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은 자신의 저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주)에서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기 위해 라캉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알튀세르 및 그의 제자들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문제제기는 하나의 심각한 지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미 프로이트-맑스주의를 “정당하지만 불가능한 기획”으로 기각하고 이데올로기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을 스피노자에게서 취하는 방향으로 알튀세리앵들이 결정적으로 일보를 내딛었을 때, 프로이트-맑스주의는 이제 그 이론적인 가능성이 소진된 어떤 합의된 종말에 이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주)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Verso: New York, 1998. 이하 인용시 SOI로 약칭하고 쪽수만 괄호에 표시.}}
이러한 이론적인 국면에서 다시 (물신숭배론이라는 매개를 통해) 프로이트/라캉과 맑스를 결합시킬 수 있음을 확언할 뿐 아니라 그 토대 위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비판하려는 지젝의 시도는 나에게 사뭇 센세이셔널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젝의 질문은 분명 하나의 추문일 수만은 없는 것 같다.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그 ‘과거지사’를 무덤에서 다시 끌고 나옴으로써 그는 적어도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회피해버릴 수만은 없는 어떤 불편함을 강제하고, 또 그 강제의 힘을 통해 또 다른 사유의 공간을 열어 젖히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라캉 대 알튀세르’라는 지젝의 질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질문을 더욱 철저하게 이론적인 문제로 다룰 것임을 전제하는 것이어야 한다. 개인적인 서신 교환의 가십적인 쪼가리 구절들에 연연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양자가 어떻게 동의하거나 논쟁하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특히 그것의 첫 번째 논문인 ?맑스는 어떻게 징후를 발명하였는가??에서 전개된 지젝의 알튀세르 비판의 내용을 살펴보고 알튀세르주의자의 입장에서 그에게 줄 수 있는 답변이 무엇인가를 숙고해보고자 한다. 또 이러한 숙고를 통해서 알튀세르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론이 ‘오늘’ 취하는 모습과 그것의 독특함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는 일에 내 자신을 한정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먼저 ?문학과 사회? 2000년 가을호에 실린 바 있는 양석원의 ?이데올로기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주)라는 논문을 우회하고자 한다. 이러한 우회의 이유는 양석원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갖는 오해 아닌 오해가 역설적으로 라캉/지젝과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을 드러내는 일에 묘한 방식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주) {{양석원, "이데올로기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 문학과 사회 2000년 가을, http://www.moonji.com. 한 페이지로 구성된 인터넷 문서로부터 인용하므로 이하 이 논문으로부터 인용되는 것은 따로 인용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1. 양석원의 "이데올로기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
양석원은 자신의 논문에서 라캉과 알튀세르의 쟁점들 가운데 “무의식적 주체”의 문제를 소개하고 알튀세르가 라캉을 어떻게 오해했는가를 설명한다. 양석원이 문제로 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알튀세르는 라캉이 “(상상적 동일시를 통한) 자아의 형성과 (상징적 동일시를 통한) 주체의 형성을 구분”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둘을 혼동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동은 알튀세르가 ?프로이트와 라캉?이라는 글에서는 “상상계 단계와 상징계 단계를 구분하면서도 곧이어 상징계적인 것이 상상계적인 것을 지배한다고 말함으로써 상징질서의 법이 인간의 탄생 이전부터 인간을 구성된 주체로 통제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글에서는 “이데올로기를 상상적인 관계”로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양석원에 따르면 이 같은 이론적 혼란의 원인은 알튀세르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을 크게 구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그의 주장의 진위를 가리기 전에 우리가 고려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프로이트와 라캉?과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주로 정신분석학에 관계되어 있다고 한다면 후자는 정신분석학에 종별적으로 관련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과정에 개입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따라서 그 양자가 모종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동일한 어떤 주제에 대한 글인양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알튀세르가 라캉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했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확인하기 위해 정말로 관심 있게 봐야하는 글은 ?프로이트와 라캉?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동의가 된다면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 양석원은 알튀세르가 “주체”와 “자아”를 구별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알튀세르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결론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이트가 이번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해주었다. 자신의 독특한 본질을 가진 개인인 실제적인 주체는 ‘자아’ ‘의식’ 혹은 ‘실존’―그것이 대자이든 자신의 육체이든 ‘행위’이든―에 집중된 어떤 에고의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인간 주체가 하나의 구조, 그 또한 ‘자아’에 대한 상상적 무지 속에서, 다시 말해 그들이 그 속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이데올로기의 형성 속에서만 ‘중심’을 가지는 구조에 의해 중심을 벗어나고 구축된다는 사실이다.*주)
*주) {{루이 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깡?, ?아미엥에서의 주장?, 솔, 43쪽. 이하 이 책으로부터 인용시 AA로 약칭하고 쪽수만 괄호에 표시.}}
여기서 알튀세르는 “실제적인 주체”, 즉 ‘무의식적 주체’와 “자아”를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알튀세르에게 있는 주체와 자아의 구별의 부재라는 양석원의 주장은 주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관련되어 제기되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구별의 부재가 ?프로이트와 라캉? 및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 두 논문 모두의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에서의) 동요로 나타난다고 진단한 바 있기 때문에, 적어도 라캉을 직접 다루고 정신분석학에 종별적으로 관련된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알튀세르가 “실제적인 주체”와 “자아”를 명확히 구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여기서 알튀세르가 말하는 “자아”와 “주체”의 구별이 이미 그가 라캉을 따라서 논의한 어린아이의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상상계의 시기 및 상징계의 시기의 구별에 대응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알튀세르는 “주체”와 “자아”를 구별함으로써 정신장치가 단일한 구조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심적(異心的)인 구조를 갖는다는 것을 여기서 명확히 하고 있으며 이러한 설명은 적어도 라캉의 이론화에 충실한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와 라캉?이 문제인 한에 있어서 양석원의 주장에서 남는 비판의 요점은 알튀세르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라캉의 이론에 대한 오해라는 점일 것이다. 