

둘째, 그들의 행동이 이념과 배치된다 하더라도 아나키즘 이념 자체가 획일적인 것을 반대하므로 행동통일을 기도하는 정도에서 선의로 이해하고 포섭하여 상해노동대학 일을 도모하는 것이 무조건의 배척보다 낫다.

 

셋째, 아나키즘운동이 침체양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청담류적 개결(介潔)과 이론적 편향 때문이다.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개조해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지만 현실적으로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금전으로 매매를 하고 있으며 정치와의 타협을 배제하면서도 국공립학교 또는 종교재단의 학교에서 임명을 받고 교직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적극, 철저, 순수라는 것은 정도 문제일 뿐이다“(이정규, 1974: 131-132).


보다 구체적으로, 이호룡의 해석을 쟁점별로 비판해 보자.


1) 국가와 정부 그리고 군대의 존재 인정: 아나키즘 본령에서의 일탈?


도대체 아나키즘의 본령이란 것이 무엇일까? 본령을 어떤 근본 원리 내지 기본 원칙이라 규정해도 그것은 추상적/일반적 개념을 지칭할 뿐이지 공시적-통시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적 교리나 행동강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아가, 이같은 본령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방법은 다양한 형태를 띌 수 있고, 아나키스트들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즘에는 여러 갈래가 있어 왔고, 또 시대의 변화와 함께 아나키즘도 변화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아나키스트가 동의하는 어떤 원칙을 도출할 수도 있다. 국가 또는 정부의 부정이나 정치참여(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정부의 직위나 정당이나 의회 등의 권력기구에 침여하는 것)의 거부는 근본 원칙이라기보다는 반강권주의(혹은 자율 자치 자주), 자유연합, 상호부조라는 아나키즘의 최고목표이자 최대 가치를 달성하는 실천적 방법론의 하나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개인적 자유나 사회적 해방의 실현이라는 보다 상위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하위의 원칙일 뿐이다. 여기서 본질적인 문제는 국가와 정부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부정은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모두 “강권적-억압적-착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도, 필요하다면 그리고 조건이 성숙되었다면, 얼마든지 정부라는 기존 조직(의 형태)를 비판적으로 활용하면서 아나키스트사회의 실현을 추구할 수 있다.4)


유림은 비록 임시정부가 조직과 활동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았지만 당시의 역사적 조건과 절박한 상황을 고려할 때 민족해방의 과제를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유일한 수단이요, 또 임정을 발전적으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참여한 것이지, 임정내부의 권력투쟁에 끼어들어 헤게모니를 장악하려거나, 요직을 탐내어 참여한 것이 결코 아니다. 나아가, 임정은 명목상 정부이지 피난살이 망명정부로서 국가통치기구로서의 실질적 의미는 거의 보유하지 못한 채 오직 상징적 존재로서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내부적으로 권력구조를 둘러 싼 분열과 독점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강권적 억압-착취기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나키스트가 어떤 대단한 정부기구에 참여하고 거창한 국가를 인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5)


국가나 정부도 하나의 정치조직이다. 아나키스트들도 수많은 자유연합형 혁명적 정치조직을 설립하여 그 틀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유림이 참여한 임정도 이름만으로는 정부기구지만, 광의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해석하자면 당시의 4개 주요 독립운동세력이 공통의 단일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자유연합”한 조직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유림의 임정참여는 개인적 결단이나 선택으로서가 아니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세력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그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아나키스트 자유연합형 조직은 아니라 할지라도, 공산당조직과 같은 철저한 상명하달의 위계조직보다는 훨씬 민주적인 것이었다.


이호룡(2000: 191)은 민족전선의 행동강령 초안에 있는 “혁명공작에서 보취의 일치와 국호의 통일에 대한 요구”라는 표현을 두고 “국가 존재의 인정”으로 해석하고, 민족전선이 “반일투쟁시기의 전략적 결합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건설시기에서도 협동 노력해야 할 것을 약속“하므로써 ”민족전선을 정권기구로 설정하고 있으며, 정권에의 참여를 전제“한다고 가정한다. 지나치게 자귀(字句)에만 억매인 해석이다. 우선 민족전선은 분명하게 그것을 구성하는 ”각 단체의 해체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언급함으로써 자유연합적 성격을 확보하였다. 소위 말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추구하는 합동연이(合同聯異)의 전략을 적절하게 구사한 것이다. ”국호의 통일“이나 ”장래의 건설”이라는 표현으로부터 정부와 국가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는 의미만을 기계론적으로 도출해 내는 것은 상상력의 결핍을 보여준다. 민족해방 후 아나키스트들이 구상한 국가나 정부란 것이 바로 독립노농당이 당략과 당책에 명시한 아나키스트형 체제를 의미하는 것인데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조선민족전선의 일환으로 조직된 한중합동유격대와 전지공작대를 두고 이호룡은 원칙적으로 군대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들이 자위수준을 넘어 전투부대를 창설하여 자신의 이념을 위반하였다고 지적한다.6) 드러난 현상에만 연연하는 단순한 해석이다. 자위부대는 전투를 하지 않는가? 혁명세력으로서 아나키스트들이 조직한 군대를 국가폭력의 수호자요 전위대 역할을 담당하는 통상적 의미의 일반 군대와 비교할 수 있는가? 소련혁명 직후, 백군이나 볼세비키와 싸운 아나키스트 마흐노(Nestor Makhno)의 군사조직에 대해서 결코 아나키즘의 일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아나키스트부대를 두고도 아나키즘의 배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일본제국주의자에게는 신채호, 이을규, 정화암도 폭력적 테러리스트에 불과하지만, 조선민중들에게는 훌륭한 애국열사이며, 아나키스트가 조직한 군대도 혁명세력이요, 혁명조직일 뿐이다. 폭력을 위한 폭력(즉, 일본군대)과 창조적 파괴를 위한 폭력(아나키스트 혁명수단으로서 군대)은 외관상으로는 둘다 폭력이지만 질적으로 완전히 상이한 것이다. 5·18에서 해방광주의 시민군을 폭도라고 규정한 군부세력이야말로 진짜 폭력집단이 아니었던가?7) 신채호도 분명히 조선혁명선언에서 암살파괴와 더불어 독립군의 무장투쟁 노선을 지지하였다(김영범, 1997: 136 n220).

 

2) 제3의 사상으로서 독자성 상실: 민족주의에 흡수?

 

처음부터 이호룡(2000: 6, n19)은 무슨 까닭인지 ‘제3의 사상’이라는 사회과학적으로 고유한 의미를 갖는 용어를 자의적으로 “한국의 근대사상에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상도 있다”는 의미에서 한정적으로만 사용한다. 이와 같은 용어법에는 아나키즘의 이념적 의의와 역사적 역할을 원천적으로 축소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의도가 혹시 무의식적으로 내재된 것은 아닌지? 한국의 아나키즘은 결코 사상적으로 잔여범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좌우익을 넘어서는 제3의 길로서 혹은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동시에 비판한 제3의 사상으로 추구되었다(신용하, 1984: 291; 김성국, 1996b: 223-224, 1998a: 90-102).8) 아나키즘의 역사 자체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그리고 동시에 지양하려는 것이다.


역사가 아무리 승리자(예컨대, 남한의 보수적 민족주의와 북한의 사대적 공산주의)의 역사로 기록되는 경향을 가진다지만, 그 승리자들의 추악한 정체가 이미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에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현실주의자(realist)의 시각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기만 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미래를 바라보지 않으려는 태도와 다를바 없다. 매우 혼란스럽게도, 이호룡(2000: 7)은, 한편으로는, 역사적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에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해방운동상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나름대로 역할“을 수행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방법이나 전망에서도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와는 다른 입장을 제시하는 등 제3의 사상으로서 그 나름대로 역할을 하였다“고 인정하면서도, 결론에서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역전해 버리는 것이다.


과연, 아나키스트들은 이호룡의 주장대로 제3의 사상으로서 독자성을 상실하여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와 구별되는 상이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민족주의 진영으로 흡수되고 말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먼저, 한 가지 근본적인 반문부터 제기해 보자. 일제하 모든 독립운동세력들은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였지만 그 방법과 독립국가/해방사회의 성격에 관해서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는 언제나 유별난 목소리만을 독야청청 더 높게 질러대야만 하는가? 아나키스트가 궁극적 목표를 위해 이념적으로 다른 세력과 한시적으로 정치적 연합을 시도해서는 안 될 어떤 내재적 불문율이나 지상명령이라도 존재하는가? 아나키스트는 영원히 어둠 속에서 외투 깃을 세우고 폭탄이나 피스톨을 들고 혈혈단신으로만 투쟁해야 하는가? 아나키스트도 얼마든지 연대하고, 타협할 수 있다. 제3의 사상은 제1의 사상이든 제2든 혹은 제4든 언제든지 필요하다면 수용하고 연대할 수 있다.


