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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노마디즘 논쟁 

 

잠시 잊혀졌던 일이었습니다.

뭔가 씁쓸하고 불쾌하고 어둡게 다가왔던 기억이어서 일부러라도 멀리하고 싶었던 기억이었습니다.

지식의 역할(?)과 삶의 진지함에 대한 고민이 번민으로까지 다가왔던 사안이었기에 마음 한켠에 아프게 남아있었습니다.

 

논쟁과 관련된 자료들을 퍼와서 그냥 나열만 합니다.

보는 분들이 판단해야 할 문제일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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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06-02-23 오후 05:52:35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04451.html

 

[서평]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유목’ 떠받들기는 신자유주의 합리화용!
두레공동체 꾸리는 재야 농사꾼 천규석씨
“국익 위한다며 생명주권 버리는게 진보인가”
생산성 낮고 약탈적인 ‘유목’ 실랄한 비판
희망은 쌀과 농업 기초한 자급·자족·자치

 

한겨레 한승동 기자기자블로그
»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1만3천원
몽골 유목민들이 땅 1㏊(헥타르=1만㎡)의 10분의 1인 10a(아르=100분의 1㏊)에 목축을 할 경우 토끼 한 마리 기르기도 어렵다. 그런데 같은 면적에 벼농사를 짓는다면 벼 단작만으로도 736.7㎏의 알곡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은 지금의 곡류 소비량 기준으로 적어도 5-10명의 1년 식량이 되며 거의 모든 칼로리를 곡류에만 의존했던 전통시대에도 2명 이상의 1년 식량이 된다.
 

1990년에 도시-농촌 직거래를 통한 지역자립 자치두레를 되살리자는 ‘한살림 운동’에 참여한 이래 한살림 운동 대구공동체를 만들고 경남 창녕 남지에 ‘공생농 두레농장’을 연 ‘진짜 재야’ 농사꾼 천규석(68).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 <쌀과 민주주의> 등에 이어 나온, 한층 더 거침없고 신랄해진 그의 다섯번째 책 제목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 펴냄). 유목사회의 근본적 한계는 몽골 유목민의 예에서 보듯 낮은 생산성이다. 그 때문에 경제적 불안정과 비자급성을 피하기 어렵고, 이를 극복하려면 정착 농경사회와 물자를 교환하거나 아예 이주해서 정착민화하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다. 끝없는 이동과 전투적 기동성, 침략, 약탈 등 유목민적 특성도 거기서 비롯된다.

지역개발이란 이름의 지역파괴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는 저자의 선언은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받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은 애써 외면”하는 세력을 겨냥하고 있다. 말하자면 유목주의란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열쇠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휘어잡고 있다. 밖으로는 유일 초대국 미국이 대표하는 서구 자본주의 문명, 안으로는 거기에 추수하는 노무현 정권, 그리고 “보상금 타먹고 체제 안에 들어간 옛 민주투사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우리 생명의 주권이고 공동체문화의 바탕인 쌀과 우리 농업도 전체국익(공산품 수출)을 위해서라면 버리고 가는 것이 진보라고 생각한다. 한 입으로 두말하는 이들의 가짜 진보에 열불을 못 참아 쓴 글들을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란다.

 

한때 자신도 어깨를 나란히했던 ‘진보주의자’ ‘민주투사’들에 대한 이 도저한 분노는 어디서 비롯됐으며, 얼마나 합당한 것일까. 김지하, 유홍준, 고은, 박원순, 김근태 등에 대한 실명비판은 실로 거침이 없다.

 

»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친 파고가 오랜 세월 인간문명의 터전이었던 대다수 국가의 농업기반을 뿌리채 흔들고 있다. 지난해 6월 정부의 쌀개방 정책에 항의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이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왕암리 최아무개(49)씨의 양파밭에서 집회를 연 뒤 트랙터로 밭을 갈아엎었다. 논산/연합뉴스

“생태계 파괴와 화석에너지 문명의 종말 문제가 피할 수 없는 화두가 된 오늘날이라면, 지역개발이란 이름의 지역파괴를 반대하고 조세, 준조세 등의 국가권력에 불복종하는 주민자치운동, 귀농운동, 유기농과 그 직거래운동, 농촌과 도시공동체운동 등의 자급자족·자치운동만이 신자유주의적 세계시장제국주의와 국가를 넘어서는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갈 것이다.” 해답은 책 맨 마지막을 결론처럼 장식하고 있는 이 구절에 집약돼 있다. 자급자족·자치운동은 “우리 생명의 주권이고 공동체문화의 바탕인 쌀과 우리 농업”을 토대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제조업(공업)이나 서비스업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지금 세계의 일부 풍요와 평등은 “지구적이고 인류적인 것이 아니라 자국내 농민이나 제3세계의 자급적 지역공동체의 해체와 희생을 전제한 임시적 풍요와 평등일 뿐”이다. 지금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의 공업중심 물량사회를 전 지구적으로 확대·유지하려면 지구가 너덧 개가 더 있어도 부족하다. 그의 이런 생각은 국가조직 그 자체와 노동운동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특히 노동운동에 대한 그의 시각은 독특하다. 도시문명의 공업사회적 평등이 농민들의 희생과 그 사회공동체의 지속적 해체를 통해 가능한 것인 이상 노동자들의 생존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단협 등은 그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지구 전체의 농촌공동체를 마지막까지 파괴 해체하는 순간까지만 지속가능한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국 차원 부의 증대는 타국 피폐화

 

요컨대 조금 물질적 생활수준을 지금보다 낮추더라도 “인간의 유일한 희망”은 결국 “쌀과 농업”에 기초한 “자조, 자족, 자주, 자치” 즉 “지역 코뮌화”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전지구를 석권하고 있는 유목주의가 이를 근본적으로 그르치고 있으며, 한때 진보를 자처했던 민주투사들이 정치권력을 쥐게 된 이 땅은 권력에 취했는지 무비판적으로 유목주의를 떠받들면서 모든 정책을 거기에 맞추고 현실을 외면하고 왜곡한다. 이것이 그가 그토록 분개하는 이유다.

 

국가의 역할증대나 증세 방침에 대한 저자의 부정적 시각은 “세금과 보험금을 많이 걷어 큰 복지국가 만들겠다는 사람들보다는 시장과 국가 중에서 국가 하나라도 줄이고 시장만 키워서 거기에 복지를 맡기자는 쪽이 오히려 진보적이 아닐까”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이런 시각은 얼핏 조지 부시 정권이 모델로 삼고 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미국 공화당의 신보수주의(네오콘)적 ‘작은 정부’나 감세정책을 연상하게 한다.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의 영국 보수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저자가 인류 공적으로 지목한 신자유주의와 세계시장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기수들이 바로 그들이었다는 사실은 좀 당혹스럽게 한다. 미 공화당 감세 논리야말로 강자를 위한 전형적인 강자의 논리라는 비판이 미국 내부에서도 거센 터에. 게다가 투자 등 기업활동과 소비 촉진을 겨냥한 감세정책은 결국 지구자원 고갈을 가속화하고 생태계를 절단내는 원흉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은가.

 

국가 해체를 지향할 만큼 ‘급진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저자가 그리는 지속 가능한 인류의 이상향은 서구 유목주의에 멸망당한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호주, 아프리카의 파괴당하기 전 농경문화를 닮아 있다. 물질생활 발전이 행복의 증대와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것, 일국 차원의 부의 증대는 타국의 피폐화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것, 그리고 힘과 물질의 증대가 곧 진보라는 개념은 허구라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찬반을 떠나, 한계에 다다른 듯 보이는 서구문명의 대안으로 충분히 고민해볼만한 화두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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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문> 2006.03.07 20:05

http://www.kookje.co.kr/kindex.html

 

[천규석 인터뷰]

 

"유행 코드 같은 노마디즘(유목주의)
실상은 신자유주의 합리화"


생태주의자 천규석씨 '유목주의' 비판


세계시장제국주의 논리일뿐
유목은 지속불가능한 시스템
위기의 현대문명 대안 못돼


 

 
  천규석씨가 지난 3일 경남 창녕군 영산줄다리기 행사장에서 '유목주의는…'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근 몇년 동안 한국 지식층에서 가장 크게 유행한 용어을 몇 개 들라면 '유목주의'(노마디즘)가 단연 앞자리에 있다. 현대철학의 첨단으로 흔히 평가되는 프랑스의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요한 개념이기도 한 이 용어는 난해하고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목주의라는 인문학적 유행어의 속뜻을 지극히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오늘의 인류가 정해진 삶의 양식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하고, 내면과 자아에 대한 탐구와 모색도 그 선상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철학적 화두라 할 수 있다. 유목주의는 시인이자 사상가인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결합되거나 인문학자들 사이에 현대철학의 한 정점으로 수용되는 방식으로 국내에서도 재해석되고 널리 퍼졌다.

그런데 최근 국내에서 '해석과 수용과 인용' 일변도이던 이 유목주의에 대해 한 농사꾼이자 생태운동가가 정색하고 비판을 가한 책을 펴내 눈길을 끈 바 있다. 지난달 말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실천문학사)를 펴낸 천규석씨가 그 주인공이다. 지난 3일 경남 창녕군 영산에서 그를 만나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데 이어 7일 다시 전화 인터뷰로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를 유목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 또는 반격으로 봐도 좋습니까.

▲"학문적이고 전문적인 비판은 할 처지도 못됩니다. 그러나 국내에서 유목주의가 마치 하나의 유행 코드처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처럼 떠받들어지고 비판은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역겨움까지 느꼈습니다. 도시가 아니라 농촌공동체를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문제점을 독자 입장에서 비판했다 할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 치밀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 상식의 선에서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비판의 핵심은.

▲"유목주의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적 아이디어, 철학적 사상이라 말하고 또 현대자본주의 체제의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개념이라고도 하지만 이를 피부로 받아들이는 '농경민' 입장은 크게 다릅니다. 유목주의는 개인이나 사회의 창조적 욕망을 억압하는 현존의 '정착적인' 체제를 비판하고 이를 해방시킬 수 있는 '유목성'을 강조한다지만 이는 실상 세계를 제패한 세계시장제국주의, 신자유주의를 합리화하거나 부추기고 있다고 봅니다. 현실적으로든 결과적으로든 탈주하고, 정체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주의란 시장제국주의, 신자유주의 합리화에 악용되거나 그 이데올로기적 원조로서 작용하지 않습니까."

-책에서 김지하 시인의 '유목과 농경문화 통합론'이 일방적이라고 비판했는데요.

▲"유목은 사회경제적으로 보자면 근본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입니다. 교류가 필수죠. 그리고 현재 세계시장제국주의가 세계 농촌을 이미 초토화시켰습니다. 한국의 농촌현실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김지하 시인은 현재의 한국이 유목문명과 농업문명의 통합, 도시적 유목문화와 농경적 정착문화의 통합을 시대적 과제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통합은 대등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죠. 현재 한국 농촌은 도시에 흡수통합된 상태입니다. 김 시인의 주장은 도시가 농촌을 흡수통합하자는 이야기밖에 안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위기의 현대문명을 구할 대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천씨는 김지하 시인과 서울대 미학과를 같이 다녔다. 천씨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귀농하면서 서로 가는 길을 달라졌지만, 저자가 제2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을 맡고 생태·농촌공동체운동을 펼치면서 김 시인과 일정한 교분은 유지했던 터라 이 같은 주장이 일반의 관심을 더 끌었다.