즉 “이 두 계기는 하나의 법, 즉 상징계의 법에 의해 지배, 통제, 각인된다. […] 라캉은 질서와 법의 효과가 아이의 탄생 이전부터 아이가 태어나길 기다려 아이가 첫 울음을 우는 순간부터 아이를 포획하여 그 아이에게 위치와 역할 따라서 강요된 운명을 배정해준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이가 통과하는 모든 단계는 법의 지배하에 이루어진다”(알튀세르, ?프로이트와 라캉?, 양석원의 논문에서 재인용). 즉, 알튀세르는 상징적 질서가 ‘아이의 첫울음’과 함께 이미 도착해 있는 것으로 이론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고 양석원에 따르면 이건 알튀세르가 “주체를 해체”하기 위해서 라캉을 “일방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저 인용된 문장 전체를 통해 알튀세르는 “주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또 본 텍스트의 저 문장에 이어지는 부분에서도 알튀세르는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 질서가 “주체”를 구성한다느니 하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번에는 라캉 자신의 텍스트로 들어가 보자. 레비-스트로스를 원용하여 라캉은 ?말하기와 언어의 기능과 장(場)?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상징들은 사실 그물망 안에서 인간의 삶을 너무나 총체적으로 포위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살과 피로’ 그를 낳을 그 모든 것들과 합류한다. 그것은 너무나 총체적이어서 그의 탄생에 요정들의 선물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별들의 선물과 함께 그의 운명(destiny)의 모습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너무나 총체적이어서 그를 신실하거나 배교자로 만들 말들을 주고 그가 아직 있지 않은 바로 그 장소까지 그리고 심지어 죽음 너머까지 그를 쫓아다닐 행동의 법을 그에게 준다. 그것은 너무나 총체적이어서 그 상징들을 통해 그의 목적이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즉 그가 죽음을-위한-존재(being-for-death)의 실현에로의 주체적인 달성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 안에서 말(the Word)이 그를 무죄로 석방하거나 유죄 판결할 최후의 심판에서 말이다.*주)
*주) {{Jacques Lacan, Ecrits: A Selection, New York: W. W. Norton & Company, 1977, p.68.}}
따라서, 양석원이 알튀세르에게서 문제로 삼은 ‘먼저 도착해 있는 것으로서의 상징적 질서’라는 테제는 사실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라캉 스스로의 테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석원이 말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이란 적어도 ?프로이트와 라캉?이라는 텍스트가 문제인 한에서는 전혀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라캉과 알튀세르 양자 모두가 이야기하는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 질서’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상징적 질서가 어린아이에 의해 체험되는 방식의 종별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상상계적 시기와 상징계적 시기에 관해 각각 설명한 뒤에 그 두 시기는 유일한 법칙인 상징계의 법칙에 의해 모두 지배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상징계의 시기에 앞서는 상상계의 시기가 의미하는 바를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구절을 통해 표현한다. 즉, “[…] 상상적 세계 자체의 시기는―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실제로 그것을 상징적 관계(즉, 인간의 자식과 인간으로서의 어머니의 관계)로 인정함이 없이, 직접적인 관계를 체험하는 첫 번째 시기”(AA, 35)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 질서,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먼저 도착해서 그/녀를 가족 내에 위치 짓고 그/녀에게 어떤 역할을 부여하는 것으로서의 “인간” 질서를 “인간” 질서로 인정함 없이 상상적인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즉, 상상계에 있어서 이야기되는 ‘아기와 어머니의 관계’는 인간인 아기와 인간인 어머니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프로이트 식으로 돌려 말한다면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빨 때, 그/녀(혹은 차라리 그것)는 어머니의 젖을 하나의 ‘부분-대상’(part-object)으로만 인정할 뿐 어머니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하지는 않는다는 것의 다른 말이다. 어머니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식할 때 아기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새디즘에 가까운) 자신의 욕구 충족 행위(젖 빨기)로 인해 파괴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anxiety)에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인격적 인식은 물론 프로이트에게 있어 사춘기까지 이어지는 성적인 ‘잠복기’의 도래를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양석원의 주장과는 달리, 알튀세르가 말하는 바의 ‘먼저 도착해 있는 상징적 질서’라는 것은 주체의 구조에의 절대적 종속 등을 표현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상상계의 체험의 종별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질문이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즉, 그렇다면 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이데올로기에 의한 호명(interpellation)을 설명함에 있어 그것을 상징적인 것이 아닌 상상적인 것으로 설명했는가? 사실 알튀세르는 거기서 이데올로기를 “개인들의 실재 조건에 대한 그들의 상상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규정할 뿐 아니라 “기독교의 종교 이데올로기”를 설명할 때, 그는 양석원이 주장하듯이 대문자 주체와 소문자 주체들의 관계를 “반사적인 것, 즉 거울구조, 그것도 이중으로 반사적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상상적인 관계로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이 점을 분명히 하자. 이 질문에 답하는데 있어 즉각적으로 제외되어야할 것은 알튀세르가 라캉을 오해했기 때문이라거나 알튀세르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의 구별을 크게 하지 않았다는 식의 답변(양석원의 답변)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껏 살펴봤듯이 알튀세르는 전혀 라캉을 오해하고 있지도 않았거니와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지젝이 등장할 차례다. 양석원은 자신의 논문의 서두에서 지젝을 거론하면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쟁점으로서의 ‘무의식적 주체’의 문제를 논했지만 사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양석원이 주장하는 것의 정확히 반대의 주장을 펼침으로써 알튀세르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절들에서 나는 지젝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을 양석원의 논문이 제기한 질문과 관련시켜 고찰함으로써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서 취하는 입장의 이론적인 이유들을 내 나름대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2.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의 핵심은 “알튀세르와 그의 학파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과 이데올로기적 호명 사이의 연결고리를” 이론화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어떻게 이데올로기적인 국가장치가 주체를 호명하고 이데올로기적 믿음의 효과를 주체 안에서 생산하게 되는가? 그에 따르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기계가 [대문자] 의미와 [대문자]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경험 속으로 ‘내부화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과정에 관해서만 논할 뿐” 그 호명에 들러붙어 있는 필연적 “잉여, 나머지, 그 외상적 비합리성과 비의미(senselessness)”가 이데올로기적 명령의 바로 그 조건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상징적 질서의 구조적인 작동은 그것이 내부화되기 위해 반드시 필연적인 잉여(폭력의 흔적)를 남기게 되는데 그 잉여는 상징적 질서의 작동에 반해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수행성을 구성하면서 ‘인식’이 아닌, ‘인식’이전적인 ‘믿음’으로서 이데올로기의 원활한 작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물질적 힘을 이룬다.