이호룡이 과연 어떤 자료를 토대로 아나키스트가 민족주의 진영에 “흡수”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흡수”라는 매우 부정적-비하적 표현은 아나키스트세력이 독자적인 정체성과 주체성을 상실하고 전혀 새로운 이질적 형태로 변모했을 경우에나 사용해야 할 것이다. 협상의 초기, 임시정부와 조선민족전선연맹과의 통일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임시정부 측 대표(조완구, 엄항섭)는 임시정부의 영도 밑에 각 단체들이 통일해야 된다는 것이나, 조선민족전선연맹측 대표(석정, 유자명)는 각 단체가 연맹의 형식으로 통일하자는 것이어서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유자명, 1999: 234-235). 마침내, 각 세력의 독립성과 자주성이 보장되는 배경 하에서 유림과 유자명은 임정에 참여한다. 그래서 4개 당파의 연합선언과 1944년 4월 24일의 한국 각 혁명당의 제36차 의회 지지선언이 4개 세력의 명의(한국독립당, 한국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로 발표된다.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자. 의열단의 후신이었던 (4개 당파의 일원인) 민족혁명당을 과연 민족주의 진영에 흡수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9) 조선혁명자연맹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반자(反資)와 동시에 반공(反共)의 입장을 수미일관하게 유지하였으며, 그 전통은 해방 후에도 유림에 의하여 굳건하게 지속된다. 만약 민족주의 진영에 흡수되었다면 어찌하여 단주는 해방후 아나키즘에 충실한 독립노농당을 독자적으로 창설하고, 김구의 민족주의 진영과 결별하게 되는가? 이호룡의 판단은 사실과 어긋난다.


그 까닭은 이호룡이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상호대립적 관계로 설정하여, 일제하 아나키즘의 발전을 민족주의와 결별-재결합하는 도식적 과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제하 아나키스트에게 있어서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는 하기락(1980: 21)의 지적처럼 “이것으로 저것을 내실화하는 보완관계”로서 “민족주의의 성숙단계로서 아나키즘”(김성국, 1996b: 219)이라는 발전론적 과정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일제하 모든 아나키스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민족주의자 중에서 일부만이 아나키스트였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자.10)


요컨대, 이호룡은 아나키즘에 대한 편향된 인식의 틀 위에서 유림을 비롯한 아나키스트의 임정참여과정을 아나키즘에서의 일탈이라고 잘못 평가한다. 특히, 단계혁명론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이러한 일탈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는 단계를 너무 단절적으로 강조하고 차별화한 나머지 단계의 연속성에 내재된 일관된 함의를 놓치고 만다. 아나키스트는 마르크시스트와는 달리 혁명의 과정에 프로레타리아독재를 삽입하여 민족혁명-정치혁명-사회혁명의 점증하는 단계혁명을 추구하지 않는다. 아나키스트혁명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추구된다. 조선아나키스트들은 서구나 중국과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체험하지 못한 식민지라는 절대절명의 특수상황에서 그리고 좌우익의 협공 속에서 직접행동의 가장 극적이면서도 위험한 형태인 일종의 연합전선과 정치참여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을 “일탈”로 치부하기보다는 “상황변화에 따른 적극적 대응이요, 성숙한 판단”으로 간주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Ⅲ. 유림과 한국아나키즘의 변호(2): 독립노농당을 중심으로

 

해방 이후에도 아나키스트들은 임정세력과는 공동전선을 모색하였으나 공산주의세력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1945년 9월 하순 창립대회에서 “우리는 자주독립 완전해방을 위하여 그 실현의 날까지 우리의 우군인 혁명적 좌익 민족주의자들과 같이 공동전선을 펴자”고 주장하여 임시정부봉재운동(臨時政府奉在運動)을 전개하였으나, 공산세력에 대해서는 “노국의 주구배(露國의 走狗輩)”라고 규정하였다. 1945년 12월 20일과 21일에 개최된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임시정부에 대해서는 절대 지지의 입장을 표명하였으나, 공산주의자에 대해서는 “소련을 조국이라고 인식하는 사대사상을 버릴 것”과 “목적을 위해 수단을 불고(不考)하는 것을 버리고 무산자 독재정권을 수립하려는 의도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11)

 

이처럼 해방정국이 급속하게 좌우익으로 분열 대립되던 상황에서 유림은 1945년 12월 1일 귀국한다. 유림이 주도적으로 조직한 독립노농당은 결성과정에서부터 아나키스트정당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었다. 1946년 2월 21일과 22일 부산 금강사에서 개최된 경남북아나키스트대회에서 유림은 조선무정부주의자 총연맹 서기부 총무위원의 자격으로 축사를 통해 과도정권의 수립과 함께 다음의 4가지 원칙을 요구한다. 아나키스트사회의 기본원리인 민족적 자주성/개인의 주체성,  지방자치주의, 생산자 자주관리가 명시되고 있다:


1. 정부수립은 일체의 외세의존을  배제하고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1. 정부는 통일된 민족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1. 정부수립은 지방자치의 확립과 불가분하게 병행되어야 한다.

1. 모든 생산수단은 생산에 종사하는 근로인민에 의하여 관리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유림은 독립노농당을 통하여 아나키스트정치를 시도하였다. 유림은 1947년에는 전국혁명자총연맹을 창립하여 위원장이 되며, 1948년에는 대한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고, 통일독립운동자중앙협의회를 결성하여 대표간사가 되며, 1950년에는 국내외 독립운동자를 총망라한 독립전선의 결성을 주창하고, 1952년 부산임시수도시절에는 한국민주주의자총연맹을 조직한다.


해방공간에서 펼쳐진 한국의 현대정치사는 그야말로 아우성과 소용돌이 그리고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예측불허의 난장판이었다. 이 와중에서도 유림은 조선민족이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그리고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 분열의 비극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물리치고자 혼신을 다하여 투쟁한다.12)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역시  선구자를 무정하게도 고난의 길로 몰고 가는 것이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호룡(2000: 228)은 일제하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전선론과 임정참여를 비난하였듯이, 독립노농당도 민족주의 진영, 즉, 우익진영에 편입되어 사상적 독자성을 상실하고, 공산주의세력과 줄곧 대립함으로써 독자적 세력의 구축에 실패하고 제3의 사상으로서 위상도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 완전히 고립된 소 정당으로 전락하여 아나키스트세력의 몰락을 초래하였다고 혹평한다. 나아가, 이러한 아나키즘의 일탈은 “한국의 근대사상계를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좌우대립으로 몰고 간 내적 요인”이라는 무책임론까지 첨가한다. 좌우대립의 희생양을 다시 한번 속죄양으로 몰아치는 격이다.


이합집산으로 얼룩진 한국의 현대정당사와 미소라는 양 강대국에 사대하던 남북한의 정권장악세력들에 관해 비판적 관점을 지닌 연구자라면 독립노농당에 대해 이같이 편파적이고도 무책임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14) 정당활동의 성과를 오직 권력장악이라는 마키아벨리적 기준에서만 본다면야 모든 집권세력은 언제나 긍정적인 평가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오늘의 싹쓸이 판 정치세태를 합리화시켜 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르랴. 현재 한국정치의 희극적 비극이 과연 소수당이었던 독립노농당의 잘못으로 연유된 것인가? 아니면 독립노농당과 같은 바른 정치세력을15) 배제하고 탄압한 지배세력의 잘못 때문인가?


이호룡의 주장을 항목별로 반박해 보도록 하자.


1) 편입? 독립노농당은 민족진영에 편입되지 않았다.


독립노농당은 그 결성 과정에서 과도정부 수립과 관련하여 우익/민족주의계열 진영(국민대회준비위원회와 비상국민회의 등)과 좌익/공산주의계열 진영(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 모두를 비자율적, 비자주적, 비통일적이라고 비판하고, 남조선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도 비현실적이라고 부정하였다. 이호룡이 제기한 “편입론”의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전략적 연대나 일시적 공동보조를 두고 편입 운운한다면 강변이 되고 말 것이다.


독립노농당은 그 발기취지서, 당의, 당강, 결당선언, 당략, 당책에서 아나키스트정당의 조건을 최대한 갖추어, 당시의 다른 정당들과 비교할 때, 매우 독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결당선언에서는 “양두를 걸고 구육을 파는 인민의 수호자와 주관에 도취되어 현실을 몰각하는 과학적 이론가는 이미 그 정체가 백일하에 폭로되었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90)고 하면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였다(오장환, 1998: 248). 특히, 당략과 당책에서 명확하게 아나키즘사회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완벽한 지방자치, 산업자치, 직업자치를 추구하고, 고도의 단누진세(單累進稅)에 의한 소득재분배, 크로포트킨류의 자급자족적 경제활동, 남녀평등의 병역의무, 노동대중의 외교 역할, 공적 산업의 국가관리와 산업의 지방분산, 노동자의 자주관리권, 공동생활의 장려 등을 대거 포함한다. 또 독립노농당이 이승만 독재를 일관되게 비판하고 4·19이후에도 존속하여 혁신세력의 통합을 주도한 사실은 그것이 결코 민족진영에 편입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2) 우익? 독립노농당은 우익이 아니다.


