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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새한철학회 <철학논총> 19(1999년 12월), pp. 149-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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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에 관한 역사철학적 탐구:서설

 


 

진 기 행*

부산외대 영상미디어학과 교수


[한글 요약]

21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인류에게 희망과 안정보다는 절망과 불안이 더 넓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탈근대가 운위되고 있지만 과연 그 탈근대의 내용은 무엇이며, 근대의 무엇을 어떻게 벗어나고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가 해명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불안해질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인류의 제반 문제들을 역사철학적 견지에서 성찰해 보려는 시도이다. 현재 인류의 모든 상황을 규정짓는 것은 바로 근대성이고 1968년 세계적으로 일어난 혁명적 사건들을 통하여 이러한 근대성이 전면적으로 문제시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근대성을 규명하는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폭발적으로 드러나게 된 1968년 혁명의 사상사적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근대성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를 우리는 1)시간의식, 2)기계론적 세계상, 3)시민사회 안에서의 대타관계, 대자연관계, 대자관계로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예비적 고찰을 토대로 하여 17세기 이후 400년간 인류를 지배해 온 근대성의 중심 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려고 한다. 그 하나는 근대성의 근원으로서의 시간의식, 즉 직선적 시간의식이다. 이러한 시간의식이 어떻게 발생하였으며, 그것인 근대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고, 그 부정적 측면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논하려고 한다. 다른 하나의 축은 근대적 세계상으로서의 기계론이다.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이 인류에게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근대성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두 가지 중심 축으로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진 현실 사회 즉 시민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그 극복의 전망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21세기에 사회철학에 해명해야할 과제가 무엇인지 거칠게 살펴보았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큰 틀에서 우리의 현재를 역사철학적으로 조망해 보려는 서설적 시도이며, 따라서 치밀한 세부적 탐구는 본 논문의 성격상 불가능하였으며 다음의 과제로 남겨두었다.


주제분야 : 사회철학

주 제 어 : 근대성. 기계론. 시간의식. 시민사회.

 


1. 들어가면서


서기 2000년은 새로운 세기의 시작이며, 새로운 천년의 시작이기도 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해이다. 그러나 시간을 이렇게 연, 월, 일, 시, 분, 초로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자의적인 편의 내지 의미부여일 뿐 객관적인 세계의 흐름을 이처럼 시간 그 자체의 단위로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세계의 흐름, 인간의 역사는 자신의 전개과정 속에서 단절과 구분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편의를 위하여 시간의 단위로 구분하여 숫자화 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따라서 21세기라는 시간 그 자체는 어떤 특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유사이래 지금까지 일반 민중들의 삶이 한시라도 걱정과 고통 없이 희망과 기쁨만으로 가득한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오늘날처럼 미래가 불투명하고 따라서 현재가 불안과 혼란스러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과거의 역사에서는 먼 미래는 예측하기 힘들었어도 당장 가까운 미래는 예측이 가능하였었다. 그것은 개인의 삶을 비롯하여 세계의 변화 속도가 완만했기 때문이며 따라서 현재의 위치가 과거와 미래와의 관계 속에서 그 위치가 분명하였다. 그러했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혼란스럽지는 않았었다. 혼란은 바로 예측불가능성으로부터 발생한다. 현재의 불안과 혼란도 바로 이러한 미래에 대한 예측불가능성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유명한 석학들과 언론들이 21세기 인류에 대한 여러 가지 전망들을 내놓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가시기는커녕 더 깊어 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전망이 민중들의 삶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거대자본과 거대강국의 논리와 이익에 충실한 전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전망이 미래에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할 과학기술이 낳는 여러 가지 긍정적 효과, 즉 편리성, 신속성, 정확성 등을 이야기할 뿐, 인간의 의식이나 삶의 질에 미칠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축소 내지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미래에 대한 진실한 전망, 대다수 민중들의 삶에 근거한 전망의 부재가 현재의 혼란의 근원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는 혼란의 원인을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현재의 인간의 삶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미래에 대한 그릇된 전망을 낳을 수 있다. 그리고 현재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결국 과거의 역사에 대한 왜곡된 해석과 맞물려 있다. 여기서 역사철학적 탐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실 사회와 현실에서의 인간의 실제적 삶에 진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철학이라면 당연히 현재의 이 혼란을 최소화하고 비록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을 수는 없더라도 가능한 한 올바른 전망을 내놓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고 있는 현실의 구조를 역사철학적으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한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인류역사 전체를 사정(射程)에 넣지는 못하지만 근대, 즉 17세기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 400년간의 세계 흐름을 정치·경제·인간의 역사 그리고 이에 대한 사상(思想)적 해석의 역사를 통하여 규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본 논문은 이러한 탐구를 위한 서설(序說)로서 그 전체적인 윤곽과 과제를 설정해 보려는 시도이다. 특히 본 논문은 이마무라 히토시가 『근대성의 구조』에서 개진하고 있는 문제의식과 내용을 재구성해 가면서 필자 나름대로의 사유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그럼으로써 거기로부터 벗어나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2. 68년과 근대의 문제


1)1968년의 역사적 의미

현재를 탈근대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그 말은 현재는 이미 근대를 벗어난 시대, 근대적인 것이 무너진 시대라는 말이다. 그러나 근대로부터 탈근대로의 전환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도대체 근대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진정으로 무너졌는지, 무너졌다면 언제 왜 그리고 어떻게 무너졌는지, 근대가 무너짐으로써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된 논의나 정리 없이 탈근대를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1세기의 길목에서 우리는 진정 우리의 현재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하여 근대를 다시 전면적으로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먼저 언제, 왜 근대성이 우리의 문제로서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아 근대가 전면적으로 문제시 된 해는 일반적으로 1968년으로 잡는다. 1968년은 서양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혁명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해에 서구에서는 프랑스의 파리, 동구에서는 체코의 프라하, 아시아에서는 북경의 문화대혁명, 미국에서의 베트남 반전운동 등 전세계가 격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을 통하여 드러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역사적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파리의 68년 5월 혁명을 통하여 우리는 서구 사회가 근대 이후 자신 안에 심각하게 안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은폐하였던 모든 문제를 남김없이 드러나고 또 그것을 끝까지 추적해 들어가게 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프라하의 봄을 통하여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사회주의가 안고 있던 문제들이 민중적 차원에서 철저하게 밝혀지게 되고 따라서 적어도 사상적인 면에서 사회주의가 결정적으로 붕괴하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물론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다. 결국 이러한 두 가지 의미를 종합하면 파리의 5월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하여 그리고 프라하의 봄은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철저한 고발과 비판을 가했다는 것, 그리고 이 두 사건은 사실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두 가지 현상이었다는 점을 인류는 뼈아프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68년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보통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어 왔지만 사실은 같은 종류의 동질적인 체제이며, 표면상으로는 분명히 대립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립체제라는 것은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특히 베트남 전쟁을 통하여 냉전체제라는 것이 얄타회담 이후의 미국과 소련의 야합이었음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고, 베트남 전쟁 반대운동을 통하여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대 강국에 의한 세계지배체제에 대한 민중의 신뢰가 뿌리에서부터 무너지게 되었다. 나아가 양대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지탱되고 있던 정신적 윤리적 질서마저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68년 혁명을 1848년 혁명에 비견할 만큼 서구문화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한다. 그는 1848년 혁명이 세계체제의 지구문화의 토대로서 자유주의가 수립되는 것으로 이어졌다면, 68년 세계혁명은 바로 이 역할로부터 자유주의를 퇴역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68년 이후 30년 동안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은 대중들이 전통적인 반체제운동들(이른바 구좌파)을 외면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68년 혁명은 최근 200년간 전세계를 양분하여 지배해 온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체제에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사형은 이미 집행되었고, 자본주의에 대한 사형집행은 좀더 오랜 시간을 요할 것이다. 그리고 두 체제로 대표되는 근대세계의 변혁 혹은 근대세계 자체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갖게 했다. 68년 이후 실로 세계에는 모든 면에서 엄청난 변화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근대성과 관련하여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2)근대지식과 정신에 대한 불신