따라서 주체가 상징적 질서 내에서 맛보는 이데올로기적 “기쁜-의미(jouis-sense), 의미-내-쾌락(의미된-쾌락)”은 외상(trauma) 없는 쾌락, 고통 없는 쾌락이 아니라 반대로 외상과 고통을 통해서만 작동하는 쾌락인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상징적인 것)의 한복판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의미”와 “의미-내-쾌락”은 인식에 앞서 ‘강요되는 믿음(forced belief)’을 통해서, 그 강요의 외상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믿음은 물적 강제와 의식(ritual)을 통해 사전에 미리 달성된다.*주)
*주) {{조금 길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바로 뒤에서 논의할 카프카와 관련된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관료제적인 절차들이 매우 불편하게 느껴지고 그것을 왜 반드시 지켜야하는가 의아해 할 때가 있다. ‘유연하게’ 절차들을 운용하지 않고 ‘불필요한’ 규칙들을 하나 하나 다 지키게 만드는 공무원이나 상사에 관해 불평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것,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따라서 소위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 ‘산업의 역군인 근로자들’의 ‘행복’이라는 체제가 지향하는 의미, 목적 등을 실현하는 데에 하등의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그러한 관료제적 절차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체제의 완성도의 측면에서만 고려하고, 따라서 부분적인 개량을 통해 극복해야할 것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체제가 원인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성이 그것의 종국적인 원인이므로 결국 별 수 없이 참아내야 할 것으로 취급한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그것은 체제에 외재적인 어떤 것일 뿐이다. 지젝은 그러나 이러한 절차들의 존재야말로 체제의 의미, 목적, 기쁨, 행복 등을 상징적 질서 속에서 생산하는데 반드시 요구되는 ‘외상’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거추장스러운 잉여로서의 고통이 체제 그 자체에 내재적인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은유가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상징적 질서와 그것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의미, 진리, 기쁨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정신적인 것이란 이를테면 가볍게 공중에 떠있는 어떤 것이고 그것이 공중에 뜨기 위해서는 향로의 조그마한 다리들 같은 단단한 물질적 지지물을 필요로 한다. 이데올로기는 그 지지물에 의해 가볍게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고 그러자마자 (그 지지물을 잊은 채, 즉 자신의 무게를 잊은 채) 공중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지지물들은 여전히 자신의 ‘엉덩이’에 들러붙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젝의 주장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나는 뒤에서 논증할 것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작동의 메커니즘을 둘러싼 쟁점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지젝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성(城)?에 나타나는 카프카의 주체 호명에 관한 사유를 대립시킨다. 지젝에 따르면 카프카가 묘사하는 ‘관료제적 기계’가 갖는 그 비합리성과 비의미, 즉 상징 기계로서의 국가장치와 그것의 내부화 사이의 “벌어짐(gap)”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상징적 질서의 작동에 들러붙어 있는 ‘잉여’인 것이다. 지젝은 카프카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차별성을 이름 짓기 위해 그것을 “동일화/주체화 없는 호명”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동일화/주체화 없는 호명]은 우리가 그것에 동일화할 수 있는 [대문자] 원인을 제공하지 않는다―카프카적 주체는 동일화할 하나의 특징을 절망적으로 찾는 주체다. 그는 큰 타자의 호명(call)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 이것이 알튀세르의 호명에 대한 설명에서 간과되고 있는 차원이다. 동일화 및 상징적 인식/오인에 붙잡히기 전에 주체($)는, 대타자 한 가운데 있는 역설적인 욕망의 대상-원인, a를 통해, 큰 타자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가정되는 이 비밀을 통해, 큰 타자의 덫에 걸려든다: $?a--라캉의 환상 공식. (SOI, 44, 강조는 인용자)
주체는 큰 타자의 호명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 호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는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동일화/주체화 없는 호명”이란 곧 우리가 앞서 논의한 ‘먼저 도착해 있는 것으로서의 상징적 질서’를 상징적 질서로 인정함 없이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으로서의 상상계적 시기의 동일화라는 것을 달리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라캉의 환상 공식을 통해 지젝이 설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라캉의 대상-원인, a(즉, ‘부분-대상’으로서의 어머니의 젖가슴 혹은 그것의 이미지라는 기표)는 상상계에 마련된 상징적 큰 타자의 덫이고 이를 ‘직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자아가 기표의 질서 속으로 잡혀 들어가고 “언어처럼 구조화”된 주체로 생성된다.