어떻게 독립노농당의 이념적 지주인 아나키즘을 우익이라고 규정하는지 참으로 불가해(不可解)하다. 공산주의세력에 반대하면 무조건 우익인가? 공산당만이 좌파를 독점하는가? 요즈음에도 통일논의에 조금이라도 비판적 발언을 제기하면 반통일세력으로 몰아 부치는 일종의 레드메카시즘 혹은 진보주의파시즘이 횡행하는데 혹시 이와 같은 기류가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영된 것은 아닌지? 세상의 어떤 우익이 당의 강령에서 “농민 노동자 일반근로대중의 최대복리를 위해 투쟁한다”고 천명할 것이며, 당의 정책으로 계획경제체제, 자본집중의 방지, 대기업의 국공영화, 노동자의 자주관리, 경자유전을 명시하겠는가? 또 어떤 우익이 미국의 정책에 공공연히 반대하겠는가? 아나르코 생디칼리스트 계열인 춈스키가 “어떤 좌파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만약 자신을 마르크스나 레닌과 같은 의미의 좌파로 규정하려 한다면 자신은 좌파가 아니다”라고 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5·16쿠테타 직전까지 혁신동지총연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당, 한국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의 통합을 주장하며 자유사회주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독립노농당을 과연 우익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사이비 좌우파가 득세한 한국의 현대정치사에서 좌우익 타령은 선명성시비만 요란할 뿐 어떤 의미 있는 생산적 토론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가 과연 누구인지?


3) 반공주의?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은 일제시대부터 계속되었다.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와 푸르동, 마르크스와 바쿠닌, 레닌과 크로포트킨, 스페인혁명에서 볼세비키/스탈린주의자와 아나키스트의 관계처럼 역사적으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은 아니라 해도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므로 아나키스트들이 소련의 앞잡이가 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을 이단시한 것은 매우 자연스런 귀결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아나키스트로서 역사를 바라 볼 뿐이다. 해방공간에서 아나키스트가 공산주의자와 연대하거나 협력해야만 한다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면 알고 싶다. 프로레타리아독재론을 내세우며 국가권력의 쟁취에 혈안이 된 공산주의자들의 구조적 한계를 아나키스트들은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러시아혁명과 스페인혁명에서도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이나 스탈린에 의해 혁명이 철저히 배반당하는 비극을 목격하였고, 후배 아나키스트들은 항상 이점을 잊지 않고 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아나키스트는 좌익독재건, 우익독재건 모든 강권적 국가주의자들을 거부한다.


4) 고립? 독립노농당은 고고하였을 뿐 결코 고립되지 않았다.


국회의원이 없는 정당은 물론 초라하게 보일 것이다. 만약 필자가 당시 유권자의 정치의식을 반영하는 막걸리와 고무신이 오간 선거문화 수준을 거론한다면, 민중의 역량을 무시하는 반민중주의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단독선거 반대라는 정치적 대의를 저버리고 독립노농당이 5·10선거에 적극 참여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당명을 거부하고도 당선한 사람들의 숫자보다는 훨씬 많지 않았을까? 김구 중심의 임정세력과 결별하여 독자적 길을 걸었기 때문에 소 정당으로 전락하였을까? 김구와 결별하게 되는 독립노농당의 대의명분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도 없이 타당한 것이다.16) 그렇다면, 김구 계의 정치세력은 그 후 어떻게 되었던가? 승승장구하였는가? 한국독립당은 어디로 갔던가? 유림이 서거하기 직전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5개 정당의 통합을 준비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그 이념적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특히, 1950년의 5·30선거에서 50명 이상이 출마하여 당선자는 내지 못하였으나 차점자만 27명이었다는 사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102)은 그래도 국민들의 상당한 혹은 적지 않은 지지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최근 선거에서 소위 진보정당들의 득표율이 극히 저조하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치가 유명무실하다고 단정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우익독재가 지배한 해방공간과 1950년대에서도 독립노농당이 전개한 치열한 선전(善戰)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알 수 없다.


5) 몰락? 아나키스트세력은 여전히 건재하다.


한국의 아나키스트세력은 몰락하지 않았다. 단지 위축되고 약화되었을 뿐이다. 자유당의 이승만 독재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지 않은 한 독립노농당은 건재하였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였다. 정당의 세력을 평가할 때, 물론 국회의원의 수는 중요하다. 그렇지만, 이미 강조했듯이, 한국과 같이 정치문화나 정치도의가 저차원인 경우에는 정치의 질도 중요한 고려 대상이 되어야 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재야의 소수 양심적 정치세력이 수행한 민주화투쟁은 오늘날 만인의 귀감이다. 자유를 주지 않는 이승만의 자유당정권을 붕괴시키는데 일조한 독립노농당이라면 그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이와 같은 평가는 4·19혁명 과정에서 아나키스트 하기락이 교수데모에 앞장서고, 독립노농당 대표로서 유림이 혁신동지총연맹의 구심점으로 활약하였다는 점을 보더라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몰락한 세력이라면, 왜 1961년 5월18일 시국대책을 논의하던 독립노농당 당원들을 계엄군이 연행하거나 수배하였겠는가? 비록 군사정권의 정당해체 조치로 독립노농당은 사라졌으나, 10년 후 정화암, 하기락 등의 아나키스트세력은 다시 통일민주당을 결성하여 선거 때마다 원내에 진출하였고, 특히 1973년 2월 선거에서는 유권자 총투표의 10.2%를 획득하였다. 통계적 수치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나키스트세력의 부활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가? 그 뿐이 아니다. 한국의 아나키스트세력은, 국민문화연구소(1998)는 논외로 하더라도, 1972년 6월 22일 한국자주인연맹을 창설하고, 1988년에는 하기락의 주도로 서울에서 아나키스트세계대회까지 개최한다. 이후 1990년대에 들어 대구아나키즘연구회, 부산아나키즘연구회 등이 속속 만들어졌으며, 2002년 2월에는 한국아나키즘학회까지 창립되었다. 그렇다면, 아나키스트세력의 몰락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잘못 된 것이 아닐까? 한국아나키스트들은 일찍이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 소수(creative minority)로서 창조적 파괴를 위한 저항정신을 항상 견지해 왔다.


6) 민중없는 조직? 아나키스트들은 민중과 함께 행동하였다.


이호룡(2000: 238)에 의하면, 아나키즘은 민중해방을 표방하여 사상의 민중성을 강조하지만, 아나키스트운동에는 민중이 없다. 왜냐하면 창조적인 선구자들끼리만 모였지, 광범한 대중을 조직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조선노동공제회부터 시작된 아나키스트의 대중조직 활동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아나키스트운동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지속하였다. 민중직접혁명론의 교훈을 누구보다도 명심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나키스트이다. 놀랍게도, 이호룡은 공산당조직의 특성인 전위당 내지 전문혁명가/뱅가드 중심조직론을 아나키스트조직에 ‘잘못’ 적용한다. 대중조직의 방법에서 공산당식의 철저한 위계서열적 조직은 한마디로 비민주적인 것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희생하는 운동방식은 출발부터 독재화의 길로 향하고 있을 뿐이다.


해방정국에서 각 정당들이 대중을 조직하였다는 진정한 의미가 과연 무엇일까? 연고주의? 돈 봉투? 막걸리와 고무신? 혹은 이념적 환상이나 세뇌? 아니면 은근한 위협과 강제? 한국에서 어떤 사상과 정당이 밑으로부터 대중의 자발적 각성과 참여를 기반으로 대중을 조직하고 또 진실로 대중을 위해 일하였던지 되묻고 싶다.

 

이호룡(2000: 237-238)은 비민중성 혹은 비조직성을 아나키즘의 관념성과 결부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아나키즘은...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관념상의 자유에 불과하다. 아나키즘은 민중들이 직접 누릴 수 있는 자유 즉 일상생활상의 구체적 자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그 결과 아나키스트들은 민중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아나키즘운동에 대한 편향적 시각이 점점 경직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답답하다. 역사상의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대경실색할 이같은 비난은 전통적으로 반(反)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사용한 “수사학적 죽이기” 수법과17) 유사한 점에 당혹스럽다.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을 관념적이라고 하다니!18) 도대체 관념적 자유와 현실적 자유를 어떻게 구분하기에 이같이 비경험적-반사실적인 결론을 내리는지? 일제하 혹은 해방직후 조선민중의 일상적 구체적 자유가 무엇이기에 아나키스트들은 외면하였단 말인가? 다른 주의자들은 어떤 방식으로 관심을 보였기에 성공했는가? 공산주의자 아니면 이승만 우익독재주의자가 조선민중의 구체적 자유에 도대체 어떤 관심을 가졌단 말인가? 자유에의 길은 다양하다. 이호룡은 어쩌면 어떤 특수한 주의가 상정하는 자유의 왕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노예가 되는 길과 자유의 길을 구분하기가 종종 쉽지 않다.