68년 이후의 근대지식과 그 정신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 개시되는데, 그것은 1920년대 이후의 근대철학과 근대정신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토대가 되어 일어날 수 있었다. 특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은 실로 근대철학의 토대전체를 근본으로부터 뒤흔드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 이래로 서구 철학을 지배해 온 대상화 내지 제작 중심의 존재 이해가 근대에 들어서면서 전면적으로 개화하여 그 결과 기계론적 세계상과 기술주의에 정향된 사고 양식이 근대정신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이었으며, 따라서 그의 철학적 의도는 바로 근대정신과 근대사회의 지평선을 이루는 기계론적, 제작 중심적 사고와 행동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극의 근원』(1928)은 하이데거와 다르지만 그와 동일한 문제의식으로 근대정신 일반의 역사철학적 비판을 실행한 것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인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실재』(1929)는 근대정신을 근원적으로 비판하려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정신을 초월하려는 철학적 구상을 담고 있다.

이들을 이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근대정신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구조주의에 의하여 근대정신에 대한 도전도 있었으며, 알튀세르에 의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타났지만, 결국 68년에 이르러 이 모든 사상들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일반대중들에게까지 근대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하였다.

또한 68년이 제기한 근대철학과 근대정신에 대한 물음은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여러 가지 작업을 통하여, 개인적인 자아 의식을 절대적인 근거로 삼는 인간주체중심주의에 대한 회의와 비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주체를 원리나 근거로 삼는 사상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혹은 영국 경험론이나 독일 고전철학도 포함하는 거의 모든 근대철학 체계를 지탱해 온 중심 사상이었다. 그것에 대한 회의 정신이 대학을 뛰어넘어 일반에게까지 광범위하게 공유되어 나갔던 것이 68년 문화 혁명의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근대지식은 곧 기술적 지성이며 그것은 근대 기술의 내적 근거였는데, 60년대에는 근대정신의 정수인 기술에 대한 비판이 대중적인 규모로 확산되어 갔다. 이미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비극적 사건에 의하여 근대 기술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전면적으로 드러났었는데, 68년 이후 그 부정적 측면이 더욱 더 극대화되기에 이른다. 또한 이 기술의 문제와 더불어 '생태학 운동'도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3)근대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반란

68년 이후 권력의 문제가 푸코에 의하여 새로운 차원에서 문제로 자각되었다. 특히 국가뿐만이 아니라 일상적 시민사회 안에까지 침투해 있는 권력 일반의 문제가 자각되어 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푸코는 시민사회 안에 그물처럼 쳐진 권력 관계를 이론화한 최초의 인물로서, 그는 권력이 도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국가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실은 시민사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권력의 담지자로서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권력이 필연적으로 배제와 차별을 낳게 된다는 점이며, 바로 여기에 근대정치체제가 갖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미 19세기에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기초가 되는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그 자유주의가 민주화에 대한 민중적 요구를 억압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지배적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또한 19세기에는 자유주의 이념과 내연의 공생관계를 맺으면서, 민족주의(nationalism)/인종구분(ethnicity), 인종주의(racism), 성차별주의(sexism)가 부상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처럼 근대 국민국가가 내세우는 이념인 만인의 자유와 평등의 이면에 사실상 계급차별적이며 인종차별적인 구조가 은폐된 채로 뿌리깊게 도사리고 있었는데, 68년의 투쟁과정에서 대중들도 이 점을 서서히 자각해 갔다. 뿐만 아니라 남녀차별의 문제가 대중적 차원에서 자각되고 그 후의 여성운동에 연결되어 가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던 것도 역시 68년이었다. 근대국가, 근대시민사회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린 자유와 평등이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 깊은 속에는 인종차별, 민족차별, 남녀차별이라는 부자유와 불평등이 바위덩이처럼 무겁게 들어앉아 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도 역시 68년이 낳은 결과였다.

일반적으로 근대경제에 대한 비판은 자칫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만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68년 혁명의 중요한 교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인식이다. 68년의 경험에 의하면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는 말만 다른 뿐 근대경제라는 점에서는 결국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쌍둥이 형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공통된 뿌리는 바로 경제합리성과 기술합리성 내지 그것을 받쳐주는 생산력중심주의이기 때문이며, 완성된 체제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경제합리성이나 기술합리성 그리고 생산력을 높여야 한다는 발상은 둘 다 전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68년은 지금까지 잘못 설정되어 온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하는 대립 도식을 파괴시키는 현실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비록 쌍둥이라도 약간의 차이는 있듯이 자본주의는 19세기적 개별 기업의 자유경쟁 체제이고 사회주의는 20세기적 관리경제 체제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 규범, 발성법은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난점을 사회주의적으로 극복하면 된다는 발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이미 현실적으로 소련의 붕괴를 통하여 여실히 드러났으며, 역으로 사회주의 경제의 난점을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로 극복해 보려는 시도도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그 전망도 어둡기만 하다.

문화에 있어서 68년의 중요한 경험 중의 하나는 20세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전위주의 즉 아방가르드(avant-gardism) 예술론의 해체이며, 이것은 예술의 분야를 넘어서 다른 분야에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모든 전위 형태의 예술 운동은 68년에 완벽하게 종말을 고하고, 예술 운동은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구축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남겨지게 된다. 전위에 의한 예술, 전위에 의한 학문, 정치에 있어서 전위정당에 의한 대중의 지도라는 발상법은 근대의 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인데, 68년 이후 전위와 대중이라는 도식은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68년은 17∼18세기 200년,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19∼20세기 200년, 합계 400년에 걸친 근대세계에 대한 결별과 근대성에 대한 종말을 고한 해였다고 할 수 있다. 68년 혁명이 이루어놓은 근대의 정치, 경제, 문화 이념의 사실상 해체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현재의 우리 상황이며, 바로 여기로부터 오늘날 우리들이 목격하고 있는 모든 불안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선 68년 혁명에 의하여 해체되어 버린 근대, 그렇지만 우리의 현재에 길게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근대, 그 근대의 구조와 구성요소를 살펴보도록 하자.



3. 근대의 구조와 구성요소


17세기 이후 400년간 근대세계를 사상사적 관점을 가지고 분석해 들어가기 전에 먼저 대단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일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근대세계를 형성해 온 그 구성요소를 크게 세 가지로, 좀더 세분하면 다섯 가지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시간의식

미래에로의 시간의식인 근대의 시간의식의 특징은 단적으로 직접적 등질적 시간이기도 하지만 '앞으로의 도약'에 극단적인 강조가 주어져 있다는 점에 있다. 근대인은 정해져 있지 않은 암울한 미래를 향하여 무슨 일인가를 '기도'(企圖)한다. 미래를 향한 '투기'(投企)는 불확정적인 암울한 것으로 비약하기 때문에 '투기'(投機)이며 도박이다. 이 投企〓投機의 관념은 전진, 발전, 향상, 완성가능, 진보 등의 관념들을 거느리고 있다. 역사의식으로서의 진보사관, 발전사관은 이 전망적 시간의식의 귀결이다. 많은 사람들은 계몽사관이 낡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 낡아버렸는가. 오히려 현재 점점 맹위를 떨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진보 따위는 낡은 관념이라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投企·投機에 광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이 시간의식이 근대적 삶 속에서 우리를 얼마나 단단히 묶고 있는지는 장(章)을 달리하여 좀더 깊이 살펴볼 것이다.