여기서 잠시 앞에서 논의한 양석원의 문제제기와 지젝의 문제제기를 비교해 보자. 그 양자의 비판은 정확히 반대인데,?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비판함에 있어 양석원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인 관계가 아닌 상상적인 관계로 봤다고 주장하는 반면, 지젝은 반대로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의 상상적인 측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두 비판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는 것은 바로 여기가 그 모든 문제가 집중되고 있는 지점이며 돌파구가 마련된다면 바로 여기서일 것이라는 점을 징후적으로 암시한다.
그러나 이를 논의하기에 앞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지젝의 비판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를 먼저 확인해 보자.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의미’ 및 ‘진리’의 체험이라는 ‘인식’의 문제로 살핌으로써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내부화과정에 필연적인 물질적 강제의 계기를 간과했다는 것이다(이러한 강제의 계기는 지젝에 따르면 “믿음에 앞서는 믿음(belief before belief)”(SOI, 40), 즉 형식으로서의 믿음, 혹은 사물들이 주체를 대신해서 믿어주는 믿음으로서의 “객관적 믿음”이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지젝의 오독이다. 알튀세르는 그 논문에서 국가장치들을 설명하면서 다른 것들과 함께,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출한 바 있다. 즉, “모든 국가장치들은 억압에 의해 그리고 동시에 이데올로기에 의해 기능한다.”(AA, 94).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있어 억압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구별은 그들이 수행하는 주된 기능에 따라 행해질 수 있다고 해도 모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은 언제나 그것의 억압적 측면을 갖는 것이다(물론 그 역도 사실이다). 국가장치에 관한 이러한 알튀세르의 테제에 대응될만한 테제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설명 안에서도 재발견된다. 그는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실재 조건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다”(AA, 107)라는 테제의 두 번째 하위테제로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존재를 갖는다”고 말하면서 “이데올로기는 항상 장치 속에, 그리고 그 실천 혹은 실천들 속에 존재한다 […] 이 존재는 물질적이다”(AA, 111)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믿음”(AA, 111)으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지젝이 말하는 바의 그 ‘장치에 의해 강요된 믿음’이라는 것을 정확히 글자 하나 하나에 이르기까지 표현한다. 읽어보자.
문제의 개인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이러저러한 실천 방식을 채택하며, 나아가 (그가 주체로서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한 사고들이 의존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의 실천[여기서 알튀세르는 문자그대로 ‘장치가 실천’한다고 적고 있다―인용자]인) 어떤 일정한 실천들에 참여한다. 그가 신을 믿는다면, 그는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에 가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고백하고, 속죄하며 (옛날에 그것은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 물질적이었다) 또한 당연히 참회한다 등등. 그가 의무를 믿는다면, 그는 ‘풍습에 따라’ 관습적 실천들 속에 기입된 상응하는 행동들을 취할 것이다.(AA, 113, 강조는 인용자)
그러므로 단순히 여기서 문제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내부화에 필연적인 물질적 강제의 계기로서의 장치들(사물들) 그 자체의 실천이 아닐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문제는 아마도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지젝이 이러한 비판 속에서 진정으로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사실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에 관련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 자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과 관련이 없지 않겠지만 내가 보기에 지젝이 정말 문제로 느끼는 것은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을 따라 알튀세르가 전개한 “사유 내 과정”으로서의 ‘이론적 실천’을 통한 “구조”의 인식이라는 테제인 것이다. 즉, 지젝이 보기에 이러한 알튀세르의 테제는 그의 이론주의적 편향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로 하여금 이데올로기를 ‘인식’의 문제로 보는 것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단절하고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젝은 ‘믿음’과 ‘인식’을 구별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이데올로기를 본질적으로 ‘인식’이 아닌 ‘믿음’으로 규정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해 지젝이 제기하는 문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알튀세르가 단순히 이데올로기의 “믿음”으로서의 성격을 간과했다는 데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를 여전히 “믿음”이면서 동시에 “인식”인 것으로 이론화하고 있다는 것에 관련된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그에게 아직 덜 급진적, 덜 존재론적인 것이다 (나는 이 문제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른 한 편, 이제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서 이데올로기를 ‘상상적인 것’으로 이론화했다는 것은 지젝의 입장에서 본다면 양석원의 문제제기와는 달리 도리어 긍정적인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프로이트와 라캉?에서 우리가 주었던 답을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주면서 ‘비록 이데올로기는 상징적인 것이지만 그것의 상상적인 체험의 차원을 생략할 수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아니, 그것이 정확한 대답일까? 내 생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으로 규정하는가’라는 양석원의 질문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전혀 다른 지점으로 우리를 향하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는 것 같다. 또 이는 다시 지젝의 질문과 복잡하게 꼬여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전혀 다른 사고의 가능성을 열어줄 것이다.