 

이호룡은(2000: 217-219)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생활혁신을 통한 자유사회건설론이 개량주의적 성격을 가져 일반 대중에게 설득력이 적었던 것으로 평가한다.19) 노동자와 농민들의 광범위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까닭이라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아나키스트단체로서 아나키스트적 원칙에 충실한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대중성 확보 이전에 우선 운동의 지상과제이다. 좌우익이 권력투쟁을 위해 감언이설로 민중을 위로부터 동원하던 당시의 실정에서 과연 어떤 운동이 진정으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다시 한번 냉정하게 반문해 보자. 모든 화려한 정치적 구호와 정책적 선전의 거품들이 다 벗겨진 오늘의 시점에서 당시 노동자와 농민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폭력과 모함이 난무하고, 거짓과 허세가 가득하였던 해방공간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결정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포섭하여 세뇌시키고 동원해야 할 객체로서만 간주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농민을 각성시키고, 농업과 농촌의 하부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농민을 주체적 생산자로 만들고자 하였다. 무상몰수나 무상분배와 같은 듣기 좋은 소리만을 외치거나, 부르죠아, 친일반동 지주의 처단과 같은 복수심을 불지르는 언동을 일삼는 것이 대중의 요구를 광범하게 수용하는 것인가? 아나키스트의 생활혁신운동은 장기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결코 화끈한 인기는 끌지 못했더라도, 실천가능한 과제들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는 아마도 가장 필요했던 농민운동이라 할 것이다.20)


7) 사상적 파탄? 독립노농당은 아나키스트사상의 선구적 실천이다.


끝으로, 이호룡(2000: 235-237)은 “사상적 파탄”이라는 극한적 용어를 구사하면서 독립노농당계열의 아나키스트와 함께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계열의 아나키스들도 매도한다. 즉, 후자가 초기에는 정당활동을 부정하였으나 뒤에는 적극적으로 관여하였기 때문이다. 남한에 단독정권이 수립되고 한국전쟁도 끝난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시작된 일부 아나키스트들의 사회민주주의운동과 4·19이후 혁신정당통합운동(의 좌절)과 민주사회당의 결성준비 그리고 통일민주당의 결성(1971)과 같은 일련의 정치활동을 두고, 이들이 초기의 반(反)정당 입장을 배신하므로서 아나키즘을 포기하고 사상적으로 파탄하였다는 것이다.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해석이다.


독립노농당계의 현실참여론을 반대한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정당활동 불참이유는 다음과 같다: “.....정당도 좋으나 그에 앞서 정당 자체가 존립할 수 있는 기반, 즉 농민과 노동자조직이 급선무다. 정당을 먼저 결성하고 농민과 노동자 조직을 그 후에 하면 그것은 농민 노동자들을 자율적으로 각성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우롱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결국 개인 중심이나 지도자 중심의 반동적인 결과를 초래한다”(이정규, 1974: 13). 이처럼 비참여파도 절대적으로 정당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시기상조론(時機尙早論) 내지 선조직후정당론(先組織後政黨論)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이들은 ‘아나키즘의 한국적 실현형태는 민주사회주의적인 형태로 건설하여야 될 것“이며, ”민주사회당이 다소나마 아나키즘적 색채가 있어 좌익과 이론적-정책적 대결이 가능하며 우익보수당에 자극을 줄 것“(이정규, 263-271)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민주사회당을 결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선택은 필자가 비판하는 순수 아나키즘론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당시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하여 선택한 방안이다(오장환, 1998: 245). 어쩌면 이들의 과감한 변신은 독립노농당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려는 일종의 동지적 계승운동 내지 연대운동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더욱 본질적인 문제는 이들은 어떤 측면에서도 아나키스트로서의 소임을 망각하거나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선, 아나키스트들은 독립노농당의 결성과 관련하여 정당참여와 비참여를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겼으며,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아나키즘의 구현을 위하여 노력하였을 뿐 어떤 형태의 심각한 당파적 대립과 분열을 초래하지 않았다. 일종의 이념적 자유연합이 아니겠는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은 한국전쟁이후 변화된 정치적 토대와 여건에서 정화암의 귀국(1954년)을 전기로 정당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 결코 정당활동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호룡의 비난은 전후맥락을 무시하고 결과만을 단죄하는 셈이다. 아나키스트들도 내적 분화 혹은 분파를 얼마든지 이룰 수 있고, 또 서로 대립과 불신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일제시대부터 결코 심각한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초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노농당계열과 자유사회건설자연맹계열은 후일 통일 민주당(1971)과 한국자주인연맹(1972년 6월 22일)으로 재결집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상적 파탄이 아니라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이념적 결단”이요, “사상적 성숙”이다.

 

Ⅳ. 유림과 한국 아나키즘의 변호(3): 이호룡의 반론을 중심으로

 

필자의 재비판에 대한 이호룡(2005)의 반론을 읽으면서 그가 아나키즘에 대하여 일종의 고착화된 오해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물론, 그것이 정당한 논리와 명확한 자료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이라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자의적 판단으로 치지도외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여부를 따져보자. 


이호룡(2005: 304)은 필자의 비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김성국의 연구 또한 유림의 아나키즘에 대한 현재적 해석이 주를 이루면서(1)21) 유림의 아나키스트운동은 부분적으로 다루었을 뿐이다(2). 또 사실 관계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틀리게 해석한 부분도 상당수 있으며(3) 아나키즘의 본령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4). 나아가 [유자명과 한국 아나키즘의 형성]에서는 아나키즘을 민족주의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혹은 최종적 성숙 단계로 규정하면서,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는 민족주의자였으며 민족주의적 목표를 더욱 열정적으로 실천하였다고 주장한다.”


뒤 이어 이호룡은 한국 아나키즘의 파탄을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반제국주의투쟁을 전개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비판하였다. 하지만 1936년 이후 특히 해방 이후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단계혁명론적 입장에서 국가와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고, 심지어는 정당까지 건설하였다. 그것은 한국 아나키즘이 그 본령에서 점차 일탈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 일탈 과정을 이론화했던 유림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연구는 해방 이후의 한국 아나키즘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유림의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운동을 심층적으로 이해해야만 해방 이후 한국 아나키즘이 왜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던가를  해명할 수 있는 것이다.”22)


결론에서 이호룡(2005: 340-341)은 한국 아나키즘의 비극적 운명을 보다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유림의 (“자율적 정부는 인정한다”는) 국가 정부관은 아나키즘 본령에서 일탈한 것이다. 단계혁명론적 입장에 근거한 그의 일탈된 국가관은 그로 하여금 해방 공간에서 임시정부 세력과 함께 행동하게 만들었고, 아니키스트의 독자세력화에 소극적이게 만들었다(5). 그리고 그것은 아나키즘이 제3의 사상의 지위를 상실하는 것(6)으로 이어졌다. 분단정부 수립 이후 유림의 아나키즘은 더욱 그 본령에서 일탈되어 갔다. 그는 부르조아 민주주의체제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개량을 도모하였다(7). 그럼에 따라 아나키즘은 공산주의를 대신하여 혁명사상으로서 한국 현대 사상계를 이끌어 갈 수 있었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결국 본령에서의 일탈이 한국 아나키즘으로부터 혁명성을 거세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본령에서의 일탈은 한국 아나키스트들을 사상적 파탄으로 몰고 갔다. 이정규, 이을규, 정화암 등을 비롯한 일부 아나키스트는 1950년대 중반부터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하였다. 한국적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아나키즘에 가장 근접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상적 파탄은 독립노농당 관계자들에게도 나타났다. 유림은 이념적으로나마 아나키즘을 고집하였지만, 유림 사망 이후 일부 독립노농당 관계자는 박석홍의 주도 하에 군사독재 세력이 건설한 민주공화당에 흡수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에서는 아나키스트운동이 소멸하고 말았다.


이상에서 제시된 인용문을 통하여 이호룡이 지적하는 필자의 문제점에 대하여 항목별로 간략히 반박해 보고자 한다. 처음 세 가지 항목은 필자에 대한 직접적인 반론이고, 나머지는 필자의 기존 해석에 대한 간접적 반론이라고 할 수 있다.

 

1) 유림에 대한 현재적 해석

과거로서의 역사에 대한 해석 방식에는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다. 어떤 해석이 독점적 설명력을 갖는 것이 아니다. 현재적 해석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히 밝히지도 않은 채 마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처럼 뉴앙스를 풍기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 다소 고전적이지만, 나는 여전히 카(E. H. Carr)가 언급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간의 대화”라는 시각을 좋아한다.