'유목주의는…'에 담긴 저자의 주장은 제3세계 농민 계층의 입장에서 세계적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치에 대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의 주장은 다음 달 나올 '소농 버리고 가는 진보는 십리도 못가 발병 난다'(가제·실천문학사)를 통해 계속될 예정이다.

그는 현재 경남 창녕군 남지에 공생농두레농장을 열어 농촌공동체운동을 하고 있으며 대구 한살림운동에 참여하는 등 농사꾼이자 생태운동가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봉권기자 bgjo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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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436

 

 

無知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
논쟁서평:『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 천규석 지음 실천문학사 刊 2006
2006년 04월 07일 (금) 00:00:00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editor@kyosu.net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 ©
‘노마드’, ‘노마디즘’은 최근에 들어와 널리 회자되고 있고 심지어 TV 선전에까지 등장한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러나 ‘유목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유목적’이라는 말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아리송할 때가 많다.


한번 물어보자. 돈이 많아 고민하는 사람이 밤낮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과 월세를 마련하지 못해 밤낮 이사를 다니는 사람이 둘 다 ‘노마드’라면, 이 ‘노마드’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어떤 중학생이 밤낮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세계에 빠져 있다면, 이 학생은 ‘노마드’인가? 늘 자기 골방에 앉아 있는 이 학생이 어떤 뜻에서 ‘노마드’인 것일까? 역으로, 늘 어딘가로 헤매고 돌아다니지만 마음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노마드인가? 도대체 ‘유목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한번 물어보자. 책 뒤 표지를 보니 이 책의 저자는 농사꾼인 것 같다. 그런데 거기에는 ‘농사꾼 철학자’라고 씌어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노마드인가? 농사와 철학의 경계를 허물고 ‘농사꾼 철학자’로서 살아가는 노마드, 또는 (역시 요새 유행하는 말로서) ‘하이브리드’인가? 그렇다면 저자는 ‘침략주의자’인가?


또 물어보자. 이 서평을 쓰는 사람은 한 평생 다양한 종류의 담론들을 가로지르면서 사유했지만, 외국땅이라고는 나이 45세에 처음 밟아 봤다. 그렇다면 서평자는 노마드인가 정주민인가?


한국에 노마드니, 유목주의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생각들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정말 ‘사유’해 본 적이 있는가? 사유를 해 보고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노마디즘’이라는 게 무엇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천의 고원』을 논하면서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이 “그 어떤 철학교과서보다 지적 유희가 심했고 당연히 더 난해했다”고 말한다. 『천의 고원』을 ‘철학교과서’라고 표현한 것도 참 우습지만,  자신이 “겨우 페이지 수만 넘겨본” 책이 “지적 유희가 심”한지 어떤지 어떻게 판단한 것일까?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책은 지적 유희가 심한 책인가? 저자는 이 책을 읽고서 스스로 “막연한 인상만”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면 한번 물어보자. 도대체 어떤 책을 ‘읽고’서 막연한 인상만 가진 사람이 그 책을 ‘비판’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이 책에는 김지하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것으로 말하고 있는 ‘신유목주의’가 언급되고 있고 그것이 ‘비판’되고 있다. 저자가 인용한 김지하의 글을 보니 좀 어이가 없다. “자동차, 휴대폰, 노트북, ...” 운운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름을 들먹이는데, 도대체 이런 것이 들뢰즈/가타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런 것들은 들뢰즈가 ‘관리사회’라고 부른 현대 사회의 기술적 장치들 아닌가? 누군가가는 엉터리로 이야기하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비판’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한국적 현상’ 아닐까?


“몽골의 초원길은 가타리와 들뢰즈의 말처럼 홈 파인 가로(街路)가 아니라 사방천지로 다 터진 매끄러운 길이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사방천지로 다 길을 트면 그것이 더욱 더 홈을 많이 파는 것이 아닌가? 들뢰즈/가타리에게서 ‘매끄러운 길’이라는 말이 도대체 성립하는가? 또 이들이 말하는 공간이 실제 공간만을 뜻하는 것인가?


“이동 마인드가 본질인 그들의 유목주의는 오늘날의 초국적 자본의 세계시장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악용될 소지가 충분이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천의 고원』이 겨냥하는 주적이 ‘세계시장 제국주의’ 아닌가? ‘이동 마인드’라는 표현도 우스꽝스럽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이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가? 이동과 정지가 정도(degree)의 문제이지 어떻게 양자택일의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저자는 방안에서 농사를 짓는가? 들뢰즈와 가타리가 초국적 자본처럼 부지런히 옮겨다니자고 했다는 말인가? 초국적 자본이 어떻게 이동 마인드인가? 오히려 그것은 자본으로 모든 삶의 양식들을 포획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분열증은 억압적인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초자아로 벗어나는 탈중심화 과정이기 때문에, [...]” 들뢰즈와 가타리가 ‘정신’분열증 환자인가? ‘정신’분열증 환자가 철학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난생 처음 듣는다. “자아의 구속으로부터 초자아로 벗어나는 탈중심화”? 무슨 말일까? 초자아(=상징계)로 탈주한다? 아이들이 하는 말로 정말 ‘돌아버리겠다’.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파편화되면서 순간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하는 분열된 주체, 즉 분열자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성과 재생산에 근본적인 위협을 가한다.” “아무런 제약 없이”? 이 세계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게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자유롭게 파편화된다”? 파편화되는 것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파편화된다는 것은 주체성이 사라지는 것인데 거기에 무슨 자유가 있는가? “순간적 욕망과 쾌락을 추구”? 들뢰즈가 ‘쾌락’ 때문에 푸코와 결별한 사실을 알고나 있는가? “순간적 욕망을 추구하는 분열자가 자본주의를 위협한다”? 자본주의가 가장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인간 아닌가! 이게 다 무슨 말이란 말인가!


저자에게 묻고 싶다. 농사짓는 것을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명 저자는 펄쩍 뛸 것이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에 대해 최소 몇 년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땅을 잘 이해하고 농사의 기본을 익혀야 한다. 도구들 쓰는 것, 계절을 읽는 것을 비롯한 많은 공부들, 그리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 자연에 대한 믿음과 헌신. 농사를 지으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저자에게 말하고 싶다. 사유하고 말하고 글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천의 고원』 같은 책을 읽으려면 최소한 당신이 농사를 짓기 위해 들인 노력만한 노력은 들여야 한다고.


우선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할 것이다. 어학을 진지하게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하나의 외국어를 자기것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잘 알 것이다. 저자는 이 점에 대해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물론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으며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가?


철학이란 2500년 이상을 숙성해 온 학문이다. 그리스 철학과 제자백가를 터득하는 데에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역사가 2500년이 숙성해 온 학문이 철학이다. 그 끝에 『천의 고원』이 있다. 도대체 저자는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나 말하는 것인가?


저자에게 물어보자. 철학이라는 게 무슨 장난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 책 뒤표지에 ‘농사꾼 철학자’라고 버젓이 씌어져 있다. ‘철학자’라는 말이 그렇게 만만한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전구 다마 잘 갈아 끼면 물리학자인가? 찌개를 잘 끓이면 화학자인가? 물건 사고 돈 계산 잘 하면 수학자인가?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고 있지만,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


서구 철학의 정점에서 나온 사유를 기본 공부도 안 된 대학원생이 그야말로 엉터리로 번역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번역본을 다시 엉터리로 읽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떠들고 다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엉터리 이야기를 듣고서 엉뚱하기 짝이 없는 ‘비판’을 하고, 선정성에만 눈이 먼 기자들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책에 찬사를 던진다. 세상이 온통 사기요 장난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떠나고 싶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와 주체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의 얼굴’, ‘접힘과 펼쳐짐’, ‘사건의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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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앤스터디> 2006-04-04(11:32:36)

http://www.artnstudy.com/MainBoard/Board/BoardView.asp?tbl=JFB_FREE&DIdx=1891

 

 

이정우 교수의 비판을 읽고



김영현(소설가)


고등학교 때 나이 많은 괴짜 고전선생이 있었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 데카르트는 ‘미친 놈’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야말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이의 말에 의하면 ‘생각 없이’ 멀쩡하게 잠을 자는 사람을 데카르트 식대로 하자면 ‘없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때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며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가 “방법서설”을 읽는 동안에 그이의 그 무지스런 말이 늘 떠나지 않았다. 여기서 ‘생각한다, 회의한다’(cogito)는 물론 그이가 단순하게 이해해버린 개념과는 달리 매우 복잡하고 논리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재의 근거를 ‘회의하는 자기’라는 자기 내부에서 찾았던 데카르트의 이성주의적 태도는 내게 존재의 객관성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서 떠날 수 없게 만들었다. 어떤 외연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기 정체성은 오로지 신만이 (모세가 떨기나무 뒤의 불꽃을 향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었을 때 신이 한 대답 즉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이다, 가 바로 신의 정의 중 가장 어렵고 완전한 것 중의 하나이다.)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의심하는 능력을 가진’ 자기 이성에 근거하여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적인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과연 그럴까. 괴짜 고전선생의 무데뽀 적인 단순성이 지닌 진리는 과연 없는 것일까. 단순화는 대체로 오해와 무지, 무지로부터 기인한 용기로부터 출발한다. 이를테면 알렉산더의 칼과 같은 것이다. 매듭을 풀어달라는 질문에 알렉산더는 칼로 매듭을 짤라버리는 것으로 대신했던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알렉산더의 무지와 오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렉산더적 접근법이 때로는 사물을 분명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회색이 지배적일 때는 때때로 무지한 양단논법이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해주기도 하는 법이다.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 교수의 비판은 매우 날카롭다. 날카로움을 넘어 조롱적이고, 차갑고 경멸적이다. 도사의 눈에 비친 잘못 걸려든 ‘도사 앞에 요령 흔드는 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천규석이 짚은 헛다리를, 감히 들뢰즈와 카타리를 논한 오버를, 거침없는 언어로 질책한다. 함부로 철학을 논하는 자에 대한 엄정한 철학 교수의 분노와 푸른 서슬이 느껴진다.

 

하지만 전공자라면 전공자다운 도량이 있어야 한다. 내가 전문 작가라 하여 내 앞에서 ‘소설’을 논하는 자에게 함부로 화를 부리지는 않는다. 충분히 듣고 천천히 따져서 고쳐주고 바로잡아 줄 것이 있으면 바로 잡아주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리석은 비전공자’ 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가 달을 가르키며 흥분하고 있는데 그의 손가락 모양을 가지고 흠을 잡아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이 책은 철학책도, 들뢰즈나 카타리를 논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의 저자인 천규석은 60년 초에 귀농을 하여 평생 동안 농사를 지으며 혼자 공부해온 사람이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농촌공동체가 허물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지켜보았고, 지금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쌀개방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이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이 중의 하나이다. 그가 십년 전에 쓴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나 재작년 녹색평론사에서 나온 <쌀의 민주주의>를 보면 그가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왔고 살아가는 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내가 잘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가속화된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소농 두레 공동체’야 말로 하나의 대안이라고 믿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이번에 이정우가 조롱 섞인 언사로 비판해놓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에서도 기저를 이루고 있다.