3. ‘실재계, 상징계, 상상계(RSI) 도식’의 전도
앞서 말했듯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논문은 정신분석학에 종별적으로 관련된다기 보다 사회적 관계(특히 생산관계)의 재생산에 필연적인 경제의 ‘타자’, 혹은 ‘타자의 타자’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그 논문에서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실험을 최대한 수행하고 있다면, 우리는 두 가지 다른 대상을 이론적으로 연관시키면서 알튀세르가 하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의 무의식적 성격을 규명하고 동시에 그것이 어떻게 계급적대라는 물질성에 관련되는가를 사고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를 요약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하나의 모순에 봉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만일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상징적인 것은 항상 삼원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라캉의 테제를 수용하는 수밖에 없고 이는 계급관계란 기본적으로 이원적(주지하다시피 라캉에게 이원적인 것은 상상적인 것이다)이라는 것에 정면 배치된다. 그러므로 라캉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가능한 하나의 길이겠지만 그것은 곧 계급관계를 사고함에 있어 중요한 장애를 노정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데올로기를 기본적으로 상상적인 것으로 규정한다면 적어도 라캉의 이론에 입각하여 고찰할 때 (지배)이데올로기가 갖는 그 보편적인 성격을 규명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상징적인 것만이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다). 회고적으로 알튀세르를 읽어볼 때, 이는 그에게 있어 매우 중심적인 딜레마로 작동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분명 ‘기독교의 종교 이데올로기’를 알튀세르가 논할 때, 거기서 ‘신’은 (법으로서) 상징계에 속하는 것으로 이론화되어야 할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극구 상상계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사실 지젝이 알튀세르에게 제기하는 문제도 이러한 알튀세르의 딜레마에 밀접하게 관련된다. 지젝은 우리가 앞서 논의한 “동일화/주체화 없는 호명”을 논한 직후에 라캉의 ‘불타는 아이’ 꿈에 대한 해석의 독특함을 설명한다.*주) 지젝에 따르면, 라캉의 해석의 특이점은 꿈을 깨는 과정을 외적 자극(소음)이 강화됨에 따라 주체가 잠을 자려는 소망을 지속하지 못하고 결국 깨어나게 되는 것으로 설명(프로이트의 버전)하는 것이 아니라 끔찍한 자신의 욕망의 실재적인 것(the Real)으로부터 외적 현실(reality)로 도피하기 위해 깨어나는 것으로 역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꿈은 실재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지젝은 이러한 라캉의 논의를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관련시킨다.
*주) {{라캉의 원래 논의는 자크 라캉, ?시선과 응시의 분열?, ?욕망 이론?, 권영택 편, 문예출판사, 186-202쪽을 참조하고 이후 언급할 장자의 나비 꿈에 대한 논의도 같은 논문을 참조하라.}}
사정은 이데올로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지지할 수 없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만드는 꿈같은 환영(illusion)이 아니다. 그 기본적인 차원에서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현실’ 그 자체에 대한 지지물로서 봉사하는 환상-구성이다. 우리의 효과적이고 실재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구조화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에른스트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에 의해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 사회적 분할로서의 ‘적대’라고 개념화된) 어떤 지지 불가능한, 실재적인, 불가능한 핵(kernel)을 가면 씌우는 하나의 환영이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우리에게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외상적이고 실재적인 핵으로부터의 도피로서 사회적 현실 그 자체를 제공한다 (SOI, 45,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지젝은 라캉의 후기 논의를 특권화시킴으로써 (본성상 총체화시키는 것으로서의) 이데올로기(즉, 상상적인 것을 이미 계기적으로 포괄하거나 혹은 언제나 그것의 ‘지지’에 의존하는 구조로서의 상징적 질서)를 사회적 현실(reality) 그 자체의 구성으로 규정하고 ‘적대’를 상상적인 것이 아닌 실재적인 것 위에 위치지운다. 이러한 (라캉과) 지젝의 이론화는 적어도 외양상으로는 ‘적대’를 상상적인 것 위에 위치지우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를 낳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론화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에 관련해서 제기되었던 문제, 즉 주체의 구조로의 철저한 종속 및 반역의 가능성의 전적인 부재라는 막다른 골목을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한 하나의 길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사실 양석원이 결국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장자의 나비 꿈에 관한 라캉의 해석을 쫓아가면서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주체는 그 안에서 그/녀의 전체 내용이 타자들에 의해, 간주체적 관계들의 상징적 네트워크에 의해 조달되는 하나의 공백, 하나의 빈 장소로 환원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 자신 안에서(in myself)’ 하나의 무(無)이고 내 자신의 긍정적인 내용은 내가 타자들을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일 이게 다였다면 라캉의 마지막 말은 주체의 발본적인 소외였을 것이다. 그의 내용, ‘그가 무엇인가’는 상징적 동일화의 지점들과 특정한 상징적 의무들을 그에게 제공하는 외적인 기표의 네트워크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서 라캉의 기본적인 테제는 주체가 어떤 내용들, 일종의 긍정적인 일관성을 그 소외시키는 상징적 네트워크로서의 큰 타자의 밖에서도 역시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다른 가능성은 환상에 의해 제공되는 것이다. 즉 주체를 환상의 대상과 등치시킴으로써(SOI, 46).
