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너머weekly> 2010-09-29
한나 아렌트: 오이코스로 하여금 폴리스를 전복케 하자!
I
동물행동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어차피 인간 또한 영토적 동물이라, 자신의 ‘나와바리’를 만들고 타인들로부터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자연스런’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사람이라도 다 같은 건 아니어서, ‘자연적으로’ 주어진 그런 성향을 ‘본성(nature)’이라고 간주하여 고수하려는 이들도 있지만, 대면하고 넘어서려는 줄기찬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를 잡아먹는 것이 ‘자연적 성향’이라고 보아 그것과 대결하고 바꾸어보려는 이들도 있다. 어떤 문제에서도 이런 두 가지 상반되는 태도는 나타나게 마련인데, 말 그대로 어떤 것을 지키려는 태도가 ‘보수주의’가 전자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주어진 것을 바꾸려는 태도로서 ‘진보주의’라는 말에는 후자를 대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자리, 주어진 몫, 주어진 자격, 그리고 주어진 자리나 몫, 자격의 분배체제를 지키려는 것과 그것을 바꾸려는 것 역시 그럴 것이다.
‘정치’라는 말의 상반되는 두 가지 방향 내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다. 보수적 정치와 진보적 정치, 그것은 같은 ‘정치’라는 말로 지칭되지만, 사실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한 것이고, 따라서 정반대의 정치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혁명이란 ‘돌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지만, 무언가를 ‘돌리는 것’은 기존의 자리들에서 이탈하여 벗어나게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애초의 어원이 무엇이든 주어진 체제나 권력을, 삶의 방식을 전복하여 뒤바꾸려는 시도를 지칭하게 되었다. 혁명이 ‘진보’의 정치와 짝을 이루게 된 것은, 적어도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유가 있는 일이다.
한 동안 미국, 아니 현대 미술 전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연극이나 문학 등 다른 예술에 속한 요소를 미술에서 제거하여 미술에 고유한 것을 찾으려고 애를 썼고, 그것으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에 관한 서사에 기대고 있다는 이유로 문학에 기댄, 미술의 본성에서 거리가 먼 예술로 간주하여 절하했고, 다다이즘 같이 퍼포먼스를 미술에 끌어들인 것은 연극과 미술을 혼동한 것이라고 보아 내쳐버렸다. 다른 예술적 요소를 미술에서 쫓아내는 푸닥거리를 통해 미술 고유의 나와바리를 확보하고자 했지만, 그 결과는 텅 빈 평면과 격자였다. 이른바 ‘모더니스트’들이 평면성과 격자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찬사를 반복해서(!) 퍼붓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캔버스마저 두께와 물질적 실체성을 갖기에 조형적이고 건축적이라는 비판 앞에서 그들이 당혹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린버그가 2차대전 후 ‘미국’미술의 주도권을 위해 미술관은 물론 CIA와 손을 잡고 돈과 권력으로 전후 미술계를 휘저어놓았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그는 처음에 <파르티잔 리뷰>라는 살벌한 제목의 잡지에 평론을 쓰던 ‘트로츠키주의’ 평론가였음에도 말이다!). 그가 찬양했던 추상표현주의의 ‘대가’ 잭슨 폴록마저, 그 돈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고 동요했음 또한(한때 미국 공산당원이었기 때문일까?). 나와바리가 이권이나 권력과 관련된 것임을 그린버그처럼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이다.
정치학에서 ‘정치’에 고유한 것을 뚜렷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런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했던 것은 칼 슈미트였던 것 같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란 책은 다른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에 고유한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일관된 책이다. “정치란 적과 친구를 가리는 문제”라는 정의가 그 질문을 통해 그가 찾아낸 것이다. 이는 경쟁 같은 유사현상과 혼동해선 안됨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린버그처럼 유치하진 않아서, 다른 영토와의 외연을 구별하여 겹치는 영토를 없애려하기보다는, 적과 친구의 적대가 전면에 나선 모든 것을 정치의 영토로 정의한다. 즉 그런 적대가 설정되는 순간 어떤 영역도 정치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 역시 정치를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고자 애를 쓴다는 점에서 영토적 동물의 ‘본성’에 충실한 ‘정치학자’다. 정치가 인간 삶의 다른 것들, 가령 먹고 사는 문제 등과 뚜렷하게 구별되어 존재했던 것의 모델을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찾는다. 먹고 사는 문제를 다루는 오이코스와, 그런 문제로부터 벗어난(사실은 누군가 해결해 주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폴리스의 확연한 구별. 그러나 그가 살던 근대 세계란 정치가 먹고 사는 문제, 이른바 경제적 문제로 인해 좌우되던 시대였고, 그래서 심지어 경제가 정치의 토대를 이룬다고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가 글을 썼던 때는 오이코스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어야 할 여자들이 참정권을 얻어 정치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절이었고, 역시 오이코스에서 ‘노동’이나 하고 있어야 할 노예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정치의 영역을 넘보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처럼 먹고 사는 문제와 정치가 구별하기 힘들게 뒤섞여버린 것, 먹고 사는 문제를 다투는 게 정치가 되어버린 것을 ‘사회’라고 부른다.