2) 기계론적 세계상

근대세계의 탄생과 기계론의 탄생은 동시에 일어났다. 근대를 근대로서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세계의 기계화이며 그 배경에 기계론 혹은 기계론적 세계상이 자리잡고 있다. 기계론적 세계상은 자연과 인간과 세계를 기계로서 보게 한다. 또한 그것은 주요한 경향으로서 근대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방향 짓는다. 아무리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자신을 기계로서 보도록 강제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고 있다. 서구근대의 초기에 확립된 기계론적 세계상은 오늘날 결코 낡거나 약화되지 않고, 오히려 현대에 있어서도 아니 현대에 있어서야 말로 그 억압적 작용력을 가장 강력하게 발휘하고 있다. 세계의 기계화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현대는 근대의 절정기, 최전성기라고 말할 수 있다. 장기이식, 유전자공학의 융성은 그 단적인 예이고, 생태계의 파괴는 자연기계론의 필연적 귀결이다.

기계론을 사고의 측면에서 파악하면, 방법적 이성론이 된다. 이 방법이라는 관념은 철두철미하게 기계론적으로 구상되어 있기 때문에 '제작'원리에 기초한다. 근대의 방법이란 제작적, 생산적, 구축(構築)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의 '만드는 정신', '제작 정신'은 방법을 요구한다. 따라서 근대의 방법주의는 근거와 체계를 요구하며 그것을 '진리'라는 형식으로 가다듬어 간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방법주의가 있다. 그것은 윤리의 방법주의이다. 근대세계는 개인의 독립과 자유를 요구하며, 이러한 개인은 또한 내면에 있어서 자기통제와 자기입법 또는 자기희생에 의해 방법적으로 구축된다. 내면의 방법적 제작, 즉 인격의 구축 없이는 근대세계는 원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자기훈련과 내면의 '합리적 경영'은 윤리적 방법주의의 귀결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진보로서의 시간의식과 기계론적 세계상을 토대로 하여 다음과 같은 근대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더해진다.


3) 시민사회

타인과의 관계(정치 경제), 자연과의 관계(생산 과정), 자기와의 관계(윤리 혹은 정신)라고 하는 세 가지 관계가 기계론적으로 그리고 방법주의적으로 조직되는 것, 여기에 근대의 인간 관계인 시민사회의 독자적인 성질이 있다.

먼저 대타관계부터 보자. 사람과 사람을 엮어서 소통(communication)시키는 근대 특유의 대타관계는 시민사회이다. 근대사회의 각 영역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이해관심에 따라서 행동한다. 관심은 항상 자기에로의 관심이다. 이것을 추상화하면, 대자관계로서의 계산적 이성으로 되고, 이 이성은 자기와 타자를 대상화한다. 이념적으로는 근대인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자신과 환경을 '표상'으로서 파악하며, 표상을 전달하고 소통한다. 시민사회에서는 대상화하고 표상 하는 인간관계의 매체는 항상 물체적인 것이다. 그것이 경제에서는 화폐이며, 정치에서는 국가권력이며, 일상생활에서는 다양한 물적인 매체이다. 대상화하는 이성이 이들 물적(物的)인 매체를 생산한다. 시민적 소통은 자기, 타인, 모든 관계를 물화(物化)하며, 또한 이러한 물화 없이는 합리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물화는 근대의 소통의 근본 특징이다.

다음으로 대자연관계를 보면, 근대에서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관계행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노동이다. 근대인의 노동의 특질은 그 에토스(ethos)와 노동관에 있다. 노동의 에토스는 세속적 금욕에 의해 뒷받침된 근면에 있으며, 직접적 소비의 단념이다. 이 노동관의 특질은 자연에 대하여 지배와 관리의 관점으로부터 관계하는 점에 있다. 자연은 기계이며, 만들고 해체할 수 있다고 하는 세계관(세계의 기계화)은 자연을 실험의 대상으로 삼고, 자연을 폭력적으로 처리하는 정신의 구축 방식을 의도한다. 이 자연에 대한 계산합리적으로 행하는 폭력적인 관계를 물질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근대기술이다.

마지막으로 대자관계를 살펴보자. 근대인이 자신으로 향한 정신의 존재방식을 이성이라 부른다. 그것은 세계를 대상화하고 표상하는 동시에 자기를 대상화한다. 그것은 곧 자기 내 반성(自己內 反省)과 분석적 이성이다. 이 이성은 계산과 계량중심의 이성이다. 근대합리성은 세계를 계량적으로 객체화한다. 모든 것의 질(質)을 사상하고 양(量)으로서 측정하는 것, 양으로 환원된 요소를 양적 비율에 따라서 구성하는 것, 이러한 조작은 기계론적 세계상 없이는 할 수 없다. 세계를 제작할 수 있다고 결단하는 정신만이 근대이성에 어울린다. 반성과 분석에 의한 내부의 대상화와 외부세계의 대상화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그것은 세계의 기계화와 하나이다.


이상과 같이 근대세계의 구성요소를 정리할 수 있는데, 이러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근대세계를 우리는 한마디로 기계론적 제작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대세계 내에는 이러한 경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즉 근대세계는 기계론적 제작주의를 주요한 경향으로 가지면서, 또한 요소 영역간의 결합 원리로서는 유기론적 경향을 부차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근대세계는 기계를 만드는 기술적 제작이라는 의미에서의 '제작'(consturuction, fabrication, production)을 가장 중요한 사상과 행동의 원리로 삼고 있음은 우리가 근대세계를 분석하면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그러할 뿐만 아니라, 각 요소 영역 또한 이러한 '제작 원리'에 의해 구성되고 또한 그것에 의해 내부로부터 움직여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근대세계는 전체에 있어서도 부분에 있어서도 기계론적 혹은 제작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근대세계가 이러한 한가지 원리에 의해서만 움직여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그 반대의 경향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이 유기론적 경향이다. 이 경향에 의하여 각 요소들이 서로 상호 침투하며 또 각 요소가 다른 요소들을 '표출'할 뿐만 아니라 전체를 '표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은 근대사상사의 전개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근대사상의 지배적인 조류는 분명히 과학과 철학의 모든 영역에서 기계론적이고 생산중심적이지만, 그 조류에 대항해서 유기론적 사상이 거듭 등장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 유기론적 사상이 기계론적 사상의 지평 내부에서 기계론을 비판적으로 보완하고 수정한다. 라이프니츠, 헤겔, 특히 현대에 와서는 화이트헤드에 이르기까지 근대 유기론적 사상과, 그리고 자연과학에 있어서 닐스 보어, G. S. 벨, 데이비드 봄 등에 의한 유기론적 자연관은 근대 기계론의 지평을 공유하면서 기계론의 난점을 극복하려는 기도였다.