 

이정우의 비판은, 하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의 짧은 평문은, 그야말로 내가 이렇게 논해야할만한 가치가 있는 글인지 의심스럽지만, ‘노마디즘’ ‘들뢰즈’ ‘철학’이라는 것들을 천규석이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하나, 하는 일종의 전문가적 핀찬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록 전공자는 아니지만, 천규석의 책을 내고 그의 책 뒤에 짧은 언사를 쓴 사람으로서, 그의 비판에 대한 나의 소견을 몇마디 적어보겠다.


먼저 유목주의로 해석되는 ‘노마디즘’에 대한 저간의 ‘허리멍텅한’ 이해와 나아가 몰이해에 대한 이정우의 비판이다. 천규석은 이 점에서 분명한 실책을 범하고 있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고 단언하면서 먼저 개념을 명확히 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 이정우로부터 다음과 같은 빈정거림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 물어보자. 나는 한평생 다양한 종류의 담론을 가로지르며 사유했지만, 외국 땅이라고는 나이 45세에 처음 밟아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노마드인가, 정주민인가?’ 그리고나서 그는 나아가, ‘한국에 노마드니 유목주의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정말 ’사유‘해본 적이 있는가? 사유를 하여 글을 쓰고 있는가? 도대체 노마디즘이란 무엇인가?’ 하고 일갈하고 있다. 나는 개념의 엄밀함을 생명으로 하는 철학자다운 그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충분히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천규석의 잘못만은 아니다.


사실 지금처럼 ‘노마디즘’이란 말이 광범위하고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시대도 없었던 것 같다. 우스개말로는 ‘바람의 딸’이라는 한비야처럼 세계를 싸돌아다니는 것을 노마디즘의 표상이라고 하기도 하고 (고전선생의 말처럼 일말의 진실이 깃들여 있긴 하지만),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의한 국경을 초월한 정보의 교류 형태나 전환된 사고방식을 의미하기도 하는가 하면, 좀 더 진지하게는 다원주의(pluralism)라는, 이것 역시 매우 복잡한 내용을 포괄하고 있는 것인데, 철학적 과제에 직면해 있는 인간들이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진리의 무정형성 (들뢰즈적 표현을 쓰자면 진리의 리좀적 체계라고 하고, 나의 약간 문학적 해석에 의하면 진리의 윈도우적 체계, <도스적 체계에 대비하여>,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과 결부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여간 이런 애매모호한 상태로 노마디즘이 우리 시대를 횡행하는 하나의 유행적 언어코드로 작용한지는 오래되었다. 여기서 천규석이 ‘어떤 노마디즘’을 침략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는 지는 엄밀하지는 않으나 책의 문맥을 통해 대충 이해가 가지 않는 바도 아니다. 천규석이 이해하고 있는 노마디즘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그것은 다양성과 통일성이라는 양면의 얼굴을 지닌 세계 자본주의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작고 가난하지만 자급자족적인 공동체를 유린하고 있는 그 모든 힘을 지칭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이정우가 굳이 이를 비판하려면 다만 빈정거릴 것이 아니라 (그는 천규석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노마디즘을 입에 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못마땅해 하고 있다!), 자신이 먼저 ‘진지하게’ 고민하며 정확하게 정립한 바른 개념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천규석을 비판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두 번째는 들뢰즈에 대한 천규석의 비판에 대한 이정우의 비판이다. 이것은 천규석이 백번 들어도 옳은 지적일 터이다. 적어도 들뢰즈에 관한한 이정우가 틀림없이 ‘선생’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어도 들뢰즈나 카타리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천규석이 ‘고전선생’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천규석이 ‘오해’한 들뢰즈가 과연 ‘없는’ 것일까. 이정우가 엄밀함으로 천규석이 잘못 읽은 문맥을 지적하는 것은 가능하고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당신 입 다물어!’하고 감히 소리칠 수 있는 것일까.

 

들뢰즈가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질 수 없는 철학자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신주단지처럼 철학교수들이 모셔두고 아껴야하는 대상은 물론 아니다. 칠십년대 중반 학번으로 헤겔의 세례를 받았던 (헤겔의 ‘대논리학’과 임석진 교수의 ‘헤겔에서의 노동의 개념’을 번역한 이을호군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헤겔의 전도사였다.) 나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헤겔과 그의 제자들을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살았던 것이다. 더구나 실천을 요구하는 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오는 동안 헤겔이 뿌려놓은 개념은 세상을 이해하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매우중요한 통로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나는 한번도 밖에 대놓고 떠들지 않았지만, 그 헤겔의 덫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해 준 사람이 바로 들뢰즈였다. 그와의 만남은 이제 와서 말이지만 그야말로 일대 충격이었다. 문학적 비유로 하자면 태양계라는 진리 체계 (헤겔의 철학 체계)에 살면서 그것을 우주로 생각해오던 사람이 어느날 은하계, 나아가서 초은하계와 우주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자유로움’과 동시에 막막한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나의 순진한 독서에 기인한 ‘오해’로부터 빚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면 나 역시 이정우 같은 이로부터 분노에 찬 ‘무지’에 의한 용기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조금 ‘해방’시켜준다면 우리는 자신의 ‘고백’을 얼마든지 할 수가 있다. 엄밀한 개념이 때때로 우리의 사유를 방해하는 것은 얼마든지 경험하는 일이다. 우리는 사유 역시 경험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철학 체계와 만나 어떤 반응을 보이는 지는 그 사람의 경험이다. 개념이 ‘유리알 유희’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하여 그것 역시 경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학문하는 자들의 독선적 경험이야말로 경계해야할 일이 아니겠는가!)

 

용기있게, 사족을 달자면 들뢰즈는 그저 들뢰즈일 뿐이다. 그는 서구 관념론이 이른 하나의 막다른 골목이자 통로일 뿐이다. 우주와도 같은 막막한 심연 앞에 그는 우리를 끌고 갔지만 그는 자신의 절망을 벗어나지 못했고, 마침내 ‘자살’을 했다. 나는 오히려 전공 학자들, 말끝마다 들뢰즈를 들먹이며 난해한 언사를 늘어놓은 자들에게, 거꾸로 묻고 싶다. ‘너희들이 그의 막막함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느냐?’ ‘ 왜 너희들은 단 하나도 따라 죽은 사람이 없느냐?’

천규석을 굳지 변호하자면 그는 단지 들뢰즈에게 ‘기대어’ 국적없이 돌아다니며 공동체를 마구 해체하고 짓밟고 있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기대어’ 선 곳이 바로 이정우 같은 사람에게 무례하고 무식하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 어디에도 철학책이라는 말은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철학에 대한 옹호 부분이다. ‘2500년간 숙성된 학문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전공자의 준엄한 명예선언이다. 누가 감히 철학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가, 하는 투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데 대한 항의라면 길거리에 있는 ‘철학원’을 보고 분개하는 것이 더 맞을는지 모른다. 사실 철학이란 말은 오랫동안 참으로 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어 왔다. 우스개말로 철학과 학생들은 철학과에 들어갈 때도 ‘철학이란 무엇인가?’ 라면 질문에 시달리다가 졸업할 때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철학을 논리학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헤겔 철학은 헤겔의 논리학이고, 칸트 철학은 칸트의 논리학이며, 불교철학은 불교 논리학이라는 식으로), 어떤 사람은 사물에 대한 설명방식, 혹은 해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정립하려고 애쓴 사람도 있다. 나아가서는 (별로 신통치는 않지만) 생의 지혜,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하긴 그 속에 세계에 대한 자기 방식의 이해와 해석이 존재하는 것일테지만.) 어떤 사람은 극히 좁고 엄밀한 체계로서의 형이상학 내지는 메타학을 지칭하기도 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천의 고원”이 서구 관념 철학이 최종적으로 이른 하나의 탈출구라는 점에 대해서는, 비록 순진한 오해일는지는 모르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의 ‘철학’에 대해 우리들이 떠들어대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마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누구나 조금씩의 물리학적 지식을 동원하면 ‘그것에 대해’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길거리의 ‘철학원’이 대학의 철학보다 못하다고, 비교거리는 아니지만, 할 것도 하나 없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아는 한 이정우 교수는 우리시대에 드물게 보는 철학자이다. 그의 지식과 지혜는 지금처럼 ‘진리의 보편성과 객관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목말라하는 후학들에게 참으로 귀한 지침이 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천규석 선생은 평생동안 농촌을 지키며 소농공동체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어쩌면 그의 삶은 들뢰즈가 그토록 증오하던 강고한 중심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유와 맞닿아있을 지도 모른다. 한 인간이 무엇을 고민하고 사유하고 있는지는 참으로 알기 어렵지만 그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진지하게 말을 꺼낼 때는 그가 하고 하는 말의 핵심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은 예수를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예수에 대해 누구보다 더 많이 말을 하고 다녔다. 처음엔 예수를 측근에서 모시고 경험했던 제자들은 그런 그가 무척 못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것이 만인의 철학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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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651

 

 

철학자들, 노마디즘의 소비화에 一助
논평 노마드 특집(교수신문 제392호)을 읽고
2006년 05월 01일 (월) 00:00:00 김진석 인하대 edit@kyosu.net

 

혼돈 속의 노마디즘
 

기어코 ‘노마디즘’이 시끌시끌한 혼돈에 빠진 듯하다. 탈근대론의 한 자락과 한 가지를 형성했던 주제가 점점 확대되어, 마치 모든 사회적·국가적 구속을 초월하며 달아나는 사유로 확장되더니, 급기야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 속의 침략주의에 일조한다는 비난을 맞기에 이르렀다.


천규석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에 대해 말한다. “몇 차례의 도전 끝에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의 유목론이 오늘날의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자 하나의 대안 비슷한 것으로 논의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는 막연한 인상”과,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더 파국적인 시장제국주의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또 하나의 침략과 파괴주의일 뿐 지속 가능한 생태주의와는 결코 양립할 수없다는 반감”만 남았다고. 이 말에서 그의 논점이 사실은 다 드러난다. 한편으로 그는 유목성을 철학적으로 다른 책에서 별 감흥이나 감동을 받지 못했다고, 무뚝뚝하고 거칠긴 하지만, 직설적 어투로 툭 털어놓는다.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책을 직접 읽거나 인용하지 못하고 그 책에 대한 해설서를 인용하면서 유목주의를 비판하고 비난하려고 했다. 그 방식이 지적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사실이며, 이정우의 냉소적 비평은 바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대로 원전을 읽지도 않았기 때문에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에 빠진 것이라고. 이정우의 관점은 여기서 알 수 있듯 전적으로 철학적 관점이다.


그런데 지금 문제되는 ‘유목주의’는 단순히 철학적인 것만은 아니고, 철학적 사상과 문화적·정치경제학적 이미지와 관습들이 뒤엉켜있는 덩어리다. 지적인 사람들은 그 말에 은근히 철학적 혹은 문화적 전위성을 부여하고, 보통 사람들은 그 말을 대충 실용적이거나 비유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사용한다. 여기서 혼돈이 생긴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광고카피는 후자의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며, 별 문제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은유적 이미지가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범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적으로 중요하거나 심오한 의미를 부여받을 때 생긴다. 예를 들어 생태주의자가 열렬한 유목주의자가 된다면? 천규석은 한 때 열렬한 생태주의자였던 김지하 같은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텔레커뮤니케이션 유목주의에 열광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울화통이 터졌다고 고백한다.


