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지도>에서 퍼왔습니다(2007/04/03 00:36)
[또 다른 논쟁서평] 노마디즘...유목주의 혹은, 유목적인 사유
몇 년 전부터
‘노마드’, ‘노마디즘’이란 말이 우리 사회의 한 유행어가 되었다.
번역하자면, ‘유목’, ‘유목주의’ 정도가 될 이 단어들이 유행을 타게 된 데에는
대략 두 가지 계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세계자본주의 단계가 냉전체제의 해체 이후
대략 1990년대부터 다국적 자본주의 단계로 이행하면서
자본주의하의 ‘보편적 삶의 조건’ 자체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알다시피, 신자유주의는 이 다국적 자본주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이 시대에 군림하고 있다.
아예 인류사를 유목/정주라는 개념틀로 재기술함으로써
이러한 현 시대적 조건을 ‘오래된 미래’로 사유하려는 경향도 대두한바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는 그 대표적인 저작이라 할 만하다.
‘잡노마드’니 ‘디지털 노마드’니 하는 신조어들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생하는 것들인데,
이러한 경향성을 ‘경제적 노마디즘’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제적 노마디즘의 우상은 칭기스칸인바,
오늘날 그 정신적 후예들은 전세계를 무대로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자본의 새로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애쓴다.
새로운 권력계급으로서의 ‘하이퍼노마드’이든,
새로운 하층민으로서의 ‘인프라노마드’이든!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노마디즘에 앞서서
反파시즘적 삶의 양식을 기치로 내걸었던 또 다른 노마디즘도 있었으니
그것이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돌로지, 곧 노마드의 철학이다.
국내에서는 이진경의 저작 <노마디즘>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는 이 철학적 노마디즘은,
그 주된 전거가 되는 <천 개의 고원>이 1980년에 출간된 만큼
경제적 노마디즘과는 종류와 계보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진경에 따르면,
철학적 노마디즘이란 “끊임없이 자신의 사유를 변이시켜가는,
앉아서 하는 유목”을 가리킨다(그것이 들뢰즈의 노마디즘인지
이진경의 노마디즘인지는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앉아서 하는 유목’이 ‘싸돌아다니는 유목’과 동종일 리는 없다.
애당초 들뢰즈/가타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분열증적 교란과
그로부터의 탈주를 기획했던 만큼 철학적 노마디즘과 경제적 노마디즘은
동일한 이름으로만 불릴 뿐 내용물은 전혀 상반된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 없이
통칭어로서 ‘노마디즘’ ‘유목주의’란 말이 남용되는 데 있지 않나 싶다
(그러한 ‘남용’을 서로가 즐긴 것은 아닌가라는 혐의는 잠시 제쳐놓도록 하자).
최근에 천규석의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를 놓고 벌어진 논란은
노마디즘에 대한 이러한 동상이몽(同床異夢)에 기인한 것이지 않을까?
저자는 “질 들뢰즈나 펠릭스 가타리류의 유목주의(노마디즘)를
국가로부터의 해방철학이라도 되는 양 떠들면서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탈을 쓴
세계시장 제국주의와 신침략주의를 합리화하는 변설임을
애써 "외면”하는 세력들에 일침을 가하고자 했지만,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유목주의를 신자유주의,
세계시장 제국주의, 신침략주의의 이데올로기로 간주하는 건 과욕인 듯싶다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단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농사꾼 철학자’라기보다는
‘옹골진 농사꾼’으로서 천규석의 주된 비판은
들뢰즈/가타리보다는 칭기스칸에 더 집중될 필요가 있었다.
그랬다면, 아마도 국내 ‘철학적 노마디즘’의 또 다른 대표자 이정우의 강파른 비판은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지의 용기 혹은 지적 몰이해’란 서평에서 이정우는
철학에 대한 천규석의 몰이해를 냉소적으로 몰아붙이는바,
“저자야말로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차 지식인인 척하는 인간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비록 논리보다는 감정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비판이지만,
천규석 자신이 그런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철학적 노마디즘도 싸잡아서) 모든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라고 말해놓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목’인가?
‘유목적 사유의 탄생’이란 부제를 달고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탐독>에서
이정우가 말하는 유목은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여러 번 이사를 다니는 일 따위가 아니라
지적 편력으로서의 ‘지적 유목’이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 문학 등 여러 담론의 세계를 유랑하면서
‘가로지르기’가 곧 그에게는 ‘유목’이고 ‘유목적 사유’인 것.
‘앉아서 하는 유목’이란 점에서 이진경과 이정우는 노마디즘관을 공유한다.
그들이 대동소이하게 ‘철학적 노마디즘’으로 분류될 수 있는 근거이다
(두 사람은 ‘수유+너머’와 ‘철학아카데미’ 같은
대학 바깥의 연구공동체를 꾸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그러니까 노마디즘을 둘러싼 논란과 혼돈의 대부분은
“노마드란 오늘날 사람들이 자기 현재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특정한 소속 없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사유하는 존재”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정의하는 데서 비롯되는 듯싶다.
실상, ‘이동 마인드’(천규석의 표현)를 갖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존재와
‘자유롭게 사유하는’ 존재는 현실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자본축적과 생계유지에 바쁜 하이퍼노마드나 인프라노마드는
사유하지 않으며(혹 겉멋으로 들뢰즈/가타리를 끼고 다닐지는 모르겠으나),
철학적 노마드들은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사유하는 게 아니라 앉아서 사유한다.
특정한 소속을 갖지 않거나 기존의 개념틀로부터 벗어나는 걸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이 두 부류가 직접 마주할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요컨대, 경제냐, 철학이냐?).
한데, 여기서 잠시 제쳐놓았던 문제를 끄집어내자면,
그리고 ‘혼돈 속의 노마디즘’에 대한 김진석의 진단을 빌자면,
“탈현대론이 소비문화와 겹치는 과정에서
‘유목주의’는 아주 광범위하고 모호한 문화적 소비욕망의 대상이 되었고,
90년대 중반 이후 ‘유목주의’는 애초의 철학적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바람을 타는 듯했다.”
즉, “유목주의가 소비문화의 대상이 되는 과정에
다름아닌 철학의 이름을 내건 책들이 일조한 것은 아닐까”란 의혹을 갖게 되는 것인데,
이 경우 경제적 노마디즘과
철학적 노마디즘은 의미론적으로 무관하더라도
화용론적으로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은 모르게 서로 연루되어 있는 것.
김진석의 ‘관전평’에 따르면,
들뢰즈 등도 ‘전쟁기계’로서의 유목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듯이
실제 역사 속에서 유목성이 일종의 공격성을 띠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들뢰즈 해설자들(혹은 철학적 노마디스트들)은
마치 자본이 전혀 노마디즘과 관계가 없거나
<천 개의 고원>의 주적이 자본주의인 것처럼 암시한다.
앉아서 유목하는 이들이 노마디즘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건 아닌가라는
혐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목주의자도 생태주의자도 아닌 이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김진석의 지적대로 ‘지역 자치공동체’라든가
‘국가의 구속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유’라는
각각의 관념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관념성에서 벗어날 때,
분명 “침략적 이동성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김진석)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의 ‘보편적 조건’처럼 돼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울은 우리가 오래 껴안고 누워서 뒹굴어야 할 우울이다.
정주민도 유목민도 아니었던 ‘산책자’ 보들레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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