 

2) 유림의 아나키스트 운동을 부분적으로 취급

모든 연구는 각각의 목적에 따라 연구대상을 한정하고 선택적으로 취급한다. 필자의 연구에서 어떤 필수적 부분이 빠졌는지 명시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3) 사실관계에 대한 자의적 해석 및 해석상의 오류 그리고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해석

이 점에 관해서도 필자가 범했다는 오류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명시하지 않는다. 아나키즘과 민족주의의 관계에 대한 필자의 해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의 긴 본문(39페이지) 중에서 겨우 한 페이지(이호룡, 2005: 311-312) 정도에 걸쳐 필자를 거명하면서 거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성국은 국가와 정부의 본질에 대해 달리 이해하고 있다. 그는 반강권주의를 아나키즘의 최고 목표이자 최대 가치로 규정하면서, 유림이 정부와 국가를 인정하고 정당활동을 전개한 것을 놓고, “한국적 특수성에 입각하여 아나키즘을 한국화 즉 고유화 혹은 주체화하였을 뿐 아니라 아나키즘의 실천적 지평을 확장함으로써 세계 아나키스트운동을 한 단계 고양시킨 선구자적 업적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즉 서구적 의미에서 아나키즘을 이해하면, 해방 이후 유림 등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전개한 정당건설 등의 정치활동은 아나키즘의 원칙을 위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탈근대적-동양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아나키스트의 정치참여는 결코 원론적으로 부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아가 ”정부라는 기존 조직을 비판적으로 활용하면서 아나키스트 사회 실현을 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김성국에 의하면 국가와 정부를 더 이상 강권조직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강권조직이 아닌 정부와 국가가 존재한다면, 그 국가와 정부는 더 이상 타도의 대상일 수 없으며, 이미 비판적 활용의 대상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비강권적 정부와 국가가 존재하는 사회는 이미 아나키스트사회에 다름 아닌 것이다. 기존의 정부를 비판적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그 정부가 강권적 조직임을 의미한다. 강권조직을 활용해서 반강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은 아나키즘의 노리에 어긋난다. 아나키스트들은 부르조아지의 반혁명책동을 저지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해야 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하듯이 강권에 의한 강권타파를 부정한다.“


이상에서 인용된 반론에서 찾아 낼 수 있는 핵심적 쟁점은 두 가지이다.

 

(1) 아나키스트의 제도정치 참여

제도정치 참여에 대하여 아나키스트들 간에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푸르동도 프랑스 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스페인혁명시에는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정부에 대거 참가하였다. 중국의 아나키스트들도 장개석 국민당정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분명하게 정리되어야 할 사실은 아나키스트는 필요하다면 제도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참여의 여부보다도 더욱 핵심적 사실은 과연 아나키스트답게 정치활동을 하느냐의 여부이다. 프루동이나 스페인의 참여파 아나키스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아나키스트가 제도정치에는 절대적으로 참여해서 안 된다는 어떤 형태의 아나키스트 원리도 필자는 들은 적이 없다. 바로 그것은 세간의 통속적인 아나키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1940년대의 임시정부 참여시기와 1945년대 해방공간에서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처한 정치적 상황은 세계의 어떤 아나키스트세력도 당면해 보지 않았던 독특하고도 창조적인 환경이었다. 식민지 상태에서 민족해방을 이룩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한국 특유의 상황에서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선택한 정치참여는 기존 서구형 아나키즘의 척도로서는 평가하기 어려운 “선구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반적 의미의 지배권력기구로서 국가/정부체제가 결코 아닌 혁명조직이었으며, 해방공간에서의 정당결성과 정치투쟁은 민족해방혁명이 불완전하나마 성취된 후에 시대적으로 절실하게 요구된 정치적-사회적 혁명을 위한 혁명정치의 연속과정으로 볼 수 있다.23)

 

(2) 강권조직을 이용한 비강권사회의 성취

프로레타리아 독재론은 그 실천적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로 변질시켰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치명적 약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은 이점을 일찍부터 간파하였기 때문에 혁명의 성공과 함께 즉각적인 국가권력기구의 해체를 주장하였다. 그 대신 연방주의적 지역연합을 요구하였다. 이호룡은 유림의 정치참여론을 프로레타리아 독재론에 빗대어 모순적이라고 비난한다. 즉, 강권조직인 정부와 국가를 거부해야만 하는 아나키스트가 강권조직을 이용하여 비강권사회를 이룩하려는 것은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강권성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국가의 본질이 폭력이라는 점에서 국가는 강권조직이다. 그러나 국가는 역사적으로 그 폭력성을 순화 혹은 감소시켜왔다. 역사상의 모든 반체제적 혁명 활동들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체제가 성립된 것이다. 물론 현시대 최고 수준의 민주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도 여전히 대내외적으로 폭력적으로 행동한다. 그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국가도 폭력성을 결코 완전하게 불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과 같은 비민주적 독재국가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훨씬 덜 폭력적이다. 이와 같은 폭력성의 상대적 약화는 민주주의국가의 제도적 기반인 법치주의가 폭력을 정당성을 지닌 권력으로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24) 역사적으로 자유민주주의적 시민혁명을 이룩한 나라들에서 더 이상 고전적 의미의 체제전복을 추구하는 폭력혁명이 성공하거나 활발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전적인 혁명운동은 폭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으므로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폭력적 수단 외에 비폭력적 혹은 평화적 방법이 존재할 경우 아나키스트도 당연히 이 길을 따라야 한다. 해방공간에서 그리고 정부수립 이후 한국 아나키스트의 정당정치활동은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가의 폭력성과 폭력적 혁명에 관한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우리는 이호룡의 비판이 획일주의적 혁명논리에 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4) 임정세력과의 합류 및 소극적인 독자세력화

해방공간에서 아나키스트들이 김구를 비롯한 임정세력과 정치적 연합전선을 구축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나키스트세력 자체가 해방 전 임정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의 하나이었기 때문이고, 아나키스트의 임정참여 형태 또한 세력통합이나 흡수가 아닌 자유연합에 의거하여 이루어 졌다. 그러므로 임정과의 세력연합이 아나키스트의 독자세력화에 어떤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단순하게 간주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정치조직인 자신들의 정당을 결성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바로 한국 아나키스트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최우선적인 실천과제로 간주하였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나아가, 해방공간의 정치적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남북연석회의의 참가여부를 두고 유림의 독립노농당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임정의 상징인 김구와 과감하게 결별하는 그야말로 독자적인 정치노선을 추구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호룡은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아나키스트 독립노농당의 결정이 갖는 정치적 의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대신에 “우익 속에 편제되어 아나키즘이 제3의 사상으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상실하게 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과연 이러한 해석이 올바른 것일까? 최근,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지도자회의가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령을 받은 김일성이 제안해 이루어 졌다“는 사실을 밝히는 당시의 비밀문서가 러시아의 한국 현대사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에 의해서 공개되었다(조선일보, 2005년 7월 14일 A8). 소련이 겉으로는 한반도 통일정부 수립을 지지하면서도 속으로는 북한에 친소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오랜 동안 치밀한 작업을 추진했다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25) 진보를 자칭하는 일부 한국학자들이 당시 남북회담에 반대한 것이 분단의 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주장은 이제 어디서 근거를 찾을 것인지? 소련이 주도하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절대적으로 추종하던 한국 공산주의자들의 사대주의적 행위를 일제시대부터 이미 간파하고 있던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소련의 꼭두각시에 놀아난다“고 하면서 회담을 극렬히 반대하고 김구의 평양행을 극구 만류하였던 것이다.

 

5) 우익편입과 제3의 사상으로서 지위상실

임정의 법통을 인정하고 일시적으로 임정세력과 정치적 연합전선을 구축했기 때문에 그리고 남북지도자연석회의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아나키스트들이 우익으로 편입되고, 그 결과 아나키즘은 제3의 사상으로서 지위를 상실했다는 이호룡의 준엄한 선고는 그야말로 편파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시적으로 그리고 거리를 두면서 우익과 연합해도 우익인가? 좌익을 비판하면 우익인가? 마치 최근 우리 사회에서 북한주민의 인권을 거론하거나, 특정 신문을 구독하면 보수반동으로 규정하려는 일단의 신판 마녀사냥 논리가 아나키스트들을 겨냥한 것은 아닐까? 우선, 분명히 해둘 것은 아나키스트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존의 좌우파 논리를 뛰어 넘는다. 아나키스트 정당으로서 독립노농당의 이념적 원리가 표명되어 있는 발기취지서, 당의(黨義), 당강(黨綱), 결당선언, 당략, 당책 등을 검토해 보라. 그것이 과연 전형적인 우익 정당이 표방하는 것들인가? 북한에서 수립될 공산주의정권의 독재화 및 꼭두각시화를 예견하고 비판하면 반동적 우익인가? 진정한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노릇이다. 제3의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소련과 미국에 사대하던 당시의 좌우파에게 협공당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제3의 사상 혹은 제3의 길을 추구하였다.


예컨대, 아나키스트 독립노농당의 독자적인 정치노선 혹은 제3의 사상으로서 아나키즘은 남한 단독선거 반대라는 역사적인 결단으로 찬연하게 그러나 슬프게 빛난다. 만약 유림이 권력추구의 통상적인 정치지도자였더라면 대세(민족분단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입장을 따라서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거에 참여)를 거르고 대의(민족통일)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며, 당명을 어기고 출마하여 1948년 5월 10일 선거에 당선된 아나키스트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였을 것이다.26) 독립노농당은 아직 제도정당이라기보다는 “혁명집단”의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자료집, 259).