농사꾼 철학자의 글도 유목주의에 대한 철학적 분석이나 비판보다는 ‘유목주의’가 국가주의보다 침략과 파괴를 더 조장하는 시장의 권력을 부추기고 조장한다는 데 있다. 이 논점이 유목주의에 대한 철학적 논의와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닐테지만, 생태주의자는 철학적 논의를 휙 건너뛰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생태주의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천규석의 주장과 많건 적건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도 사실이라면, 유목주의의 침략적 ‘뿌리’에 대해 성찰하는 것도 생각보다는 중요할 터이다.


90년대 초 소개된 탈근대론은 금방 초반기의 저항적이거나 대항적 의미를 상실하기 시작했고, 오히려 소비문화를 탈정치적으로 확산시키는 분위기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기술이나 매체가 이제 막 무서운 이동성을 보이기 시작한 당시에도, 한편에는 그것의 새로운 의미에 주의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동시에 벌써 ‘유목주의’라는 표현은 너무 날렸다. 탈현대론이 소비문화와 겹치는 과정에서 ‘유목주의’는 아주 광범위하고 모호한 문화적 소비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90년대 중반 이후 ‘유목주의’는 애초의 철학적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는 듯했다.

 

필자는 1994년에 ‘초월에서 포월로’를 썼는데, 그 글의 부제는 “새로운 유목성 넘어 새로운 정착성으로”였다. 지금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이었지만 당시에도 이동통신기계의 발달에 대한 찬양이 벌써 고조되고 있던 노마디즘적 상황이었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사람들은 이제 정착된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유목생활 시대로 들어선 듯하다. 사람들은 일종의 이동성 존재가 된 듯하다. 이름하여 새로운 노마드. 앞으로 한 동안 그런 삶의 양식에 대한 헌사가 쏟아질 것 같다. 그러나 엄격하게 보면, 이 새로운 유목성 혹은 이동성은 우리의 몸이 이제 땅의 무게에서 벗어나 가볍게 이동한다는 데 놓여있진 않다. 그 점이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점만을 주장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새로운 정착성이 생성된다는 데 있다. 다만, 과거의 정착성은 이동성과 반대되는 소극적인 현상인 반면에, 이 새 정착성은 최고도의 이동성을 확보한 상태라는 데에 특징이 있다. 이 상태는 어떤 상태인가. 매우 느린데도 보통 빠름보다 빠른 더 빠른 상태…가만히 있어도, 가장 멀리 간 상태.”


그런데 ‘유목주의’가 소비문화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다름 아닌 철학의 이름을 내건 책들이 일조한 것은 아닐까. 한 예를 들면 이진경의 ‘노마디즘’은 들뢰즈의 사상을 대중화하는 성과를 이뤘지만, 동시에 ‘유목주의’라는 이미지로 단순화되기 어려운 책을 대중적으로 부드럽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 등의 책에서 ‘유목성’은 전쟁기계와 함께 중요한 요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핵심적이진 않다. 오히려 ‘전쟁기계’ 개념이 더 핵심적이며, 바로 그 개념에 의지해 저자들은 국가와의 관계를 풀어가려 했다. 아무리 국가의 포획에 반대한다 하지만 ‘전쟁기계’가 동시에 강조되지 않은 ‘유목주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으로 빠지기 십상인 듯하다. 더욱이 이진경은 ‘코뮨주의’를 말하는데, 이 경우 들뢰즈 등이 그렇게 강조한 ‘전쟁기계’의 까칠까칠한 현존은 희석된 채, ‘유목주의’는 부드러운 공동체의 이미지 속으로 포섭된 듯하다. 들뢰즈 등이 강조한 ‘전쟁기계적 노마드’가 일종의 공동체의 분위기를 강하게 띠게 된 것은 기괴한 일이 아닐까. 이 혼동 속에서, 다시 그 책을 인용하며 유목주의를 비난하는 생태주의자도 지역공동체를 말하니, 기괴함은 배가된다.


‘노마디즘’은 왜 이런 혼돈에 빠진 것일까. 최소한 들뢰즈 등의 탓은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포획장치가 강고하다는 경고와 함께, 분명하게 ‘노마디즘’이 ‘전쟁기계’와 합체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한국에서 들뢰즈를 말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포획장치는 강조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전쟁기계’는 별로 말하지 않곤 했다. 그 결과 ‘노마디즘’은 무색무취한 디지털 소비문화에 포획되거나 혹은 무작정 국가로부터 도망간다는 낭만적 혹은 무정부주의적 뉘앙스를 많이 가지게 된 듯하다. 들뢰즈 등은 유목주의라도 무조건 국가로부터 도망가는 것은 아니며 행정기계로서의 국가와 결합하면서도 다시, 또 다시, 이탈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로써 ‘유목주의’가 정말 침략적인가, 라는 물음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정우나 이진경은 그 점을 완강히 혹은 완곡히 부인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나는 오히려 ‘노마디즘’이, 비록 시대마다 다른 상황 속에서 일어나긴 하지만, 많은 경우에 공격성과 침략성을 띤다고 생각한다.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 실제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것을 사실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 또 들뢰즈 해설자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혹은 ‘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하는데, 나는 그것이 들뢰즈 등의 관점을 제대로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본이 끝없이 흘러다니는 욕망임을 분명히 했으며, 꼭 자본주의를 주적으로 삼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자꾸 확장시키며 한계를 극복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니까.    


그러니 유목주의는 모든 구속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사유이며 침략과 전혀 상관없다고 찬양하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관념성을 깨야 하지만, 유목주의의 침략성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역사 속의 모든 침략적 이동성을 비난하려고만 하는 맹목적 생태주의도 자신의 관념성을 깨야 할 듯하다. 복지사회의 이념조차 통째로 거부하는 ‘지역 자치공동체’가 다소 추상적이고 이상적 이념이라면,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지금 맞서 싸우려는 ‘유목주의’(대중적 이미지로 떠돌아다니는) 역시 비슷하다는 것이다. 흔히 그것은 어떤 공격성도 없이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고 소개되는데, 이 이해는 관념화된 철학의 자기만족이 아닌가 싶다.


침략적 이동성은 오늘날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판단은 단순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오늘의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과거의 유목적 침략성에 쉽게 낙인을 찍을 수 없듯이, 현재의 세계화된 이동성에 대해서 판단하는 일도 오늘의 우리에게도 쉽지 않다. 한국인이 뿌듯하게 여기는 한류도 때로는 침략적이다. 국민기업이라는 삼성전자 및 국민은행의 주식을 60~80% 정도 차지한 외국자본이 토종 자본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그렇다면 그 ‘침략적’ 자본을 당장 내쳐야 하는 것일까. 아니라면?

 

김진석 / 인하대·철학

필자는 하이델베르크대에서 ‘권력에의 의지로서의 해석학. 니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외에서 소내로’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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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06-06-01  22면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60601022001&code=seoul&keyword=%C8%AB%C0%B1%B1%E2

 

 

홍윤기교수, 이정우 대표에 직격탄… 노마디즘논쟁 가세

“학문 패권주의를 그대로 반영한 비열한 인물평을 쏘아대는 가운데 한국과 지구 사회에서 철학이라는 학문 그 자체가 망하는 길을, 그것도 그런 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마구 내뱉고 있다.” 한마디로 제 멋에 취해 자기가 무슨 소리하는지도 모른다는 비판이다.‘우아한 말의 성찬’만 있을 법한 철학계에 이처럼 날선 비판이라니, 이거 보통 아니다.‘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천규석 지음·실천문학사 펴냄)에 대한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대표의 비판에, 홍윤기 동국대 교수가 가한 재비판이다.

 

▲ 홍윤기 동국대 교수

경과는 이렇다. 천규석은 그의 책을 통해, 요즘 지식인들이 되뇌는 유목주의(노마디즘),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이 결국 제국주의·침략주의 미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럴만도 한 것이, 들뢰즈·가타리가 만들어낸 유목주의와 현실에서 유통되고 있는 유목주의는 어째 어긋나 보인다. 박정희 찬양자이자 극우논객으로 꼽히는 월간조선의 조갑제 기자가 90년대 후반 ‘몽골벨트 취재보고’ 기사를 연재한 것은 그 징조의 하나였다. 생명사상을 부르짖던 김지하가 유목주의를 언급하는 순간 ‘박정희식 파시즘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 것도 한 예다. 무슨 텔레콤이니 경제연구소니 하는 곳에서 최신 디지털 기기 좀 팔아보겠다고 ‘디지털노마드’ 운운하는 현상은 또 다른 차원의 예다.

 

이정우 “유목주의 잘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

 

이에 프랑스 철학에 천착해오던 이정우 대표는 ‘교수신문’에 실은 서평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를 통해 천규석을 격렬하게 비판했다.‘그것들과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와는 무관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얘기한다.’는 게 요지다.

 

홍윤기 “들뢰즈·가타리가 개념 정리 안한 탓”

 

홍 교수가 비판의 포문을 여는 지점은 여기서부터다.‘알지도 못하면 입다물라.’는 서평은 “도저히 ‘철학한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쓸 서평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원전을 읽고 오랫동안 철학해온 사람만 들뢰즈·가타리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은 ‘원서 패권주의’이자 ‘전공자 독점주의’다. 비유하자면 “농사꾼이 농사를 아는 사람들만 자기가 농사지은 쌀을 먹으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진지하게 철학하려는 태도만 있다면 약간 미숙하고 불안하더라도 도와줘야지,‘네가 뭘 알아.’하고 쏘아붙일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홍 교수는 한걸음 더 나아가, 천규석이 유목주의를 이해 못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마디즘 해설서를 써냈던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조차 ‘명확한 개념정의가 없다.’고 지적한 것과 비슷하게 천규석도 들뢰즈·가타리가 핵심개념을 정리해두지 않았다 비판한다는 것이다. 즉,‘개념도 정확히 모른다.’는 이 대표의 비판은 천규석이 아니라 들뢰즈·가타리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판은 천규석 아닌 들뢰즈·가타리에게”

 

홍 교수는 “국가주의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는 천규석의 급진적 생태주의가, 이정우의 학문권력의식과 철학파시즘 때문에 제대로 해독되지 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런 내용을 담은 홍 교수의 ‘철학에서의 파시즘과 철학할 권리’는 이번에 발간된 계간지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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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858

 

 

반론: 홍윤기 교수의 비판(황해문화 여름호) 등에 답한다
"들뢰즈/가타리 반대로 뒤집어 왜곡"
2006년 06월 05일 (월) 00:00:00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edit@kyosu.net

 

천규석의 ‘노마디즘은 침략주의다’를 읽으면서 황우석을 생각했다. 어디에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아연한 문제들이 얽혀 난맥상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홍윤기가 몹시 거친 글을 다시 얹음으로써 사태는 더 악화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홍윤기의 글에 대해 직접적 대응을 하기보다는(그럴 경우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질 수 있기에) 천규석, 홍윤기, 나아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하나의 핵심적인 오류를 지적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다. 수많은 오류들이 얽혀 있지만 지면 관계상 매우 중요한 하나의 오류만을 이야기하려 한다.