정치와 비정치의 외연을 뚜렷하게 구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아렌트는 슈미트보다는 그린버그에 더 가까운 것 같다(그린버그와 달리 권력과 돈에 가까워서가 아니라, 시민권을 얻어야 했던 난민이었다는 점에서는 달랐지만, 아니 달랐음에도). 그래서 그는 먹고 사는 문제로부터, 그에 매인 자들로부터 정치 자체를 최대한 멀리 떼어놓고자 한다. ‘사회’가 지배적인 것이 된 시기에 그건 이미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그 와중에도 먹고 사는 문제에 쫓겨다니는 자들로부터 ‘정치’를 최대한 보호하는 길을 찾았던 것 같다. 그가 미국에서 ‘상원’이라는 제도에 대해 주목하면서 납득하기 쉽지 않은 찬사를 퍼붓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는 혁명을 사유하는데서도 아주 다른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즉 혁명의 모델처럼 간주되는 프랑스 혁명의 경우 이처럼 먹고 사는 문제를 정치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 혁명을 망쳐버렸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그런데 정치가 먹고 사는 문제 등을 전부 제거한다면 거기에는 뭐가 남을까? 이른바 ‘공화주의적인’ 이런저런 정치적 제도들, 아마도 그것이 정치라는 나와바리에 고유한 ‘평면과 격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이코스가 떠받쳐주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그림의 평면을 떠받쳐주는 캔버스머저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 앞에 머뭇거리고 있는 ‘모더니즘’ 미술과 동일한 딜레마를 갖는 게 아닐까?
II
아렌트가 이런 식의 정치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던 것에는, 이론적으로는 스승인 하이데거의 영향이 컸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 망명하여 난민으로 살게 했던 나치즘의 경험에 기인하는 바가 더욱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나치즘을 단지 나치즘만으로 다룬다면, 그것은 역사적 분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학에 속하는 것이지 정치학에 속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다행히도(?)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있었기에 역사적 개별성을 넘어서는 정치적 현상임을 쉽게 설득할 수 있었지만, 정치학의 문제로 보편화하기엔 그것만으론 부족했던 것 같다. 여기서 그가 스탈린주의의 소련을 이들과 하나로 묶어 동일한 본성을 갖는 것으로 다룰 생각을 한 것이 이런 이론적 필요 때문인지, 아니면 45년 이후 그가 살던 미국에서의 냉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둘 다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던 그는 2차 대전 전반기에 나치즘 군대의 대부분과 상대해야 했던 소련을 나치즘과 묶어 ‘전체주의’라는 공통된 하나의 범주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전체주의에 공통된 본성을, 그것의 ‘기원’을 이루는 본질을 추적한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그가 제시하는 전체주의의 발생적 본질은 ‘이데올로기’와 ‘테러’, ‘대중운동’이라는 세 가지 요인이다. 첫째, 이데올로기 내지 이념. 이데올로기적 사유는 경험이나 현실로부터 독립한 사유로서, 이념 자체에 의해 연역적인 추론이나 논증의 방식으로 정치적 결정을 끄집어낸다. 둘째는 ‘필연성’이란 개념과 결부된 테러다. 나치즘은 진화론의 자연적인 필연성을 통해, 즉 인류의 진화를 위해 인종적 적을 제거하려 했다면, 맑스주의는 역사적 필연성을 통해, 즉 역사의 발전을 위해 계급의 적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필연성은 나중에 먹고 사는 문제, 즉 인간을 생존에 묶는 필연성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셋째, 전체주의는 대중운동을 본질적인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독재와는 다르다. “전체주의란 정치적인 욕구를 가진 대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날 수 있다.”(<전체주의의 기원>, 2권 25쪽) 여기서 아렌트는 대중이란 원자화된 고립된 개인들의 집합체로 이해한다. 고립된 자들의 외로움,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하게 하는 이 고독이 통상적인 급진주의와 다른 극단주의를 낳았다는 것이다(278~82쪽).