 

6) 개량주의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흔히 반(反)마르크스주의자 혹은 반혁명세력을 개량주의자라고 매도한다.  호룡(2004: 340)은 유림이 분단정부 수립 이후 “부르죠아 민주주의체제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개량을 도모“함으로써 그의 아나키즘은 혁명성을 상실하고, 개량주의에 빠졌다고 평가한다. 필자는 이와 같은 이호룡의 해석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사실을 왜곡하는 것으로 지적하고 싶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진정한 혁명은 4.19 시민혁명이다. 주지하듯,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체제와 3.15부정선거에 항거하여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학생들이 주도하여 거국적으로 확산된 시민혁명이다. 유림은 1950년부터 독립노농당의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반이승만정권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리하여, 1960년 4.19혁명이 발생하자 4월 28일 시국담화를 통하여, “자유를 취해 강권에 반항한 생명의 대가로...민주혁명의 막이 열렸으니 진정한 민주가 실현될 때까지...일치단결로 공동투쟁”할 것을 촉구하였다. 나아가, 당면과업으로서 “이번 투쟁의 근본의의가 부정선거의 규탄에 그치는 것이 아니므로 재임되는 질서는 정치문제에 한정하지 말고 제반문제에 걸쳐서 목전의 미봉책을 버리고, 장래를 고려할 것”을 주창하여 기존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혁신하려는 4,19의 혁명적 성격을 강조하였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135). 5월 13일 유림은 김창숙(金昌淑), 장건상(張健相), 정화암(鄭崋岩), 조경한(趙擎韓), 김학규(金學奎), 권오돈(權五惇)과 함께 7인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계급투쟁으로 국민을 분열하고, 국제운동으로 주권을 망각하는 적색계열과의 합작은 내외정세로 보아서 백해(百害)가 있고 일리(一利)가 없으므로 우리는 이를 삼가 사양”하면서 “백지(白紙)에 도안(圖案)을 그리는 건국(建國)”의 혁신(革新)을 호소하였다(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136).


그런데도, 이호룡(2004: 338)은 “4.19라는 혁명적 상황이 도래하였음에도 제도적 개혁만을 추구하였을 뿐, 혁명공간을 활용한 아나키스트 사회건설을 위한 방책은 하나도 제시하지 않았다. 즉 민주사회 건설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고 유림을 비난한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분명히 이호룡이 유림의 아나키즘을 비난하는 이론적 근거가 바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논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4.19혁명을 민주주의사회의 성립을 위한 시민혁명으로 고양시켜야 한다는 유림의 역사인식을 “개량주의적”(이호룡, 2004: 338)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입장은 오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유림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계급투쟁을 고무하는 적색분자들과는 관계를 단절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원칙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혁명논리를 거부하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아나키즘의 혁명성 여부를 따진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나아가, 4.19당시의 한국정세는 공산주의식 혁명과는 아무런 의미연관도 갖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확립과 빈곤을 타파하는 경제발전을 성취하는 것이 전 국민의 염원이었다. 이호룡이 요구하는 혁명성이 도대체 무엇을 위한 어떤 방식의 혁명성인지 매우 궁금할 뿐이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그의 논문에서 명기해야만 했다.


시대착오적인 혁명논리를 비판하면서 유림은 1960년 5월 27일에 발표된 [혁신동지총연맹 결성대회 준비선언문]에서 주창하였다: “우리에게는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이 일물의 양면이며,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명확한 계선을 인정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는 역사의 실험실에서 이미 고전화된 어떤 원리를 외국으로부터 수입하여 발을 깍아 신에 맞추는 것처럼 우리가 그 원리에 적응되려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일에 우리의 전통, 시대의 주위에 적합한 실정을 파악하며 판리함으로써 우리가 능동으로 독특한 체계를 창조하려는 것이고, 더욱 모든 것은 공개, 평화, 합법적 수단으로 실현하려 한다”(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139). 유림은 비마르크스 사회주의 혹은 자유사회주의를 추구하였던 “좌파를 넘어선 좌파“ 혹은 탈마르크스적 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기존 좌파를 반대한다고 해서 아나키즘을 도매금으로 우익에 넘기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혁신세력의 결집과정에서 유림이 사회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아나키즘을 고집하였다는 사실은 아나키스트로서 유림의 강고하고도 일관된 의지를 보여 준다. 이를 두고, “개량주의적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현실인식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이호룡(2004: 339)이야말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라는 이분법적 양단논리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개혁이 모여 혁명이 될 수 있고, 또 혁명은 개혁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Ⅴ. 21세기 한국 아나키스트정치를 위하여

 

해방이후 아나키스트정치의 실험은 유림의 서거와 함께 찬란한 패배로 끝났다. 그것은 쓸쓸한 종말로 비춰질 수도 있다. 비록 독립노농당의 이름은 현실정치에서 사라졌지만, 유림과 함께 아나키스트 독립노농당은 매우 독특하고도 핵심적인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당시의 정당으로 오늘날 온전하게 그 명맥을 유지하며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권력의 향배에 따라서 이리저리 부화뇌동, 이합집산 하는 한국정당사를 볼 때, 차라리 독립노농당은 장렬한 전사 혹은 명예로운 퇴진이었다고 기억해야 한다.27)


유림의 사후, 일부 아나키스트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투항하였고, 일부는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의 기치를 들기도 하였으며,28) 한때는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여 (예컨대, 1971년의 통일민주당 결성과 1972년의 한국자주인연맹 조직) 세력을 결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 하 무장투쟁으로 용맹을 떨쳤고 해방 후 민족통일과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던 아나키즘은 그 위력과 위광을 서서히 감추면서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선구자를 준비하기 위하여 역사의 어둠 속으로 자신을 감추었다.


매우 다행스럽게도, 한국 아나키스트정치는 21세기를 맞이하며 새로운 부활을 요구받게 되었다.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세계 도처에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욕구가 점증하고 있다.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욕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새로운 사회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아나키즘과 아나키스트정치는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부자유 사회주의와 불평등 자본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유연합의 상호부조를 모색하던 아나키즘은 이제 인터넷과 전지구화 그리고 사해동포주의 및 인권사상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조류를 배경으로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역량을 실험해 볼 수 있게 되었다.


필자(김성국, 2001: 84)는 유림이 한국 아나키스트운동에 기여한 바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정리하였다:


첫째, 유림의 임정참여는 아나키스트정치의 시발점으로서 신채호가 추구하였던 민족주의와 아나키즘을 아름답게 결합시킨 이념적 성숙의 산물이다.

둘째, 유림은 신채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우익 민족주의진영에 편입되거나 자본주의적 질서에 현혹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셋째, 유림의 독립노농당 결성과 정당 활동은 아나키스트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함으로써 세계아나키스트운동사에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고, 한국아나키즘의 고유성을 확립하였다.

넷째, 유림도 아나키즘의 반공산주의적 노선을 따라서 시종일관 대립적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아나키즘의 사상적 독자성을 유지하였다.29)

다섯째, 유림의 비타협적 원칙주의 노선은 현실적으로는 고난과 좌절로 이어졌지만, 21세기 한국아나키즘의 부활과 발전에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이제 세월은 흘렀고, 시대는 경천동지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 21세기 한국 아나키스트들은 유림의 역사적 유산을 창조적 파괴의 정신으로 계승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30) 유림이 개척한 아나키스트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과거 유림이 독립노농당을 통하여 추구했던 목표인 자주, 민주, 통일은 새로운 개념으로 재무장되어 신선한 설득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 방향을 아래와 같이 모색해 볼 수 있다.


1) 자주독립의 국가정치로부터 사해동포주의의 탈국가주의적(Post-statist) 세계정치로

대외적으로 사대주의적 종속관계를 불식하고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확실하게 소유한다는 “자주”의 개념은31) 국민국가 혹은 민족국가의 존재의의가 의문시되거나 도전받는 21세기 전지구화(Globalization)시대에서는 세계적 차원으로 더욱 확대될 필요가 있다. 우선, 독립노농당의 黨略 二에 명시되어 있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외교의 자주권을 확립한다”는 다차원적 자주의 개념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최근 문화적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는 세계적 조류를 감안하여 문화적 자주의 중요성을 명심해야 한다.


나아가 자주의 의미가 “자신에 대한 주인” 혹은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모든 사람과 모든 사회가 자주인 혹은 자주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상호협력하면서 공존공영을 도모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주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회와의 상호 존중 및 협력의 토대 위에서만이 구축될 수 있다. 국민국가의 좁은 틀에 안주하여 동일한 국적이나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의 인권만을 인정해서는 결코 자주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없다. 즉, 해방 전후의 한국사회에 요구되었던 자주의 정치는 민족해방과 통일국가건설로서 독립국가의 자주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면, 21세기의 자주정치는 국가정치의 경계를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자주를 보장하는 사해동포주의를 수용하여 확산시키는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된 후진국이었지만 이제는 중진국 혹은 강소국으로서 세계적 위상을 지녔으므로 우리보다도 약하거나 낙후된 사회도 배려하는 세계정치(Global Politics)를 펼쳐야 한다.