‘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가령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보자. 홈 패인 공간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 홈을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반면 매끄러운 공간은 이런 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다른 종류의 운동이 가능하다. 대부분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A라는 공간은 홈 패인 공간이다.” 이런 식의 명제는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것은 마치 “10kg은 무거운 무게이다”라는 말만큼이나 무의미한 명제이다. 무겁다/가볍다는 것은 대립의 관계도 아니고(‘대립’이라는 두 실재/실체가 서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연속적인 정도(degree)의 관계이다. 10kg은 11kg보다 가벼우며 동시에 9kg보다 무겁다. 어린아이에게는 무겁지만 트럭에게는 가볍다. 이 관계를 마치 가벼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고 무거움이라는 어떤 것이 어딘가에 있어 그 둘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이지 곤란하다.


요컨대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다. 이는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한 공간이 시간성을 얼마나 내포하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지표(index)일 뿐인 것이다. 무거움, 가벼움은 어떤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존재에 붙는 성격들이다. 마찬가지로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도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들은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이다.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말이다.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樹木型)은 나쁜 것이라는 식이다. (※수목형 사유란 나무가 주변의 잔가지나 곁뿌리들을 중심으로 끌어들여 동일화하고 포개는 사유, 유일한 중심을 상정한 사유를 의미함-편집자)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모든 오해들의 절반 이상이 바로 이 오해에서 유래하는 듯싶다. 리좀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암(癌)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 아닌가? 초국적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바이러스야말로 정말 리좀적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들뢰즈/가타리는 암, 초국적 기업들, 바이러스 등을 좋은 것들로 간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가? 리좀/수목형, 홈 패인/매끄러운 등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여기에 “좋은/나쁜”이라는 가치들이 실체화되는 것이 아니다.


리좀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리좀이 좋은 것이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떤 매끄러운 공간이 좋은 것이다. 홈 패인 공간, 수목형 등은 현실적인 질서들이다. 리좀, 매끄러운 공간 등은 이 현실적인 질서를 극복하려는 운동들이다. 그러나 리좀, 매끄러운 공간으로 간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다 나은 현실로 바꾸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리좀적 운동이 필요하다. 그러나 리좀적 운동으로 갔다고 해서 우리 현실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파괴적이고 불행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천의 고원’을 조금이라도 성실하게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가 이 점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홍윤기는 그의 글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이동성과 정주성을 근본적 차이를 가진 대립 범주로 설정”했다고 말하면서, 천규석과 더불어 “이동성과 정주성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실존 ‘범주’의 규명과 관련된 근본적 차이”라는 점을 주장한다. 그리고 “유목주의”는 “이동 마인드”를 본질로 하는 침략주의이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바로 이런 침략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들은 접어두자. 우리는 여기에서 천규석-홍윤기가 방금 말한 오류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들을 실재적 대립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 두 일반적인 오류 위에 다시 이들의 특수한 하나의 오류, 정말이지 심각하고 어이가 없는 오류를 덧붙이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투영해 엉뚱하게 오해한 후, 다시 이들에게 그 이분법 중에서 나쁜 경우를 귀속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리좀적인 것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수목형 현실이다. 변화와 창조는 리좀적 사유를 요청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를 도입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리좀이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전혀 반대로 나쁜 리좀들을 이들의 주장으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유목적인 것”이 좋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물론 이 때 좋음과 나쁜의 기준을 긋기가 쉽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천규석-홍윤기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들뢰즈/가타리가 나쁜 유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이들의 생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장치의 “외부”를 두 가지로 본다.(여기에서 “외부”를 즉물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그 하나는 국가들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을 가진 거대한 세계적 기계들로서 그 예로서 “초국적 기업들, 산업 콤비나트, 기독교 · 이슬람교를 비롯한 거대 종교들 및 종교 단체들”을 들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과 대조적으로 국소적인(“로칼”한)  “무리들, 주변부 사람들, 소수자들”을 들고 있다.(『천의 고원』 445/689쪽. 이 대목은 천규석이 그나마 “읽었다”고 한 바로 그 대목임에 주목하자) 이 두 경우는 모두 국가장치의 “외부”를 형성하지만, 그러나 서로 대조된다. 하나는 국가/법조차도 우습게 보는 거대한 자본권력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소수자들이다.(들뢰즈/가타리는 후자에 대해 “신원시주의=n?oprimitivisme”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태공동체가 이 신원시주의의 한 형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바로 후자의 “외부” 즉 소수자들의 철학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은 바로 거대 자본권력들의 “유목주의”을 비판하는 철학, 소수자 윤리학과 소수자 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는 철학이다.


그런데 보라. 천규석과 홍윤기는 이들의 철학을 완벽하게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들의 철학을 바로 이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주적인 “시장제국주의 철학”으로 단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상에 대해 좀 부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있다. 어떤 점들에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플라톤에 대해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퇴폐주의자”라고, 헤겔에 대해 “역사를 무시하는 추상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맑스에 대해 “노동자들의 현실을 모르는 부르주아 철학자”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을 그야말로 완전히 반대로 뒤집어 매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공동대표 ©

 

필자는 서울대에서 ‘미셸 푸코와 주체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인간의 얼굴’, ‘접힘과 펼쳐짐’, ‘사건의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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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859

 

 

노마디즘 문제의식, 농사꾼 철학자가 원전 파쇼보다 정확
이정우 대표의 반론을 읽고 다시 답함
2006년 06월 05일 (월) 00:00:00 홍윤기 동국대 edit@kyosu.net

▲홍윤기 교수의 글이 실린 황해문화 최근호 ©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철학아카데미 이정우 대표의 악성 서평(교수신문 제 396호)만 보면 지금도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혐오감이 되살아난다.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서 같은 책을 서평하기로 했던 나의 글은 결국 들뢰즈/가타리의 원본 유목주의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뿐만 아니라 ‘철학하는 것’의 정체성과 ‘철학하는 인간’의 사회적 위상까지 심각하게 생각해본 긴 반성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정우 대표가 인신비방이 가득 찬 그 서평에서 자신이 전문 철학자임을 내세워 천 선생이 제기한 쟁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당신 들뢰즈 책을 불어로 읽었느냐 안 읽었냐, 2천5백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서양 철학 공부나 하고 그 글을 썼냐 안 썼냐, 대학원생의 엉터리 번역을 엉터리로 읽었냐 아니냐고 넋두리하는 태도를 보고 경악했다. 사실 그렇게 말할 정도면 그 책에 대한 서평 자체를 거부했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우 씨도 이번 글에서 자인했듯이 그렇게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로 빠진” 그의 글을 서평이라고 실어준 ‘교수신문’이 사실 더 한심했다. 내가 아니라 이정우 씨와 독자들, 또 천 선생에게 뒤늦게나마 사과할 일이다.

 

▲서울신문에 보도된 노마디즘 논쟁 관련 기사 ©


흔히 철학은 철학전공자나 하는 난해한 학문 분야라고 생각된다. 분명히 철학에는 철학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학문적인 지식, 역사, 그리고 전문서적이 있다. 그러나 문명 수준이 일정 정도 도달해 인간의 관심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나 생활권에는 이런 전문소양과는 전혀 독립적으로 ‘철학함’의 능력이 분출된다. 이 때 ‘철학함’은 자신과 동료 인간의 생각, 말, 행위, 나아가 삶의 방식과 세계의 존립이 왜 정당한지를 그 근거(ground)에서 물으면서 그 근본적인 해답을 추구하는 고도의 사고활동 또는 담화활동이 된다. 문제현장에서 이뤄지는 바로 이런 고도의 인간 활동이 사실 전공으로서의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탐사영역이다.

 

‘황해문화’에서 나는 무분별한 유목주의 추종에 단지 분개할 뿐만 아니라 그 근원까지 비판하려고 한 농사꾼 천규석 선생을 바로 이런 가장 원초적 의미에서의 철학하는 인간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철학함은 철학전공자 이전에 시민의 권리이며, 철학에서의 민주주의야말로 이 시대 한국의 철학을 융성하게 할 가장 기본적인 활동조건이다. 이정우 대표는 철학의 바로 이런 조건을 말살하고 철학활동을 그 싹에서부터 뭉개는 일종의 학문적 焚書를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철학전공자로서의 지적 권력을 한껏 내세운 이 대표의 노마디즘 이해가 과연 농사꾼 철학자를 있는 대로 경멸할 만큼 정확한가. 결론부터 말해, 잔뜩 기대를 갖고 이번 글을 본 나는 이 대표가 과연 들뢰즈/가타리의 원서를 그 쪽마다 제대로 독해했는지를 크게 의심하게 됐다. 무엇보다 이 대표는 들뢰즈/가타리가 ‘철학했던’ 현장의 그 생생한 맥락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고, 바로 그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아주 어처구니없는 오독을 자행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게 됐다. 


그가 거론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대한 “가장 통속적인 오해들 중 하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개념적 구분들을 가치론적 이분법을 전제하는 대립의 관계로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씨는 노마디즘을 본격적으로 사고실험한 이 책 제12장에 나오는 홈 패인 공간과 매끄러운 공간의 개념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 대표에 따르면, “홈 패인 공간이라는 공간이 어딘가에 있고 그것과 대립하는 매끄러운 공간이 그것과 대립해서(‘opposition’의 관계)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그런 식의 이해는 “개념적/형식적 구분”을 “실재적/실체적 구분”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이 대표에게 바로 물어보자. 들뢰즈/가타리는 “홈 패인 공간”(espace strie’.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줄줄 홈패인 공간”이다)과 “매끄러운 공간”(espace lisse. 더 실감나에 번역하면 “매끈매끈한 공간”이다)을 ‘개념적으로’ 왜 굳이 구분하였는가. 아마 원전에 더 충실하자면 이 구분에 “숭숭 구멍난 공간”(espace troue’)을 추가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념이 ‘실체’(substance)는 아니더라도 ‘실재'(reality)와는 어느 정도 연관성을 갖거나 갖지 않아야 한다면 공간에 관해 이렇게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노마디즘과 관련해 들뢰즈/가타리가 철학적으로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씨는 ‘줄줄 홈이 패였다’든지, ‘매끈매끈하다’든지, ‘숭숭 구멍났다’라고 표현된 공간들이 “별도로 존재하는 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구분일 뿐이며, 또 정도의 문제일 뿐”이며, “어떤 공간이 있을 때 그 공간의 성격을 서술해주는 개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단지 “성격 서술”을 위해 이런 식으로 구분했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상태에 있는 것을 서로 달리 묘사하기 위해 ‘다른 표현어를 썼다’고 해야지 ‘서로 다른 개념으로 구분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정우 씨는 그저 대상을 묘사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과 철학적 문제의식에 부응하는 핵심적 사안을 포착하기 위해 서로 구분되는 ‘개념’으로 그것을 규정하는 일을 전혀 혼동하고 있다.(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공간의 성질을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려고 각기 다른 표현을 쓴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記標로 하여 각기 다른 문제의식을 대변하는 記意를 선명하게 개념화시키려고 했던 것이다.(하지만 사실 그다지 성공적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이 대표는 이 공간 구분과 연관시켜 ‘유목적 전쟁기계’를 가장 특정적으로 정식화시킨 ‘천 개의 고원’ 제12장의 공리III에 딸린 다음의 도식을 기억할 것이다.(원전 518쪽; 국역본 797쪽)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 매끈매끈한 공간을 실체와 연관되지 않은, 단지 “성격 서술”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정우 대표의 자유다. 하지만 그들을 오해한다는 사람에 대해 자해성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이 대표가 그렇게 숭모하는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을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개념 구분을 실체적 구분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면 먼저 들뢰즈/가타리부터 비난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절대 원전을 읽을 리 없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을 상대로 ‘원전 사기극’을 연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정우 씨가 “이런 식의 오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오인”이라고 하여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들에 가치론적 이분법을 부여해 이해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역시 이 공간 구분을 예로 들어 “바로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공간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공간이라는 식”, 그리고 “리좀은 좋은 것이고 수목형은 나쁜 것이라는 식”의 이해를 비난하고 드는 것도 정말 의심스러운 지적이다. 문제가 되는 제12장에서 들뢰즈/가타리가 던지는 가장 큰 화두는 “국가 모델” 또는 “국가 장치”에 포획되지 않은 탈억압적 삶이 어떤 형태로 가능하겠느냐 하는 문제다. 다시 말헤 들뢰즈/가타리는 ‘국가’에 관한 생각에서 단순히 ‘바람직한 국가’를 구상한 것이 아니라 ‘국가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지면서 삶은 여전히 가능해지고 활력에 찰 수 있는 그 한계선을 추적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들뢰즈/가타리는 적어도 그 문제의식에 있어서는 ‘국가의 궁극적 소멸’을 전망한 맑스/엥겔스의 후계자다.