여기서 아렌트가 제시한 요인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단순한 폭력과 구별되는 테러를 뒷받침하는 자연적 내지 역사적 ‘필연성’은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와 테러는 사실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아렌트는 테러를 대중운동과, ‘폭도mob’가 된 대중과 연결하기도 하지만, 이는 필연성에 기초한 이념적 폭력으로서 정의되는 자신의 테러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테러와 대중운동이 전체주의라는 하나의 현상으로 합류한다고 해도, 상이한 출발점을 갖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양자는 구별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을, 그가 나중에 제시하는 이론을 염두에 두면서 좀 더 간결하게 요약하라면,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묶는 ‘필연성’의 개념, 그리고 필연성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 간의 경계를 침범하고 와해시키는 대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이것이 정치를 전체주의로 몰고 가는 핵심적인 요인인 것이다.
이는 ‘혁명’에 대한 분석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그가 보기에 프랑스 혁명이 실패한 것은 첫째, 먹고 사는 것이 힘든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동정 때문에 먹고 사는 문제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 다시 말해 정치를 통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 때문이다. 그것이 제도와 헌법이라는 문제, ‘자유’라는 정치적 문제보다도 불행한 인민의 먹고 사는 문제라는 계급적인 ‘자연적 선’에 주목하게 했고, 그것이 계급적 적에 대한 자코뱅의 테러로 귀착되었다는 것이다. “필연성, 즉 인민의 절박한 필수품 때문에 테러가 발생했고, 프랑스 혁명은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혁명론>, 137쪽) 물론 여기에 어떤 경험도 없이 이론적으로 추론한 것에 불과한 문필가들의 이념(이데올로기)이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또 하나는 바로 그 먹고 사는 문제의 주체인 ‘인민’, 그가 이전에 대중이라고 명명했던 것을 함축하는 인민의 관념이다. “프랑스 식 인민 개념은 애초부터 하나의 조직으로 행동하고 하나의 의지에 사로잡힌 듯 행동하는 대중, 즉 수많은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179쪽) 요컨대 정치의 요체인 자유가 인민의 먹고사는 문제라는 거대한 바다에 빠져 익사한 것이 프랑스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속에서 읽을 수 있는 아렌트의 문제설정은 분명하다: 어떻게 해야 정치를 전체주의로부터 보호할 것인가? 이에 대한 아렌트의 대답 또한 분명하다.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결합하는, 혹은 결국은 테러로 귀착되는 필연성의 영역으로부터 정치를 ‘자유의 영역’으로 분리하는 것,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 그 하나고, 다른 하나는 정치의 경계로 밀고 들어오는 대중을, ‘인민’을 정치로부터 최대한 분리하는 것, 따라서 인민이나 대중이 정치의 요체에 손댈 수 없도록 일정한 벽을 설치하는 것이다. 오이코스와 폴리스를 분리하고, 폴리스에 참여하는 자를 ‘자격 있는 자’로, 즉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자로 제한하는 것이라는 고대의 정치를 정치의 모델로 삼았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오이코스에 속한 사람들을 삭제한 채 정의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순수한 정치의 요체로서 ‘자유’라면, 그 자유는 어떤 자유인지, 누구의 자유인지, 그런 자유가 정말 그의 말대로 ‘보편적’인 것인지, 그 경우 보편성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다시 물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확보되는 순수한 정치라는 것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반문해야 하는 게 아닐까?