4. 근대성의 근원으로서의 시간의식


이상에서 우리는 근대의 구성요소를 몇 가지로 나누어 예비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았는데 이제 그것을 좀더 깊이 파고들어 가면서 근대세계에 대한 역사적· 사상사적 의미분석을 시도해 보자.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근대라는 이 거대한 건축물을 지탱하고 있는 중심 기둥, 그렇기 때문에 만약 근대를 무너뜨리려면 가장 먼저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중심 축을 두 가지로, 즉 시간의식과 세계관으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근대적 시간의식 - 직선적 시간

근대의 정신과 경험을 가장 잘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계라고 할 수 있다. 시계는 정밀 기계의 대표이며, 특히 자동 기계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 자동 기계라는 것이 중요하다. 시계는 스스로 움직인다고 하는 그 자동성 때문에, 단순히 인간에게 유용한 도구로 그치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로서 즉 인간 존재와 세계의 법칙성에 관한 비유로서 자주 이용되었다. 시계는 근대 특유의 시간의식을 대표하는 동시에, 근대의 세계상인 기계론을 체현하고 있다. 시계적 시간성과 자동기계적 세계상이 근대의 산물인 시계를 둘로 싼 표상 세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떠한 시대에도 인간이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고자 하는 한, 반드시 시간의식이 요구된다. 즉 우리는 이렇게 삶으로서의 시간, 사회적 시간을 요구하며,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시간은 우리 인간의 삶을 조직하는 내적인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전에는 유목과 농업 중심의 생활 형태가 영위되고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태양의 운행과 계절의 순환을 기반으로 하는 공통된 시간상이 있었다. 이는 유럽과 아시아가 완전히 동일하다. 이와 같이 자연의 순환을 기초로 해서 만들어진 시간의식은 간단히 '순환시간'이라고 불리고 있다. 유럽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순환 시간, 즉 닫힌 원환(圓環)의 반복이라는 이미지가 근대 직전까지 있었다. 이 순환시간, 즉 자연의 운동에 의거한 시간의식이 무너지고, 새로운 시간의식, 즉 직선적 시간,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로도 무한히 열린 시간의식이 생겨나올 때, 비로소 시간의식의 근대가 도래한다.

순환적 시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과거중심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간의식은 종종 동일물의 반복, 전통에 따라 사는 데에 가치를 두는 전통주의, 보수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순환시간에 미래의식이 끼어 들 틈은 없다. 전통적인 순환시간 속에는 과거와 현재밖에 없다. 미래는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다. 미래에 대한 언급은 신의 영역에 속하며 따라서 인간에게는 금기시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식이 나타난다는 것과 순환시간이 붕괴하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이다.


2)선취(先取)하는 의식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그래서 '아직 없는 것'이다. 아직 없는 것을 의식하는 일은 아직 없는 것을 선취하는 의식이다. 이 선취 내지 예측이라고 하는 것은 근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근대 이후의 독특한 사고 방식인데, 이러한 사고방식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가. 중세 교회의 시간과 상인의 시간은 전혀 달랐다. 교회의 시간은 신의 시간으로, 그것은 신의 것이며 늘인다던가 줄인다던가 하는 일이 없이 영원히 똑같은 것으로서 반복하는 것으로서 신성시되었던 시간이었다. 반면에 점점 그 활동범위를 넓혀가고 있던 상인의 시간은 계산 가능한 추상적 시간이다. 이 둘은 원리상 화합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시간 관념이다. 상인이 실제로 시장이라는 공간에서 행하는 첫째 행위는 단순한 물건을 내다 파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놓여지는 시장상황 즉 컨텍스트의 불확정 요소를 앞질러서 계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취 의식이 없이는 상인의 행위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인의 궁극적 목표는 이윤의 추구인데 이윤은 시장에서 어떤 선취적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위험을 선취하여 상품구매나 출하의 시기, 상품 가격이나 대부 이윤을 계산한다고 하는 경험을 거듭하는 가운데, 점차로 시간이라는 것을 양적인 대상물로 추상화하여 계산하는 시간의식이 생성되어 갔다. 여기서 말하는 '시간이 양적인 대상물로 된다'는 것은 실제상 세분 가능한 시간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순환적 시간은 하루를 아침, 점심, 저녁 셋 정도로밖에 분할하고 있지 않았지만, 상인은 이것을 1분, 1초라고 하는 단위까지 분할하고 조작했다. 그러한 미분화 가능한 양적 대상물로서의 시간, 계산 가능한 추상적 시간, 간단히 말해, 직선시간은 상인의 행동으로부터 나왔다. 상인의 행동이란 선취하는 의식에 의해 선도되고 있는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상인의 선취하는 의식이 이후 근대에 계승되어 나갈 추상적이고 직선적이며 계산 가능한 시간을 낳은 셈이 된다. 이러한 시간의식은 그리스에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로마에서도 시계와 같은 것이 발명되었지만 주류는 아니었다. 대중이 일상생활에서 이른바 근대시간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게 된 것은, 유럽의 경우 12세기 이후의 상인들에게서 비롯된다. 14세기 이후가 되면 서양의 도시에 거대한 시계가 중심부에 설치되어, 교회의 종과 다툼이 생겨났는데, 이것은 순환시간 내지 신성한 시간과 추상시간의 다툼이며, 농촌과 도시의 다툼이었고, 결국 종의 시간이 패배하고 시계의 시간이 승리하게 된다. 이와 같이 시간의식의 문제는 중세 내내 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었으며, 따라서 "시간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 그래서 삶의 리듬을 둘러싼 투쟁 내지 지배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가 되면 "중세도시에서는 이미 '상인의 시간'이 '교회의 시간'에 대해 승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3)기도(企圖)하는 의식

그러나 근대시간성을 선취의식만으로는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의 경우에도 역시 상인과 방대한 화폐 재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주의가 성립되지 못했는가 하는 물음과 연관되며, 이 물음도 시간의식에 관련된다. 이 문제는 베버와 마르크스를 통할 때 비로소 해명이 가능하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의 근대성을 산업의 성립, 혹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동정신의 성립에서 보고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론』제1권 24장인 「본원적 축적론」에서, 자본주의 발생 과정에서의 생산 수단과 노동자의 분리를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많은 중상주의 정책에 의해 강제적으로 노동자가 만들어졌음을 지적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본원적 축적론」에서 근대 노동의 리듬에 맞는 노동 신체를 만든다는 의미에서의 노동 창출 과정을 그렸고, 막스 베버는 이러한 노동자나 제조자들의 내면적 의식을 그렸다. 우리가 마르크스와 베버의 학설에 따라 정신과 윤리의 측면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 이유를 말하면, 근대 자본주의의 근대성은 합리적인 노동 형식과 세속내(世俗內) 금욕 윤리의 창출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시간성은 단지 불확실한 미래를 선취하는 의식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선취한 불확실한 조건을 기초로 해서 무언가를 기도(企圖)하는 정신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근대 시간성은 선취 의식과 기도하는 정신의 결합에서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기도하는 정신은 미래를 선취하는 동시에 그 선취한 미래를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고, 그것에 따라 다시금 불확정한 미래라는 어둠을 향해 결연히 비약한다고 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 기도하는 행위 안에 실은 근대 특유의 시간의식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도란 선취적으로 결단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이 선취적 결단이라는 행위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근대에 특유한 행위의 또 다른 측면이 드러난다. 즉 이 결단은 선취라고 하는 지적 조작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으나, 실은 '의지'(意志)에 의한 행위이다. 미래를 선취하고 현재를 변형시켜 구축해 가는 정신은 바로 의지적 정신이며, 이 의지가 실은 사고를 지배해 간다. 이 의지라는 행동 형식은 근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근대는 의지의 시대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 이전까지는 인간의 자발적 의지에 의한 행위는 대단히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자칫 잘못하면 신에 대한 저항으로 간주되어 이단시 될 수 있기 때문에 금기시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고는 단지 관조 할 뿐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의지가 부가되면 사고는 기도하는 정신 쪽으로 이동해 간다. 헤겔의 지양Aufheben, 니체의 '힘에의 의지', 마르크스의 '혁명'도 결국 이와 같은 근대의 의지론 위에 서 있다. 헤겔은 근대정신의 전형적 대표자라고 읽을 수 있고, 니체와 마르크스는 전혀 다른 표현 방식이기는 하지만 근대의 정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근대정신의 화신이자 또한 그것을 비판하고 극복해나가는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하이데거는 어떤 의미에서 근대 기도 정신의 정수를 정식화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니체의 선례도 있긴 하지만, 20세기에 있어서 근대의 깊은 곳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했다고 하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기도'의 이론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 이해의 깊은 근저를 밝혀내고, 근대 이해에 크게 공헌한 헤겔, 마르크스, 니체, 하이데거 등의 공적은 우리에게 근대세계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는 데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로서는, 그들의 작업을 비판적으로 이용하면서, 지금껏 유럽형이상학의 이론 구도 안에서 근대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의 맹점을 돌파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데카르트의 연역적 방법주의와 베이컨의 귀납적 방법주의는 시각이 다른 듯이 보이며 또 사실이 그렇지만, 양쪽 다 기도론(企圖論)이라는 점에서는, 즉 미래를 선취하고 결단하여 현존 상태를 변혁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같다. 기도하는 정신은 베이컨과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정신에 대해 커다란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기도의 정신과 미래 시간의식은 근대적 지식의 성격을 결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의 도덕의식도 또한 기본적으로 기도의 정신에 의해 근거지워져 있다. 즉 도덕도 또한 기도인 것이다. 도덕 또는 윤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관련하는 것이다. 사람은 도덕의 무대에서 자신에게 대면하며 자신과 관계한다. 그것은 자신을 방법적으로 훈련하여 자신에게 행동의 법칙을 설정하고 그 법칙에 따라 자신의 일을 수행해 간다고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경제의 무대에서 노동이 수행하는 역할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똑같은 것이 도덕의 무대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도덕은 말하자면 양심의 세계이지만 도덕적 양심 또한 계산하며 노동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도덕은 기도가 된다. 18세기에 들어 영국의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말하는 '자기통제'(self-command), 독일의 칸트가 『도덕철학서론』에서 말하는 '자기규제' 혹은 '자기입법'이라는 것은. 양쪽 다 기본적으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통제나 입법이라는 말에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듯이, 자기 자신에게 도덕의 법칙을 부과하고, 그것을 향해 자신의 정신을 단련시켜 간다는 것이 근대적 도덕이다. 즉 법칙이 하나의 계획이 되고, 이상적 계획을 향해 불순한 신체를 지닌 '나'를 순수 상태로 드높여 가는 셈이다. 단련시킨다는 것은 제대로 갖추어진 방법적 조직적 훈련을 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이론과 실천 영역에서 거론되는 인식과 도덕에서조차 결단적 기도의 계기를 포함하는 미래 시간의식이 끼어 들어 있다. 자각하건 하지 않건 사실이 그렇다.