그들은 바로 이런 문제구도에서 국가를 가능하게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문명을 소급해가면서 입증하려고 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국가가 기반이었다고 생각되었던 전쟁, 야금술 등등 모든 문명적인 것이 원래는 국가의 영토를 무력화시킨 유목민에게서 유래했다는 것을 인류학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입증하려고 했다.(천규석 선생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방향으로 문제에 접근했다.) 따라서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팍스 몽골리카의 중심이 거기에 종속되어 있던”, “스텝의 매끈매끈한 공간 자체”는 어떤 경우에도 억압적인 국가장치 외부에 있는, 더 권할 만한 좋은 삶의 터전이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는 결코 존재세계에 대한 무위자연적 관조를 행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억압의 구조적 응집이라고 생각되는 국가라는 정주체에 대해 유사혁명적, 또는 그들의 용어를 따르자면. 탈영토화하는 도주선을 개척한 것이다. 그래서 숭숭 구멍난 공간은 줄줄 홈패인 공간의 지하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통하는 도주로로 잠복한다고 상정되는 것이다.


‘유목민’ 개념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탈국가기획을 구체화시키는 실천적 구상으로서 결코 가치중립적인 서술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반자본주의적인 혁명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천규석 선생의 의혹을 충분히 감당할 만큼 ‘실천적으로 포괄적인’ 전략가들은 못되었다. 바로 이 점에서 천규석 선생은 소위 원전을 읽었다는 이정우 씨보다 훨씬 정확하게 쟁점을 파악했다.


리좀이나 수목형에 대한 세간의 이해를 이정우 씨가 오해라고 비난한 것을 보면서 나는 정말 실망했다. 들뢰즈/가타리에 있어 리좀과 유목민의 개념은 그 문제층위가 다르다. 이정우 씨의 반론을 읽으면서 나는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책을 그들의 문제수준에 따라 ‘개념’ 수준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유유자적하는 태도로 쓰는 고급 독후감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붙잡고 지적인 근거를 찾으려고 분투하는 철학적 담론은 어떤 경우에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 때 학문적 자폐성에 침몰된 원전 팟쇼보다는 자기 문제의 전정성을 호소하는 농사꾼 철학자가 아무래도 나아보이는 것 같아 철학 전공자로서는 몹시 씁쓸하고 미안할 뿐이다.

 

필자는 베를린자유대에서 ‘변증법비판과 변증법구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개발독재와 박정희시대’ 등의 공저와 ‘의사소통의 철학’ 등의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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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900

 

 

재반론_홍윤기 교수의 반론(교수신문 제401호)을 읽고

‘표현’ 개념 잘못 이해 … 억측 근거로 비판
2006년 06월 12일 (월) 00:00:00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edit@kyosu.net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충돌과 갈등을 통해 창조 또한 가능하다. 논쟁이란 이성과 이성의 길항(dia-logos)을 통해서 진리/진실에 한발자국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한다거나 상대방을 이기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핵심적인 문제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주의’가 침략주의인가, 천규석의 주장이 과연 근거 있는가, 아니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이라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유목주의/노마디즘’이라는 표현으로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지칭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는 논증된 문제가 아니다. 이 표현은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진경의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이 말을 사용하기로 하자)


‘노마디즘’은 이중적으로 패러디되고 있다. 한편으로는 유목민들의 삶을 그리워하는 낭만적 회귀라는 패러디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자본주의적 상품논리로서의 ‘유비쿼터스’ 전략이라는 패러디이다. 둘 다 들뢰즈/가타리의 본지와는 한참 떨어진 패러디들이다. 그러나 후자의 패러디가 훨씬 심각하다. 국민국가들을 매개 고리로 하는 후기자본주의적 ‘공리계’(화폐 회로들의 장)에 저항하고자 하는 소수자 윤리학/정치학을 완전히 거꾸로 ‘침략주의’, ‘시장제국주의’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규석의 책은 ‘천의 고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이 그것을 항간에 유행하는 천박한 “유목주의”와 동일시함으로써 “침략주의”라는 극단적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천규석/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 사유를 1)개념/이론이 아니라 인상/이미지로 받아들이고 2)그것을 상상/억측한 후 3)그것에 대해 전혀 빗나간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전쟁기계”라는 말을 듣고서 거기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피 냄새가 난다’, ‘칭기즈칸의 정복주의’를 찬양하는 것이다 같은 식의 ‘비판’을 가하는 것이 전형적인 예이다. ‘유목’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여기저기 이동하는 것이라고 상상하고, ‘욕망’이라는 말이 들어가자 퇴폐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상상하는 둥, 우스꽝스러운 상상/억측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어떤 개념을 듣고서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그 언어가 연상시키는 이미지/인상을 근거로 상상/억측한 후 다시 그것을 엉뚱하게 비판하는 것, 이것이 천규석/홍윤기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사유’이다.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1968년(‘68혁명’) 이래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새로운 노동운동, 문화운동, 생태운동 등등)을 염두에 둔 개념이며, 국가장치/자본주의로부터 탈주하면서 투쟁하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참으로 얄궂은 것은 천규석 등이 추구하는 생체공동체야말로 다름 아니라 들뢰즈/가타리가 추구하는 전쟁기계의 좋은 예라는 사실이다)


이런 식으로 무책임하게 상상/억측할 때 천규석도 침략주의자이다. 천규석은 ‘농사꾼 철학자’이고 따라서 농사와 철학을 가로지르면서 유목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천규석은 침략주의자가 된다. 이 무슨 기묘한 결과인가. 이런 식의 “연상 고리들”을 끊고서, 최소한의 지적 성실성을 가지고서 누군가를 언급하고 평가하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말한다면, 홍윤기는 홈 패인/매끄러운, 유목/정주, 리좀/수목형을 비롯해 들뢰즈/가타리의 구분이 개념적 구분일 뿐 실체적/실재적 구분이 아니라는 내 지적을 논박하기 위해서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그림을 내세웠다. 그러면서 ‘봐라, 들뢰즈/가타리가 실체의 내용과 표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느냐’는 요지의 반론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첫째,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다.(들뢰즈/가타리의 ‘표현’을 어떤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무엇인가를 표현한다는 상식적 의미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돌과 조각가가 있을 때 돌이 내용이고 조각가가 표현이다. 일상적 ‘표현’ 개념과는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이다.

 
둘째, 이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chemical substance를 ‘화학물질’로 번역하는 것을 상기하면 되겠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 그러니까 홍윤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철수의 키와 성격’, ‘영희의 키와 성격’이라 해야 할 것을 ‘키의 철수와 영희’, ‘성격의 철수와 영희’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천의 고원’ 58-60쪽, 한글본 92~95쪽을 숙독할 것을 권한다) 요컨대 홍윤기는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고 있는 것이다.(!)


더 기막힌 것은 이런 실소를 자아내는 “근거”를 제시한 후에, 그는 오히려 내가 “원전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강변한다는 사실이다.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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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923

 

 

재반론_이정우 대표의 글(교수신문 제402호)을 읽고 재차 답함
“實體 개념 이해 못해” … 탈영토화 실효성 있나
2006년 06월 19일 (월) 00:00:00 홍윤기 동국대 edit@kyosu.net

▲홍윤기 동국대 교수, 철학 © 한겨레
천규석 선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이다’에 관한 ‘황해문화’ 서평에서 내가 비판한 것에 이정우 씨가 반론하고 내가 다시 거기에 반론하라는 ‘교수신문’의 요청을 받아들였을 때 나는 내심 두 가지를 기대했었다. 그 첫 번째는 “불어 원서로 읽지도 못하는” 터에 “학문적으로 미숙한” 대학원생의 번역본만 읽고 자꾸 세간에서 들뢰즈/가타리를 오해하거나 왜곡한다고 이 대표가 불평하는데, 본인은 그 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한 번 들어보자는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지난번 글(비평, 401호)에서 이미 나는 그의 원전 또는 번역본 독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원전에 입각해서’ 근거를 밝혔다. 그런데 나에 대한 재반론에서(402호, 5면) “내용/표현, 실체/형식을 도식한 (들뢰즈/가타리의) 그림”을 잘못 이해에서 자기에게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면서 하는 얘기는 또 다시 나의 지적 호기심을 저버렸다.

 

‘가로줄’의 있고 없음의 차이에 대하여


우선 지난 번 쟁점은 들뢰즈/가타리가 “매끈매끈한 공간”, “줄줄 홈패인 공간”, “숭숭 구멍난 공간”이라고 구분한 것들 사이의 차이가 이 씨의 주장대로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이렇게 되면 이것들 사이의 구분은 ‘개념적’ 구분이 아니게 된다) 아니면 나의 생각대로 ‘질적 대립’까지 함축하는 각기 다른 실체를 의미하는지 여부였다. 이번에 제시된 이 씨의 의견에 따르면, “들뢰즈/가타리에게 ‘내용의 실체와 형식’, ‘표현의 실체와 형식’은 있어도 ‘실체의 내용과 표현’, ‘형식의 내용과 표현’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의 내용과 표현이 있는 것이 아니며”, “내용과 표현이 각각 어떤 것, 무엇인데”, 이 씨가 보기에 나는 ― 그의 뜻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 ‘그 어떤 실체’(X) 하나를 먼저 상정하고 나서 ‘그 X’의 내용과 표현, ‘그 형식’의 내용과 표현이라고 읽어 “그림의 가로를 먼저 읽고 세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읽어” 자신으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내가 ‘실체’를 그 어떤 독립적 존재물로 이해했다고 ― 내가 보기에 ― “상상/억측”하고 있다.