라캉은 이렇게 주체의 긍정적인 차원, 그것의 ‘내용’으로서의 ‘존재의 쪼가리’를 큰 타자 바깥(즉, 실재계)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의 ‘실재적인 것’으로서의 이 ‘존재의 쪼가리’부터 주체가 구조로부터 벗어나 반역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마침내 열린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한 해결일 수 있을까? 일차적으로 주목해야만 하는 점은 다음과 같다. 즉, 이데올로기가 문제인 한에서, 그리고 사회적 현실과 적대의 관계가 문제인 한에서 지젝의 도식에서는 구조와 적대가 상호적으로 배타적인 자리를 통해 규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구조 밖에 적대가 있고 적대 밖에 구조가 있다. 이러한 도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따라서 구조에 대한, 그리고 적대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캉은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라는 곳에서 “게슈탈트적 전체”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주1) 그는 ‘기표의 분할 불가능성’을 논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기표가 어떤 (전체는 부분들의 합으로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다는) “게슈탈트적 전체”는 아니라는 것을 명시했다: 라캉의 형식주의 비판. 하지만 우리는 또한 데리다가 그 말을 문제로 삼아 ?진리의 배달부/요소?라는 곳에서, 라캉이 비록 ‘소박한 형식주의’는 기각하지만 그의 ‘기의 없는 기표’로서의 편지는 다시 그것이 야기하는 기표의 사슬 전체로서의 구조를 자신의 기의로 삼는 것이며 이는 최종적으로 (세련된) 형식주의를 복권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라고 비판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주2)
*주1) {{자크 라캉,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 ?욕망 이론?, 112쪽.}}
*주2) {{Jacques Derrida, “Le facteur de la verite,” The Post Card, tr. Alan Bass, Chicago: The Chicago University Press, 1987, 특히 pp.411-42.}}
따라서 문제는 구조와 적대의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이해할 것인가 이다. 발리바르는 이 문제를 알튀세르의 전체 기획에 대한 하나의 이론적 결산이라고 볼 수 있는 ?“이행”의 아포리들과 맑스의 모순들?(1990)*주1)이라는 글에서 논한다. 구조와 적대(모순)를 서로 배타적인 자리에 위치지우는 것은 자본주의의 (현실적) 대당으로서의 시민사회와 국가 및 생산과 재생산의 이원론에 갖힌 이론적 결과일 뿐이다. 그것은 ‘모순에 대한 구조의 우위’ 혹은 ‘구조에 대한 모순의 우위’라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1) ‘모순에 대한 구조의 우위’: 여기서는 모순을 구조에 종속시켜 모순을 하나의 “조절의 계기”로 사고하거나*주2), 반대로 혹은 그에 상응하여, 모순에 부여될 수 있는 “단절의 기능”을 “구조의 외부”에 위치시키는 식으로 이론화된다. 철학적으로 “구조주의”라는 이름에 의해 요약될 수 있는 이러한 입장은 구조의 ‘영원한’ 재생산으로부터 이행을 사고하기 위해 (그것이 갖는 주체에 대한 발본적인 부정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모종의 ‘결단주의’를 요구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2) ‘구조에 대한 모순의 우위’: 여기서는 구조가 모순(계급투쟁)의 계기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즉, 적대적인 사회적 전략들의 복합체로서 생산관계)의 우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론화된다. 생산관계들의 적대는 생산력들의 모순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실현되고, 비록 그것이 지연, 중단, 억제된다고 할지라도 이행은 항상 이미 시작되어 있다. 그리하여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의 ‘이행을 위한 목적론’이 복귀한다.
*주1) {{에티엔 발리바르, ?“이행”의 아포리들과 맑스의 모순들?, 윤소영 편,?맑스주의의 역사?, 민맥, 275-92쪽.}}
*주2) {{이는 우선은 알튀세르 자신의 ?‘자본’을 읽자?에서 드러난 관점에 대한 알튀세리앵의 자기비판을 구성하는 것이지만, 주목해야할 점은 지젝 또한 자신의 글에서 이러한 관점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는 맑스의 “자본의 한계는 자본 그 자신이다”라는 테제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 천박한 “진화주의적” 해석은 기각하지만 동시에 자본주의의 모순을 단지 자본주의적 구조의 ‘조절의 계기’로서만 사고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영구적인 발전으로 끌고가는 것이 바로 이 내재적인 한계, 이 ‘내적인 모순’이다”(SOI, 52)라고 말하게 된다.}}
발리바르는 이 양자택일로부터 단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앞서 말한 시민사회와 국가의 이원론 및 생산과 재생산의 이원론에 대한 비판의 방향에서 추구하면서 “구조”를 하나의 게슈탈트적인 “전체”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구조인 것”이라기 보다는 “구조적인 것으로, 즉 실천 일반에 내재적이지만 그러나 심지어 집단적인 의지[…]조차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모순들 자체의 복잡성, 그것들의 ‘불균등성’ 혹은 알튀세르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것들의 과잉결정이”라고 말한다. 바꿔 말해서, 모순이 구조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은 모순들의 분절/절합(articulation)의 복잡성 그 자체다. 이는 알튀세르가 ?맑스를 위하여?에서 정식화한 ‘구조’에 대한 사고의 진정한 확장이라고 볼 수 있다.