2) 독재타도의 민주정치로부터 “민중이 직접 건국공작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정치로

독립노농당은 결당선언에서 “국가의 존재가 인민의 복리를 전제로 하고, 인민의 복리는 인민자신이라야 최선으로 옹호함이 불문의 철칙이어늘 건국사업이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됨은 민중이 직접으로 건국공작을 부담 아니한 데서 원인이 발견된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혁명은 처음에는 독재왕권체제를 타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시민의 자유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대의제 민주주의가 채택되어 민주정치의 핵심적 수단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시민의 정치의식과 교육수준 및 지적수준이 엄청나게 고양되고, 사회적 분화가 고도로 복잡하게 발전한 오늘날 엘리뜨주의에 입각한 대의제 민주주의는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정치적 특권계급이 등장하였고, 권력의 집중과 독점으로 인하여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였으며, 이에 상응하여 정치적 무관심이나 냉소주의가 확산되어 있다. 유림은 일찍부터 “서구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불리는 의회민주주의 가운데 대표성의 허구와 다수결의 불합리성, 즉 다수의 횡포와 소수의 진리가 존재함을 역설”하였으며 “결코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최문호/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269). 필자도 의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초기 발전단계에서는 필요할지 모르나 오늘날과 같이 형식적 민주주의로부터 실질적 민주주의로 전환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더 이상 필수적인 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수많은 민간 전문가들의 존재 그리고 인터넷의 등장에 따른 전자정치 혹은 전자민주주의의 가능성으로 인하여 시민이 직접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역량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과거 아나키스트들은, 전문 혁명가의 지도에 의한 혁명론을 주장한 마르크시스트와는 달리, 민중직접혁명론을 주창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나키스트들의 주요한 실천논리도 직접행동(Direct Action)이다. 이를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자면 직접민주주의(Direct Democracy)와 직결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형식적 대의제를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소수가 독점하는 지배권력기구로서 강권국가체제는 와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권력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 때 권력관계의 의미는 지배-복종이나 착취-희생과 같은 의미로서가 아니라, 생산적-협동적 메커니즘으로 변모될 것이다. 21세기 아나키스트 민주정치는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3) 민족해방의 통일정치로부터 인간해방의 해방정치로

8.15해방은 불행히도 민족분단의 씨앗을 담은 불완전한 것이었다. 유림을 비롯한 당대의 모든 애국지사들이 진정한 민족해방, 즉, 민족통일국가를 성취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고군분투하였다. 최근까지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외칠 만큼 통일정치는 우리의 최대과제이자 최고가치 이었다. 다소 논란이 있겠지만, 필자는 이제 국가중심주의 혹은 민족주의는 우리들 삶에 있어서 ”당분간은“ 필요조건일지는 몰라도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남북분단의 고착화와 장기화가 예견되는 현실에서 통일국가의 꿈에 집착하는 것은 통일지상주의에 빠지거나, 시대착오적 부국강병주의를 답습할 위험성이 적지 않다. 특히, 강력한 통일국가의 건설계획은 당장 주변 강대국들의 견제와 방해를 초래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국경문제와 관련된 심각한 갈등을 조성할 수 있다.


이제 통일은 그 최선의 형태로 국가연합 정도의 수준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중앙집중형 통일국가보다는 지방자치제의 강화가 더욱 우선적이고 필수적이다. 원리적으로도 아나키스트가 추구하는 권력체제는 지역자치와 지역연합에 의거한 연방주의에 있기 때문에, 남북분단의 극복은 통일국가의 형성보다는 지역연합에 기반을 두는 국가연합이 더욱 바람직한 형태일 수 있다.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통일을 소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혹은 왜 우리는 통일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북한 주민들이 통일을 원한다면 그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정치지도자들과 일반 시민들이 원하는 통일의 이유가 서로 상이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시민들 간에도 상당히 격차가 존재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북한이 현재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는 억압과 빈곤으로 가득한 사회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같은 민족으로서 북한동포의 처지를 생각할 때 우리의 민족주의가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무엇일까? 북한주민의 인권! 한편 북한과 남한은 냉전시대의 유물로서 여전히 군사적 대립과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핵문제와 더불어 북한이 공개적으로 적화통일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전쟁재발의 가능성은 상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북통일에 앞서 모든 수단(예컨대, 관련 강대국이 참여하는 상호불가침조약, 평화협정 체결 그리고 군비축소 등)을 강구하여 남북한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완화하여 평화적 교류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평화는 통일에 우선한다.


인간은 오랜 세월 강압적 권력관계의 질곡에서 인권을 유린당하여 왔다. 지금도 세계도처에는 인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특히, 빈곤과 폭력은 인권침해의 최대 요인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전쟁이 빈곤과 폭력을 조장시키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메카니즘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통일의 정치는 납북한 주민 모두가 전쟁상태를 벗어나 평화 속에서 인권을 보장받는 인간해방의 정치로 고양되어야만 한다.

 

Ⅵ. 결어

 

이 글의 첫째 목적은 유림의 아나키즘이 가진 선구자적 창조성 혹은 한국적 고유성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필자에 대한 이호룡의 반론을 재비판하는 것이었다. 역사해석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 있다. 그렇지만, 아나키즘과 거의 원초적으로 적대적 혹은 대립적 관계에 있는 마르크시스트의 논리나 개념에 입각하여 아나키즘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매우 비생산적인 방식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내재적 비판의 적실성과 효율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은 그 쟁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비판의 근거를 명확히 제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비판은 순환론적 자기 재확인에 갇혀 버리게 된다.


둘째, 필자는 유림의 아나키스트정치를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서 어떻게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을지 검토하였다. 정보화와 세계화, 이에 따른 탈민족주의화, 탈국가중심주의화의 조류를 감안하여 세계정치, 직접민주주의정치, 해방정치를 아나키스트적 대안정치로 구상해 보았다. 그러나 정치란 본질적으로 위험한 권력관계와 직결된 것이므로, 아나키스트정치는 “반정치의 정치(Politics of Anti-Politics)”(Habel, 1988)라는 초발심을 항상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유림의 아나키즘과 독립노농당은 전 세계에 아나키스트정치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선구자의 길은 매우 험난하였지만, 그의 노력으로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다시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북극성과도 같은 고절(孤節)이었다. 단주, 당신이 지녔던 그 인류적 이상이나 민족적인 소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류해방을 향한 열정이요, 의지요, 혼신(渾身)이었다...당신의 그 선지적 식견은 우중(愚衆)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고, 수많은 일화로 수놓은 결벽은 범접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고절은 더욱 빛나기도 한다...북극성! 당신의 망령은 저 별처럼 이 땅에 진좌(鎭座)하여지라”(구상/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1991: 15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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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In Defense of Korean Anarchist Movement," A paper presented at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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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Anarchism and Nationalism in East Asia." Anarchist Studies 4-1:  pp. 4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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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Anti-Political Politics." pp. 381-398 in Civil Society and the State: New  European Perspectives (edited by John Keane), London: Verso.


Nozick, Robert

1974    Anarchy, State, and Utopia. New York: Basic Books.


Taylor, Michael

1982   Community, Anarchy and Liber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 제2장과 제3장은 기존 필자(김성국, 2001)의 발표문 내용을 축약하여 재인용한 것이다. 따라서 논의 내용의 중복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필자의 기존 논의를 대거 인용하면서 쟁점 사항에 대한 논지를 보다 명확하게 할 것이다.

 

2) 스페인혁명시 파시즘의 공격이 가열되면서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정부의 각료가 된다. 1936년 9월 카탈로니아정부에 1명, 동년 12월 마드리드정부에 2명이 입각한다. 당시 FAI(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은 이를 상황이 요구하는 것으로 지지했으나, “뒤르티(Durruti)의 친구들”그룹은 비판한다.

 

3) Crump은 1998년 10월 3일 영국 스코트랜드 스털링대학 그의 연구실에서 있었던 토론에서 필자의 반박 혹은 정당화에 대하여 충분히 한국적 특수성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일본의 岩佐作太郞이나 八太舟三이 추구했던 ‘순정(純正)아나키즘(Pure Anarchism)’을 지지한다고 토로하였다. 한국의 경우는 스페인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전혀 상이한 상황이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4) 예컨대, 최소정부(minimal state)의 개념이 여기에 부합된다. 이에 관해서는 Nozick(1974: 26-28, 51-53, 113-119)과 Taylor(1982)를 참고할 것.

 

5) 1872년 9월 2일 헤이그에서 제2차 인터내셔날을 성공적으로 치룬 직후 바쿠닌, 마라테스타 등 서구의 저명한 아나키스트들이 9월 15일부터 산 테이미에 모여 “정치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소위 혁명적 임시정부의 권력과 같은 조직은 모두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거론된 임시정부는 마르크스주의가 주창하는 프로레타리아 독재국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6) 군대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크로포트킨이 연합군의 대독전쟁을 바른 것으로 인정하고 동료 아나키스트들의 반전운동을 비판하였다. 이미 1928년 6월 복건성의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던 이정규를 비롯한 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은 토비와 공산주의세력에 대처하기 위하여 중국 국민당의 요청에 의하여 황포군관학교의 직제에 준하는 황천이속민단훈련처라는 무장자위조직을 만들었다. 특히, “전지공작대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적극 참여한 단체라고 할 수 있다...그렇다고 하여 이 단체를 무정부주의 단체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주도세력 일부를 제외하고 무정부주의 세력이 없으며, 대원들 역시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띄는 인물이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고 주장하는 것(박환, 1997: 125-126)은 매우 신중한 해석이다. 전지공작대의 구성 자체가 김구 계열의 민족주의세력(김구의 장남인 김인, 조소앙의 차남인 조시제, 김구가 파견한 이해평 등)과 연합하여 이룩된 것이므로 이호룡의 비판 자체가 초점을 제대로 맞추기 어렵다. 전지공작대의 성격과 활동에 관해서는 박환(1997)을 참고할 것.