4)근대적 시간의식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시간론이라고 하면, 후설의 추상적인 내적 시간의식이라든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론만 논의되고 있지만, 시간의식에 대한 역사철학적 고찰도 중요하다. 근대시간론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 활동하는 근대적 인간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과연 다른 시간의식을 자신들 안에 만들어 낼 수가 있는가를 우리는 역사철학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이것은 후설의 시간의식을 아무리 확대 해석해도, 베르그송의 시간의식을 아무리 생산적으로 이해해도 만들어 낼 수 없고, 현실에 대한 역사철학적 고찰로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우리는 68년의 여러 가지 비판 운동으로 근대적 시간의식의 문제에 대하여 어느 정도 눈을 뜨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17세기 이래의 시간의식, 더 한정하자면 베이컨과 파스칼이 지적한 누적적, 직선적 시간의식, 즉 '진보적 시간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 아직 당분간은 더 계속되겠지만 좀 거리를 두고 보자면, 이 시간의식의 생산적 가능성은 마침내 그 생명을 다한 듯하다. 근대시간성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간론을 구상하는 일은 사상적으로도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도 우선 근대시간성의 정체를 다각도로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정체를 우리는 제작주의적 그리고 기도주의적 행동으로 정의해 보았다. 만드는 정신과 기도하는 정신을 어느 정도까지 뿌리까지 흔들 수 있는가가 향후 역사의 행방을 좌우할 것이다.


5. 근대적 세계상으로서의 기계론


1) 자연기계론

근대 이전에도 기계는 있었으나 그것은 기계라기 보다는 오히려 도구라고 하는 편이 낳다. 도구와 근대적 의미의 기계의 차이는, 도구는 어차피 인간의 손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지만, 기계는 인간의 손과 정신과 두뇌에 의한 생산물이면서도 인간으로부터 일정한 독립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점이다. 17세기의 시계와 20세기의 컴퓨터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으나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17세기의 자동 기계인 시계의 출현은 우선 기술의 무대에서 근대의 도래를 알리는 결정적인 신호탄이었다. 이후 근대세계에 굳건히 자리잡은 기계론은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이 장에서는 자동 기계로서의 시계에 표현되어 있는 근대 특유의 기계론적 세계상의 성립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기계론적 세계상의 중심에는 기계의 이미지가 놓여있다. 기계는 인간에 의한 기술적 제작물이기 때문에, 제작 행위가 그 중심에 있다. 근대인은 자각하건 하지 않건, 어쩔 수 없이 혹은 자발적으로, 반드시 제작적 관점, 즉 만든다고 하는 관점에서 자신과 타인과 세계 전체를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바라보는 방식은 일상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보통은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6세기 이후부터 화이트헤드가 '천재의 세기'라고 부른 17세기초에 걸쳐 자연의 제작이라는 이념 하에서 자연기계론이 원리상 성립되었다. 자연의 제작적 이미지에 관해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한 말인 '이 세계 즉 자연이라고 하는 책은 삼각형이나 원과 같은 수학이나 기하학의 언어로 씌어 있다'는 것은 대단히 유명하다. 이 말은 근대 이전의 세계상, 즉 유기적 세계상에 관한 철저한 사망 선고라고 해도 좋다. 유기적 세계상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퓌시스(physis)가 의미하듯이 각각의 사물 안에 그 사물의 존재를 가능케 하고 있는 생명 원리 같은 것을 인정한다. 유기론적이란 말은 각각의 개체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자립적 원리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각각이 독자성, 고유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 없으며 직접적으로 개체와 개체를 연결해 가는 그런 원리도 없다. 이것이 닫힌 우주상의 근본 원리이다. 그런데 갈릴레이가 '자연은 수학적 언어로 씌어 있다.'고 말하는 그 순간, 개체가 가지고 있던 고유성은 사라지고 모든 사물의 기본 성격이 완전히 똑같아져 버린다.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적 차이일 뿐이고, 양적 존재라고 하는 점에서는 만물은 완전히 똑같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연은 수학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갈릴레이의 자연학으로 상징되듯이, 자연의 제작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기계론은 우선 첫째로 자연 연구의 방면에서 나타난다. 고대와 중세의 자연상(自然像)은 살아 있는 유기적 자연의 이미지였으나, 갈릴레이의 자연상은 자연에 관한 표상을 구축한다고 하는 대단히 인공적인 자연상이며 그것은 만들어진 것, 지적 조작에 의해 구축된 자연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근대 자연상의 특징이다. 주어진 자연을 주체가 구축한 이념에 의해 변형시키고 그렇게 제작된 표상을 가지고 자연에 대해 조작을 가한다는 발상법이다. 자연 기계론의 두 번째 점은 자연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양적 존재자의 덩어리라는 것, 더 간단히 말해 순수한 양적 공간이라는 것이다. 근대적 세계관은 양적 세계상이다. 이렇게 해서 우선 자연이라고 하는 것을 이념적으로 제작한다. 마치 기계를 만드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조작을 해서, 이념적인 설계도에 따라 자연을 구축해 간다. 갈릴레이의 자연관은 100-150년 후 뉴턴의 자연학이라는 형태로 그것이 체계화된다. "뉴턴은 자연세계 전체를 하나의 커다란 기계개념으로 파악하는 '뉴턴의 세계-기계(Newtonian world-machine)'를 이룩하였다."기계가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부품으로 환원될 수 있듯이 자연도 또한 양적 요소로 환원될 수 있다. 이와 같은 표상체계를 일컬어 기계론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기계론적 자연 인식이 근대를 정복하게 되고 모든 근대적 인식의 지배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오랜 역사에서는 만드는 정신, 제작의 정신에 의해 자연을 변혁시킨다던가 하물며 지배한다고 하는 것은 원리상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신의 영역에 속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계론적 세계상은 전적으로 근대에 나타난 새로운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법의 관점, 확실성이나 정확성의 관점, 제작으로써 자연을 정복한다고 하는 관점 등에서 17세기에 베이컨은 다른 철학자로서는 좀처럼 말할 수 없는 근대의 특징을 날카롭고 명석판명하게 밝혀내고 있다. 데카르트도 당시 17세기의 기계론적 세계상을 철학적 체계로서 구축한다는 과제를 물려받은 전형적인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유물론적 세계기계'라는 말은 오히려 뉴턴보다도 데카르트적 용어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뉴턴의 기계론은 아무래도 물리학에 그 중점을 두고 있지만 데카르트는 생물학에까지 그의 기계론 사상을 확대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역시 '방법'을 말한다. 또한 확실성과 정확성을 추구한다. 결국 경험론과 합리론은 정신 자세 면에서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지만,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으로서는 동일한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적인 제작적 세계상, 즉 기계론적 세계상은 17세기에 두 가지의 사상 유형을 동시에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더 중요한 점은 데카르트가, 기계론적 세계상이 근대의 주체 이념을 낳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연기계론으로서 나타나는 기계론적 세계상이야말로 '생각하는 나'가 탄생하는 장소이다. 이리하여 이른바 근대적인 자아를 처음으로 출발점 내지 근거의 위치에 놓을 수 있었다. 만일 기계론이 없었다면 전체를 개체로 분해한다고 하는 정신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 개체를 코기토로 바꾸어 '나는 생각한다'라는 원리를 정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론적 세계상이야말로 근대 개인주의의 원리를 만들어내는 초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체적(individual) 혹은 개체(Individuum)라는 개념을 엄밀히 이론화한 것이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임을 여기서 확인해 두는 것은 중요하다. 이 기계론의 정신이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분해하고 재구성하는 방법적 정신을 만든 것이며, 이 방법을 뒷받침하는 원점에 분할 불가능한 개인이 놓이게 된다. 이 개인이 바로 주체이며 그것은 철학의 원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의 원리가 되기도 했다. 근대경제에서의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이 원리적인 위치에 놓이고, 근대 정치에서는 개인적 주체의 권리가 주장된다. 이러한 경제적, 정치적 권리, 요컨대 근대 자연권 사상도 또한 기계론의 성과다.