구조란 통시적인 것 속에서 지속적으로 복귀하는 하나의 무시간적이고 공시적인 형식이 아니다. 모순들이 서로에게 반영되고 절합되는 양상, 즉 그것들의 배치의 고유성과 복잡성 그 자체가 구조적인 것이다. 구조적인 것은 따라서 모순들이 그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단순한 형식적 외피가 아니라 차라리 그 형식적 외피에 (전위와 응축을 통해) 균열을 내는 방식 속에서만 실존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설사 사건들의 표면에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점이 ‘구조적인 인과율’을 읽어내는 일을 더 쉽게 만들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징후적인 방식으로만 읽어낼 수 있다; 따라서 구조는 지젝이 말한 것처럼 이면이 아닌 표면이지만 단순하게 현전하는 표면은 아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구조적인’ 이유는 그 복잡성 자체가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것으로서의 주체의 의지를 항상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발리바르의 논의는 동시에 양방향으로 이행의 문제를 개방하게 만든다. 첫째, “기존의 사회적 관계들을 그것들의 위기로부터 보존하는 것은 어떤 국가장치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둘째, “그 자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제어하여’ 그것의 결말을 계획하는 것은 어떤 혁명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목적론이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도 피지배계급의 입장에서도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그렇다면, 적대들을 구조의 한복판에, 그리고 구조를 적대들의 한복판에 위치시키는 이러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사고가 이데올로기론에 관련하여 갖는 함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적대를 상상적인 것이나 실재적인 것에 위치시키지 않고 상징적인 것에 위치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바로 ‘RSI 도식의 전도’다. 그러나 당연히 질문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지는가일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의 요소들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결론으로 발리바르가 제시하는 테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효과들을 지배자들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 확장시키기 위해서, 그것이 사회에서 ‘정상적’(또 규범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 그것은 순수하게 형식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강한 의미에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 대부분의 ‘정당성’과 ‘헤게모니’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들은 그것은 지배자들 자신의 경험[…]이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 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대중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반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 주어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항상 피지배자들의 가상[상상]의 특수한 보편화이다.*주)
*주) {{에티엔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정치와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도서출판 이론, 186쪽.}}
지배이데올로기는 보편적이며 따라서 상징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적대에 의해 돌이킬 수 없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고 그 자체로 갈등적인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단순히 상징적인 것으로만 규정될 수 없고 또한 ‘상징적인 것의 상상화’(쟝-클로드 밀레르)로서만 제시될 수도 없다. 그것은 근원적으로는 피지배자들의 ‘상상의 특수한 보편화’, 달리 말하자면 피지배자들의 ‘상상적인 것의 특수한 상징화/제도화’로 정의된다(물론 이것이 ‘상징적인 것의 상상화’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하여 이제 상징적 질서 그 자체가 ‘적대들의 구조’가 되는 것이다.*주) 이러한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이데올로기론은 이데올로기적 지배에 대한 주체의 반역의 가능성을 ‘결단주의’나 ‘생기론’에 기대지 않은 채 이론화할 수 있게 만든다. 왜냐하면, 제도화된 헤게모니적, 총체화적 보편성(이는 전체주의화가 아니라 복수성의 포섭과 위계화다)은 (그 자신이 기원적으로 참조할 수밖에 없는) 이상적(ideal), 부정적 보편성으로 전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자체로 항상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 {{따라서 상징적인 것은 이제 더 이상 기표들의 연쇄(chain)로서의 구조가 될 수 없다. 연쇄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모순들이고 그것들이 모순들인 한에서 더 이상 언어학/기호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따라서 이는 라캉보다는 프로이트에 오히려 가까워지는 테제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에게 있어 무의식에 중요한 것은 (전의식적인) ‘언어표상’이 아니라 ‘사물표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징적인 것의 상상화’라는 밀레르의 테제에 대해 ‘상상적인 것의 상징화’를 대립시키는 발리바르의 입장에 관해서는 발리바르, ?문화와 동일성?, 최원 역, http://www.geocities.com/spinoc를 참조하라.}}
이제 역으로 우리는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발리바르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교훈?의 한 각주에서 이렇게 묻는다.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가족구조를 기초짓는 것이 아니라, 가족제도 내부에 주체적 입장들의 갈등과 가변성을 치명적으로 각인시킴으로써, 가족제도가 지정하는 역할들을 개인들(‘비정상’의 경우는 제외하고)에 의해 ‘정상적으로’ 수행되는 단순한 기능들로 강제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반대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주) 즉,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곧 가족제도 자체를 직접 구조화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관습에 의해 형식적으로 할당되는 그 전형적인 역할들(“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엡? 6:1))를 가족 구성원들이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구조적인 것’으로서, ‘모순들의 복합적 구조’로서의 외디푸스 콤플렉스인 것이다. 따라서 분석치료의 목적은 단순히 매번 복귀하는 같은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환자에게 인식/인정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매번 복귀하면서도 매번 다른 방식으로 복귀하는 사태의 고유성, 복잡성 자체를 읽어내고 개입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분석치료 실천의 ‘임상성’이 진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주) {{에티엔 발리바르,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의 교훈: 빌헤름 라이히의 ‘파시즘과 대중심리’에 관하여?, 윤소영 편,?알튀세르와 라캉?, 공감, 226-27쪽.}}
이러한 발리바르의 주장은 ‘RSI 도식의 전도’가 정신분석학 내에서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주어질 수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함축하는 것은 정확히 지젝이 말하는 것의 반대다. 지젝이 관습적 실천들 그 자체의 형식(“실재적 추상!”)을 구조로, 상징적 질서로 이야기하면서 ‘적대’를 그 대척점으로서의 실재적인 것에 위치시킬 때, 그는 정확히 프로이트-맑스주의가 과거에 범했던 오류(상동적 형식으로서의 ‘구조’)를 그대로 반복한다.*주) 그의 구조와 적대에 대한 사고는 분명히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와 그것의 ‘수학적 형식주의’(에 대한 비판, 그러나 여전히 그 형식주의에 내재적인 비판)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최종심에서 모순들은 수학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알튀세르가 구조주의(특히 라캉의 그것)와 맺은 그 관계의 ‘내심의 갈등 전체’가 이러한 ‘상징적인 것’에 관한 논쟁을 둘러싸고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알튀세르는 자신이 말했듯 구조주의자가 아니었거나 구조주의자였다면 아마도 ‘가장 독특한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자’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주) {{‘물신숭배’와 관련하여서는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화된 등가물의 체계로서 그리고 상품화로서의 물신숭배의 ‘구조’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주체화의 유일한 양식은 아닐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복수의 이데올로기적인 국가장치들, 혹은 제도들에 의한 주체화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에서, 그것은 다른 주체화/동일화의 양식들을 필요로 하고 그것들과 함께 작동한다. ‘구조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 문제는 이러한 복수의 양식들이 불균등하게 절합되거나 과잉/과소결정되는 방식일 것이다. ‘사회적 관계의 상품화’가 ‘사회적 관계의 단순화’는 아니다.}}
4. 이데올로기와 과학: 결론을 대신하여
양석원은 자신의 논문에서 “이데올로기의 오인을 넘어서는 것이 과학이고 알튀세르의 주장처럼 과학은 인간의 본질에 기초한 휴머니즘과 결별하는 “주체 없는” 방법이라면 이 과학적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과학적 지식은 어떠한 형태로든 인간 주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내가 보기에 이러한 양석원의 질문은 어느 정도의 소박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우선 알튀세르가 “주체 없는” 실천으로서의 과학적 실천을 이야기 한 것이 ‘인간 없는’ 어떤 실천을 의미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알튀세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인) 그 과학적 실천의 ‘담지자’가 자신의 실천의 물질성들에 언제나 제약된 방식으로만 그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즉 과학은 대상(Gegenstand)을 갖고 따라서 ‘정신은 자유롭게 뛰어 놀 수 없다’). 하지만, 알튀세르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여타의 다른 실천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적 실천의 바로 그 조건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로부터 ‘단절’함으로써 생산되는 것이 과학이지만 그 어떤 과학적 생산물도 확정적으로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없다. 단절의 ‘미완성성’이 그것의 ‘비가역성’만큼이나 중요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다시 추가로 과학적 실천은 결국 토픽에 이중적으로 기입된다고, 즉 사회적-정치적 실천들에 이데올로기적인 실천으로 재기입된다고 말한다. 요컨대, 이제 이데올로기가 그 모든 이론적/비이론적 실천에 편재한다.