III
아렌트의 정치학은 혁명의 정치학, 아니 ‘진보적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반대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아렌트의 이런 정치학을 통해 ‘혁명’을 사유할 수 있을까? 어떤 이론을 순진하게 따라가는 식으로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나올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은 대단한 기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가 비록 미국혁명에 대한 찬사를 펼쳐놓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 속에서, ‘혁명’ 없는 혁명을 그것의 대안으로 제안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 대안에서 그가 강조했던 것은 “불행한 인민대중”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동정과 연민에 혁명을 넘겨주지 않았다는 점, 혁명을 제도를 통해 정치적 자유를 확보하는 문제로 제한했다는 점이었다. 나아가 이미 정치적 주체로 공인된 인민대중이 정치의 근간을 흔들지 않도록 만들어놓은 방어선으로서 ‘상원’이란 제도에 특별한 찬사를 보낸다. 이런 점에서 아렌트가 그토록 좋아하는 ‘폴리스(polis)’를 경찰이나 치안을 뜻하는 ‘폴리스(police)’로 바꾸어놓고, 그가 말하는 정치란 사실 정치가 아니라 ‘치안’에 불과하다고 했던 랑시에르의 비판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보기에 아렌트의 정치학은 혁명의 정치학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혁명으로부터 정치를 보호할 수 있을까를 묻는 정치학이다. 그것은 이미 여성이나 노예, 심지어 청소년마저도 정치적 주체로 전면에 등장한 지금 시대에, 그들이 오이코스에 갇혀있던 고대적인 길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유효하다면 ‘반동’이고 무효하다면 ‘향수’에 불과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이는 그와 하이데거에 공통된 것이다.) 어느 경우든 ‘시대착오적’이란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미국의 공화주의자들은 이런 시대착오에 현대적 형식을 부여하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혁명이나 대중정치와 대결하며 출현했던 것이기에, 그의 정치학은 혁명에 반하는 보수주의자들이, 혹은 치안의 정치학이 싫어하는 것, 혹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슈미트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혁명의 적대자들이 두려워하는 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정치의 관념을 뒤집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혁명을 사유하는데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순 없지만, 어떤 유용한 요소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가사와 경제를 동시에 뜻하는 생계와 생존의 영역으로서 오이코스란, 필연성에 매인,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모든 영광을 뒷받침하지만 오랜 세월 그림자로서만 살아온 자들의 이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렌트 말대로 먹고 사는 데 매여선 정치를 할 수 없다면, 그래서 정치에 자신을 걸 수 없다면, 그런 그들을 정치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게 아니라 그들이 충분히 정치를 사유하고 정치에 목숨을 걸 수 있도록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면 되지 않을까? 더구나 자동화와 정보화가 적어도 ‘기술적으로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었다고 자랑해대는 지금 시기에, 오히려 생산하는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소비의 속도로 인해 자본주의가 고통 받고 있는 이 시기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기는커녕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들은 정치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을 계속 오이코스에 가두기 위해 먹고사는 문제를 문제로서 지속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아렌트가, 이미 정치의 영역에 들어온 대중이 정치에 전념하도록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자는 생각을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만이 아니라 ‘정치를 보호하려는’ 자들은 그럴 의사가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좋은 정치’라는 말로 표현되는 ‘정치의 보호’란 대중들로부터, 그들의 힘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치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이코스의 주어진 자리, 폴리스를 말 없이 떠받치는 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치안 이상이 아닌 그들의 정치를 그저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아니, 혁명적 정치의 꿈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정치학에 그저 머리를 끄덕이고 있을 순 없다.
혁명의 정치학이란 이 분할을 깨뜨리고, 그런 식의 ‘정치학’과 대결하고, 이런 식의 정치를 전복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이코스에 의해 폴리스가 침윤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분할하는 선을 침범하고 와해시키는 것, 그리하여 폴리스의 비밀이 오이코스임을 드러내고, 오이코스 자체가, 삶의 모든 문제가 정치적인 것이, ‘폴리스’가 되게 하는 것.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영역이 구별불가능하도록 ‘오이코스’의 배제된 자들이 밀고 들어가도록 하자. 일상의 삶 전체가 정치의 장이 되도록 하자. 오이코스로 하여금 폴리스를 와해시키게 하고, 오이코스로부터 정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이코스로 하여금 폴리스를 뒤집어 버리도록 하자. 그리고 그들이 걱정하듯이, 대중의 흐름으로 하여금 이러한 분할을 깨고 그 경계를 횡단하며 범람하도록 하자. 대중의 힘을 정치의 일차적 동력으로 작동하게 하고, 계급적 분할, 자격의 분할을 와해시켜 대중화하는 이탈의 벡터를 흘러넘치게 하자. 그리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항상 정해진 자리를 이탈하고 고정된 경계를 가로질러 혁명을 향해 흘러가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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