기억을 새롭게 하기 위해 지난 번(401호) 내가 어떻게 얘기했는지 상기해 보자. 이 씨가 잘 읽었다고 자처하는 그림을 두고 나는 “누가 동의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들뢰즈/가타리 텍스트의 이해가 문제된다면 거기에서 ‘매끈매끈한 공간’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도 아닌 들뢰즈/가타리 자신에 의해,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단정적으로 연관지어져 있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바로 “들뢰즈/가타리 자신은 서로 성격이 차이나는 공간들 서로 구별되는 삶의 방식의 ‘실체’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고 첨언하였다.(강조는 이번에 가한 것임) 이 씨는 나의 이 문구 중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라는 구절을 따로 떼어 ‘(어떤) 실체가 있어 그 실체가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한다’고 풀어읽은 것이다.


사실 나는 당시 원전의 도식을 옮길 때 원저자들이 본래는 긋지 않았던 가로줄을 두 줄 그어 넣어 “내용”과 “표현”의 ‘실체적’/‘형식(태)적’ 차이를 부각시키려고 의도했었다. 만약 이정우 씨가 내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면 원전의 도식 하나도 제대로 베끼지 못했냐며 실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안대소를 했을 텐데 그렇지는 않은 것 보니 내가 그려 넣은 두 개의 가로줄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파안대소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잠깐만 참아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브라이언 마쑤미의 영역본(416쪽)도 불어 원전의 도식을 나처럼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나와 마쑤미의 이 한미합작 그림에 대해 두번 파안대소하겠다면 못 말리겠지만.)


자 그럼, 나와 마쑤미가 가공한 위의 도식을 보면서 원전의 아래 도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이 도식에 붙은 공리Ⅲ에서 원저자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유목적 전쟁기계의 형식(형태)으로 표현된 것’의 ‘내용’은 ‘순회성 야금술의 형식(형태)을 가진 것’인데, 바로 이 유목적 전쟁기계의 형태는 순회성 야금술의 형태라는 내용의 “표현 형태로서”(comme la forme d'expression) 존립하고, 바로 그런 표현-내용 관계로 ‘상호연관’돼(correative)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상호연관되어 있는 내용과 표현은 (오른쪽 도식에서 따로 부각시킨 대로) 그 ‘실체’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실존 방식의 표현과 그 내용은 “상호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아마 이 점에서 이정우 씨가 공간의 차이를 정도의 차이라고 단정한 것 같은데), 바로 그 내용과 표현이 각기 자기 실체를 가진다는 것이다.(이 씨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다.)


문제는 ‘내용’과 ‘표현’이 각기 그 실체와 형식(태)에서 질적으로 차이날 정도로 통째로 개념적으로 구분되고(그래서 왼쪽의 본래 그림에는 일체 가로줄 없이 세로줄만 있다), 그에 따라 당연히 ‘실체’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공간으로 포착된다는 것이다(그래서 그 부분을 주목하라고 내가 의도적으로 가로줄을 그어 실체란과 형식(형태)란을 구분했다). 따라서 “숭숭 구멍난 공간”을 “내용”으로 하는 “실체”와 ― 지난번에는 생략한 구절이지만― “매끈매끈한 공간”을 “표현”으로 하는 “실체”는 ‘실체’라는 글자의 기표로서는 일치하지만 그것의 기의는 질적으로 다르다.(결국 이 씨는 ‘내’가 그은 가로선만 봤지, 그가 숭모하는 원저자들이 그은 세로선은 전혀 보지 못했고 그 의미도 몰랐다.)

 

실체는 그냥 질료가 아닌 “형태지어진 질료”


그럼 그 질적으로 다른 그 기의는 무엇인가. 이 점은 들뢰즈/가타리가 유목론(nomadology)을 특징적으로 부각시키려는 개념구도와 전략적으로 연관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끈매끈한 공간으로 ‘표현’되는 것은 유목적 전쟁기계와 연관시키고, 그 ‘내용’인 숭숭 구멍난 공간(이것은 광산 갱도의 비유이다)은 대장장이와 연관시킴으로써 줄줄 홈패인 공간과 연관된 정주민의 생활양식을 질적으로 추상화시키는 추론과정을 밟아간다. 그것은 곧 ‘관념적 차원에서’ 정주민적 생활양식으로부터의 탈주선을 닦는 관념적 작업, 즉 탈영토화의 철학적 전략과 바로 연결된다. 문제는 이런 철학전략이 영토성 해체의 전략으로서의 실천적 효과가 의문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우 씨는 왜 들뢰즈/가타리가 자신들의 그림에서 세로선만 그어 내용/표현을 엄격히 단절시키면서 그와 동시에 그 두 공간의 실체까지 구분하고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두 공간의 차이가 단지 ‘정도’ 차이라는 소리만 계속 되풀이하는가. 나는 이번에 비로소 그가 들뢰즈/가타리의 실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이 씨는 “‘실체’란 어떤 것, 무엇이 아니라 어떤 것의 질료/물질을 뜻한다. ‘형식’은 어떤 것의 구조를 뜻한다”고 얘기하는데, 실체에 대한 이런 식의 허술한 진술은 그가 과연 원전의 관건개념을 제대로 숙지했는지 의심하게 만들어 나로 하여금 失笑가 아니라 신笑를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바로 그가 숙독하라고 권한 면들 바로 앞에서(원전 55쪽; 국역본 88쪽) 들뢰즈/가타리는 “실체들(les substance)이란 형태지어진 질료들(matieres formee)에 다름 아니다”라고 명시적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실체란 “어떤 것”의 질료들이 아니라 ‘특정 형(식)태를 가진’ 질료들이다. 따라서 그 형태가 무엇이냐에 따라 “영토성 및 영토화 및 그것들의 정도”와 그와 대립되는 “탈영토화”와 그 정도가 관련된다. 따라서 실체가 다른 것은 단지 양적이거나 경험적 정도(degree)가 다를 뿐아니라 (탈)영토의 구획이나 질적 상태가 달라질 정도로 구별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에서 “전쟁기계는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단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시비하지 않겠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려 “전쟁은 전쟁기계의 조건도 목적도 아니지만, 그것의 필수적 동반물이거나 보완물”이라고(원전 520쪽; 국역본 800쪽) 규정했다는 것만 구차하게 상기시켜주겠다.


결국 나는 두 번에 걸친 원전 놀음에서 그로부터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의 허술한 오독과 억측을 일일이 쫓아다니는 일에 더 이상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이정우 씨를 비판하게 된 일차적 동기는 이렇게 원전을 두고 그와 지적 놀음을 하자는 데 있지 않았다.

 

“공적 사과 없으면 더 이상 논쟁 않겠다”


나는 그가 천규석 선생의 책을 두고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라고 몰아붙이면서 철학의 공론장과 민주주의적 참여권을 오염시키는 온갖 인신공격을 가하는 것에 분노해서 이정우 비판에 나섰다. 그러나 나는 그가 최소한 유감을 표시했으면 하는 두 번째 기대를 전혀 바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반박을 꼬박꼬박 챙기면서도 그는 “설사 내가 틀렸다 해도 ‘사기극’이 무슨 말인가. 논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강조 필자)라고 역정을 낸다. 그럼 되물어보자. “설사 천규석 선생이 틀렸더라도 ‘무지’니 ‘지적 몰이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최소한의 예의도 모르는 무례한 모욕인가?”


이정우 씨가 그렇게 자신에게 돌아올 예의를 챙기는 사람이라면 한 가지 요구하겠다. 그가 먼저 철학의 공론장을 오염시킨 자신의 무례와 불손함을 공적으로 사과하라. 그런 “최소한의 예의”조차 표시하지 않는다면 나는 논쟁을 포함해 더 이상 그와 일체의 학문적, 인간적 교류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이번 사단이 ‘철학함의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인간적 충정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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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9994

 

 

재반론: 홍윤기 교수(교수신문 제403호)의 재비판에 답한다

“논쟁의 포인트가 무엇인가” … 담론의 윤리 아쉽다
2006년 07월 02일 (일) 00:00:00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editor@kyosu.net

▲교수신문 제403호에 실린 홍윤기 교수의 글

이미 방향성을 상실한 논쟁이 되어버려 사족에 불과한 것이 되겠지만, 마지막으로 전반적으로 정리해보고 싶다.


천규석은 그의 책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서 ‘유목주의’, ‘노마디즘’이라는 말들이 담고 있는 복합성과 이질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침략주의’로 고발하고 있으며, 그 철학적 기초로서 ‘천의 고원’을 논했다. 여기에서 그는 이 책이 “그 어떤 철학교과서보다 지적 유희가 심했다”고 말하면서(“그 어떤”이라 했으니 아마 천규석은 ‘천의 고원’을 다른 모든 ‘철학교과서들’과 일일이 비교해보았나 보다), 이 말과는 모순 되게 “겨우 페이지 수만 다 넘겨보았다”, “막연한 인상만” 남았다고도 말한다.

신중한 이해 없는 비판은 독약일 뿐


천규석은 ‘유목’이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은유적 의미를 전혀 구별하지 않은 채 ‘천의 고원’을 자신의 맥락으로 환원시켜 ‘침략주의’로 규정하고 있고, 자본주의적 국가장치의 외부를 뜻하는 ‘전쟁기계’를 그저 ‘전쟁’이라는 말만 보고 일종의 정복주의로 매도하고 있으며, 68혁명 이후 도래한 소수자 운동(여성운동, 학생운동, 생태운동, 동성애자 운동 등등)의 맥락에서 등장한 욕망 개념을 ‘퇴폐주의’로 비난한 것을 비롯해서, 단순히 틀렸다거나 오해했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에 있다. 천규석이 단지 틀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그런 이야기들을 논의 대상에 대한 최소한의 성실한 이해도 없이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어떤 사상을 이런 식으로 비난하려면 그 비난의 대상에 대한 신중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천규석은 그 자신이 그저 ‘페이지 수만 넘겨’ 보았고 ‘막연한 인상만’ 가진 그런 책에 대해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면서 그것을 하나의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적 역량의 한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 담론, 사유 등에서의 윤리적 문제를 함축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행위가 단순히 천규석이라는 한 사람의 지적 불성실을 넘어 한국사회의 한 병리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천규석의 책을 강도 높게 비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감싸지만 말고 잘못된 것은 지적도 해야


‘천의 고원’은 ‘안티오이디푸스’의 속편이다. 그리고 물론 이 책들에는 매우 복합적인 지적-역사적 배경들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가 이 책의 사상을 논하려면, 더구나 ‘침략주의’라는 등의 정도가 심한 ‘비판’을 가하려면 이런 지적-역사적 배경에 대한 정말이지 최소한의 근거는 가져야 한다. 천규석 식으로 그렇게 ‘책’을 출간하는 것은 부실공사로 건물이 무너져 사람이 다치고 잘못된 음식이 사람들의 몸을 해치는 것처럼 즉물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경우들과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다.