다른 한 편 지젝은 ‘인식’과 ‘존재’(‘믿음’)를 근본적으로 구별하자고 제안함으로써 자신의 질문을 보다 세련된 형태로 제기한다. 이러한 지젝의 질문은 ‘인식론에 대한 존재론의 우위’라는 저 오래된 테제를 반복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정확히 ‘무의식’의 문제에 관련시킴으로써 보다 당대적인 형태를 띄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인식’이 아니다. 그것은 ‘믿음’조차도 아니고 사물이 주체를 대신하여 믿어주는 ‘믿음 이전적인 믿음’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인식’으로부터 ‘존재’로, 그리고 다시 ‘믿음’의 사물성으로 부단히 이행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라캉이 소박한 형식주의에서 세련된 형식주의로 움직이는 동안 그 자신은 소박한 경험주의에서 세련된 경험주의(혹은 차라리 환상(적)-경험주의)로 함께 움직여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반문할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알튀세르는 인식적 측면과 감정적 측면을 항상 동시적으로 사고해야한다고 말한다. 정신 안에서 관념은 항상 이미 그것의 정동적 측면에 통일되어 있다. 따라서 순수한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한 정동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적 측면과 감정적 측면을 대립적으로 파악하거나 그 양자 사이의 우위를 결정함으로써 특정한 방식으로 위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양자의 ‘마주침’에 의한 상상적 고유성의 생산을 통해 작동하는 (초개인적인) 인간의 사유와 교통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따라서 알튀세르에게 있어 그 모든 ‘인식’은 최종심에서 상상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왜 알튀세르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대립시키지 않는지의 이유이다. 라캉과 지젝이 “현실”(“환상-구성”)을 ‘실재적인 것’으로부터의 “도피”로 규정하는 반면, 알튀세르는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을 무한한 과정 속에서 항상 아직 진행중인 통일(‘침투’와 ‘침식’)로 사고하고자 한다.*주) 따라서 알튀세르에게는 최악의 ‘오인’조차 ‘인식’으로서의 최소한의 긍정성을 갖는다.
*주)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181-82쪽.}}
(알튀세르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참조하는) 스피노자는 자신의 저서 ?에티카?에서 “관념 안에는 그것이 허위라고 일컬어질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주1)라고 썼다. 즉, 그에 따르면 오류적인 관념은 자신을 배제할 적합한 관념의 결핍 속에서만 오류로 된다. 따라서, 적합한 관념의 획득이 그 오인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오인이 갖는 힘을 긍정적으로 전화시킬 수 있게 만든다. 예컨대, 태양과 지구의 실제 거리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태양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으로 상상하는 것(느끼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상상적인 오인은 우리의 신체의 변용과 그 변용의 원인의 본질을 포함하는 한에서 최소한의 긍정성을 내포하는 것이고 적합한 관념과 함께 있을 때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역능’을 이룬다.*주2)
*주1) {{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역, 서광사, 101쪽.}}
*주2) {{스피노자, 같은 책, 103쪽.}}
알튀세르가 ‘인식’과 ‘믿음’을 배타적으로 구별짓지 않은 것은 그의 ‘이론주의’의 증거가 아니라 반대로 인식론에 있어서의 과학/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사회적인 실천으로서의 (대중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통일적으로 고찰하고 그 각각의 실천들이 서로에게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가를 추적하려고 했던 그의 노력의 증거로 평가되어야 한다. 알튀세르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대중을 어떻게 이데올로기로부터 구출할 것인가가 아니라 대중들의 이데올로기를 이론적 수단에 의해 어떻게 긍정적으로 전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다. 즉, 그에게 ‘이론’(맑스주의의 그것을 포함하여)은 ‘공산주의적 정치’를 얼마나 인지 가능하게 만드는가에 따라 수용되거나 기각되어질 수 있을 뿐이다. ‘인식’과 ‘믿음’을 구별하자고 제안하는 지젝에게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말을 들려주는 것이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것처럼 보인다. 이데올로기들에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 문제는 아니다 […] 이데올로기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실천을 가상[상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무의식적[혹은 차라리 비의식적] 조건들이 그 속에서 가공될 수 있는 차별적인 역사적 형태들이다 […] [그리고] 이러한 개념화 속에 과학적 인식 또는 정치적 행동을 사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전혀 없다.”*주)
*주) {{발리바르, ?비동시대성?, 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