 

7) 5·18과 국가폭력의 관계에 대해서 자유해방주의적(libertarian), 혹은 아나키스트적 해석을 시도하는 김성국(1998b)을 참고할 것.

 

8) “노자철학만이 참된 아나키즘”이고, “노자철학의 총체성은 항상 아나키즘의 본질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는 김용옥(2000: 72-73)도 아나키즘을 제3의 사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무정부주의를 마치 무질서를 지향하는 혼란주의와 동의어인 것처럼 곡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모든 진보주의(=사회주의, 공산주의)나 보수주의(+우파 반동주의, 국가주의)가 한결같이 국가라는 제도에 대한 불가치의(不可置疑)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맑시즘 특히 레닌이즘은 아나키즘을 증오하였고, 모든 스테이티즘(statism) 그리고 우파 반동철학도 아나키즘을 혐오하였다. 아나키즘은 현실 불가능한 로맨티시즘의 타락 내지 리버랄리즘의(liberalism)의 환상으로 치지도외(置之度外)하였다. 왜냐? 아나키즘은 권력에 대한 근원적 부정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지향하는 모두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허나 인류의 예지는 좌 우가 동시에 증오하는데 숨어 있었다. 21세기는 바로 이 좌 우가 모두 혐오하던 의식형태로부터 출발치 않을 수 없다.”

 

9) 김영범(1997: 423)에 의하면, “중 후기 의열단운동의 이념적 위상은 민족주의라고 단언하기에는 부연설명이 필요하고, 사회주의로 간단히 치부해버리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이성동체화(異性同體化)의 지점에 놓인 것이었다. 그것은 민족주의 편에서 보면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사회주의 편에서 보면 민족적 사회주의로 규정될 수 있을 성질의 것이었다. 이때의 사회주의는 민족독립 후 신국가 건설과정에서의 경제체제의 조직원리를 주로 의미하였지, 계급혁명이라는 사회정치적 과정이나 계급투쟁이라는 변혁방법론의 내포를 띠지는 않았다.”

 

10) 아나키즘과 민족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낼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이념과 사회에 관해서는 김성국(1996b: 218)을 참고할 것.

 

11) 유림도 동아일보(1945년 12월 12일)와의  인터뷰에서 “볼세비즘과 아나키즘은 정치, 사상으로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은 만인이 다 인정하는 바일 것이나, 나는 볼세비즘과 정부가 반드시 합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정치행동으로 제3자의 입장에서 합작의 접착제 역할을 하려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유림은 이때만 해도 비록 공산주의에 반대하지만 민족통일의 대업을 위해서는 상호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점차 소련의 조선공산당 지배와 북한의 괴뢰정권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공산세력과의 연대가 불가능할 뿐니라 무의미함을 확신하게 된다.

 

12) 유림은 1948년 3월 5일 남한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담화내용에서 “6. 골육상잔을 초래한다” 와 “7. 미소대립을 조장하여 국제전쟁을 도발한다”는 예언자의 탁견을 제시하였다(대동신문, 1948년 3월 6일자).

 

13) 남북분단이나 6 25전쟁을 두고 외인론과 내인론이 대립한 가운데 최근 세계체제의 구조적 제한성을 강조하는 외인론이 득세하고 있다. 그렇지만, 일제하 독립운동사와 해방 직후의 좌우익 대결구도를 볼 때, 조선의 분단은 이미 일제시대부터 정형화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조선의 오랜 역사를 통해 끈질기게 살아남은 사대주의적 정치행태는 일제말 친일-친청-친로의 삼각구도에서 미소라는 양극구도로 변화되었을 뿐이다. 미소의 그 어느쪽에도 사대하지 않았던 아나키스트의 정치적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비록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것이기는 해도, 가장 떳떳하고 자랑스런 패배이다.

 

14) 이호룡(2000: 214-220)은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비정치적 농민운동의 성과도 과소평가할 뿐이다.

 

15) 특히, 당명을 어긴 5·10선거의 당선자들이 비록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기에 족한 수임에도 과감히 제명함으로써 대의를 추구하는 이념정당의 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오늘날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기 위해 온갖 추태를 부리는 정치판과 비교해 본다면, 과연 한국에 그런 선진적 정당이 있었던지 믿기 어려울 것이다.

 

16) 하기락(1993: 315-326)을 참고할 것.

 

17) 이호룡(2000: 234, 235, 237, 238)의 수사법, 예컨대, 아나키즘의 “사상적 파탄”, “사상적 독자성의 확보 실패“, ”사상으로서의 존립근거를 상실하는 내적 요인“, ”아나키즘의 포기“, ”우익 진영에 편입“ 등은 근원적으로 한국아나키즘에 대한 비우호적 가치전제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

 

18) 아나키스트의 실천지향성은 “실행에 의한 선전(propaganda by deed)"이라는 구호 속에 분명히 표현되고 있다. 이호룡이 사용하는 ”사실에 의한 선전‘은 잘못된 번역이다.

 

19)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개량주의”를 마치 소극적이고 안일한 방법론으로 비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자가당착일 뿐이다. 점진적 방법론을 선호하는 개량주의는 급진주의에 내재된 모험적 기회주의나 선동적 영웅주의를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또 개량과 급진의 차이는 생각보다도 크지 않고 그 경계도 애매한 경우가 많다. 특히, 실질적 효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때로 급진의 부작용은 훨씬 심각하다.

 

20)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활동에 관한 내용은 국민문화연구소(1998)를 참고할 것.


21) 밑줄 친 부분과 번호는 이하 필자의 반론 대상이 되는 항목이다.

 

22) 이호룡이 추구하는 “유림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한 연구”란 것도 자칫 잘못하면 아나키즘과 앙숙관계인 마르크시스트의 권력추구형 시각에서 아나키즘을 편향적으로 바라보는 매우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연구가 될 수 있다.

 

23)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단계적 혁명론을 도식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가능한 목표와 수단 간의 일치 혹은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을 동시적으로 추구한다.

 

24) 하버마스의 지적처럼 헌법은 여전히 미완의 기획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국가체제의 불완전성과 이에 대항하여 개선하려는 시민불복종운동의 초법적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25) 란코프 교수에 의하면, 소련의 정치국은 미소공동위 소련 측 대표에게 2건의 결정문을 하달한다. 1946년 7월과 47년 5월에 하달된 이 결정문은 소련 측 대표에게 미국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제시하도록 하고 미국이 이에 반대할 경우 회담결렬을 선언하라고 지시했다. 예컨대, 1947년 5월의 결정문에서는 남북의 정당지분을 50 대 50으로 나누고 남한 지분의 절반인 25%를 좌익계로 해서 소련지지 세력을 75%로 늘릴 것을 요구하였다.

 

26) 유림의 원칙적 순수성은 물론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의 현실정치(Real Politics)라는 새로운 탈혁명적(Post-Revolutionary) 상황을 고려할 때, 당선자들을 제명하는 대신에 포용해야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당시 국민들의 정치의식이나, 정치문화의 수준을 고려할 때, 과연 아나키스트 정당정치가 성공적으로 존속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렇지만 남조선 단독선거의 위험성을 반대하면서 유림의 독립노농당이 내세운 논리(자주독립을 무기한 지연시키고, 국토분단을 무제한 만성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골육상쟁의 비극을 연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소대립을 조장하여 국제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회고컨대 선견지명의 탁견이 아닐 수 없다.

 

27) 논문의 곳곳에서 유림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거나 실패라고 규정하는 이호룡에게 “당대에 성공한 한국 정당정치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명시할 것을 요구하며, 어떤 기준에서 그것을 성공이라고 하는지 묻고 싶다.

 

28) 사회민주주의의 수용을 “전향“이라고까지 규정하는 것은 너무 엄격한 기준이다. 불모지의 엄혹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할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잠정적 혹은 단계적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현재 필자는 아나키스트이면서도 합리적 대안을 추구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공허하고 맹목적인 반세계화. 반자본주의, 반시장주의 투쟁의 대열에 동참하기 보다는 한편으로는 급진적 정신과 비판적 의식을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실용적으로 점진주의적 노선을 추구하는 자기확대적 급진주의(Self-expanding Radicalism)가 더욱 적실한 행동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최종적이며, 이상적인 순간을 고대하며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전향적인 행동을 통하여 현실을 개조시켜나가는 것이 아나키스트의 도리가 아닐까?

 

29) 소련동구권의 전체주의적 공산주의가 붕괴한 오늘날 과거의 공산주의는 자유(해방적) 사회주의(liberal or libertarian socialism) 혹은 아나르코코뮤니즘(anarcho-communism))에로의 창조적 변신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30) 이와 관련된 보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김성국(2001, 2003)을 참고할 것.

 

31) 한국적 특수상황에서 고안된 자주의 개념은 아나키스트의 최고 가치인 자유와 개념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다만, 자주에는 개인적 자유와 사회적 해방의 의미가 모두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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