기계론은 근대세계의 모든 면에 침투해 작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기계론을 부정해 버리게 되면, 역으로 전체주의라는 괴물을 불러내는 데 공헌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경험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정치적 낭만주의는 보수파이건 혁명파이건 기계론을 부정한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집단에 끼워 넣어지게 되고 근대의 뛰어난 유산인 개체의 '자연권'마저도 부정하게 되며 결국 그것이 얼마나 많은 개인들을 비참하고 황폐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한번 기계론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기계론적 세계상이야말로 근대 주관성(주체) 철학의 근원이다. 데카르트에서부터 출발해 18세기의 칸트나 헤겔을 지나 후설에 이르는 주관성의 원리는 역사적으로 볼 때 다름 아닌 기계론에 의해 구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인간기계론

근대기계론은 우선 자연의 제작이라는 관념을 만드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인간을 제작한다는 이념을 내놓은 사람이 있었다. 이도 역시 기계론적 세계상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인간의 제작이라는 이념이 확립되고서야 비로소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인간기계론'이라 불리게 되는 사상의 탄생이다. 그 사람은 바로 홉스이다. "기술에 의하여 Commonwealth 즉 국가(라틴어의 Civitus)라 불리우는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창조되지만 그것은 인공적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17세기 사상가 중에서 홉스가 누구보다 명확히 자동기계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인간의 세계가 기계로서 만들어지며 인공 인간으로도 만들 수 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왜 홉스가 중요한가 하면, 베이컨이나 데카르트가 자연에 대해 제작적 작위적 이미지를 강조한 데 비해, 그는 정치라고 하는 구체적인 인간 세계를 작위적 세계상으로 철저하게 그려내는 모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근대 사회사상의 사실상의 건설자였다고 하는 것이다. 17세기의 홉스, 18세기의 드 라 메트리의 유물론, 19세기의 마르크스의 유물론도 모두 다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을 공통의 바탕으로 삼고 있다. 비록 내용 면에서는 다르지만 발상의 전제는 공통된다. 즉 이 세계를 인간이 제작한다고 하는 관점에서 파악하며, 분해한다든지 조립한다든지 하는 형태로 기계론적으로 바라본다.

지금까지는 일반적으로 유물론에 의해 관념론이 대체된다든지 관념론에 의해 유물론이 극복된다고 하는 식으로 말해져 왔으나, 그것은 겉모양만 그러할 뿐 속내용은 동일하다. 즉 양자는 동일한 것의 두 측면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특히 20세기에 화석화 되어버린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에 대한 비판의 입장을 설정하기 위해, 대단히 유용한 사상사적 정리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헤겔의 철학을 근대 기계론적 세계상의 철저한 계승자로 간주한다면, 선 듯 납득하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은 유물론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오히려 전형적인 관념론이다. 왜냐하면 자연기계론에서는 우선 가장 먼저 '만드는 정신'이 생겨나서 자연에 관한 표상이나 개념을 만들고, 그 이후에 자연이라고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이 표상의 그물을 던져서 건져내 간다는 발상이며, 이것은 사실 헤겔의 관념론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의 기계론도 헤겔도 모두 자연에 대해 지성 주도형을 그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사실은 근대의 기계론에 관념론적 발상이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데카르트의 코기토 중심주의는 물론이고 칸트나 헤겔의 관념론적 입장이 근대정신의 주류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3) 기계론적 세계상과 시간 관념

기계론적 세계상에 의해 비로소 근대 특유의 시간 관념, 즉 진보적 시간관념이 생겨났다. 그런데 동시에 지금까지 말한 자연 기계론과 인간 기계론 없이는 진보적 시간론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었음도 사실이다.

그럼 진보적 시간을 구성하는 기본 조건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우선 '진보'라고 하는 시간개념과 순환시간개념은 서로 모순되며, 진보의 이념은 근대이전의 순환시간과 싸워 이기고 생겨난 것이며,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시간의식이다. 또한 이 진보시간성은 근대기계론과 짝을 이루어 생겨났다. 직선시간성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양적인 것으로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양적이라는 것은 어디를 취해도 등질적인 시간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의 등질적인 시간 관념은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이 만들어낸 등질적 공간론과 짝 개념이다. 공간도 시간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이미지로 파악된다. 원리상 기계론이 전제로 삼는 등질 공간, 등질 시간은 아무리 조그맣게 잘라도 또한 아무리 크게 묶어도 똑같은 것이므로, 미적분이 가능하게 된다.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에 걸쳐,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각각 미적분학을 만든 것은 이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유기론적 세계상에서는 미적분학이 성립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제각기 이질적인 것이 불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공약되지 않는 세계, 양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세계, 이것이 바로 질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나 뉴턴의 미적분학은 근대적 세계상에 있어서만 가능하다.