홍윤기는 이런 내 서평에 대해서 몹시 거칠게 공격해 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아리송하다. 만일 그가 내 글을 공격하려 했다면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이 ‘침략주의’이자 ‘정복주의’이자 ‘퇴폐주의’ 등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했을 것이다. 천규석은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비난했고, 나는 그 비난이 엉터리라고 비난했다. 그렇다면 홍윤기가 해야 할 일은 천규석의 말이 맞고 내 비난이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홍윤기는 오히려 들뢰즈/가타리가 항간에 떠도는 ‘유목주의’들과는 구분되어야 할 나름대로의 ‘치열한’ 사유를 펼치는 사람들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몇 가지 추상적이고 막연한 제한은 가하고 있지만, 들뢰즈/가타리가 국가 외부를 사유하려는 맑스/엥겔스를 이어받고 있는 철학자들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들뢰즈/가타리를 잘 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결국 홍윤기에 따르면 천규석이 얼마나 그릇된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가가 증명되고 있지 않는가! 맑스/엥겔스를 이어 국가 외부를 사유하려는 치열한 인물들을 천규석은 침략주의, 정복주의, 퇴폐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논쟁의 포인트가 무엇인가. 도대체 홍윤기는 무엇을 주장하려는 것일까.


홍윤기는 정말 논의해야 할 것을 논의하지 않고서 논의의 초점을 엉뚱하게 틀어버리고 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유목주의란 침략주의이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유목주의는 결코 침략주의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 것일까.


홍윤기는 이렇게 정말 문제가 되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서 나를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서평에서 언급한 ‘원전’이라는 말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원전에 대해 무슨 말을 했기에 논의의 핵심이 아니라 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으며 읽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그러나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도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


그렇다 모든 책을 원어로 읽을 수는 없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일종의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또 더 중요한 것은 꼭 원어로 읽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희랍어 원전으로 읽을 수도 있고,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일본어 등등 외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도 있고, 또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요약본을 읽을 수도 있고, 해설서를 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을 것인가는 그 사람이 어떤 맥락에서 그 책을 읽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유목주의는 침략주의가 아님이 입증됐다”


문제의 포인트는 이것이다. 만일 누군가를 ‘침략주의’니 하는 식으로 비난하려면(사실 이런 비난은 정말 강도 높은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침략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라), 당연히 그 비난의 대상이 되는 저작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논의 대상을 그렇게 성실하게 독해하지도 않은 사람이 그를 ‘침략주의자’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부도덕한 행동이다. 이것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책을 원어로 읽지 않은 사람은 적어도 그 사실만으로 우선은 겸손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누군가를 그렇게 비난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그 사람을 정말 얼마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홍윤기는 이런 내 주장에 대해 ‘원전 패권주의’, ‘원전 파쇼’, ‘원전 사기극’을 비롯해 정말이지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으면서 공격했다. ‘원전을 읽지 않은 사람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내가 전혀 하지 않은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해석’하면서 참으로 악의적인 이야기들을 내뱉고 있다. 내 이야기 어디에 이런 주장이 함축되어 있는가. 아마도 ‘원전’이라는 이 말이 홍윤기 가슴 속의 그 무엇인가를 자극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원전에 바탕한 논의는 중요하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이렇게 원전이라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래서 지금 논의의 초점이 무엇인지조차 잊어버렸던 홍윤기가 이제 원전의 어느 한 부분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어디 한번 원전으로 해 보자’ 하는 식으로 나왔다는 사실이다. 만일 원전으로 해 보자고 했으면, 지금 이 논의의 핵심에 닿는 부분을 이야기해야 한다. 즉 ‘유목’, ‘전쟁기계’, ‘욕망’ 등등과 관련되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홍윤기는 들뢰즈/가타리의 ‘표현’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억지스러운 이야기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나 홍윤기의 이런 행동이 얄궂게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상가에 대해 제대로 논하려면 바로 이렇게 원전을 붙들고서 신중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홍윤기는 (비록 내용상으로는 틀린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의 원래 주장과는 정반대로, 누군가에 대해 논하고 평가하려면 그의 저작을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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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2006.06.27 제615호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7228.html

 

 

노마디즘은 침략주의인가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에 대한 이정우·홍윤기 논쟁에 답한다 …“원문 읽어라”는 주장도 들뢰즈 철학에 대한 오해도 문제 있어

 

▣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나는 철학자의 책을, 그것도 원문으로 몇 번이고 읽어야 철학이나 철학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오역이 있어도 엔간하면 번역서를 읽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철학이란 철학적 문헌을 다루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유하고 사유를 삶으로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이론과 개념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혹은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사유를 삶에서 분리된 것으로, 고상하고 그저 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나 사상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들뢰즈’를 전공한 분이 원전 타령?

 

그렇기에 나는 농사꾼도, 노동자도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의 극단화된 분업이 가로막아서 그렇지,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농사꾼이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 최근 유목주의 문제를 둘러싸고 철학자 이정우(왼쪽)씨와 홍윤기씨의 논쟁이 전개됐다. 발단은 천규석씨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이다.(사진/ 좌-한겨레 서정민 기자, 우- 한겨레 김태형 기자)

굳이 대비해서 말하자면, 농사꾼이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삶을 사유하고 그 사유를 통해 새로운 삶을 구성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즉, 농사꾼임에도 철학을 할 수 있다는 기대 밖의 가능성보다는 농사꾼이기에 자신의 삶을 걸고 그것으로 얻어낸 사유의 강도가 중요하다고 믿는다. 거꾸로 자신의 철학에 따라 농사를 짓게 된 철학자 역시 존경한다.

 

내가 알기엔 들뢰즈도 그렇다. 그는 스피노자를 전혀 읽지 않았지만 스피노자의 사유대로 사는 사람이 있다면 스피노자주의자라고 하기에 충분하다고 본다. 반면 스피노자의 개념들을 잘 알지만 그저 알 뿐이라면 ‘스피노자주의자’라는 말에 값하기 어렵다. 그래서 프랑스어로 원전을 읽지 않았다면 들뢰즈 철학에 대해 말해선 안 된다는 말을, 푸코나 들뢰즈 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말하는 것이 무척 당혹스럽다. 들뢰즈도 푸코도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들어 발언할 주체의 자리를 제한하려는 이런 태도를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같다. 그것은 담론의 권력이 작동하는 가장 통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발언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들뢰즈의 사상이 서양철학사의 정점에서 나온 철학이라는 말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는 철학사라는 이름으로 행사되는 지적 권력에 대해, ‘주류’(majority)를 형성하며 그 척도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배제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비판적이었고, 따라서 그의 사상은 차라리 철학사와 대결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철학이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사꾼이든 철학자든 다른 사상이나 철학자에 대해 언급할 때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모든 이론을, 더구나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이론을 성실히 엄밀하게 읽고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면 극단적인 비난이나 비판의 말은 아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들뢰즈가 억압으로부터 욕망의 해방을 주장했다는 말, 욕망의 해방이란 대중문화 수용자가 유행이나 이미지 등을 즐기는 찰나적 해방이라는 말, 인간의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말은, 들뢰즈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들뢰즈는 욕망의 근원을 성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이유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다. 욕망은 처음부터 사회적으로 투여된다는 것, 따라서 성적인 것으로 환원해선 안 된다는 것이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리고 욕망이 해방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혁명은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었기에 있을 수 있었다”)을 주장한 것은 분명하지만, 욕망과 억압, 욕망과 권력을 대비시키는 단순한 구도는 거꾸로 그가 비판하고자 했던 것이다. 가령 정치학의 근본 문제란 “어째서 대중은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가?”라고 말할 때, 그는 욕망이 억압을 원하는 사태(파시즘의 경우가 대표적이다)가 바로 문제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권력과 욕망이 다른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권력이 바로 욕망인 것이다.” 욕망은 어떤 배치를 형성하는지에 따라, 혹은 어떤 배치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혁명을 향하기도 하고 권력을 향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제는 욕망의 배치를 이해하고 변환시키는 것이다.

 

‘전쟁기계’ 개념은 무엇인가

 

유목주의와 전쟁기계에 대한 비판도 이와 비슷하다.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전쟁’은 가치와 가치의 충돌이고, 어떤 지배적인 가치와 대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썼고, 들뢰즈는 카프카의 책이나 클레의 그림을 ‘전쟁기계’라고 했다. 전쟁기계란 기존의 지배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탈주선을 그리는 집합적 배치의 이름이다. 그래서 그것은 새로운 가치의 창안을 통해서 기존의 가치, 이미 지배적 장치와 결합된 가치에서 탈주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과 충돌하게 된다. 대개는 국가 장치나 지배적 가치가 탈주선을 가로막으며 시작되는 충돌이다. 여기서 ‘전쟁’이 발생한다. 따라서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지만, 전쟁을 회피하지도 않는다.

 

»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하나의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몽골의 유목민들. (사진/ REUTERS NEWSIS/ ANDREW WONG)

 

유목민의 전쟁도 이러하다. 유목민은 전쟁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유목하며 자유로이 이동할 뿐이다. 그러나 땅을 ‘소유’하는 정착민들은 울타리를 쳐서 그들의 유목 행로를 차단하고 저지한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거기다. 유목민의 번호적 조직은 이동과 유목에 적합하지만, 전쟁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정착민이 자신이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만들 때조차 그들의 전쟁기계가 조직의 모델이 된다. 이처럼 국가가 장악한 전쟁기계로 인해 유목적 전쟁기계는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로 오해되고 혼동된다. 자유로운 행로를 차단하는 울타리가 잊혀진 채, 유목이 남의 땅을 침범하고 침략하는 것으로 비난되듯이. 그러나 소유나 울타리가 없다면 침범이나 침략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자유로운 이동이 만들어낸 길들이 침략의 길로 간주되는 것은 그것을 차단하려는 소유의 벽, 울타리와 성벽(만리장성!) 때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따라서 “들뢰즈가 유목민이 정착민 다음에 출현했다고 했다”는 말은 부적절한 말이다.)

 

노마디즘은 몽골이란 또 다른 기원으로 회귀하려는 복고주의가 아니다. 따라서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그것을 확장된 민족주의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래서 들뢰즈는 유목민을 차라리 “움직이지 않은 자”로서 정의했다. 즉, 외형상의 유목이나 움직임이 아니라, 앉아서도 끊임없이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안하는 ‘태도’를 유목주의라고 정의한다. 유목민을 이주민과 구별한 것도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동한다는 이유만으로 신자유주의와 유목주의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적절하다.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를 이동하는 자본이란 어디를 가도 오직 돈밖에 모르는, 하나의 목적에 고착된 정착민이고, 잘 봐줘야 자신이 착취하던 것이 다 소진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다시 착취하기 시작하는 이주민일 뿐이다. 삼성이 ‘디지털 노마드’를 자사의 광고 카피로 삼았다고 해서 노마디즘을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본가가 게바라를 상품화했다고 해서 그를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태주의자의 적대감 이해 못해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생산성으로 유목과 농경을 비교하는 것은, 정확하게 공업에 의해 농업을 축출했던 논리를, 개발주의의 논리를 반복하는 게 아닐까? 유목민이 불모의 땅에서 산다는 조건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비교된다는 것은 접어둔다고 해도, 자본과 개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자기가 사는 땅을 그로부터 지키려는 농민이나 갯벌이나 산을 개발에서 지키려는 생태주의자는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는 전쟁기계가 된다(배치가 달라지면 생태주의나 농업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생태주의자가 유목주의에서 위협과 적대감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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