4)근대의 기계론적 세계상에 대한 비판

근대적 세계상에 대하여 맨 처음 비판했던 이는 베르그송이며, 이어지는 이가 후설이다. 베르그송은 생물학을 이용해서 근대적 세계상을 비판했는데, 그에 의하면 물질세계는 기계론의 세계이며 언제나 우리가 지각하는 순간 그대로 존재하는 타성일 뿐이고 따라서 그 세계에는 지속이 없다. 그러나 유기체의 세계, 생명의 세계에는 진화가 있으며, 이 진화는 지속이다. 생명의 세계는 탄력성이 있으며, 어떤 생명이 사고를 당해 자기의 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면 다른 부분이 그 기능을 대신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기능이 탄생한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에는 그런 전체성을 유지하려는 탄력성이 없다. 물질은 쪼개지면 그대로 언제나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물질의 기계론적인 '작위적 통합'에 대하여 생명의 탄력적인 통합을 '내면적 통합', '참 통합', '살아있는 통합'이라고 불렀다. 후설은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갈릴레이로 상징되는 근대의 정신구조를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근대의 정신구조는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뒷받침해 왔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위대한 그 근대과학의 창시자일지도 모르지만, 근대의 의미적 세계 즉 생활세계를 숨겨버린 위대한 은폐자이기도 하다는 것이 후설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생활세계라고 하는 용어를 채택하여 유의미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 실감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과제라고 역설했다. 이론적인 것과 생활세계적인 실천의 틈새를 줄이고 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는 노력이 후설 현상학의 과제였다. 후설의 이 문제의식은 기계론적 세계상을 논적(論敵)으로서 상정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의 철학'은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기계론적 세계상에 대한 비판의 성과일 것이다.

21세기로 접어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는 근대의 사상에 대해 더욱 더 비판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의 4백년간을 이끌어 온 것이 바로 이 기계론적 세계상이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보다 깊은 곳까지 샅샅이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근대는 기계론의 시대였다. 현재 우리가 혜택을 입고 있는 갖가지 문화적 성과들은 기계론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제동장치 없는 기계론의 무한정한 확대는 정치나 경제의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신의 면에서도 근대의 성과를 역으로 짓밟아 가는 경향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계론적 세계상의 이러한 이중성을 명백히 바로 볼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기계론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긍정적 가능성과 그것을 억누르고 있는 부정적 경향을 함께 충돌시켜서 아직 우리의 사유 속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 기계론적 틀의 부정성을 제거하고, 가능성을 개화할 수 있는 새로운 조건을 탐구해 가는 것, 바로 이것이 21세기를 맞이한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는 철학적 과제 중의 하나이다.


6. 근대성의 실현으로서의 시민사회


1) 근대 시민사회

19세기의 자본주의는 17-18세기까지 발생한 '초기'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것으로서 19세기 후반에 와서 지리적으로 전지구적이 되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modern)를 만들었다. 이 장에서 간단하게 살펴볼 주제는 근대세계의 역사적인 성립과정과 그 현황이다. 즉 19세기에 있어서 비로소 근대성의 요소가 '유기적으로 구조화된' 전체로서 결합되어 엄밀한 의미에서의 근대세계가 성립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근대세계체제는 자본주의체제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즉 만물의 궁극적인 상품화를 통한 자본의 끊임없는 축적에 우선성을 두고 작동하는 체제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 이 거대체제, 거대기계는 그것이 지닌 내적인 약점에 의해, 특히 차별과 배제의 구조에 의해 변혁을 요구받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는 근대세계의 해체를 시도하여, 이 '관절 분리' 작업을 통해 근대세계의 좋은 성과를 새로운 '관절 체계' 안에 이식하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근대시민사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오직 하나의 근대세계와 그 역사밖에 없다고 하는 것, 스탈린주의도 나치즘도 파시즘도 일제의 군사통제 경제도 근대세계에 내재한 만성적 모순에 대한 대응의 유형들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기의 극복'이 시도된 뒤에도 동일한 체제, 즉 관리 - 통제 체제밖에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 이러한 것들을 이제 우리는 확실히 깨달아야만 한다. 이러한 자각을 촉진시킨 것은 근대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의 모든 분야가 안고 있는 '배제와 차별'에 대한 자각이었다. 근대세계는 최근 4백년간의 역사에서 점점 더 배제의 힘과 차별의 체계를 강화해 왔다.

물론 근대체제 혹은 근대의 세계상이 이상적(理想的) 이념으로서 낳은 위대한 성과들은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근대세계상의 한계를 넘어야만 한다. 68년 혁명 이후, 하나의 거대한 시대였던 4백년 사이에 갖가지 사상이 주창되고 갖가지 체제가 실험되었지만 이제 그것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과 함께 불가능성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이제 무엇이 문제인지가 명백히 볼 수 있는 그런 단계에 와 있다.


2)근대정신과 배제의 관계

기계론적 세계상, 진보적 시간의식, 예측과 기도의 시민사회 등으로 구성되는 근대성의 구조가 왜 배제적으로 되는 것일까. 스미스나 칸트가 이상(理想)으로 요청한 '자기통제'나 '자기입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이 현실적으로 증가해 왔던 근대세계가, 즉 이성적인 인간과 이성적으로 구조로 만들어진 근대세계가 어째서 배제와 차별의 구조를 지니게 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시민적 인간의 윤리와 정신이 아직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고 혹은 자기입법적이 아니기 때문에, 즉 근대세계가 아직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배제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오히려 반대로 근대세계가 충분히 '합리적'이기 때문에, 근대적 시민의 내면이 너무나도 충분히 '자기통제적' '자기입법적'이기 때문에, 도리어 근대성은 배제적 차별적인 것이다. 근대시민의 내면적 '자율성'은 근대 4백년의 이상(理想)이었다. 바로 여기에 비밀의 열쇠가 있다. 스미스-칸트적 자율성과 자립성은 '경험적 자아'를 '법'에 기초해서 철저하게 '훈련하고' '단련해서' 보다 고도의 '순수한 자아'로 상승시켜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근대인의 내부는 두 가지 자아로 분열되어 있으며, '순수한 자아'가 '불순하고 경험적인 자아'를 '관리한다'고 하는, 말하자면 '자아의 계급구조'를 성립 당시부터 안고 있었다. 그러나 '순수 자아'가 '경험 자아'를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구조 속에는 가능하면 '경험 자아', 즉 신체와 욕망을 갖는 자아를 말살하고 싶다는 욕구가 몰래 작동하고 있다. 근대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이미 배제와 차별의 구조를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들이 서로 대면할 때, 그들은 서로 상대를 '물체화'하고 상대를 계산적으로 처리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에 이를 정도의 배제에 이르는 일도 종종 있다. 그 회로를 차단하는 방지 장치가 적어도 근대사상 자체에는 없다. 왜냐하면 근대 자아, 근대 주체의 내면적 원리인 자기훈련이라고 하는 원리가 곧 배제와 차별의 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근대성의 구조가 지닌 이중의 배제성을 알게 된다. 하나는 근대인이 내장하고 있는 '배제의 정신'이며, 또 하나는 근대세계의 모든 제도가 안고 있는 '배제의 구조', 즉 계급적 경제, 정치, 민족과 인종의 차별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 등이다.



7. 나오면서 - 근대의 계승과 극복을 위하여


이제 우리는 현존 세계체제 즉 자본주의 세계경제로부터 또 다른 세계체제 혹은 체제들로의 이행기에 살고 있다. 이를 우리는 제1의 근대(17-18세기), 제2의 근대(19-20세기)를 이은 제3의 근대라고 하자. 앞으로 인류는 최근 200년간의 역사적 유산을 긍정과 부정의 양면에서 반복하면서, 조금씩 다음 세대로 이행해 가는 과도기가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근대원리와 근대적 구조가 여전히 살아 있는 한, 근대에 대한 비판과 저항 그리고 근대에 의한 비근대(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라고 하는 남방 벨트)의 흡수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될 것이다. 근대의 원리 및 그것을 구성하는 몇 가지의 요소는 모든 점에서 극히 강력하고 파괴적이며, 모든 것을 '사물'로서 취급하는 경향을 갖는다. 따라서 제3의 근대에 있어서도 인간과 자연을 기계화해 간다는 의미에서의 전면적인 '사물화'가 여전히 실현되어 갈 것이다. 관리주의 체제란 인간과 자연의 기계론적 사물화를 정치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다가올 시대는 우선 관리주의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리라 예측된다. 다른 한편, 사회에서는 상호 분해, 분열이 격심해지고, 그 과정에서 상호 적대적인 극한적 투쟁 즉 내란이 격렬하게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며 실제로 그러하다. 결국 근대의 원리와 구조가 지금까지보다 더욱 강력해지고 전 지구를 뒤덮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기계론적 사물화가 극에 달할 것이다. 그래서 근대원리가 비근대를 흡수해 가고, 경제 생활의 전면적인 국가자본주의화가 전 지구를 뒤덮을 것이다.

근대원리의 전 지구화라는 의미에서의 세계화 경향과 함께 근대성 안에 잠들어 있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발굴하는 작업이 사상과 실천의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어 갈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 긍정적인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근대의 첫 번째 성과이자 가능성은 이성의 힘이다. 비록 근대가 개척한 이성의 능력은 자세히 보자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일단 양해한 다음에, 가능성의 관점에서 '이성비판'을 행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근대 안에 잠자고 있는 이성의 발전 가능성을 다음 시대의 과제로서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근대의 두 번째 성과이자 가능성은 시민사회를 창출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시민사회란 부르주아 사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나 중세의 공동체원리를 대체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틀을 말하며,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깊이 탐구하였고 그 밖의 여러 곳에서도 문제가 되어온 시민사회를 다시 한번 새로운 관점에서 즉 상호관계(교통관계)의 근대적 경험이라는 형태로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근대의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이어받아 재정립하고 발전시켜갈 때에 가장 먼저 검토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근대를 계승하는 사고 방식의 문제이다. 우리는 근대의 원리를 이루어 온 방법주의의 정신 또는 체계 구축의 정신에서 벗어난 곳으로부터 재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새로운 출발점을 일찍부터 모색했던 철학자들이 있다. 표상주의 혹은 대상화일원론을 비판하며 존재와 시간을 재고한 하이데거, 각 요소를 헤겔식으로 총괄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로 뒷모습을 비춰보듯 각각의 측면을 대치시키는 '소극적 변증법'을 시도하는 아도르노, 근대세계의 톱니 장치를 역으로 취해 철저하게 분해 조작을 해보는 들뢰즈와 데리다, 생산중심주의의 근대세계를 전도시키기 위해 근대 이전의 경험을 참조하면서 그것을 근대의 경험과 대조해서 개조하고 유기론적 정신에서 근대의 기계론을 제한해 가는 시도를 한 바타이유, 구제라고 하는 신학적 구조를 원용해서 기계론과 진보시간론을 동시적으로 전도시키는 시도를 한 벤야민 등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는 원리를 만들고 근거를 세워 체계화해 간다고 하는 방법적 '기도'가 근대정신 구조의 특징인 것은 일찍이 알았었지만, 바로 그 내부에 타자배제적인 성격이 숨어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타자배제적인 성격을 회피하면서 극복하는 사고 방식, 세계를 기술(記述)해 가는 스타일로서 반방법주의, 반체계주의적인 사고의 실험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아도르노의 '에세이(Essai) 사상'이 그것이다. 근대적 사고는 원래 기도(企圖)한다든지 계획한다든지 하는 것이 그 중심이며, 그것이 방법주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방법주의로 철저하게 일관하게 되면, 의도하는 틀 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가정해서 처리를 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배제되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작은 것이라도 극히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러한 것을 시야에 넣고 생각해 가기 위해서는 '애매함'을 감수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에세이적 스타일의 사고라는 것이다. 그것은 근대의 또 하나의 병적인 특징인 '정확함'에 반대되는 사고이다. 근대정신의 경우 철학을 비롯한 모든 과학은 조그마한 애매함이라도 남아 있으면 불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철저하게 정밀함을 추구했다. 그 정확함의 최고봉이 바로 수학이다. 근대의 모든 과학뿐만 아니라 또한 철학도 수학을 모델로 삼아 정확한 원리나 근거로부터 출발해서 수미일관된 체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바로 학문의 이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 이념에 따라 순수한 학문의 세계를 구축했고 그 정확함이 바탕이 된 순수성이 바로 진리의 보증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현실에는, 그리고 자연의 현실에도, 순수한 존재 같은 것은 없다. 진실한 존재의 모습은 복합적인 것이다. 하나의 현실은 무한한 곡절을 가지며 긍정과 부정이 번갈아 전개되어 가는 그런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복합체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근대의 데카르트주의는 그것을 단순한 것으로 환원하여 거기서부터 연역적인 순수 체계를 만듦으로써 진실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곡절이나 상호 침범이나 상호 충돌이야말로 진실의 참모습이기 때문에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묘사하는 노력을 피할 수는 없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는 오히려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정확함, 순수함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 일반적 방침의 구체적 실천에 관해서도 아도르노, 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가 이미 시도하고 있다. 이 방법주의 혹은 체계주의가 심각한 문제를 낳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사상의 태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단순한 사상의 차원이라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이며 따라서 체계적 사고라도 상관없겠지만, 정치의 경우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이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획일주의나 관리 통제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구체적인 정치의 장에서는 순수하지 못한 것의 배제와 숙청이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지금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류의 현상을 바라보라. 나치의 순수 아리아인에 대한 이데올로기로부터 순수한 러시아 민족이라든가 순수한 프랑스인이라든가 순수한 크로아티아인이라든가 해서 일종의 순수주의가 세분화되어 서로 충돌하고 결국 피비린내 나는 인종청소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근대원리의 사상적 측면을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행위의 이면에 있는 발상의 방식을 공격하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방법주의나 순수주의는 정치의 경우 통제, 관리, 계획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요컨대 '전위당'과 그 지도자의 독재주의는 순수근거주의의 근대원리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을 만들어내는 발상의 근원을 안에서부터 밝혀내는 것이 현대 철학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근대 시민사회가 필연적으로 도달한 이와 같은 배제와 차별의 벽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돌파할 것인가, 그리고 그 대안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모색해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설로서의 이 글의 성격상 두 가지 대안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먼저 이마무라의 이자공동체(異者共同體) 혹은 타자공동체이다. 이는 중심이 없는 공동체이다. 중심이 있으면 거기로부터 차별과 권력이 생기게 된다. 중심이 없으면 거기에 힘에 의한 동일화도 배제도 없게 된다. 솔선해서 자기배제하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만든 소극적 공동체는, 비록 무력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거기에서는 배제와 차별이 없는 생활의 실질이 실현되어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인간이냐 비인간이냐 하는 물음이 완전히 의미를 잃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 대안은 월러스틴의 무지개연합(rainbow coalition)이라는 개념으로 이것은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집단들이나 차별 받는 집단들이 선거 혹은 정치연합에서 명분을 알리고 이익을 얻기 위해 만드는 연합체를 말한다.

현재로서 우리가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너무나 힘겨운 일이다. 다만 자기 내부의 타자를 깨닫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배제와 차별의 회로를 끊는 첫걸음일 것이다. 자기 내부의 타자를 보는 것은 반성의 노력이며, 바로 거기에서 이성의 능력이 시험된다. 물론 이때 우리는 이러한 반성과 이성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경계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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